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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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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行文好 而以間疎丕, 植爲謀 終似畵餠이니라
取之以仁義하고 守之以仁義者 周也 取之以詐力하고 守之以詐力者 秦也 以秦之所以取 取之하고 以周之所以守 守之者 漢也 仁義詐力 雜用以取天下者 此孔明之所以失也니라
曹操因衰乘危하야 得逞其奸이어늘 孔明恥之하야 欲信(伸)大義於天下하니
當此時하야 曹公 威震四海 東據許, 兗하고 南收荊, 豫하니 孔明之所恃以勝之者 獨以其區區之忠信으로 有以激天下之心耳
夫天下廉隅節槪慷慨死義之士 固非心服曹氏也 特以威劫而强臣之하니 聞孔明之風이면 宜其千里之外 有響應者하리니
如此 則雖無措足之地라도 而天下固爲之用矣리라
且夫而後 天下忠臣義士 樂爲之死하나니라
其後 어늘 하니 此其與曹操異者 幾希矣
曹, 劉之不敵 天下之所知也
言兵이면 不若曹操之多 言地 不若曹操之廣이요 言戰이면 不若曹操之能이요 而有以一勝之者 區區之忠信也
孔明 遷劉璋 旣已失天下義士之望이어늘 乃始治兵振旅하야 爲仁義之師하야 東向長驅하야 而欲天下響應하니 蓋已難矣니라
曹操旣死 子丕代立하니 當此之時하야 可以計破也
何者
어늘하니 此其父子兄弟且爲寇讐어든 而況能以得天下英雄之心哉
孔明 旣不能全其信義하야 以服天下之心하고 又不能奮其智謀하야 以絶曹氏之手足하니 宜其屢戰而屢却哉인저
夫敵有可間之勢而不間者 湯, 武行之 爲大義 非湯, 武而行之 爲失機 此仁人君子之大患也니라
不知蜀之與魏 果有以大過之乎
苟無以大過之하고 而又決不能事魏 則天下安肯以空言竦動哉리오
嗚呼
書生之論이니 可言而不可用也니라
蘇長公所罪孔明之取劉璋 與其不能行間丕, 植一節 愚未敢信이며
但其將略一節 愚竊謂其可以守國이요 而非所以取天下者라하노라
大略先主之顧草廬하야 數言之間 已了一生功案矣하니 何則
孔明 節制之謀勝이나 而揮攉之氣寡
卽其生平하면 用兵之失 有三하니 當關羽之鎭夏口也 何以不虞吳人之議其後
甚且하야 已犯兵家大忌어늘 何以黙無一言하야 從中止之
嗚呼
以禪之孱弱으로 原無能恢復大漢者
卽如孔明所云 鞠躬盡瘁하야 死而後已 其志雖勤이나 而其略 豈足以定天下者哉리오


09. 제갈량諸葛亮에 대한
문장을 쓴 것은 좋으나 조비曹丕조식曹植을 이간질하고 소원하게 한다는 것으로 계책을 삼은 것은 끝내 그림 속의 떡일 듯하다.
천하를 인의仁義로써 취하고 인의仁義로써 지킨 것은 나라이고, 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취하고 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지킨 것은 나라이고, 나라가 취한 것(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취하고 나라가 취한 것(인의仁義)으로써 지킨 것은 나라이니, 인의仁義와 속임수와 무력을 뒤섞어 써서 천하를 취하려 한 것은 바로 공명孔明(제갈량諸葛亮)의 잘못인 것이다.
조조曹操나라의 쇠약하고 위태로운 틈을 타서 간악함을 부리자, 공명孔明이 이를 부끄러워하여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고자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조공曹公(조조曹操)의 위엄이 사해四海를 진동시켜 동쪽으로는 허창許昌연주兗州를 점거하고 남쪽으로는 형주荊州예주豫州를 점령하였으니, 공명孔明이 믿고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구구區區충신忠信으로 천하天下인심人心을 격발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저 천하에 청렴하고 절개가 있고 강개하여 의리에 죽을 수 있는 선비들이 진실로 조씨曹氏에게 심복한 것이 아니고, 다만 강압에 협박당하여 억지로 신하 노릇을 하였으니, 공명孔明의 풍도를 들으면 마땅히 천 리 밖에서 호응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발을 붙일 곳이 없더라도 천하 사람들이 진실로 그를 위하여 쓰일 것이다.
또 한 사람이라도 의롭지 못하게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 것을 하지 않은 뒤에야, 천하의 충신忠臣의사義士가 기꺼이 그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유표劉表가 죽었을 적에 선주先主(유비劉備)가 형주荊州에 있었는데, 공명孔明형주荊州를 기습하여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선주先主가 차마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 유장劉璋이 호의로 선주先主를 맞이하였는데, 에 이른 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공명孔明유장劉璋의 목을 조르고 등을 쳐서 나라를 빼앗으니, 이는 조조曹操와 다를 바가 거의 없는 것이다.
조씨曹氏유씨劉氏(유비劉備)가 서로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병력을 말하면 조조曹操처럼 많지 못하였고, 영토를 말하면 조조曹操처럼 넓지 못하였고, 전술을 말하면 조조曹操처럼 능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한 가지 더 나은 것은 구구한 충신忠信이었다.
공명孔明유장劉璋을 딴 곳으로 옮겨 이미 천하 의사義士들의 신망을 잃었는데,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군대를 정돈하여 인의仁義의 군대라 칭하고 동쪽으로 향하여 길게 몰아 나라를 공격하면서 천하 사람들이 호응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조조曹操가 죽은 뒤에 아들 조비曹丕가 대를 이어 지위를 계승하였으니, 이때에는 계략으로 이들을 격파할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조조曹操가 임종할 즈음 조비曹丕를 불러 작은 아들 조식曹植을 부탁하면서 일찍이 원소袁紹의 아들 원담袁譚원상袁尙을 가지고 경계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도, 조비曹丕조식曹植을 끝내 해치려 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부자간과 형제간에도 원수가 된 것인데 하물며 천하 영웅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이간질할 만한 형세가 있는 것이니, 불과 수십만 의 재물을 내어 대신大臣들과 골육骨肉(친족)들로 하여금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해치게 하고 그런 뒤에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면, 이는 바로 한 고조漢 高祖항적項籍(항우項羽)을 멸망시킨 계책을 쓰는 것이다.
공명孔明은 이미 신의信義를 온전히 보전하여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하였고, 또 지모智謀를 떨쳐서 조씨曹氏의 수족을 끊지 못하였으니, 조씨曹氏와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퇴각당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적에게 이간질할 만한 형세가 있는데도 이간질하지 않는 것은 탕왕湯王무왕武王이 이것을 행하면 대의大義가 되고, 탕왕湯王무왕武王이 아니면서 이것을 행하면 실기失機가 되는 것이니, 이는 인인仁人군자君子의 큰 병통인 것이다.
여온呂溫이 이르기를 “공명孔明환제桓帝영제靈帝의 뒤를 이어서 백성들에게 나라를 사모할 것을 강요할 수가 없었으니, 천하의 백성들에게 널리 포고할 적에 우선 말하기를 ‘조씨曹氏(조비曹丕)가 너희들을 이롭게 하면 내가 그를 섬길 것이고, 너희들을 해롭게 하면 내가 그를 주벌할 것이다.’라고 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내 알지 못하겠다. 촉한蜀漢나라보다 과연 크게 뛰어난 점이 있었는가?
만일 크게 뛰어난 점이 없고 또 결코 나라를 섬기지 못한다면, 이러한 빈말을 가지고 어찌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의논이니, 입으로 말할 수는 있으나 실지로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소장공蘇長公공명孔明유장劉璋을 취한 것과 조비曹丕조식曹植에게 이간책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비판한 이 한 구절은 내가 믿을 수가 없다.
다만 공명孔明장략將略에 대한 한 구절은 내가 생각하건대, 나라를 지킬 수는 있어도 천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대략 선주先主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여 공명孔明이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에 이미 일생의 공안功案을 끝마쳤으니, 어째서인가?
공명孔明은 절제하는 계책은 뛰어났으나 민첩하게 움직여 승기를 휘어잡는 기운은 부족하였다.

그의 평생을 살펴보면 잘못 용병한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관우關羽하구夏口에 진주했을 적에 공명孔明은 어찌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 뒤를 의논(기습)할 것을 헤아리지 않았으며, 관우關羽가 죽자 선주先主가 눈물을 흘리면서 출병을 하였으니, 이것은 이른바 ‘분병憤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또 7백여 리에 걸쳐 길게 진영을 늘어놓아서 이미 병법가兵法家에서 크게 꺼리는 일을 범하였는데, 공명孔明은 어찌하여 묵묵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 중앙에서 이를 저지하지 않았는가?

몇 년 동안 기산祁山에 출군함에 이르렀으나, 위연魏延이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샛길로 나아가 관중關中(장안長安)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나와서 공명孔明과 함께 서로 만나자는 계책’을 청함에 있어서는,
이 또한 을 도륙하고 범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계책이었는데, 공명孔明은 또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쓰지 않았는가?

아!
유선劉禪의 잔약함으로는 원래 대한大漢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공명孔明이 말한 “몸을 굽히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라는 것이니, 그 뜻은 비록 부지런하나 그 지략이 어찌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


역주
역주1 諸葛亮論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諸葛亮(181~234)은 삼국시대 蜀漢의 승상인데 字는 孔明이고 琅邪 陽都 사람으로,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저명한 정치가․전략가 중의 한 명이다. 諸葛亮이 襄陽의 隆中에 은거해 있었는데, 司馬徽와 徐庶의 추천을 받은 劉備가 그를 초치하기 위해 禮를 다하여 草廬에 세 번 방문하자, 이에 감복하여 劉備에게 天下三分之計를 갈파하고 軍師가 되어 劉備를 섬겼다.
曹操가 劉備와 孫權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諸葛亮은 孫權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曹操를 赤壁에서 대파하였다. 그리하여 劉備로 하여금 荊州를 점령하고, 이어 四川의 益州를 차지하여 蜀漢의 황제로 등극하게 함으로써 魏․吳․蜀 삼국의 시대를 열었다. 劉備가 죽고 난 뒤 後主 劉禪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後主 建興 12년(234) 北伐 중에 五丈原에서 魏나라의 司馬懿와 대치하다가 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建興 5년(227) 3월 諸葛亮이 魏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出兵하면서 後主에게 올린 〈出師表〉가 千古의 名文으로 유명하며, 뒤에 다시 〈出師表〉를 올려 〈前出師表〉와 〈後出師表〉로 나뉘었다. 생전에 일절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으며, 죽은 뒤에 武侯라는 시호를 받아 諸葛武侯로 통한다.
역주2 殺一不義而得天下를 有所不爲 : 《孟子》 〈公孫丑 上〉에서, 公孫丑가 伯夷와 伊尹과 孔子의 같은 점을 묻자,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 리 되는 땅을 얻어서 人君 노릇을 하면 모두 諸侯들에게 조회받고 天下를 소유할 수 있거니와, 한 가지 일이라도 不義를 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이고 天下를 얻음은 모두 하시지 않을 것이다.[得百里之地而君之 皆能以朝諸侯有天下 行一不義 殺一不辜而得天下 皆不爲也]” 하였다.
역주3 劉表之喪 : 劉表는 字가 景升이며, 兗州 山陽郡 高平縣 사람으로, 西漢의 魯恭王 劉餘의 후손이다. 천하가 크게 혼란하던 獻帝 初平 연간에 荊州刺史가 되었는데, 주변의 여러 州를 병탄하여 세력을 크게 넓혔다. 曹操와 袁紹가 官渡에서 대치하고 있을 적에 袁紹로부터 원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劉表는 관망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曹操는 袁紹를 멸망시키고 난 뒤에 직접 劉表를 정벌하러 나섰는데, 정벌군이 이르기 전인 建安 13년(208) 劉表는 등창이 나서 죽었다.
역주4 先主在荊州……先主不忍也 : 先主는 蜀漢을 개국한 劉備를 이르며, 孤는 劉表의 뒤를 이어 荊州刺史가 된 劉琮을 가리킨다. 당시 劉備는 汝南에서 曹操에게 쫓겨 劉表에게 의탁해 있었다. 曹操의 대군이 공격해오는 와중에 劉表가 죽고 그의 둘째 아들 劉琮이 뒤를 이었으나, 주변의 참모들이 모두 曹操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자 그대로 항복하였다.
劉備는 樊城에 주둔해 있다가 曹操가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襄陽을 거쳐 樊口를 향해 퇴각하였는데, 이때 諸葛亮이 劉備에게 劉琮을 기습하여 죽이면 荊州를 얻을 수 있다고 계책을 내었다. 그러나 劉備는 “劉荊州(劉表)가 죽을 적에 나에게 그 孤兒를 부탁하였으니, 信義를 저버리고 자신의 일을 이루는 짓은 하지 않겠다.” 하고 거절하였다. 《三國志 蜀書 先主傳》
역주5 劉璋以好逆之 : 劉璋은 字가 季玉인데, 益州刺史 劉焉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益州刺史가 되었다. 성품이 유약하고 의심이 많았는데, 漢中의 張魯가 자주 침범하여 위협을 느끼자, 法正과 張松의 계책을 따라 劉備를 우호세력으로 맞아들여 張魯를 누르고자 하였다. 益州는 四川 곧 成都와 그 부근 지역이다. 《三國志 蜀書 劉璋傳》
역주6 至蜀不數月……而奪之國 : 劉備가 漢中의 張魯를 격퇴시켜 달라는 劉璋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益州로 들어가니, 劉璋이 반갑게 맞이하여 劉備에게 병력과 물자를 내주고 張魯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劉備는 張魯를 토벌하는 대신 益州의 백성들에게 恩德을 베풀어 民心을 수습하고 기회를 보다가, 마침내 대군을 출동시켜 成都를 포위하고 劉璋을 협박하니, 이에 劉璋이 항복하였다. 劉備는 劉璋을 公安으로 옮기고 益州를 차지하여 蜀나라를 세웠는데, 이는 모두 諸葛亮의 계책을 따른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東坡는 諸葛亮이 주인인 劉璋을 몰아내고 劉備가 益州를 차지하게 한 것은 不義를 저지른 것으로 曹操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역주7 操之臨終……未嘗不以譚尙爲戒也 : 丕는 曹丕(187~226)를 이르는데, 魏나라를 개국한 文帝로 曹操의 아들이다. 曹操 사후에 魏王의 지위를 계승하였다가 漢 獻帝에게 선양받아 魏나라를 개국하였다.
植은 曹植(192~232)으로 曹丕의 아우이고 字가 子建이며 陳王에 봉해지고 시호가 思이므로 보통 陳思王으로 칭하는데, 曹操 생전에 형 曹丕와 後嗣를 다퉈 사이가 좋지 않아서 文帝 즉위 후에 많은 핍박을 받았다.
譚과 尙은 袁紹의 두 아들이다. 河北 지방의 패자였던 袁紹가 曹操에게 官渡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병을 얻어 죽으면서 後嗣를 미처 정하지 못했는데, 막하의 장수 審配와 逢紀 등이 袁紹의 遺命이라고 칭하고는 적자인 袁譚을 물리치고 셋째 아들 袁尙을 後嗣로 세웠다. 이에 袁譚이 격분하여 袁尙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이후 형제간의 반목과 공격이 계속되다가 결국 曹操에게 모두 패망하였다. 曹操가 죽으면서 두 아들에게 이들 형제간처럼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8 丕與植……如此 : 曹丕는 황제가 된 뒤에 자신과 후사를 다퉜던 아우 曹植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여러 번 죽이고자 하였으나 어머니가 말려서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한번은 文帝(曹丕)가 曹植을 불러 “네가 詩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났으니, 일곱 걸음 안에 詩를 지으면 괜찮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曹植은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콩깍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울고 있네.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는데, 서로 삶기를 이리 급하게 하는가.[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煮何太急]”라는 〈七步詩〉를 지어 한 형제간이 서로 핍박함을 비유하였으므로 曹丕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살려주었다. 그러나 재위 중에 封地를 계속 옮기게 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9 不過捐數十萬金……此高祖所以滅項籍也 : 漢 高祖가 陳平에게 천하를 빨리 안정시킬 계책을 묻자, 陳平이 “項王(項籍)의 강직한 신하는 亞父(范增)와 鍾離昩․龍且․周殷 등의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대왕이 진실로 수만의 금을 내시어 反間을 행하여 저들 君臣을 이간질해서 그 마음을 의심하게 하면, 項王의 사람됨이 의심하고 시기하고 참소하는 말을 믿어서 반드시 안으로 서로 죽일 것이니, 漢나라가 인하여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면 楚나라를 틀림없이 격파할 것입니다.”라고 계책을 내었다.
이에 高祖가 황금 4만 근을 내어 陳平에게 주니, 陳平이 이 금을 가지고 楚나라에 反間을 많이 놓자, 項籍이 과연 鍾離眛 등을 믿지 않았으며, 뒤에는 范增까지 의심하여 떠나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項籍의 세력이 급속하게 약해져 결국 高祖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 項籍은 項羽로 籍은 이름이고 羽는 字이다.
역주10 呂溫……吾誅之 : 呂溫(711~811)은 唐나라 德宗, 憲宗 때의 문신으로, 字는 和叔이며, 河中 사람이다. 貞元 14년(798)에 진사과로 출사하여 集賢殿校書郞을 역임하고 戶部員外郞에 이르렀다. 呂溫은 法家를 배워 重刑主義를 주장하였는데, 문장과 학문이 빼어나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桓․靈은 後漢 말기에 昏愚하여 나라를 망친 황제들인 桓帝(재위 146~ 167)와 靈帝(재위 167~189)를 이른다. 前漢 말기 成帝와 元帝는 큰 失政이 없었기 때문에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어 新나라를 세우자, 백성들이 모두 漢나라를 그리워하여 漢나라의 皇室인 劉秀(光武帝)에게 귀의하였으므로 漢나라를 중흥할 수 있었다. 그러나 後漢의 桓帝와 靈帝는 포악한 정사로 말미암아 인심을 잃어 백성들이 다시는 漢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았으므로, 劉備가 아무리 漢나라의 황실로 漢나라를 계승한다 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呂溫이 지은 《呂衡州集》 〈諸葛武侯廟記〉에 “지난날 만일 諸葛武侯(諸葛亮)가 先主의 명을 받아 천하에 포고하기를 ‘내가 거사한 것은 사사로이 劉氏의 종실을 위하려는 것이 아니요, 천하 백성들을 살리려는 것이다. 曹氏가 너희들을 이롭게 하면 내가 그를 섬길 것이고, 曹氏가 너희들을 해롭게 하면 내가 그를 주벌할 것이다.’라고 하여, 포학한 魏나라에 핍박받는 백성들로 하여금 분연히 감동하게 하고, 그런 뒤에 군대를 정돈하고 적의 틈을 엿보다가 승승장구하여 의로운 명성을 떨치고 쳐들어갔더라면, 咸陽과 洛陽을 굳이 평정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諸葛武侯는 무슨 이유로 지극히 공정해야 할 운수를 당하여 사사로움으로 천하 사람들을 강요하였는가? 이쪽에서 오히려 힘으로 다툼으로써 저들이 심복하지 아니하여 몹시 애쓰고도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니, 당연하지 않은가?[向使武侯奉先主之命 告天下曰 我之擧也 匪私劉宗 唯活元元 曹氏利汝乎 吾事之 曹氏害汝乎 吾除之 俾虐魏偪從之民 聳誠感動 然後經武觀釁 長驅義聲 咸洛不足定矣 奈何當至公之運 而强人以私 此猶力爭 彼未心服 勤而靡獲 不亦宜哉]”라고 보인다.
역주11 羽之旣沒……所謂憤兵矣 : 憤兵은 분노에 차서 이성을 잃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군대로, 憤兵은 반드시 패한다고 한다.
前漢 宣帝 때의 名相인 魏相은 宣帝가 장군 趙充國 등의 말을 듣고 쇠약해진 匈奴族을 공격하려 하자, 글을 올려 간하기를 “亂을 구원하고 포악한 자를 주벌하는 것을 義兵(의로운 군대)이라 이르니 군대가 의롭게 출동하는 자는 왕 노릇하고, 敵이 자신을 침공하여 부득이 일어나는 것을 應兵(대응하는 군대)이라 이르니 군대가 대응하여 출동하는 자는 이기고, 작은 일을 다투고 한하여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을 忿兵이라 이르니 군대가 분해서 싸우는 자는 패합니다.[救亂誅暴 謂之義兵 兵義者王 敵加於己 不得已而起者 謂之應兵 兵應者勝 爭恨小故 不忍忿怒者 謂之忿兵 兵忿者敗]” 하였다. 《漢書 魏相傳》 憤과 忿은 통용된다.
당시 劉備는 結義兄弟한 關羽가 魏․吳 兩國의 연합군에 패하여 죽자 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켰으며, 이 와중에 張飛마저 부하 장수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극도로 분노하여 출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2 連營七百餘里 : 당시 劉備는 吳나라의 장수 陸遜과 대치하면서 長江의 三峽 지역인 夷陵까지 7백 리의 긴 진영을 설치하였다가 대패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3 魏延所請提勁卒五千……出與孔明相合 : 魏延은 蜀漢의 장수이다. 建興 6년(228) 蜀漢의 승상 諸葛亮이 魏나라를 정벌할 적에 여러 부하들과 상의하니, 장군 魏延이 말하기를 “지금 魏나라의 長安을 지키고 있는 夏侯楙는 겁이 많고 지략이 없는 인물이니, 이제 저에게 精兵 5천 명을 맡겨주시면 곧바로 褒中으로 진출하여 秦嶺을 따라 동진해서 子午谷으로 나와 북진할 경우 불과 10일 만에 長安에 도달할 것입니다.
夏侯楙는 저의 군대가 불시에 쳐들어왔단 말을 들으면 반드시 城을 버리고 도주할 것이니, 저들이 동쪽 지방과 서로 연결하려면 아직도 20여 일이 걸릴 것이며, 승상께서는 斜谷을 따라오시면 충분히 도달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一擧에 咸陽(長安) 以西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諸葛亮은 “이것은 위험한 계책이니, 평탄한 길을 따라 서서히 隴西를 점령하면 만전의 계책으로 반드시 승리한다.” 하고, 魏延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역주14 屠龍搏虎手 : 龍을 도륙하고 범을 잡을 수 있는 솜씨란 뜻으로, 강대국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을 이른다.
역주15 孔明所云……死而後已 : 鞠躬盡瘁는 ‘몸을 굽혀 수고로움을 다한다.’는 뜻으로, 이 내용은 諸葛亮이 재차 出兵하면서 後主에게 올린 〈後出師表〉의 끝부분에 보인다. 諸葛亮은 이 글에서 後主에게 小人을 멀리하고 賢臣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보살필 것을 당부하고, 마지막에 “臣은 몸을 굽히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成敗와 利害에 이르러서는 臣의 지혜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臣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라고 하여 끝을 맺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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