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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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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其所傳으로 攻其所蔽하니 荀卿當深服이리라
嘗讀孔子世家하야 觀其言語文章호니 循循莫不有規矩하야 不敢放言高論하야 言必稱先王하니 然後 知聖人憂天下之深也로라
茫乎不知其畔岸而非遠也 浩乎不知其津涯而非深也
是亦足矣
使後世有能盡吾說者 雖爲聖人이라도 無難이요 而不能者라도 니라
此三者 皆天下之所謂難能而可貴者也
이나 三子者 每不爲夫子之所悅이요 하시니라
且夫學聖人者 豈必其言之云爾哉리오
亦觀其意之所嚮而已
夫子以爲後世 必有不足行其說者矣 必有竊其說而爲不義者矣
是故 其言 平易正直하야 而不敢爲非常可喜之論하시니 要在於不可易也
하고 大變古先聖王之法하야 於其師之道 不啻若寇讐러니
及今觀荀卿之書然後 知李斯之所以事秦者 皆出於荀卿하야 而不足怪也로라
荀卿者 喜爲異說而不讓하고 敢爲高論而不顧者也
其言 愚人之所驚이요 小人之所喜也
子思, 孟軻 世之所謂賢人君子也어늘
天下之人 如此其衆也하고 仁人義士 如此其多也어늘
由是觀之하면 意其爲人 必也剛愎不遜하고 而自許太過하니 彼李斯者 又特甚者耳
今夫小人之爲不善에도 猶必有所顧忌
是以 夏, 商之亡 桀, 紂之殘暴로도 而先王之法度, 禮樂, 刑政 猶未至於絶滅而不可考者하니 是桀, 紂猶有所存하야 而不敢盡廢也
彼李斯者 獨能奮而不顧하야 焚燒夫子之六經하고 烹滅三代之諸侯하며 破壞하니 此亦必有所恃者矣
彼見其師歷詆天下之賢人하야 自是其愚하고 以爲古先聖王 皆無足法者라하니 不知荀卿 特以快一時之論이요 而荀卿亦不知其禍之至於此也
其父殺人報仇하면 其子必且行劫하나니
荀卿 明王道하고 述禮樂이어늘 而李斯以其學으로 亂天下하니 其高談異論 有以激之也
孔孟之論 未嘗異也로되 而天下卒無有及者하니 苟天下果無有及者 則尙安以求異爲哉리오
王遵巖曰
以異說高論四字 立案하니 煞是荀卿頂門一鍼이요 而謂李斯焚書破壞先王之法 皆出於荀卿이라하니 尤是長公深文手段이니라


04. 순경荀卿에 대한
그가 전수한 바를 가지고 그의 폐단을 공격하였으니, 순경荀卿이 마땅히 그 죄줌에 깊이 복종했을 것이다.
내 일찍이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읽어서 그(공자孔子) 언어와 문장을 보았는데, 차근차근하여 법도가 있지 않음이 없어서 감히 흰소리 치고 고상한 의논을 하지 않아 말씀마다 반드시 선왕先王을 칭하셨으니, 그런 뒤에야 성인聖人이 천하를 우려함이 깊음을 알았다.
아득하여 그 언덕(끝)을 알 수 없으나 먼 것이 아니요, 넓어서 그 나루터를 알 수 없으나 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말씀한 것은 필부匹夫필부匹婦도 모두 아는 것이지만 그 행하신 것은 성인聖人도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으니, 아!
이 또한 충분한 것이다.
만일 후세에 나(공자孔子)의 말씀을 다 따르는 자가 있다면 비록 성인聖人이 되는 것도 무난할 것이요, 능하지 못한 자라도 허물을 적게 함이 되는 것은 잃지 않을 것이다.
자로子路의 용맹과 자공子貢의 변설과 염유冉有의 지혜, 이 세 가지는 모두 천하 사람들이 이른바 능하기 어려워서 귀중히 여길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매번 부자夫子의 기쁨이 되지 못하였고, 안연顔淵은 침묵하여 그 능한 바를 드러내지 않아서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부자夫子께서는 자주 그를 칭찬하셨다.
성인聖人을 배운다는 것이 어찌 반드시 그 말씀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성인聖人의 뜻이 향하는 바를 볼 뿐인 것이다.
부자夫子는 ‘후세에 반드시 자신의 을 행할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요, 반드시 자신의 을 도둑질하여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셨다.
이 때문에 그 말씀이 평이하고 정직하여 감히 크게 비범하여 기뻐할 만한 의논을 하지 않으셨으니, 요컨대 바꿀 수 없음에 있는 것이다.
옛날 나는 이사李斯순경荀卿을 사사하다가 이윽고 그 책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옛날 선성왕先聖王의 법을 크게 변경해서 그 스승의 에 대하여 원수처럼 여길 뿐만이 아닌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순경荀卿의 책(《순자荀子》)을 본 뒤에야 이사李斯나라를 섬겼던 것이 모두 순경荀卿에게서 나와서 굳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됨을 알았다.
순경荀卿이란 자는 이설異說을 하기 좋아하여 사양하지 않고, 과감히 고론高論을 하고도 돌아보지 않은 자였다.
그의 말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소인小人들이 좋아하는 바였다.
자사子思맹자孟子는 세상의 이른바 현인賢人군자君子인데,
순경荀卿은 홀로 말하기를 “천하를 어지럽힌 자는 자사子思맹가孟軻(맹자孟子)이다.”라고 하였으며,
천하 사람이 이와 같이 많고 인인仁人의사義士가 이와 같이 많은데도
순경荀卿은 홀로 말하기를 “사람의 성품은 악하니, 걸왕桀王주왕紂王은 본성대로 하였고, 임금과 임금은 거짓을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해보면, 짐작하건대 그 사람됨이 반드시 고집스럽고 불손하며 또 스스로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평가한 자였을 것이요, 저 이사李斯라는 자는 또 더 심한 자였을 것이다.
지금 소인小人들이 불선不善을 할 적에도 오히려 반드시 돌아보고 꺼려하는 바가 있다.
이 때문에 나라와 나라가 멸망할 적에 걸왕桀王주왕紂王의 잔인함과 포악함으로도 선왕先王법도法度예악禮樂형정刑政이 아직 완전히 끊어지고 없어져서 상고할 수 없음에 이르지 않았으니, 이는 걸왕桀王주왕紂王도 오히려 남겨둔 바가 있어서 감히 다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저 이사李斯란 자는 홀로 분발하여 뒤돌아보지 않고서 부자夫子육경六經을 불태우고 삼대三代에 세운 제후諸侯들을 삶아 죽였고 주공周公정전제도井田制度를 파괴하였으니, 이 또한 반드시 믿는 바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사李斯는 그 스승이 천하의 현인들을 차례로 비방하여 스스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옳게 여김을 보고는 옛 성왕聖王이 모두 본받을 만한 자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니, 이것은 순경荀卿이 다만 한때의 의논을 통쾌하게 한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요, 순경荀卿 또한 그 가 여기에 이를 줄은 알지 못한 것이다.
그 아버지가 사람을 죽여 원수를 갚으면 그 자식도 반드시 장차 겁박하는 짓을 행한다.
순경荀卿왕도王道를 밝히고 예악禮樂을 기술하였는데, 이사李斯가 그의 학문을 가지고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은 순경荀卿의 고상한 말과 이론異論이사李斯를 격동시킴이 있었던 것이다.
공자孔子맹자孟子의 의논은 일찍이 다르지 않았으나 천하에 끝내 그들에게 미친 자가 없으니, 만일 천하에 과연 미친 자가 없다면 오히려 어찌 이설異說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 ‘이설고론異說高論’의 네 글자를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았으니 이것은 순경荀卿정문일침頂門一鍼이며, ‘이사李斯가 책을 불태우고 선왕先王의 법을 파괴한 것이 모두 순경荀卿에게서 나왔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장공長公이 더욱 엄하게 비판한 수단이다.”


역주
역주1 荀卿論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荀卿(B.C. 313~B.C. 238)은 이름이 況이고 字가 卿으로 전국시대 趙나라 사람이다. 儒學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性惡說을 주장했으며, 法家를 대표하는 韓非子와 李斯는 모두 그의 제자이다. 저서에는 《荀子》가 있다.
역주2 其所言者……聖人有所不能盡也 : 이 말은 《中庸》의 “君子의 道는 夫婦의 어리석음으로도 참여하여 알 수 있으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夫婦의 不肖함으로도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聖人이라도 또한 능하지 못한 바가 있다.[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能焉]”라는 내용을 줄여 요약한 것이다.
역주3 不失爲寡過而已矣 : 寡過는 자신을 성찰하고 사욕을 이겨 허물을 적게 하는 것으로, 최소한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4 子路之勇 子貢之辯 冉有之智 : 子路와 子貢과 冉有는 모두 孔子의 高弟로 孔門十哲에 든 제자들이다.
子路(B.C. 542~B.C. 480)는 季路라고도 칭하였는데, 성이 仲이고 이름이 由이며 魯나라 卞 땅 사람으로 孔子보다 9살 어린데, 政事에 뛰어났으며 용맹하였다. 子貢(B.C. 520~?)은 성이 端木이고 이름이 賜이며 衛나라 사람으로 孔子보다 31살 어린데, 言語에 뛰어났다. 冉有(B.C. 552~B.C. 489)는 이름이 求이고 魯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 어린데, 政事에 뛰어났으며 다재다능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論語》 〈雍也〉에 “季康子가 ‘仲由는 政事에 종사하게 할 만합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 ‘由는 果斷性이 있으니 政事에 종사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셨다. ‘賜는 政事에 종사하게 할 만합니까?’라고 물으니, ‘賜는 사리에 통달했으니 政事에 종사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셨다. ‘冉求는 정사에 종사하게 할 만합니까?’라고 물으니, ‘求는 다재다능하니 政事에 종사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季康子問 仲由可使從政也與 子曰 由也果 於從政乎何有 曰 賜也可使從政也與 曰 賜也達 於從政乎何有 曰 求也可使從政也與 曰 求也藝 於從政乎何有]”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東坡가 이들 세 사람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孔子께서 이들을 칭찬만 하신 것은 아니다. 孔子는 일찍이 子路를 평하여 《論語》 〈先進〉에서 “由는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若由也不得其死然]”라고 하였고, 또 “由는 속되다.[由也喭]”라고 하셨으며, 또 〈公冶長〉에서 “道가 행해지지 않는다. 내가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하노니, 나를 따라올 사람은 아마도 由일 것이다.[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 其由與]”라고 하셨는데, 子路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자, 孔子께서는 “由는 용맹을 좋아함이 나보다 나으나 사리를 헤아려 맞게 하지 못한다.[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라고 폄하하셨다.
또 子貢에 대해서는 〈先進〉에서 “賜는 天命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화를 늘렸으나 억측하면 자주 맞는다.[賜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라고 하셨고, 魯 定公 15년 邾 隱公이 魯나라에 조회 왔을 적에, 定公에게 玉을 바치면서 너무 높게 바치고 定公은 玉을 받으면서 너무 낮게 받자, 子貢이 이것을 보고 “두 나라 군주가 모두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孔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賜는 불행히도 말을 하면 맞으니, 이는 賜로 하여금 말을 많이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賜不幸言而中 是使賜多言也]”라고 폄하하셨다는 내용이 《春秋左氏傳》 定公 15년에 보인다.
冉有(冉求)에 대해서는, 〈先進〉에 “季氏가 周公보다 부유하였는데도 冉求가 그를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재산을 증식해주자, 孔子께서 ‘冉求는 나의 무리가 아니니, 小子들아! 북을 울려 죄를 聲討함이 옳다.’라고 꾸짖으셨다.[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라는 내용이 보이며, 이외에도 孔子께서 冉有에 대해 책망한 내용이 자주 보인다.
또 〈公冶長〉에 “孟武伯이 ‘子路는 仁합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 ‘내 알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셨다. 다시 묻자, 孔子께서 ‘由는 千乘의 나라에 軍政을 다스리게 할 수는 있어도 그가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셨다. 孟武伯이 ‘求는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求는 千室의 큰 고을과 百乘의 卿大夫 집안에 宰가 되게 할 수는 있어도 그가 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셨다.[孟武伯問 子路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何如 子曰 求也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5 顔淵……而夫子亟稱之 : 顔淵(B.C. 521~B.C. 490)은 이름이 回이고 字가 子淵이며 魯나라 사람으로 孔子보다 30세가 어린데 德行에 뛰어났다. 安貧樂道하여 孔子께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꼽았으며, 후대 사람들은 ‘復聖’으로 칭하였다.
《論語》 〈爲政〉에 孔子께서 “내가 顔回와 더불어 온종일 이야기를 하였으나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인 듯하였는데, 물러간 뒤에 그가 사사로이 거처하는 것을 살펴봄에 충분히 發明하니, 顔回는 어리석지 않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라고 칭찬하였다.
또 〈雍也〉에 “顔回는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仁을 떠나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仁에 이를 뿐이다.[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라고 하시고, 또 뒤이어 말씀하시기를 “어질다, 顔回여.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顔回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顔回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칭찬한 내용이 보인다.
그리고 〈述而〉에는 “孔子께서 顔淵에게 ‘써주면 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시자, 子路가 ‘夫子께서 三軍을 出動(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孔子께서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江河를 건너려 하여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며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成功하는 자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셨다.[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公冶長〉에 “孔子께서 子貢에게 ‘너는 顔回와 더불어 누가 나으냐?’라고 물으시니, 子貢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顔回를 바라겠습니까. 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顔回만 못하다. 나는 네가 그만 못함을 인정한다.’[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라고 보인다. 이처럼 孔子는 顔回가 여러 제자들 가운데 가장 어짊을 여러 자리에서 누누이 강조하셨다.
역주6 昔者……焚滅其書 : 李斯는 楚나라 上蔡 사람으로 荀卿에게서 수학하고 秦나라에 가서 客卿이 되어 法治主義로 始皇帝의 천하통일을 도왔으며, 그 공으로 丞相의 지위에 올랐다. 封建制를 폐지하고 郡縣制를 실시하였으며 문자를 통일하여 小篆을 제정하는 등 왕업의 기초를 닦았으나, 始皇帝가 죽자 간신 趙高의 말을 따라 始皇帝의 詔書를 위조하여 太子 扶蘇와 장군 蒙恬을 죽이고 二世皇帝 胡亥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뒤에 趙高의 모함을 받아 삼족이 멸하였다.
焚滅其書는 秦 始皇 34년(B.C. 213)에 李斯가 秦 始皇에게 秦나라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詩經》․《書經》과 百家의 서적을 불태울 것을 上奏하면서 “오늘날 諸生들이 지금의 것을 스승삼지 않고 옛것을 배워 當世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혼란시키며, 서로 법을 비난하는 것으로 사람을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명령이 새로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각기 자신이 배운 것을 가지고 비판하여, 집에 들어가서는 마음으로 그르다 하고 나와서는 골목에서 모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 군주의 권위가 위에서 내려가고 黨與가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을 금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신은 청컨대 史官이 보관하고 있는 책들 중에 秦나라의 기록이 아니면 모두 불태우고, 博士의 관직을 맡은 자가 아니면서 천하에 《詩經》․《書經》과 百家의 서적을 보관한 자가 있으면 모두 郡의 守와 尉에게 나아가서 모두 불태우며,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詩經》․《書經》을 말하는 자가 있거든 棄市하고 옛날 법을 가지고 지금을 비판하는 자는 三族을 멸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秦 始皇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詩經》․《書經》과 百家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백성들을 우매하게 만들었는데, 李斯의 스승 荀卿의 저작들도 이때 같이 불태워졌다.
역주7 荀卿獨曰……子思孟軻也 : 이 내용은 《荀子》 〈非十二子〉에 보인다.
역주8 荀卿獨曰……堯舜僞也 : 이 내용은 《荀子》 〈性惡〉에 보인다.
역주9 周公之井田 : 井田은 井田法으로, 사방 1里의 농지(900畝)를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해서 8가구의 농민들에게 지급하여 경작하게 하는 법이다. 이때 배분받은 면적은 각 100畝인데 이것이 私田이 되며, 한가운데의 100畝는 公田이라 하여 국가에 바치는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제도는 周 文王 때부터 시행하였는바, 농민들에게 가장 좋은 租稅制度로 알려져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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