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等書는 竝長公隨手淋漓者로되 却自瀟灑脫俗하야 可愛하니라
但舍弟初到筠州
에 卽喪一女子
하고 而軾亦喪一老
하야 悼念未衰
하고 又得鄕信
하니 九月中逝去
라
異鄕衰病이 觸目悽感하니 念人命脆弱如此라 又承見喩에
讁居無事
에 頗窺其一二
하고 已借得本州天慶觀道堂三間
하니 冬至後
에 當入此室
하야 乃出
하리라
太虛他日에 一爲仕宦所縻하면 欲求四十九日閒이나 豈可復得耶아
但擇平時所謂簡要易行者하야 日夜爲之하되 寢食之外에 不治他事니 但滿此期하면 根本立矣리라
此後에 縱復出從人事라도 事已則心返하야 自不能廢矣리라
太虛未免求祿仕하야 方應擧求之나 應擧를 不可必이니 竊爲君謀컨대 宜多著書를 如所示論兵及盜賊等數篇하라
但似此得數十首는 皆卓然有可用之實者하니 不須及時事也라
但旋作此書라도 亦不可廢應擧니 此書若成이면 聊復相示하라
公擇이 近過此하야 相聚數日하야 說太虛不離口로되 莘老는 未嘗得書라하니 知未暇通問이라
이 須其子履中哀詞
하니 軾本自求作
이니 今豈可食言
이리오
但得罪以來로 不復作文字하야 自持頗嚴하니 若復一作이면 則決壞藩墻하야 今後에 仍復袞袞多言矣리라
初到黃에 廩入旣絶하고 人口不少하니 私甚憂之라 但痛自節儉하야 日用을 不得過百五十이라
每月朔
에 便取四千五百錢
하야 斷爲三十塊
하야 掛屋梁上
이라가 平旦
에 用(盡)[畫]義
하야 挑取一塊
하고 卽藏去義
하고 仍以大竹筒
으로 別貯用不盡者
하야 以待賓客
하니 此
法也
라
有蜀人王生이 在邑中하야 往往爲風濤所隔하야 不能卽歸하면 則王生이 能爲殺鷄炊黍하야 至數日不厭하고
又有潘生者 作酒店
하야 棹小舟
하고 徑至店下
하면 村酒亦自醇釅
이요
柑橘椑柿極多하고 大芋長尺餘하야 不減蜀中하며 外縣米斗二十이니 有水路可致라
羊肉은 如北方하고 猪牛麞鹿은 如土하고 魚蟹는 不論錢하며
載書萬卷隨行
하야 喜借人看
하며 黃州曹官數人
이 皆家善庖饌
하야 喜作會
하니 太虛視此數事
하면 吾事豈不旣濟矣乎
아
欲與太虛言者無窮이나 但紙盡耳니 展讀至此하면 想見掀髥一笑也리라
이러니 適會葬老乳母
하야 今勾當作墳
하야 未暇拜書
라
이런 편지는 모두 장공長公이 쉽게 손 가는 대로 쓴 것인데, 아주 깨끗하고 속기俗氣가 없어서 사랑할 만하다.
5월말에 사제舍弟가 와서 손수 쓴 편지를 받았는데, 위로의 말과 선물을 보낸 것이 매우 후하였소.
날마다 답장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는데, 체중遞中에 다시 가르치는 편지를 받으니,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 더욱 심하오.
나는 우거寓居하는 몸이 그런대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오.
다만 사제舍弟가 처음 균주筠州에 이르자마자 딸아이를 잃었고, 나 또한 늙은 유모를 잃어서 슬픈 생각이 줄어들지 않으며, 또 고향 소식을 받았는데 당형堂兄인 중사中舍께서 9월 중에 서거했다고 하오.
타향에서 노쇠하고 병든 몸이 눈에 보이는 것마다 감회가 서글프니, 사람의 목숨이 이와 같이 취약한 것을 생각하게 되오.
또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중간에 병을 얻은 것이 가볍지 않은 것을 알았는데 다시 건강해졌다니, 우선 기쁘오.
우리들은 점점 노쇠해지니, 다시는 소년시절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오.
마땅히 빨리 도가道家의 책과 방사方士의 말을 따라 크게 스스로 수양하고 단련해야 하오.
귀양살이에 일이 없어서 곧 그중 한두 편을 읽어보았고, 이미 본주本州에 있는 천경관天慶觀(도관道觀)의 도당道堂 세 칸을 빌렸으니, 동지冬至 후에 마땅히 이 방에 들어가서 49일이 지나야 비로소 나올 것이오.
만일 폐출되어 쫓겨난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것을 이룰 수 있겠소?
태허太虛가 훗날 일단 벼슬길에 얽매이게 되면 49일의 한가한 틈을 얻으려 해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소?
다만 평상시에 이른바 간략하고 요긴해서 행하기 쉬운 것들을 가려서 밤낮으로 시행하되 잠자고 밥 먹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말아야 하니, 다만 이 기한이 차면 근본이 서게 될 것이오.
이후에 비록 다시 세상에 나가서 인사人事에 종사하더라도 일이 끝나면 마음이 돌아와서 자연히 그만둘 수 없을 것이오.
그런데 이 편지가 도착하는 날에는 이미 날짜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오.
보내준 시문詩文은 내용이 모두 크게 뛰어나서 끊임없이 사람을 핍박하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또한 굳이 핍박받을 필요가 없다오.
태허太虛가 녹사祿仕를 구함을 면치 못하여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하고자 하나 과거급제는 기필할 수가 없으니, 적이 그대를 위해서 도모하건대, 나에게 보여준 〈논병論兵〉과 〈도적盜賊〉 등 몇 편과 같은 글을 많이 지으시오.
다만 여기서 받은 수십 수首 같은 것은 다 뛰어나서 쓸 만한 실제가 있지만, 굳이 세상일을 언급할 필요는 없소.
다만 곧바로 이런 글을 짓더라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이런 글이 만약 이루어지면 바라건대 다시 보여주오.
마땅히 그대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의 이러한 뜻을 알리라고 생각되오.
이공택李公擇이 근간에 이곳을 방문하여 며칠 동안 모여 있으면서 계속하여 태허太虛에 대해 말하였으나 손신로孫莘老는 일찍이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니, 그대가 통문通問할 겨를이 없었음을 알겠소.
정공벽程公闢이 자신의 아들 이중履中의 애사哀詞를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내가 본래 스스로 지어주겠다고 자청하였으니, 어찌 지금 식언할 수 있겠소?
다만 죄를 얻은 이래로 다시는 문자를 짓지 않고 스스로 몸가짐을 자못 엄격히 하였는데 다시 한 번 글을 짓게 되면 울타리를 트고 담장을 허물게 되어서 지금 이후로 다시 끊임없이 말이 많게 될 것이오.
내가 처음 황주黃州에 부임했을 때에 녹봉이 이미 끊겼고 식구가 적지 않으니, 내심 몹시 근심하여 다만 통렬히 스스로 절약해서 하루의 지출이 1백 50전錢을 넘지 않게 하였소.
매달 초하루에 곧 4천 5백 전錢을 취하여 이를 30개의 덩이로 나누어 들보 위에 걸어놓았다가, 매일 새벽에 그림을 거는 장대를 사용해서 이 가운데 한 덩이를 들어 내리고 곧바로 장대를 감춰버렸으며, 이어서 큰 대통에다가 쓰고 남은 돈을 따로 저장하여 빈객에 대한 비용을 대비하였으니, 이것은 가운로賈耘老의 방법이라오.
이제 주머니 속을 헤아려보건대 아직도 1년 남짓 지탱할 수 있소.
처음 도착했을 적에는 돈이 부족한 것을 염려해서 특별히 경영하였으나, 물이 이르면 도랑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니, 굳이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소.
이 때문에 가슴속에 전혀 한 가지 일도 없다오.
나의 거처로부터 강 맞은편에 있는 무창武昌은 산수가 매우 아름답소.
촉蜀 지방 사람인 왕생王生이 무창읍武昌邑 가운데에 거주하는데, 내가 왕왕 풍랑에 막혀서 즉시 거처로 돌아오지 못하면 왕생王生이 곧잘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나를 먹이는데 며칠에 이르도록 싫어하지 않소.
또 반생潘生이라는 자가 번구樊口에 주점을 열고 있어서 작은 배를 노 저어 곧바로 주점 아래에 이르면 시골 술 또한 절로 진하게 익어 맛이 좋다오.
이곳은 밀감과 귤과 돌감과 감이 매우 많고 큰 토란은 길이가 한 자가 넘어서 촉蜀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에 비해 덜하지 않으며, 외현外縣의 쌀은 한 말에 20전錢이어서 값이 싼데 수로水路로 가져 올 수가 있소.
양고기는 북방처럼 흔하고 돼지와 소와 노루와 사슴도 흙처럼 흔하며 물고기와 자라는 굳이 값을 따질 것이 없소.
그리고 기정岐亭의 감주관監酒官인 호정지胡定之는 만 권의 서책을 싣고 나를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빌려주어 보게 하며, 황주黃州의 조관曹官 몇 사람은 모두 집안이 요리를 잘하여 연회하기를 좋아하니, 태허太虛가 이런 몇 가지 일을 본다면 나의 일이 어찌 이미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겠소?
태허太虛와 함께 말하고 싶은 것은 무궁무진하나 다만 종이가 다하니, 펴서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상상하건대 그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바탕 껄껄 웃을 것이오.
자준子駿은 진실로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고 그 아들 또한 좋아할 만한데, 한 번 서로 만난 적이 있소?
이곳에 황강소부 장순신黃岡少府 張舜臣이란 자와 그의 형 요신堯臣이 있는데, 모두 말하기를 태허太虛와 서로 친하다고 하오.
아이가 매번 비문批問을 입었었는데, 마침 늙은 유모를 장례葬禮하면서 지금 봉분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여 편지를 올릴 겨를이 없다오.
해가 저물어 몹시 추운데 만만 번 자중하시오.
이단숙李端叔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전달해주기를 부탁하오.
간밤에 가볍게 술 한잔 하였더니 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