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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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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與徐州所上書 意同이라
臣伏見호니 自來河北, 京東 常苦盜賊이로되 而京東尤甚하야 不獨之姦이요 至有飛揚跋扈割據僭擬之志하니이다
近者 徒黨 靑徐妖賊 皆在京東하니 凶愚之民 殆已成俗이니이다
自昔大盜之發 必有釁端이어늘 今朝廷淸明하고 四方無虞로되 而此等常有不軌之意者 殆土地風氣習俗使然이니 不可不察也니이다
凶愚之人 常以此藉口하고 而其材力心膽 實亦過人하니이다
加以近年 改更貢擧條制하야 掃除腐爛하고 專取學術하니 其秀民善士 旣以改業이로되 而其朴魯强悍難化之流 抱其無用之書하고 各懷不逞之意하니이다
朝廷雖勅有司하야 別立字號하야 以收三路擧人이나
而此等 自以世傳으로 無由復踐하야 老死田里하고 이라하야
私出怨言하고 幸災伺隙하니
臣每慮及此하면 卽爲寒心이니이다
揚雄有言호되 御得其道하면 則天下狙詐 咸作使하고 御失其道하면 則天下狙詐 咸作敵이라하고
之流 皆有絶異之姿어늘 而惜其不入於道德하고 苟放縱於末流라하니
是知人之善惡 本無常性하야 若御得其道하면 則向之姦猾 盡是忠良이라
이라하니 使不遇漢高런들 亦與盜賊何異리잇고
臣竊嘗爲朝廷計하야 以爲窮其黨而去之 不如因其材而用之라하니
何者
其黨不可勝去 而其材自有可用이니이다
漢武嘗遣하야 督捕盜賊할새 所至하야 斬二千石以下하니 可謂急矣로되 而盜賊不爲少衰者 其黨 固不可盡也일새니이다
若朝廷 因其材而用之하면 則盜賊自消하고 而豪傑之士 可得而使하리니 請以唐事明之호리이다
以後 河北諸鎭 相繼僭亂하야 雖憲宗英武로도 亦不能平하니이다
觀其主帥하면 皆卒伍庸材로되 而能於六七十年間 與朝廷相抗者 徒以好亂樂禍之人 背公死黨之士 相與出力而輔之也니이다
至穆宗之初하야 하니이다
知河北之亂 權在此輩하고 於是 盡籍軍中宿將名豪如朱克融之流하야 薦於朝하야 冀厚與爵位하야 使北方之人으로 羨慕向進하야 革其亂心하니이다
而宰相崔植, 杜元穎 皆庸人이라 無遠慮하야 以爲河北旣平하니 天下無事라하야
克融輩久留京師로되 終不錄用하고 饑寒無告하야 怨忿思亂이러니
會張(洪)[弘]靖赴鎭할새 遂遣還幽州한대 而克融等作亂하야 復失河朔하니이다
今陛下鑑唐室旣往之咎하사 當收京東河北豪傑之心이니이다
臣伏見 近日沂州百姓程棐 告獲妖賊郭進等하니이다
竊聞棐之弟岳 乃是李逢之黨으로 配在桂州호되 豪俠武健 又過於棐
京東州郡 如棐岳者 不可勝數라하니
此等 棄而不用이면 卽作賊이요 收而用之 卽捉賊이니 其理甚明이니이다
臣願 陛下精選靑, 鄆兩帥 及徐, 沂, 兗, 單, 濰, 密, 淄, 齊, 曹, 濮知州하사 諭以此意하야 使陰求部內豪猾之士하야 或有武力하고 或多權謀하고 或通知術數而曉兵하고 或家富於財而好施어든 如此之類 皆召而勸奬하야 使以告捕自效하소서
籍其姓名하야 以聞於朝하야 所獲盜賊 量輕重酬賞호되 若獲眞盜大姦이어든 隨卽錄用하고 若只是尋常劫賊이어든 卽累其人數하야 酬以一官하야
使此輩 歆艶其利하야 以爲進身之資하소서
但能拔擢數人이면 則一路自然競勸하리이다
貢擧之外 別設此科하면 則向之遺材 皆爲我用이요 縱有姦雄嘯聚라도 亦自無徒하리이다
但每州 搜羅得一二十人하면 卽耳目徧地하야 盜賊無容足之處矣리이다
歷觀自古奇偉之士컨대之流 皆出於群盜로되 改惡修善하야 不害爲賢이어든 而況以捉賊出身 有何不可리잇고
若朝廷隨材試用이면 異日攘戎狄, 立功名 未必不由此塗出也리이다
非陛下神聖英武 不能決行此策이니이다
臣雖非職事 而受恩至深하니 有所見聞 不敢瘖黙하야
謹錄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6. 이종李琮을 대신하여 경동京東의 도적을 논한 글
서주徐州에서 올린 글과 뜻이 같다.
이 엎드려 보니, 예로부터 하북河北경동京東은 항상 도적 때문에 시달렸으나 경동京東이 더욱 심하여, 비단 담장을 뚫거나 담장을 넘어가서 물건을 훔치고 남의 상자를 뒤지며 사람을 몽둥이로 쳐 죽여 매장하고 무덤을 발굴하는 간악한 자들뿐만 아니라, 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며 발호하고 지방에 할거하여 참람하게 왕자王者에 견주려는 뜻을 품은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근자에는 이봉李逢의 도당과 청주淸州서주徐州의 요사스런 적들이 모두 경동京東 지방에서 나왔으니, 백성들이 흉악하고 어리석어 거의 이미 풍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큰 도적이 나올 적에는 반드시 빌미가 될 만한 단서가 있었는데, 지금 조정이 깨끗하고 사방에 근심이 없는데도 이들이 항상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마도 토지의 풍기風氣와 습속 탓인 듯하니, 이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라 고제高帝패읍沛邑 사람이고 항우項羽숙천宿遷 사람이고 유유劉裕팽성彭城 사람이고 황소黃巢완구宛朐 사람이고 주전충朱全忠탕산碭山 사람이며, 그 나머지 역대의 호걸로서 경동京東에서 나온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흉악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항상 이것을 입에 올리고 있으며, 또 이들의 재주와 힘과 담력 또한 실로 보통사람들보다 더 뛰어납니다.
게다가 근년에 공거貢擧(과거科擧)에 대한 조례條例를 변경해서 지난날 썩어 문드러진 것들을 깨끗이 청소하고 오로지 학술學術이 뛰어난 자를 취하니, 뛰어난 백성과 훌륭한 선비들은 이미 학업을 바꿨으나 질박하고 노둔하고 강포하고 사나워 교화되기 어려운 무리들은 쓸모없는 책을 품에 안고 각자가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비록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별도로 자호字號를 세워서 세 (하북동河北東하북서河北西경동京東)의 과거보는 사람들을 수용하게 하였으나,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대대로 전해온 박학朴學으로는 다시 과장科場을 밟을 길이 없어서 전리田里에서 늙어 죽고 과거에 급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체념하여,
은밀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나라에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면서 틈을 엿보고 있으니,
은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참으로 마음이 두렵습니다.
양웅揚雄이 말하기를 “어거함이 올바른 방도를 얻으면 천하에 교활하게 속이는 사기꾼들도 모두 부릴 수 있고, 어거함이 올바른 방도를 잃으면 천하에 교활하게 속이는 사기꾼들이 모두 적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반고班固 또한 논하기를 “극맹劇孟곽해郭解의 무리들은 모두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자질이 있었는데, 도덕道德의 길에 들지 못하고 구차히 말류末流에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했다.”라고 하여 애석히 여겼으니,
이로써 사람의 이 본래 일정한 본성本性이 없어서 만약 어거함이 올바른 방도를 얻으면 지난날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도 모두 어질고 훌륭한 인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허자장許子將(허소許劭)이 조조曹操를 보고 평하기를 “그대는 태평한 조정에서는 유능한 신하요, 난세에서는 간웅姦雄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한신韓信팽월彭越나라 고조高祖를 만나지 못했던들 이들 또한 도적과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이 일찍이 조정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보건대 ‘도적의 무리를 끝까지 치죄治罪하여 제거하는 것이 그 재능을 따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그 무리를 이루 다 제거할 수가 없고 그 재주가 진실로 쓸 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나라 무제武帝가 일찍이 수의직지사자繡衣直指使者를 보내어 도적들을 체포하고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이르는 곳마다 전시戰時군흥법軍興法으로 다스려서 이천석二千石(지방 태수) 이하를 참형에 처했으니, 급하게 몰아붙였다고 이를 만하였으나 도적들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던 것은 그 무리를 진실로 다 없앨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이들을 그 재능에 따라 등용한다면 도적이 저절로 사라지고 호걸스런 선비들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니, 청컨대 나라의 일을 가지고 밝혀보겠습니다.
나라는 천보天寶 연간 이후로 하북河北 지방의 여러 번진藩鎭들이 서로 잇달아 참람한 짓을 하고 반란을 일으켜서 비록 영무英武헌종憲宗도 이를 평정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의 주수主帥(절도사)들을 보면 모두 졸병 출신의 용렬한 재주였으나 6, 7십년 동안 조정에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난을 좋아하고 를 즐기는 자들과 국가를 저버리고 도당徒黨을 위해 죽으려는 선비들이 함께 힘을 내서 그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종穆宗이 즉위하여 유총劉總이 조정에 귀의하자, 하북河北 지방이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유총劉總하북河北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이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군중軍中의 옛 장수와 유명한 호걸들로 주극융朱克融과 같은 무리들을 모두 군적에 올려 조정에 천거해서 이들에게 높은 지위와 관작을 줌으로써 북방 사람들로 하여금 이들을 보고 흠모하고 나와 벼슬해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고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재상인 최식崔植두원영杜元穎은 모두 용렬한 자들로 원대遠大한 사려가 없어서 생각하기를 ‘하북河北 지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천하에는 일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주극융朱克融 등의 무리가 오랫동안 경사京師(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끝내 벼슬을 하지 못하고 굶주림과 추위를 하소연할 곳이 없게 되자, 원망하고 분노하여 난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침 장홍정張弘靖으로 부임하면서 주극융朱克融유주幽州로 돌아가게 하자, 이들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나라는 다시 하삭河朔(하북河北) 지방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나라의 지난 잘못을 거울삼아 마땅히 경동京東하북로河北路의 호걸들의 마음을 거두셔야 할 것입니다.
이 엎드려 보니, 근일 기주沂州의 백성인 정비程棐란 자가 요사한 도적 곽진郭進 등을 사로잡았다고 고해왔습니다.
엎드려 들으니, 정비程棐의 아우 정악程岳은 바로 이봉李逢의 도당으로 지금 계주桂州에 유배되어 있는데, 호걸스러움과 뛰어난 무용이 정비程棐보다도 더하다고 합니다.
경동京東의 여러 주군州郡에는 정비程棐정악程岳과 같은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을 나라에서 버리고 등용하지 않는다면 바로 도적이 될 것이요, 거두어 등용한다면 바로 도적을 잡을 것이니,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합니다.
은 바라건대 폐하께서 청주靑州운주鄆州의 두 장수(절도사)와 경동京東경서京西직사職司와 또 서주徐州기주沂州연주兗州단주單州유주濰州밀주密州치주淄州제주齊州조주曹州복주濮州지주知州(태수太守)를 엄정히 선발하신 다음, 이러한 뜻으로 타일러서 저들로 하여금 은밀히 자기 구역 내의 호협하고 교활한 인사들을 찾아내어, 혹 그 가운데 무용武勇이 있거나 권모權謀가 많거나 술수術數에 통달하고 병법을 깨달았거나 집에 재물이 많으면서 베풀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이와 같은 무리들을 모두 불러 권유해서 저들로 하여금 도적을 고발하고 체포하여 그 공로를 스스로 바치게 하소서.
저들이 포획한 도적의 성명姓名을 장부에 올려 조정에 보고하여, 잡힌 도적이 지은 죄의 경중을 헤아려서 을 주되 만약 진짜 도적과 크게 간악한 자를 잡았으면 즉시 벼슬을 내리고, 단지 평범한 강도라면 바로 그 인원수를 합산해서 한 관직을 주어 공로를 보상하소서.
그리하여 이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탐내고 부러워하여 이로써 출신出身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소서.
다만 이들 중에 몇 사람만이라도 잘 발탁한다면 한 가 다투어 권면될 것입니다.
공거貢擧(과거科擧)와는 별도로 이 를 특별히 설치한다면 지난번에 버린 인재들이 모두 우리에게 쓸모가 있게 될 것이요, 비록 간웅姦雄이 있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라도 저절로 따르는 무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모든 로 하여금 이들을 망라하여 찾아내게 해서 1, 2십명을 얻게 되면 바로 이목耳目(첩자)이 지방에 두루 깔려 있어, 도적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기이하고 뛰어난 인사들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주처周處대연戴淵과 같은 무리들은 모두 도적떼 출신이었으나 악행을 고치고 선행을 닦아 어진 이가 됨에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하물며 도적을 잡는 것으로 출신出身하는 것이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만약 조정에서 재능에 따라 이들을 등용한다면 후일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공명功名을 세우는 일이 반드시 이 길로부터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성神聖하고 영무英武하신 폐하가 아니시면 이 계책을 결행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비록 이 맡은 일이 아니나 폐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지극히 깊으니,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 감히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기록하여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代李琮論京東盜賊狀 : 本集에는 제목 아래에 “元豐□年”이라는 한 句가 있는데, 연도를 표시한 字가 빠져 있어 몇 년인지 알 수가 없으나, 商務印書館에서 발행한 萬有文庫本 《蘇東坡集》에는 3년(1080)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元豐 3년부터 8년까지는 蘇軾이 黃州에 유배되어 있어 李琮과 내왕할 길이 없을 듯하므로, 元豐 3년에 쓰여졌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李琮은 字가 獻甫로 江寧 사람인데 進士로 출사하여 寧國軍推官과 知陽武縣이 되어 치적이 있었으나, 王安石에게 붙어 비난을 받았으며 가는 곳마다 苛斂誅求하여 선비들에게 비웃음을 산 인물이다.
역주2 穿窬胠篋椎埋發塚 : 穿窬는 담을 뚫거나 넘어가는 좀도둑을 이르고, 胠篋은 옆에서 상자를 열고 물건을 훔치는 것을 말하며, 椎埋는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묻는 강도짓을 이르고, 發塚은 묘를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치는 행위이다. 모두 절도나 살인 등 흉악범을 이른다.
역주3 李逢 : 神宗 元豐 연간에 반역을 도모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逆黨의 괴수이다. 李逢은 余姚縣主簿로 있으면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백성들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역주4 漢高帝……碭山人 : 高帝는 秦나라 말에 봉기하여 漢나라를 일으킨 劉邦이고, 項羽는 이름이 籍으로 劉邦과 함께 기병하여 楚나라의 霸王이 되었으며, 柳裕는 南朝의 宋나라를 일으켰고, 黃巢는 唐나라 말기 반란을 일으킨 도적떼의 두목이며, 朱全忠은 원래의 이름이 溫으로 唐나라 昭帝를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여 後梁을 세운 인물이다.
역주5 朴學 : 質樸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訓詁를 위주로 한 漢代의 經學을 이른다. 漢나라 武帝 때의 학자인 倪寬은 《尙書》에 정통하였는데, 처음 武帝를 알현하고 《尙書》에 대해 설명하자, 武帝가 이르기를 “나는 비로소 《尙書》가 朴學임을 알겠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朴學은 義理를 가볍게 여기고 訓詁를 중시하였으므로 王安石의 新法黨이 이를 폐지하고자 한 것이다.
역주6 場屋 : 과거시험장을 이른다.
역주7 不入彀中 : 彀中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이르는데,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여기서는 과거의 급제선(합격선)에 들지 못함을 이른다.
역주8 班固亦論 劇孟郭解 : 班固는 《漢書》의 저자이며, 劇孟과 郭解는 漢나라 武帝 때의 협객들이다. 《漢書》 〈遊俠傳序〉에 이르기를 “布衣의 유협인 劇孟과 郭解의 무리는 마을 사이를 치달려, 권력이 州縣에 행해지고 힘이 公侯를 압도하였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자질이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道德의 길에 들지 못하고 末流에 방종하여 몸이 죽고 집안을 망쳤으니, 불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협은 사방을 떠돌며 무협을 자랑하던 협객으로 戰國時代부터 위세를 떨치다가 漢나라 武帝 때에 이들이 처형된 뒤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역주9 許子將謂曹操曰……亂世之姦雄 : 子將은 許劭의 자이다. 許劭는 後漢 말엽의 학자로 관상학에 밝고 인물을 잘 논평하여 이름이 높았다. 曹操가 아직 이름이 나기 전에 찾아가 그에게 자신을 평해주기를 청하자, “그대는 태평한 조정에서는 유능한 신하요, 난세에서는 姦雄이다.”라고 평하였다.
역주10 韓彭 : 韓信과 彭越을 이른다. 모두 뛰어난 장수들로 漢나라 高祖 劉邦을 만나 천하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각각 楚王과 梁王에 봉해졌다.
역주11 繡衣直指 : 漢나라 武帝 때의 암행어사로, 비단옷을 입고 지방을 암행하여 지방관리들의 부패와 무능을 치죄하고 도적들을 다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武帝 말년에 郡國에서 도적이 봉기하여 도로가 막히자, 直指使者인 暴勝之 등으로 하여금 비단옷을 입고 도끼를 가지고 다니면서 지방관리들을 치죄하고 도적을 체포하게 하였다.
역주12 軍興從事 : 軍興은 군사작전이 진행될 적에 지방관 등이 재물을 모아 군사작전에 군수품을 제공하는 것을 이르는데, 그 법이 몹시 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3 天寶 : 唐나라 玄宗의 年號로 742년부터 755년까지 총 14년간이다. 天寶 14년(755)에 范陽節度使로 있던 安祿山이 河北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洛陽과 長安이 함락되었다. 이후로 唐나라는 藩鎭들이 발호하여 끝내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역주14 劉總入朝 而河北始平 : 劉總은 幽州節度使 劉濟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스스로 幽州節度使가 되었다가 양심의 가책으로 조정에 귀의하여 절도사 직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던 河北 지방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劉總이 조정에 귀의할 적에 막하 장수인 朱克融 등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역주15 京東京西職司 : 京東과 京西는 京東東路와 京東西路를 이르며, 여기서의 職司는 이곳의 治安을 주재하는 憲司, 즉 提點刑獄을 이른다.
역주16 周處戴淵 : 모두 晉나라 사람이다. 周處는 字가 子隱이며 陽羨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는데 弱冠이 되기 전부터 뛰어난 힘을 믿고는 행실을 닦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마을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장성하여 스스로 남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알자 개과천선하고 학문에 진력하여 뒤에 벼슬이 御史中丞에 이르렀다. 戴淵은 字가 若思로 廣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遊俠을 좋아하고 행실을 닦지 않다가 마침내 도적의 괴수가 되었는데, 문장가인 陸機를 만나고 그의 권유에 감화되어 검을 버리고 행실을 닦아 뒤에 벼슬이 驃騎將軍에 이르렀다. 모두 《晉書》 〈列傳〉에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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