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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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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老成典刑之言이라
臣聞 天下治亂 出於下情之通塞이니 至治之極 至於小民하야도 皆能自通하고 大亂之極 至於近臣하야도 不能自達이라하니이다
易曰 天地交泰라한대 其詞曰 上下交而其志同이라하고
又曰 天地不交否라한대 其詞曰 上下不交而天下無邦이라하니
夫無邦者 亡國之謂也니이다
上下不交하면 則雖有朝廷君臣이나 而亡國之形 已具矣 可不畏哉잇가
臣不敢復引衰世昏主之事
馴致其事하야 至安祿山反하야 兵已過河로되 而明皇猶以爲忠臣하니 無他
下情不通하고 耳目壅蔽 則其漸至於此也니이다
臣在經筵하야數論此事하니이다
陛下爲政九年 除執政臺諫外 未嘗與群臣接하시니이다
이나 天下不以爲非者 以謂 不得不爾也니이다
今者 祥除之後 聽政之初 當以通下情, 除壅蔽 爲急務니이다
臣雖不肖 蒙陛下擢爲河北西路安撫使하시니
沿邊重地 此爲首冠이라 臣當悉心論奏 陛下亦當垂意聽納이니이다
祖宗之法 邊帥當上殿面辭어늘 而陛下獨以本任闕官하고 迎接人衆爲詞하사 降旨拒臣하야 不令上殿하시니 此何義也잇고
臣若伺候上殿이라도 不過更留十日이니
本任闕官 自有轉運使權攝하야 無所闕事 迎接人衆 不過更支十日糧이니 有何不可완대 而使聽政之初 將帥不得一面天顔而去니잇고
有識之士皆謂 陛下厭聞人言하고 意輕邊事하야 其兆見於此矣라하니이다
臣備位講讀하야 日侍帷幄 前後五年이니 可謂親近이어늘 方當戍邊하야 不得一見而行하니 況疎遠小臣 欲求自通이면 亦難矣리이다
今陛下聽政之初 不行乘乾出震見離之道하시고 廢祖宗하야 而襲行垂簾不得已之政하시니 此朝廷有識 所以驚疑而憂慮也니이다
臣不得上殿 於臣之私 別無利害로되 而於聽政之始 天下屬目之際 所損聖德 不小하니이다
臣已於今月二十七日 出門하니 非敢求登對
然臣始者本俟上殿하야 欲少效愚忠이러니 今來 不敢以不得對之故 便廢此言이니이다
惟陛下察臣誠心하사 少加採納하소서
古之聖人 將有爲也인댄 必先處晦而觀明하고 處靜而觀動하니 則萬物之情 畢陳於前이라
不過數年이면 自然知利害之眞이요 識邪正之實이니 然後 應物而作이라
作無不成하니이다
臣敢以小事譬之하리이다
夫操舟者 常患不見水道之曲折이로되 而水濱之立觀者 常見之하나니 何則
操舟者 身寄於動하고 而立觀者 常靜故也니이다
奕碁者 勝負之形 雖國工이라도 有所不盡이로되 而袖手旁觀者 常盡之하나니 何則
奕者 有意於爭하고 而旁觀者 無心故也니이다
若人主靜而無心이면 天下其孰能欺之리잇가
漢景帝卽位之初 首用鼂錯하야更易法令하고 黜削諸侯라가
遂成이러니 景帝往來 寒心者數月하야 終身不敢復言兵하니이다
武帝卽位未幾 遂欲用兵鞭撻四夷하야
兵連禍結三十餘年하니 然後 下哀痛詔하고 하니이다
以此 知古者英睿之君 勇於立事하면 未有不悔者也니이다
景帝之悔速故 變而復安하고 武帝之悔遲故 幾至於亂하니 雖遲速安危小異 然比之常靜無心하야 終始不悔 如孝文帝者하면 不可同年而語矣니이다
今陛下聖智絶人하시고 春秋鼎盛하시니 臣願虛心循理하사 一切未有所爲 黙觀庶事之利害 與群臣之邪正호되 以三年爲期하사 俟得利害之眞 邪正之實然後 應物而作하소서
使旣作之後 天下無恨하고 陛下亦無悔하야 上下同享太平之利하면 則雖盡南山之竹이라도 不足以紀聖功이요之壽라도 不足以報聖德이니이다
由此觀之컨대 陛下之有爲 惟憂太早 不患稍遲 亦已明矣니이다
臣又聞 爲政 如用藥方이라하니
今天下雖未大治 實無大病이니이다
古人云 有病不治 常得中醫라하니 雖未能盡除小疾이나 然賢於誤服惡藥하야 覬萬一之利하야 而得不救之禍者遠矣니이다
臣恐急進好利之臣 輒勸陛下輕有改變이라
輒進此說하오니 敢望陛下 深信古語하고 且守中醫安穩萬全之策하사 勿爲惡藥所誤하시면 實社稷宗廟之利 天下幸甚이리이다
臣不勝忘身憂國之心하야 冒死進言하노이다
謹錄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1. 정주定州에 부임하면서 조사朝辭하는 일을 논한 글
노성老成한 대신의 전형이 될 만한 말이다.
이 들으니 “천하가 다스려지느냐 혼란하냐는 아랫사람의 마음이 통하느냐 막혀 있느냐에서 나오니, 지극한 정치의 궁극에는 하찮은 백성에 이르러도 다 스스로 통할 수가 있고, 크게 혼란한 정치의 궁극에는 측근의 신하에 이르러도 스스로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역周易태괘泰卦상전象傳〉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사귀는 것이 태괘泰卦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상하上下가 사귀어 그 뜻이 같아지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비괘否卦단전彖傳〉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사귀지 않는 것이 비괘否卦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상하上下가 사귀지 않아 천하에 나라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라가 없다는 것은 망국亡國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하가 사귀지 않으면 비록 조정과 군주와 신하가 있더라도 망국亡國의 형상이 이미 갖추어진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은 감히 다시 쇠퇴한 세상의 혼우昏愚한 군주의 일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라 명황明皇(현종玄宗)과 같은 군주는 나라를 중흥하여 형벌을 거의 쓰지 않은 태평성대를 이룩한 군주였으나, 천보天寶 말년에 소인들이 지위에 있어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통하지 못하자, 선우중통鮮于仲通이 거느린 20만 대군이 노수瀘水 남쪽에서 전군全軍전몰戰歿하였는데도 명황明皇이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이러한 일이 이루어져서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킴에 이르러 반란군이 이미 황하黃河를 건너왔으나 명황明皇은 아직도 그를 충신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통하지 못하고 군주의 총명이 가려지면 점차로 번져서 여기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경연經筵에서 여러 번 이 일을 논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정사政事를 다스린 9년 동안 집정대신執政大臣대간臺諫들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천하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즈음이라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상大祥이 지나 상복을 벗으시고 직접 정사政事를 다스리시는 초기이니, 마땅히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통하게 하고 막힌 것을 제거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은 비록 불초하나 폐하께서 발탁하여 하북서로안무사河北西路安撫使로 삼으시는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연변沿邊(변방)의 중요한 지역 가운데 으뜸이 되는 곳이니, 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논주論奏해야 할 것이요, 폐하께서도 마땅히 유념하여 받아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조종祖宗의 법에는 변방의 장수가 부임할 적에는 마땅히 대궐에 올라가서 황제를 뵙고 하직해야 하는데, 폐하께서는 다만 본관의 자리가 현재 비어 있고 또 영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구실로 삼으셔서 특지特旨를 내리시어 을 막아 대궐에 오르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무슨 의의입니까?
이 만약 폐하께서 한가하실 때를 기다려 대궐에 오른다 하더라도 열흘을 더 지체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본관의 자리가 비어 있으나 본래 전운사轉運使가 대리로 맡고 있어서 사무를 폐지하는 일이 없고, 또 영접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나 10일의 양식을 더 지급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무슨 불가한 일이 있기에 폐하께서 직접 정사政事를 다스리시는 초기에 장수가 한 번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신단 말입니까?
식견識見이 있는 선비들이 모두 생각하기를 ‘폐하께서 남의 말을 들으시기를 싫어하고 변방의 일을 마음에 소홀히 여기셔서 그 조짐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강독講讀하는 지위를 맡고 있어서 날마다 유악帷幄에서 모신 지가 전후 5년이나 되었으니, 친근하다고 이를 만한데도 변방을 지키러 가면서 한 번 천안天顔을 뵙고 가지 못하니, 하물며 폐하와 소원한 낮은 신하가 스스로 통하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주역周易건괘乾卦상전象傳〉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君子가 이것을 보고서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에 이르기를 “상제上帝진방震方에서 나와 이방離方에서 서로 만난다.”라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나오면 만인이 우러러 보는 법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직접 정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을 타고 진방震方에서 나와 이방離方에서 만나보는 를 행하지 않으시고, 부임할 적에 군주가 장수를 임견臨遣하는 조종祖宗고사故事를 폐지하시어 수렴청정하실 적의 부득이한 정사政事를 답습하시니, 이것이 조정의 식견 있는 자들이 놀라고 의심하여 우려하는 이유입니다.
이 대궐로 올라가서 폐하를 뵙지 못하는 것은 의 일신상에는 별다른 이해가 없으나, 지금은 폐하께서 직접 정사政事를 다스리시는 초기로 천하 사람들이 주목하는 즈음이어서 성덕聖德에는 손상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은 이미 이달 27일에 도성문都城門을 나왔으니, 감히 등대登對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당초에 본래 기다렸다가 대궐로 올라가서 폐하를 뵙고 어리석은 충성을 조금이라도 바치고자 하였으니, 지금 감히 등대登對하지 못했다 하여 곧바로 이 말씀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 진실한 마음을 살피셔서 다소나마 받아들여 주소서.
옛날 성인聖人들은 장차 큰 일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어두운 곳에 처하여 밝은 곳을 관찰하고 고요한 곳에 처하여 하는 것을 살펴보았으니, 이렇게 하면 만물의 실정이 다 앞에 드러납니다.
이렇게 하여 불과 몇 년이면 자연히 이해利害의 진실을 알게 되고 사정邪正의 실정을 알게 되니, 그런 뒤에야 사물에 대응하여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함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감히 작은 일을 가지고 비유해보겠습니다.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자는 항상 물길의 굴곡을 보지 못함을 걱정하지만 물가에 서서 구경하는 자는 항상 이것을 볼 수 있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자는 몸이 움직이는 배에 맡겨져 있고 서서 구경하는 자는 항상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두는 자는 승부의 형세를 비록 국수國手라도 다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팔짱을 끼고 옆에서 구경하는 자는 항상 이것을 다 볼 수 있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바둑을 두는 자는 항상 다툼에 마음이 있고 옆에서 구경하는 자는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군주가 마음이 고요하고 무심하다면 천하에 그 누가 속일 수 있겠습니까?
나라 경제景帝는 즉위 초기에 맨 먼저 조조鼂錯를 등용하여 법령을 바꾸고 제후들의 작위爵位를 낮추고 영지를 줄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7의 변란이 일어나자, 두 궁궐 사이를 왕래하면서 몇 달 동안이나 마음으로 두려워하고는 이후 종신토록 감히 다시는 병사兵事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제武帝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사방 오랑캐들을 채찍질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병란이 이어지고 화변禍變이 끊이지 않기를 30여 년이나 했으니, 그런 뒤에야 애통해하는 조서를 내리고 재상으로 봉하여 부민후富民侯로 삼았습니다.
은 이로써 옛날의 영특하고 현명한 군주들이 큰 일을 이루려는 데 용감하면 후회하지 않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제景帝는 후회가 빨랐기 때문에 국세局勢를 변환하여 다시 편안하였고 무제武帝는 후회가 더뎠기 때문에 거의 혼란에 이르렀으니, 비록 빠르고 더디고 편안하고 위태로움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항상 고요하고 무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후회하지 않은 효문제孝文帝 같은 분에 비한다면 같은 수준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성스럽고 지혜로움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시고 춘추가 젊으시니, 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도리를 따르시어 일체 무슨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여러 가지 일의 이해利害와 신하들의 사정邪正을 묵묵히 관찰하시되 3년을 기한으로 삼아 이해利害의 진실과 사정邪正의 실제를 분명히 아신 뒤에 사물에 대응하여 시작하소서.
그리하여 일이 시작된 뒤에 천하 사람들은 한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없고 폐하께서도 또한 후회하는 마음이 없어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태평성대의 이로움을 함께 누리게 된다면, 비록 남산南山의 대나무를 다 베어 죽간竹簡을 만들더라도 스러운 공적을 충분히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요, 나라 삼종三宗수명壽命을 겸하시더라도 성덕聖德을 다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살펴보건대 폐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 적에 오직 너무 빠를까 우려하셔야 할 것이요, 다소 늦을까 걱정하지 마셔야 함이 또한 이미 분명합니다.
은 또 들으니 “정사政事를 다스림은 병자에게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하가 비록 크게 다스려지지는 못하였으나 실로 큰 병통은 없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병이 났을 적에 치료하지 않으면 항상 중간 정도의 의원은 얻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비록 작은 병을 다 제거하지는 못하나 나쁜 약을 잘못 먹고 만에 하나의 이익을 바라다가 구제할 수 없는 를 얻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은 급진적으로 이익을 좋아하는 신하들이 번번이 폐하에게 법령을 가볍게 변경하시도록 권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번번이 이러한 말씀을 아뢰는 것이오니, 감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옛말을 깊이 믿으시고, 또 중간의 의원으로 안온하여 만전萬全을 기하는 계책을 쓰시어 나쁜 약으로 잘못되는 바가 없으시다면, 실로 사직과 종묘의 이익이요, 천하에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은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죽을죄를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기록하여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朝辭赴定州論事狀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元祐 八年九月二十六日 端明殿學士 兼翰林 侍讀學士 左朝奉郞 新知定州 蘇軾狀奏’라는 34字가 있다. 元祐 8년(1093) 9월 당시 蘇軾은 知定州事에 제수되었는데, 朝廷에 올라가 황제에게 朝辭하고 당금의 정사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朝辭를 하지 말라는 명이 내려 이 글을 올린 것이다. 朝辭는 外地로 부임하는 신하가 황제를 직접 뵙고 하직인사를 하는 것이다. 定州는 河北西路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河北省 正定이다. 狀은 古代 文體의 하나로 사실을 서술하거나 의견을 진술한 글을 이른다.
역주2 天寶之末……明皇不知 : 鮮于仲通(693~755)은 이름이 向이고 仲通은 그의 字로 陽縣 사람이다. 楊貴妃의 사촌 오라비인 楊國忠을 당시 劍南節度使 章仇兼璟에게 소개하여 출세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이후 승상이 된 楊國忠의 힘으로 劍南節度使가 되고 다시 京兆尹이 되었다. 天寶 10년(751) 長安에 와 있던 南詔의 인질이 도망가자 玄宗이 노하여 승상인 楊國忠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楊國忠은 자신과 친한 鮮于仲通을 蜀郡長史로 천거하고 그로 하여금 6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南詔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瀘川의 싸움에서 全軍이 전멸되고 鮮于仲通만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다. 이때 楊國忠은 兵部尙書를 겸하고 있었는데, 그의 패전을 은닉하고 도리어 戰功을 세웠다고 상을 내렸다. 天寶 13년(754)에 劍南留后 侍御史 李宓이 거느린 7만 명의 군대로 하여금 다시 南詔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들 또한 패하여 全軍이 전멸당하고 李宓은 사로잡혔다. 楊國忠은 패전을 숨기고 도리어 승리했다고 아뢰고는 당시 劍南節度使였던 鮮于仲通으로 하여금 더욱 많은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니, 전후에 전사한 자가 거의 20만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어 玄宗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唐書 楊國忠傳》
역주3 垂簾之際 : 당시 나이 어린 哲宗이 즉위하여 太皇太后가 垂簾聽政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4 易曰……自强不息 : 自强不息은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음을 이른다. 이 내용은 《周易》 乾卦 〈象傳〉에 보이는데, 옛날 사람들은 천동설을 주장하였는바, 천체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운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하늘의 운행이 굳세다고 한 것이다.
역주5 又曰……相見乎離 : 이 내용은 《周易》 〈說卦傳〉에 보이는데, 〈文王後天圖〉를 기준으로 하여 坎에서 艮으로, 艮에서 震으로, 震에서 巽으로, 巽에서 離로 이어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周易》 〈說卦傳〉에 이르기를 “만물이 震에서 나오니, 震은 동방이다. 巽에 깨끗하다는 것은 巽은 동남쪽이니, 깨끗하다는 것은 만물이 깨끗함을 말한 것이다. 離는 밝음이니, 만물이 모두 서로 만나보기 때문이니, 남방의 괘이다. 聖人이 남면하여 천하를 다스려서 밝은 곳을 향해 다스림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帝는 하늘의 上帝이다.
역주6 臨遣將帥故事 : 臨遣은 군주가 臨御하여 임지로 떠나는 장수를 직접 전송함을 이른다.
역주7 七國之變 : 七國은 당시 漢나라의 제후국인 吳, 楚 등 일곱 나라를 가리킨다. 漢나라 高祖(劉邦)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子弟들을 크게 봉하여 왕실을 돕게 하였으나, 세대가 멀어져 강성한 제후들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景帝 때에 鼂錯(조조)는 이들 제후국의 봉지를 삭탈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에 이들은 간신 鼂錯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周亞夫의 토벌을 받고 모두 패망하였다.
역주8 兩宮 : 景帝가 머물고 있던 궁과 太后가 머물던 東宮을 이른다. 당시 景帝는 국가의 주요 문제를 東宮에 가서 太后에게 稟議한 다음 시행하곤 하였다.
역주9 封宰相爲富民侯 : 富民侯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侯라는 뜻이다. 漢나라는 황제의 자손들만 王으로 봉하고 他姓으로 공이 높은 자는 侯로 봉하였는데, 武帝는 사방 오랑캐를 정벌하여 국경을 확장하느라 많은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을 괴롭히다가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경제를 부흥시켜 백성을 잘살게 하고자 하였다. 이런 의도에서 경제를 부흥시킨 재상을 富民侯로 봉하였다.
역주10 三宗 : 殷나라 中宗, 高宗, 祖甲 세 임금을 이른다. 《書經》 〈周書 無逸〉에 보면, 中宗은 재위기간이 75년이고 高宗은 59년이고 祖甲은 33년으로 모두 장수를 누렸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宋나라의 仁宗, 英宗, 神宗이라 하였으나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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