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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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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子瞻上執政書 其所自持處 嶄然하니라
軾聞之호니 將有求於人而其說不誠이면 則難以望其有合矣라하니이다
世之奇特之士 其處也 莫不爲異衆之行하고 而其出也 莫不爲怪詭之詞하야 比物引類하야 以搖撼當世호되 理不可化 則欲以勢劫之하야 將以術售其身하니이다
雖其貴賤之闊絶이나 而其相須之急 不啻若左右手라하니이다
嗚呼 果其用是說也인댄 則夫世之君子所爲老死而不遇者 無足怪矣니이다
今夫扣之者急이면 則應之者疑하고 其辭夸하면 則其實必有所不副
今吾以爲王公大人 不可以一日而無吾也라하면 彼將退而考其實인댄 則亦無乃未至於此耶잇가
昔者 而不失爲明君하고 而不失爲賢公卿하니
吾將以吾之說하고 而彼將以彼之說하야 彼是相拒하야 而不得其歡心이라
貴賤之間 終不可以合하야 而道終不可以行하나니
何者
其扣之急而其辭夸也일새니이다
鬻千金之璧者 不之於肆로되 而願觀者塞其門하야
觀者歎息 而主人無言焉하나니 非不能言이요 知言之無加也니이다
今也 不幸而坐於五達之衢하고 又呶呶焉自以爲希(稀)世之珍이라호되 過者不顧어든 執其裾而强觀之하면 則其所鬻者 可知矣니이다
王公大人 其無意於天下後世者 亦安以求爲也리오
苟其不然이면 則士之過於其前而有動於其目者 彼將褰裳疾行而摟取之
凡皇皇(遑遑)汲汲者 擧非吾事也니이다
昔者 嘗聞明公之風矣로니 하야 才足以過人이로되 而自視缺然하야 常若不足하고 安於小官而樂於恬淡이니이다
方其在太學之中 衣繒飯糗하야 若將終身이러니 至於德發而不可掩하고 名高而不可抑하야 貴爲로되 而其自視 不加於其舊之라하니이다
其度量宏達 至於如此하니 此其尤不可以夸辭而急扣者也니이다
軾不佞 自爲學至今 十有五年이라
以爲凡學之難者 難於無私 無私之難者 難於通萬物之理
不通乎萬物之理 雖欲無私 不可得也
己好則好之하고 己惡則惡之하야 以是自信則惑也라하노이다
是故 幽居黙處하야 而觀萬物之變하고 盡其自然之理하야 而斷之於中호되 其所不然者 雖古之所謂賢人之說이라도 亦有所不取하니 雖以此自信이나 而亦以此自知其不悅於世也
其言語文章 未嘗輒至於公相之門하니이다
今也 天子擧直諫之士하시니 而兩制過聽하야 謬以其名聞이라
竊以爲 與於此者 皆有求於吾君吾相者也
亦敢獻其文凡十篇호되 而書爲之先하오니 惟所裁擇이면 幸甚이리이다
唐荊川曰
此文 與說富相公文同意하니 皆欲以無意中之하니라


02. 증승상曾丞相에게 올린 글
자첨子瞻이 집정대신에게 올린 글은 그 스스로 지킨 바가 아주 엄격하다.
제가 들으니 “장차 남에게 요구함이 있으면서 그 말이 성실하지 못하면 뜻이 합하기를 바라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기이하고 특출한 선비들은 은둔해 있을 적에는 여러 사람들과 다른 행실을 하지 않음이 없고, 등용되었을 적에는 괴이한 말을 하지 않음이 없어서 사물을 비유하고 또 같은 종류를 끌어와서 당세 사람들을 동요시키되, 이치로 교화할 수 없으면 세력으로 위협하여 장차 술책을 써서 자신의 계책을 써먹으려고 합니다.
옛날의 군자 중에 한자韓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왕공王公대인大人은 빈천한 선비가 자신의 아래에 있으면서 그 뒤를 밀어주어 명성을 크게 드날리게 하고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신분의 귀천貴賤이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서로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좌우의 손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과연 이 말을 따른다면 세상의 군자들이 늙어 죽도록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지금 문을 두드리기를 급하게 하면 응하는 자가 의심하고, 하는 말이 과장되면 실제가 반드시 부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스스로 말하기를 “왕공王公대인大人은 단 하루도 내가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 저 왕공王公대인大人은 장차 물러가서 그 실제를 고찰할 것이니, 그러면 또한 자신의 과장된 말이 그 높은 경지에 못 이르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나라 고조高祖는 일찍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현명한 군주가 되었고, 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은 일찍이 선비를 천거하지 않았으나 어진 공경公卿이 되었습니다.
‘나는 장차 나의 말을 따르고 저들은 장차 저들의 말을 따른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피차가 서로 대립하여 환심歡心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끝내 합하지 못하여 가 끝내 행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문을 두드리기를 너무 급하게 하고, 하는 말이 너무 과장되기 때문입니다.
천금의 벽옥碧玉을 파는 자는 벽옥碧玉을 가게에 진열하지 않아도, 구경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문에 꽉 차 있습니다.
벽옥碧玉을 구경한 자들이 감탄하는데도 주인은 말을 하지 않으니, 이는 주인이 말하지 못해서가 아니요, 말하는 것이 보탬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불행히도 보물을 가지고 사통오달의 길거리에 앉고 또 스스로 세상에 드문 보배라고 시끄럽게 떠드나, 지나가는 자들이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들의 소매를 붙잡고 억지로 이것을 보게 한다면, 물건이 팔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공王公대인大人 중에 천하와 후세에 뜻이 없는 자라면 또한 어찌 선비를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눈에 확 뜨이는 선비가 자기 앞을 지나갈 경우 저 왕공王公대인大人들은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서둘러 달려가서 선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황망해하고 급급해하는 것은 모두 왕공王公대인大人의 일이요, 선비인 저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일찍이 명공明公의 풍모를 들었는데, 명공明公께서는 대신의 자손으로 과거科擧에 높은 등급으로 급제하여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데도, 자신을 보기를 하찮게 생각하여 항상 부족함이 있는 듯이 여기시고, 낮은 벼슬을 편안히 여겨 편안하고 담박함을 즐거워하신다 하였습니다.
태학太學에 계실 적에는 거친 명주베로 만든 옷을 입고 마른밥을 먹으면서 장차 이대로 몸을 마칠 듯이 하였는데, 덕이 드러나 가릴 수가 없고 명성이 높아져 억누를 수 없게 되어서는 귀함이 천자의 소재少宰가 되었으나 자신을 보는 것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 도량의 크고 통달함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제가 더욱 과장되게 말씀드리고 급하게 문을 두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불초한 저는 학문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무릇 학문의 어려움은 가 없기가 어려운 것이고, 가 없기 어려움은 만물의 이치를 통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면 비록 가 없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물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해서〉 자기가 좋으면 좋아하고 자기가 싫으면 싫어하여 이것으로써 스스로 믿는다면 미혹된 것입니다.’라고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그윽하고 묵묵히 거처하여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자연의 이치를 다하여 마음속으로 결단하되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비록 옛날 이른바 현인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또한 취하지 않는 바가 있었으니, 비록 이 때문에 스스로를 믿으나 또한 이 때문에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러므로 저의 언어와 문장이 일찍이 한 번도 공상公相의 문에 이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직간하는 선비를 등용하려 하시니, 양제兩制에서 잘못 듣고서 제 이름을 임금께 잘못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여기에 참여된 자들은 모두 우리 군주와 정승에게 바람이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감히 제가 지은 글 10편을 바치면서 먼저 편지를 올리는 것이오니, 행여 채택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였다.
“이 글은 부상공富相公(부필富弼)을 설득한 글과 뜻이 같으니, 두 편 모두 의도함이 없는 것으로 상대방의 뜻을 적중시키고자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上曾丞相書 : 이 글은 〈上富丞相書〉와 동일한 시기에 쓰여졌다. 曾丞相은 曾公亮(999~1078)으로 字는 明仲이며 泉州 晉江 사람이다. 天聖 연간(1023~1031)에 進士로 출사하여 端明殿學士 知鄭州事, 知開封府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仁宗 嘉祐 6년(1061)에 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어 韓琦와 함께 재상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魯國公에 봉해졌다.
역주2 韓子者……不啻若左右手 : 韓子는 唐나라의 대문장가인 韓愈를 가리킨다. 韓愈(768~824)는 字가 退之이고 昌黎伯에 봉해져 韓昌黎로 불렸으며 諡號는 文이다.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처음으로 사륙변려문을 비판하고 古文復興運動을 주창하였으며 《昌黎先生集》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본문에 인용된 문장은 文集 등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내용이 당시 襄陽刺史이며 山南東道節度觀察使인 于頔에게 보낸 편지(〈與于襄陽書〉)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비로서 큰 명성을 누리고 당세에 드러난 자는 먼저 현달한 선비로서 천하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 자가 앞에서 주선해주지 않은 경우가 없고, 선비로서 아름다운 빛을 남겨 후세를 비추는 자들은 또한 後進의 선비로서 천하의 명망을 지니고 있는 자가 뒤에서 주선해주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만일 앞에서 주선해주는 이가 없으면 비록 아름다우나 드러나지 못하고 뒤에서 주선해주는 이가 없으면 비록 성하나 전하지 못합니다. 이 두 사람들은 일찍이 서로 필요로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士之能享大名顯當世者 莫不有先達之士負天下之望者 爲之前焉 士之能垂休光照後世者 亦莫不有後進之士負天下之望者 爲之後焉 莫爲之前 雖美而不彰 莫爲之後 雖盛而不傳 是二人者 未始不相須也]”
역주3 漢高未嘗喜儒 : 漢高는 漢나라 高祖 劉邦을 가리킨다. 漢나라 高祖는 市井 출신으로 儒學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儒生을 만나면 욕을 하고 儒生의 두건에 오줌을 누곤 하였다.
역주4 衛霍未嘗薦士 : 衛霍은 衛靑과 霍去病을 이른다. 두 사람은 모두 漢나라 武帝 때의 명장들로 흉노를 상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들은 모두 武帝에게 선비를 천거한 적이 없었다.
역주5 以大臣之子孫 而取天下之高第 : 曾公亮은 天聖 연간에 진사과에 甲科로 급제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명문세가로 부친 曾會는 벼슬이 集賢殿修撰에 이르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 天子之少宰 : 《周禮》 〈天官〉에 의하면 天官의 長을 太宰, 부장관을 少宰라 하였는데, 天官은 吏部를 가리킨다. 曾公亮은 嘉祐 6년(1061)에 吏部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으므로 蘇軾이 天子의 少宰라고 말한 것이다. 朝鮮朝에서도 少宰는 吏曹參判을 뜻하였다.
역주7 錙銖 : 錙와 銖는 고대 중량의 단위 중에 적은 것들로, 병칭하여 매우 적음을 이른다. 錙는 1兩의 4분의 1이고, 銖는 1兩의 24분의 1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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