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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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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等書 竝長公隨手淋漓者로되 却自瀟灑脫俗하야 可愛하니라
軾啓하노라
五月末 舍弟來하야 得手書하니 勞問甚厚
日欲裁謝 因循至今이러니 하니 感愧益甚이로라
比日履玆初寒 起居何如
寓居粗遣이라
但舍弟初到筠州 卽喪一女子하고 而軾亦喪一老하야 悼念未衰하고 又得鄕信하니 九月中逝去
異鄕衰病 觸目悽感하니 念人命脆弱如此 又承見喩
中間得疾不輕이러니 且喜復健이로라
吾儕漸衰하니 不可復作少年調度하니
當速用道書方士之言하야 厚自養鍊이라
讁居無事 頗窺其一二하고 已借得本州天慶觀道堂三間하니 冬至後 當入此室하야 乃出하리라
自非廢放이면 安得就此리오
太虛他日 一爲仕宦所縻하면 欲求四十九日閒이나 豈可復得耶
當及今爲之하라
但擇平時所謂簡要易行者하야 日夜爲之하되 寢食之外 不治他事 但滿此期하면 根本立矣리라
此後 縱復出從人事라도 事已則心返하야 自不能廢矣리라
此書到日에는 恐已不及이나
然亦不須用冬至也
寄示詩文 皆超然勝絶하야 亹亹焉來逼人矣
如我輩 亦不勞逼也
太虛未免求祿仕하야 方應擧求之 應擧 不可必이니 竊爲君謀컨대 宜多著書 如所示論兵及盜賊等數篇하라
但似此得數十首 皆卓然有可用之實者하니 不須及時事也
但旋作此書라도 亦不可廢應擧 此書若成이면 聊復相示하라
當有知君者리니 想喩此意也리라
公擇 近過此하야 相聚數日하야 說太虛不離口로되 莘老 未嘗得書라하니 知未暇通問이라
須其子履中哀詞하니 軾本自求作이니 今豈可食言이리오
但得罪以來 不復作文字하야 自持頗嚴하니 若復一作이면 則決壞藩墻하야 今後 仍復袞袞多言矣리라
初到黃 廩入旣絶하고 人口不少하니 私甚憂之 但痛自節儉하야 日用 不得過百五十이라
每月朔 便取四千五百錢하야 斷爲三十塊하야 掛屋梁上이라가 平旦 用(盡)[畫]義하야 挑取一塊하고 卽藏去義하고 仍以大竹筒으로 別貯用不盡者하야 以待賓客하니法也
度囊中 尙可支一歲有餘
至時 別作經畫이나 水到渠成하니 不須預慮
以此 胸中 都無一事로라
所居對岸 山水佳絶이라
有蜀人王生 在邑中하야 往往爲風濤所隔하야 不能卽歸하면 則王生 能爲殺鷄炊黍하야 至數日不厭하고
又有潘生者 作酒店하야 棹小舟하고 徑至店下하면 村酒亦自醇釅이요
柑橘椑柿極多하고 大芋長尺餘하야 不減蜀中하며 外縣米斗二十이니 有水路可致
羊肉 如北方하고 猪牛麞鹿 如土하고 魚蟹 不論錢하며
載書萬卷隨行하야 喜借人看하며 黃州曹官數人 皆家善庖饌하야 喜作會하니 太虛視此數事하면 吾事豈不旣濟矣乎
欲與太虛言者無窮이나 但紙盡耳 展讀至此하면 想見掀髥一笑也리라
固吾所畏 其子亦可喜하니 曾與相見否
此中하니 皆云與太虛相熟이라
이러니 適會葬老乳母하야 今勾當作墳하야 未暇拜書
歲晩苦寒 惟萬萬自重하라
一書 託爲達之하노라
夜中微被酒하야 書不成字하니
不罪不罪하라
不宣하노라


08. 진태허秦太虛에게 답한 글
이런 편지는 모두 장공長公이 쉽게 손 가는 대로 쓴 것인데, 아주 깨끗하고 속기俗氣가 없어서 사랑할 만하다.
소식蘇軾은 아뢰노라.
5월말에 사제舍弟가 와서 손수 쓴 편지를 받았는데, 위로의 말과 선물을 보낸 것이 매우 후하였소.
날마다 답장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는데, 체중遞中에 다시 가르치는 편지를 받으니,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 더욱 심하오.
근일 첫 추위에 기거가 어떠하오?
나는 우거寓居하는 몸이 그런대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오.
다만 사제舍弟가 처음 균주筠州에 이르자마자 딸아이를 잃었고, 나 또한 늙은 유모를 잃어서 슬픈 생각이 줄어들지 않으며, 또 고향 소식을 받았는데 당형堂兄중사中舍께서 9월 중에 서거했다고 하오.
타향에서 노쇠하고 병든 몸이 눈에 보이는 것마다 감회가 서글프니, 사람의 목숨이 이와 같이 취약한 것을 생각하게 되오.
또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중간에 병을 얻은 것이 가볍지 않은 것을 알았는데 다시 건강해졌다니, 우선 기쁘오.
우리들은 점점 노쇠해지니, 다시는 소년시절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오.
마땅히 빨리 도가道家의 책과 방사方士의 말을 따라 크게 스스로 수양하고 단련해야 하오.
귀양살이에 일이 없어서 곧 그중 한두 편을 읽어보았고, 이미 본주本州에 있는 천경관天慶觀(도관道觀)의 도당道堂 세 칸을 빌렸으니, 동지冬至 후에 마땅히 이 방에 들어가서 49일이 지나야 비로소 나올 것이오.
만일 폐출되어 쫓겨난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것을 이룰 수 있겠소?
태허太虛가 훗날 일단 벼슬길에 얽매이게 되면 49일의 한가한 틈을 얻으려 해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소?
마땅히 지금 해야 할 것이오.
다만 평상시에 이른바 간략하고 요긴해서 행하기 쉬운 것들을 가려서 밤낮으로 시행하되 잠자고 밥 먹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말아야 하니, 다만 이 기한이 차면 근본이 서게 될 것이오.
이후에 비록 다시 세상에 나가서 인사人事에 종사하더라도 일이 끝나면 마음이 돌아와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을 것이오.
그런데 이 편지가 도착하는 날에는 이미 날짜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오.
그러나 굳이 동지冬至에 할 필요는 없소.
보내준 시문詩文은 내용이 모두 크게 뛰어나서 끊임없이 사람을 핍박하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또한 굳이 핍박받을 필요가 없다오.
태허太虛녹사祿仕를 구함을 면치 못하여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하고자 하나 과거급제는 기필할 수가 없으니, 적이 그대를 위해서 도모하건대, 나에게 보여준 〈논병論兵〉과 〈도적盜賊〉 등 몇 편과 같은 글을 많이 지으시오.
다만 여기서 받은 수십 같은 것은 다 뛰어나서 쓸 만한 실제가 있지만, 굳이 세상일을 언급할 필요는 없소.
다만 곧바로 이런 글을 짓더라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이런 글이 만약 이루어지면 바라건대 다시 보여주오.
마땅히 그대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의 이러한 뜻을 알리라고 생각되오.
이공택李公擇이 근간에 이곳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모여 있으면서 계속하여 태허太虛에 대해 말하였으나 손신로孫莘老는 일찍이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니, 그대가 통문通問할 겨를이 없었음을 알겠소.
정공벽程公闢이 자신의 아들 이중履中애사哀詞를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내가 본래 스스로 지어주겠다고 자청하였으니, 어찌 지금 식언할 수 있겠소?
다만 죄를 얻은 이래로 다시는 문자를 짓지 않고 스스로 몸가짐을 자못 엄격히 하였는데 다시 한 번 글을 짓게 되면 울타리를 트고 담장을 허물게 되어서 지금 이후로 다시 끊임없이 말이 많게 될 것이오.
내가 처음 황주黃州에 부임했을 때에 녹봉이 이미 끊겼고 식구가 적지 않으니, 내심 몹시 근심하여 다만 통렬히 스스로 절약해서 하루의 지출이 1백 50을 넘지 않게 하였소.
매달 초하루에 곧 4천 5백 을 취하여 이를 30개의 덩이로 나누어 들보 위에 걸어놓았다가, 매일 새벽에 그림을 거는 장대를 사용해서 이 가운데 한 덩이를 들어 내리고 곧바로 장대를 감춰버렸으며, 이어서 큰 대통에다가 쓰고 남은 돈을 따로 저장하여 빈객에 대한 비용을 대비하였으니, 이것은 가운로賈耘老의 방법이라오.
이제 주머니 속을 헤아려보건대 아직도 1년 남짓 지탱할 수 있소.
처음 도착했을 적에는 돈이 부족한 것을 염려해서 특별히 경영하였으나, 물이 이르면 도랑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니, 굳이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소.
이 때문에 가슴속에 전혀 한 가지 일도 없다오.
나의 거처로부터 강 맞은편에 있는 무창武昌은 산수가 매우 아름답소.
지방 사람인 왕생王生무창읍武昌邑 가운데에 거주하는데, 내가 왕왕 풍랑에 막혀서 즉시 거처로 돌아오지 못하면 왕생王生이 곧잘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나를 먹이는데 며칠에 이르도록 싫어하지 않소.
반생潘生이라는 자가 번구樊口에 주점을 열고 있어서 작은 배를 노 저어 곧바로 주점 아래에 이르면 시골 술 또한 절로 진하게 익어 맛이 좋다오.
이곳은 밀감과 귤과 돌감과 감이 매우 많고 큰 토란은 길이가 한 자가 넘어서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에 비해 덜하지 않으며, 외현外縣의 쌀은 한 말에 20이어서 값이 싼데 수로水路로 가져 올 수가 있소.
양고기는 북방처럼 흔하고 돼지와 소와 노루와 사슴도 흙처럼 흔하며 물고기와 자라는 굳이 값을 따질 것이 없소.
그리고 기정岐亭감주관監酒官호정지胡定之는 만 권의 서책을 싣고 나를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빌려주어 보게 하며, 황주黃州조관曹官 몇 사람은 모두 집안이 요리를 잘하여 연회하기를 좋아하니, 태허太虛가 이런 몇 가지 일을 본다면 나의 일이 어찌 이미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겠소?
태허太虛와 함께 말하고 싶은 것은 무궁무진하나 다만 종이가 다하니, 펴서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상상하건대 그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바탕 껄껄 웃을 것이오.
자준子駿은 진실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고 그 아들 또한 좋아할 만한데, 한 번 서로 만난 적이 있소?
이곳에 황강소부 장순신黃岡少府 張舜臣이란 자와 그의 형 요신堯臣이 있는데, 모두 말하기를 태허太虛와 서로 친하다고 하오.
아이가 매번 비문批問을 입었었는데, 마침 늙은 유모를 장례葬禮하면서 지금 봉분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여 편지를 올릴 겨를이 없다오.
해가 저물어 몹시 추운데 만만 번 자중하시오.
이단숙李端叔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전달해주기를 부탁하오.
간밤에 가볍게 술 한잔 하였더니 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소.
나무라지 마시오. 나무라지 마시오.
이만 줄이오.


역주
역주1 答秦太虛書 : 이 글은 元豐 3년(1080) 11월 秦太虛에게 보낸 서신인데, 당시 蘇軾은 黃州에 유배 중이었다. 秦太虛는 秦觀(1049~1100)으로 太虛는 그의 字인데 뒤에 少游로 고쳤고 號는 淮海居士이며 揚州 高郵(現 江蘇省 高郵縣) 사람이다. 元豐 8년에 진사로 출사하여 蔡州敎授, 秘書省正字 등을 역임하였다.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으로 이름났으며 蘇門四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역주2 遞中復辱敎 : 遞中은 郵便을 이르며, 辱敎는 상대방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으로 편지를 받았음을 이른다.
역주3 乳母 : 蘇軾의 乳母 任氏로 元豐 3년(1080) 黃州에서 죽었다.
역주4 堂兄中舍 : 堂兄은 從兄이며, 中舍는 관직명으로 太子中舍이다. 堂兄은 蘇軾의 백부인 蘇渙의 맏아들 不欺를 가리킨 것으로 不欺의 字는 子定이며, 벼슬은 太子中舍와 監成都糧料를 지냈다.
역주5 四十九日 : 道敎와 佛敎에서 수련하는 기한이다.
역주6 程公闢 : 程師孟(1015~1092)으로 公闢은 그의 字이며 蘇州 吳縣(現 江蘇省 蘇州) 사람이다. 景祐 원년(1034)에 진사로 출사하여 夔路의 提點刑獄을 역임하는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역주7 賈耘老 : 賈收로 耘老는 그의 字이며, 烏程(現 浙江省 湖州) 사람이다. 詩에 능하고 술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였는데, 蘇軾이 湖州에 있을 적에 가까이 교유하였다. 시집으로 《懷蘇集》이 있다.
역주8 武昌 : 삼국시대 吳나라의 수도였으며 근래에 湖北省의 省都였다. 지금은 漢口, 漢陽과 합쳐져 武漢市가 되어 있다.
역주9 樊口 : 당시에 黃州城과 長江을 두고 마주하던 지역인데 지금은 武漢市에 속해 있다.
역주10 岐亭監酒胡定之 : 岐亭은 鎭의 이름인데 지금의 湖北省 麻城縣 서북쪽에 있었으며, 監酒는 주세를 관리하는 관직명이다. 胡定之는 자세하지 않으나 定之는 그의 字로 보인다.
역주11 子駿 : 鮮于侁으로 子駿은 그의 字이며 閬州(現 四川省 閬中城)사람으로 進士 출신이다. 蘇軾의 知己 가운데 한 사람인데 성품이 독실하고 어질어 湖州에서 蘇軾이 烏臺詩案으로 구속되었을 적에 많은 친구들이 절교하였으나 홀로 蘇軾을 뒷바라지하였다. 그는 神宗 熙寧 연간에 여러 路의 轉運判官을 역임하였는데, 時政을 논하면서 王安石의 新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蘇軾은 그의 글을 평하여 “위로는 국법을 해치지 않고 가운데로는 친척을 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을 괴롭히지 않아 세 가지 어려운 일을 잘 말하였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역주12 黃岡少府張舜臣者 其兄堯臣 : 少府는 관명으로, 唐나라 때에는 縣令을 明府라 하고 縣令의 보좌인 縣丞과 縣尉를 少府라고 칭하였는데, 黃岡少府는 黃岡縣의 보좌의 직책을 예스럽게 표현한 듯하다. 堯臣, 舜臣 형제는 미상이다.
역주13 兒子每蒙批問 : 兒子는 아들을 가리키며, 批問은 편지 가운데 한 句를 들어 안부를 묻는 것을 이른다.
역주14 李端叔 : 李之儀(1038~1117)로 端叔은 그의 字이며 滄州 사람이다. 熙寧 3년에 진사로 출사하였으며, 蘇軾과는 定州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는데 특히 편지글을 잘 써서 蘇軾으로부터 “문장이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다.[入刀筆三昧]”라는 칭찬을 받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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