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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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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如酷吏하니 雖蠡 亦何辭리오
越旣滅吳 范蠡以爲 句踐爲人 하야 可以共患難이요 不可與共逸樂이라하고 乃以其私徒屬으로 浮海而行이러니
至齊하야 以書遺曰 蜚(飛)鳥盡 良弓藏하고 狡兎死 走狗烹하니 子可以去矣라하니라
子曰
范蠡 獨知相其君而已
以吾相蠡컨대 蠡亦烏喙也
夫好貨 天下賤士也 以蠡之賢으로리오마는 何至耕於海濱하야 父子力作하야 以營千金하고 屢散而復積하니 此何爲者哉
豈非才有餘而道不足이라 功成 名遂身退 而心終不能自放者乎
使句踐有大度하야 能始終用蠡런들 蠡亦非淸淨無爲以老於越者也
吾故 曰 蠡亦烏喙也라하노라
不忍爲也라하고 遂去하야 終身不復見하고
逃隱於海上하야 曰 吾與富貴而詘(屈)於人으론 寧貧賤而輕世肆志焉이라하니라
使范蠡之去 如仲連이면 則去聖人不遠矣리라
嗚呼
春秋以來 用捨進退 未有如蠡之全者也로되 而不足於此
吾是以 累歎而深悲焉하노라


06. 범려范蠡에 대한
문장文章이 혹독한 법리法吏(법관法官)와 같으니, 비록 범려范蠡라도 또한 무슨 말로 해명하겠는가?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자,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의 사람됨이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여서 환란患亂은 함께할 수는 있으나 일락逸樂은 함께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자신의 사사로운 무리(가신家臣사병私兵)들을 데리고 바다를 항해하여 나라를 떠나갔다.
그는 나라에 이르자, 대부 문종大夫 文種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나는 새가 다 잡혀 없어지면 좋은 활이 감춰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달리던 사냥개를 삶아 죽이는 법이니, 그대는 이제 나라를 떠나감이 옳다.”라고 하였다.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범려范蠡는 다만 군주의 을 볼 줄 알았을 뿐이니.
내가 범려范蠡를 살펴보건대 범려范蠡 또한 까마귀 부리이다.
재물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天下의 천한 선비이니, 범려范蠡와 같은 어진 사람이 어찌 취렴聚斂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자이겠는가마는, 바닷가에서 농사지으면서 부자父子가 힘써 일해서 천금千金을 경영해 얻고는 재물을 흩었다가 다시 재물을 모았으니, 이것은 어째서인가?
재주는 충분하나 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 이루어지자 몸은 비록 물러갔으나, 마음은 끝내 스스로 방랑放浪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구천句踐이 큰 도량이 있어서 시종 범려范蠡를 등용했더라도 범려范蠡청렴淸廉한 채 무위無爲나라에서 그대로 늙을 자가 아니다.
나는 그러므로 “범려范蠡 또한 까마귀 부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중련魯仲連나라 군대를 물리치자, 평원군平原君이 그를 봉해주고자 하여 천금千金으로 축수祝壽를 하니, 노중련魯仲連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의 고사高士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남을 위해서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고 혼란을 풀어주되 취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만일 남을 도와주고 취함이 있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일이다.
나는 차마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떠나가서 종신토록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도망하여 바닷가에 은둔하며 말하기를 “내가 부귀를 누리면서 남에게 굽히기보다는 차라리 빈천한 채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하찮게 여기며 내 마음대로 살겠다.”라고 하였다.
만일 범려范蠡노중련魯仲連처럼 떠나갔더라면 성인聖人과의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아!
춘추시대 이래로 용사用捨진퇴進退범려范蠡처럼 온전한 자가 있지 않았으나 여기에는 부족하였다.
나는 이 때문에 여러 번 탄식하고 깊이 슬퍼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范蠡論 : 이 글의 저작 연도는 미상이다. 本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范蠡論〉으로 되어 있다. 范蠡는 춘추시대 越王 句踐을 섬긴 유명한 정치가이자 정략가로 字는 少伯이다. 越나라가 吳나라에게 패하여 會稽山에서 항복한 이후, 句踐을 도와 각고의 노력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결국 吳나라를 멸망시켰다.
范蠡는 吳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越나라를 떠나 齊나라에 가서 姓名을 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증식하여 수천만 금을 모았으나, 齊나라에서 그를 정승으로 삼고자 하자 재산을 흩어버리고 齊나라를 떠났다. 그 후 陶 지방에 가서 스스로 陶朱公이라 이름하고 농업과 무역에 종사하면서 다시 거만의 재산을 모았으나 끝내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역주2 長頸烏喙 : 사람의 觀相術에 있어 긴 목과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한 입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사람은 특히 탐욕스럽고 시기심이 많다고 한다.
역주3 大夫種 : 越나라 대부 文種으로 字는 子禽이며 본래 楚나라 郢 땅 출신인데 越나라에 등용되어 대부가 되었다. 뛰어난 정치력으로 范蠡와 함께 越王 句踐을 보필하여 吳나라와의 전쟁으로 멸망 직전에 몰린 越나라를 구하고, 끝내 吳王 夫差를 패망시켜 句踐을 霸者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句踐의 곁을 떠나라는 范蠡의 권유를 듣지 않고 越나라에 남았다가, 의심이 많은 句踐에게 반역의 누명을 쓰고 자결하였다.
역주4 聚斂積實 : 聚斂은 원래 관리들이 苛斂誅求하는 것을 이르나 여기서는 인정사정없이 재물을 모으는 것을 가리키며, 積實은 재물을 쌓아 창고에 가득히 채워놓음을 이른다.
역주5 魯仲連旣退秦軍……連不忍爲也 : 魯仲連은 전국시대 齊나라의 高士이다. 그는 특이하고 빼어난 계책을 잘 냈으나, 얽매여 사는 것을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고 趙나라에 은거하고 있었다.
平原君은 趙나라 公子로 이름이 勝인데 선비를 좋아하여 門下에 食客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秦나라 장군 王齕이 趙나라를 공격하여 趙나라의 수도 邯鄲(한단)을 포위하자, 여러 제후들이 秦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趙나라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魏나라의 공자인 信陵君 無忌는 平原君의 처남이었으므로 趙王이 平原君으로 하여금 魏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자, 魏나라의 安釐(禧)王은 장군 晉鄙에게 군대를 주어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秦 昭王이 사신을 보내 “제후국 가운에 감히 趙나라를 구원하는 나라가 있으면 먼저 그 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자, 魏王이 두려워하여 晉鄙로 하여금 蕩陰에 주둔한 채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게 하였다.
魏나라에서는 新垣衍이란 辯士를 趙나라에 보내 秦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는 계책을 고하게 하였는데, 이때 이 말을 들은 魯仲連이 “포악한 秦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차라리 東海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며 여러 제후들을 동원할 수 있는 계책을 설명하니, 新垣衍은 “내가 다시는 秦나라를 황제로 섬기자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고 魯仲連에게 절하고 떠나갔다.
信陵君 無忌가 侯嬴의 계책을 써서 魏王의 침실에 있는 印符를 훔쳐 가지고 魏軍의 陣營으로 달려가 晉鄙를 죽인 다음, 스스로 장군이 되어 魏軍을 거느리고 마침 趙나라를 구원하러 온 楚軍과 함께 王齕의 秦軍을 대파하여 邯鄲의 포위를 풀었다. 전쟁이 끝나자 平原君이 魯仲連에게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平原君이 다시 술자리를 베풀고 천금으로 魯仲連을 위로하고자 하였으나, 魯仲連은 이마저도 받지 않고 떠나갔다. 《史記 魯仲連鄒陽列傳》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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