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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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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設行人屬國之官 專按越之范蠡, 吳之伍員上立見이니라
天下無事久矣
以天子之仁聖으로 其欲有所立以爲子孫萬世之計 至切也로되 特以爲發而不中節이면 則天下或受其病이라
而太息者 幾年於此矣시니이다
蓋自近歲하시니 而天下皆洗心滌慮하야 以聽朝廷之所爲니이다
然而數年之間 卒未有以大慰天下之望하니 此其故何也
之大憂未去하야 而天下之治 終不可爲也일새니이다
聞之師호니 曰 應敵不暇 不可以自完이요 自完不暇 不可以有所立이라하니이다
自古創業之君 皆有敵國相持之憂하야 命將出師하야 兵交於外로되 而中不失其所以爲國者
其兵可敗 而其國不可動이요 其力可屈이나 而其氣不可奪하니이다
今天下一家 二虜且未動也어늘 而吾君吾相 終日皇皇焉하야 應接之不暇하니 亦竊爲하노이다
是以 歲出金繒數十百萬하야 以資彊虜하니
此其旣往之咎 不可追之悔也어늘 而議者方將深罪當時之失하고 而不求後日之計하니 亦無益矣
臣雖不肖 竊論當今之弊호리이다
蓋古之爲國者 不患有所費하고 而患費之無名하며 不患費之無名하고 而患事之不立하니이다
今一歲而費千萬하니 是千萬而已어니와 事之不立이면 四海且不可保어든 而奚千萬之足云哉잇가
今者 二虜不折一矢하고 不遺一鏃하야 走一介之使하고하면 所過騷然하야 居人爲之不寧이니이다
大抵皆有非常之辭 無厭之求 難塞之請하야 以觀吾之所答이라
於是 朝廷洶然하야 大臣會議하나니 旣而 去未數月 邊陲且復告至矣니이다
由此觀之하면 二虜之使未絶이면 則中國未知息肩之所어든 而況能有所立哉잇가
曰 二虜之大憂未去 則天下之治 終不可爲也라하노이다
非至逸이면 無以待天下之勞 非至靜이면 無以制天下之動이라
是故 古之聖人 雖有大兵役, 大興作하야 百官奔走하야 各執其職이로되 而中書之務 不至於紛紜이러니
今者 曾不得歲月之暇하니 則夫禮樂刑政敎化之源으로 所以使天下回心而嚮道者 何時而議也리잇가
千金之家 久而不治하면 使販夫竪子 皆得執券以誅其所負하나니
苟一朝發憤하야 傾囷倒廩以償之하고 然後 更爲之計하면 則一簪之資 亦足以富하나니 何遽至於皇皇哉잇가
嘗竊怪其以蠻夷之國으로 承敗亡之後하야 救死扶傷之餘 而賂遺費耗 則不可勝計如此
이나 卒以滅吳하니 則爲國之患 果不在費也니이다
彼其內外不相擾 是以 能有所立하야 使二人으로 分國而制之하니이다
范蠡曰 之外 種不如蠡하니 使蠡主之라하야 凡四封之外 所以待吳者 種不知也하고
四封之內 蠡不如種하니 使種主之라하야 凡四封之內 所以彊國富民者 蠡不知也하야
二人者 各專其能하고 各致其力이라
是以 不勞而滅吳하니이다
其所以賂遺於吳者 甚厚而有節也 是以 財不匱하고 其所以聽役於吳者 甚勞而有時也 是以 本不搖하니 然後 句踐 得以安意肆志焉하야 而吳國固在其指掌中矣니이다
今以天下之(人)[大] 而中書常有蠻夷之憂하니 宜其內治有不辦者
臣以爲治天下 不若淸中書之務 中書之務淸이면 則天下之事 不足辦也라하노이다
今夫天下之財 擧歸之하고 天下之獄 擧歸之하고 天下之兵 擧歸之하야 而宰相 特持其大綱하고 聽其治要하야 而責成焉耳 夫此三者 豈少於蠻夷哉리오마는 誠以爲不足以累中書也일새니이다
今之所以待二虜者 失在於過重하니이다
古者 有行人之官하야 掌四方賓客之政하니 當周之盛時하야 하고 蠻夷戎狄 莫不來享이라
行人之官 治其登降揖讓之節 牲芻委積之數而已러니 至於周衰하야는 諸侯爭彊하야 而行人之職 爲難且重하니이다
子朱曰 朱也當御라하니 叔向曰 秦, 晉不和久矣
今日之事 幸而集이면 秦, 晉賴之 不集이면 三軍暴骨이라하니이다
其後 奔吳하야 爲吳行人以謀楚하야 而卒以入郢하니이다
賈誼曰 陛下試以臣爲屬國하시면 請必繫單于之頸而制其命하고而笞其背하야 擧匈奴之衆 惟上所令이라하니이다
今若依倣行人屬國하야 特建一官하야 重任而厚責之호되 使宰相으로之中 擧其可用者하고 而勿奪其權하며 使大司農으로 以每歲所以餽於二虜者 限其常數하야 而豫爲之備하고 其餘者 朝廷不與知也니이다
凡吾所以遣使於虜 與吾所以館其使者 皆得以自擇하고 而其非常之辭 無厭之求 難塞之請 亦得以自答하야 使其議不及於朝廷하고
而其閒暇 則收羅天下之俊才하야 治其戰攻守禦之策하고 兼聽博採하야 以周知敵國之虛實하야 凡事之關於境外者 皆以付之니이다
如此 則天子與宰相 特因其能否하야 而定其黜陟이니 其實不亦甚簡歟잇가
今自宰相以下百官 汎汎焉하야 莫任其責하나니 今擧一人而授之하야 使日夜思所以待二虜하면 宜無不濟者하리니
然後 得以安居靜慮하야 求天下之大計하면 唯所欲爲하야 將無不可者하리이다
爲今日計컨대 只消於兵部中 另立一協部尙書或侍郞하야 專掌北虜之事호되 用邊將하고 理兵餉하고 繕虜墻하며 幷探牒虜情하고 儲養邊材 皆其所掌이며
歲一春則巡邊하고 夏四五月間 則歸復于朝하야 與兵戶二部 相爲筦(管)榷이면 計之善者也니라


02. 책략策略 2
외교를 담당한 행인行人속국屬國을 다스리는 관원을 설치할 것을 주장한 것은 오로지 나라의 범려范蠡나라의 오원伍員을 살펴보고 견해를 세운 것이다.
천하天下가 무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어질고 성스러운 천자天子께서 자손만대의 계책을 세우고자 하신 것이 지극히 간절하셨으나, 다만 일을 시작하면서 절도에 맞지 않으면 천하天下가 혹 그 해를 입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자께서 크게 한숨 쉬신 것이 지금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근년에 처음으로 두서너 명의 대신大臣을 등용하시자, 천하天下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깨끗이 씻고 생각을 바꾸어서 조정朝廷의 하는 바를 따랐습니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끝내 천하天下 사람들의 바람을 크게 위로하지 못하였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큰 걱정거리인 두 오랑캐가 제거되지 못해서 끝내 천하天下를 잘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승에게 들으니, 말씀하기를 “적에게 대응할 겨를이 없으면 스스로 완전할 수가 없고, 스스로 완전할 겨를이 없으면 확립하는 바가 있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창업한 군주들은 모두 적국과 서로 대치하는 우환이 있어서 장수를 임명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군대가 밖에서 교전하였으나 국중國中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군대는 패할 수 있으나 나라는 동요시킬 수 없었고, 힘은 굽힐 수 있으나 기운은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천하天下가 통일되어 한 집안이 되었고 두 오랑캐가 동요하지 않는데도 우리 군주와 정승이 종일토록 경황이 없어서 일을 처리하기에 겨를이 없으시니, 또한 삼가 집사자執事者들을 위하여 취하지 않습니다.
옛날 대신大臣들의 의논은 장구長久한 계책을 세우지 않고 최하의 계책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해마다 금은金銀과 비단 수십 백만을 내어 강성한 오랑캐에게 밑천을 대주었습니다.
이는 이미 지나간 잘못이라서 후회한들 소용이 없는 일인데, 의논하는 자들은 당시의 잘못을 크게 나무라기만 하고 후일의 계책을 강구하지 않으니, 또한 아무 유익함이 없습니다.
이 비록 불초不肖하나 당금當今의 병폐를 논하겠습니다.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재물을 허비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재물을 허비하는데 명분이 없음을 걱정하였으며, 재물을 허비하는데 명분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 일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함을 걱정하였습니다.
지금 한 해에 천만 금을 허비하니 이것은 단지 천만 금을 허비할 뿐이지만, 만일 일이 확립되지 못한다면 사해四海도 보전할 수가 없는데 그까짓 천만 금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두 오랑캐들은 화살 하나 허비하지 않고 화살촉 하나 버리지 않고서 사신使臣 한 명을 보내고 역마 몇 대를 달리면, 우리 중국中國은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소란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 때문에 편안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모두 포악하고 무례한 비상非常한 말과 끝없는 요구와 부응하기 어려운 요청을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는 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에 조정朝廷이 흉흉하여 대신大臣들이 회의를 하지만, 오랑캐 사신이 떠난 지 몇 개월이 안 되어 변방에서는 또다시 오랑캐 사신이 왔다고 보고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두 오랑캐의 사신이 끊이지 않는다면 우리 중국中國이 편안히 어깨를 쉴 곳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확립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은 이 때문에 큰 근심거리인 두 오랑캐를 제거하지 못하면 끝내 천하天下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서성中書省왕정王政이 말미암아 나오는 곳이니, 천자天子재상宰相과 함께 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기관으로서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합니다.
지극한 편안함이 아니면 천하天下의 수고로움을 대비할 수가 없고, 지극한 고요함이 아니면 천하天下함을 제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 성인聖人들은 비록 큰 전쟁과 큰 공사가 있어서 백관百官들이 분주하게 각각 직책을 수행하더라도 중서성中書省의 임무는 간략하여 어지러운 데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 한 해와 한 달의 여가도 얻지 못하니, 그렇다면 교화敎化의 근원인 예악禮樂형정刑政으로서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려 를 향하게 하는 것을 어느 때에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천금千金을 소유한 부잣집이 오랫동안 재산을 다스리지 못하면 물건을 파는 지아비와 형편없는 자들이 모두 문권文券을 가지고 와서 빚 독촉을 할 것입니다.
이때 만일 부잣집에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창고를 기울이고 곳간을 털어서 빚을 갚고 그런 뒤에 다시 계책을 세운다면, 비녀 하나의 적은 밑천으로도 충분히 다시 집안을 부유하게 할 수 있으니, 어찌 대번에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 데에 이르겠습니까?
이 일찍이 《사기史記》의 〈오월세가吳越世家〉를 읽어보니, 월왕 구천越王 句踐회계산會稽山에서 곤궁하여 나라와 화친을 맺을 적에 뇌물로 바친 과 여자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고, 나라로 돌아와서는 나라의 온갖 부역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대부大夫의 딸을 나라의 대부大夫에게 시집보내고 의 딸을 나라의 에게 시집보냈으며, 봄과 가을의 공물貢物나라 창고에 바치는 것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은 일찍이 나라가 오랑캐 나라로서 패전한 뒤를 이어서 죽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부상한 자들을 부축한 끝에 뇌물로 소비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이 이와 같음을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끝내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나라의 병폐가 되는 것은 과연 재물을 소비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국내와 국외가 소요騷擾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확립한 바가 있어서 범려范蠡대부 문종大夫 文種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범려范蠡는 말하기를 “사방 국경의 밖을 다스리는 일은 문종文種이 나만 못하니, 나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야 한다.” 하고는 국경의 밖에서 나라에 대응하는 일을 자신이 도맡아 문종文種은 알지 못하였고,
“사방 국경의 안을 다스리는 일은 내가 문종文種만 못하니, 문종文種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야 한다.” 하고는 국경의 안에서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을 문종文種이 도맡아 범려范蠡는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재능을 오로지 쓰고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도 나라를 멸망시켰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라에 뇌물로 바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절도가 있었기 때문에 재물이 고갈되지 않았고, 나라에게 사역을 당한 것이 매우 수고로웠으나 적당한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근본(백성)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런 뒤에야 구천句踐이 마음을 편안히 하고 뜻을 펴서 나라가 진실로 그의 손바닥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천하天下의 큰일을 맡고 있는 중서성中書省으로서 항상 오랑캐를 걱정하고 있으니, 내치內治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은 생각하건대 ‘천하天下를 잘 다스리려면 중서성中書省의 임무를 줄여서 깨끗이 하는 것만 못하니, 중서성中書省의 임무가 줄어서 깨끗해지면 천하天下의 일을 굳이 다스릴 것이 없다.’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천하天下재정財政을 모두 사농司農에게 돌리고 천하天下옥사獄事를 모두 정위廷尉에게 돌리고 천하天下병사兵事를 모두 추밀원樞密院에 돌려서, 재상宰相은 다만 큰 강령綱領만 잡고 정치의 요체만을 다스려서 성공을 책임지울 뿐이니, 이 세 가지가 어찌 만이蠻夷를 대응하는 것보다 하찮은 일이 되겠습니까마는 진실로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중서성中書省을 옭아매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 두 오랑캐를 대응하는 방법은 중서성中書省의 임무가 지나치게 편중됨에 그 잘못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행인行人이라는 관직이 있어서 사방 빈객賓客(외교 사신)의 정사를 관장하였으니, 나라의 전성기에는 제후諸侯들이 사방에서 조회朝會 오고 만이蠻夷융적戎狄이 와서 공물을 바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행인行人이라는 관직은 그저 계단을 오르내리고 읍하고 사양하는 예절과 이들에게 공급하는 희생犧牲과 꼴과 위적委積(곡식 등의 물자)의 숫자만을 다스렸을 뿐이었는데, 나라가 쇠함에 이르러는 제후諸侯들이 강성함을 다투어서 행인行人의 직책이 수행하기 어렵고 또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춘추시대에 나라가 나라에 빙문 오자, 숙향叔向행인 자원行人 子員을 부르라고 명하였습니다.
자주子朱가 말하기를 “제가 담당할 차례입니다.”라고 하자,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나라와 우리 나라가 불화한 지 오래되었다.
오늘의 빙문하는 일이 다행히 잘되면 나라와 우리 나라가 모두 유익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삼군三軍이 싸워 군사들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라의 오원伍員나라로 도망가서 나라의 행인行人이 되어 나라를 도모한 결과, 끝내 나라의 군대는 나라의 수도인 땅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한西漢이 일어날 적에 속국을 다스리는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가 말하기를 “폐하陛下께서 한 번 을 속국을 다스리는 관원으로 임명하신다면, 청컨대 반드시 선우單于의 목에 올가미를 매어서 그의 목숨을 제재하고 중항열中行說을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매질하며 온 흉노匈奴의 무리를 들어 오직 황상께서 명령하는 대로 따르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만약 옛날 행인行人과 속국을 다스리던 제도를 따라 특별히 한 관직을 두어서 임무를 중하게 하고 책임을 무겁게 하되, 재상宰相으로 하여금 양제兩制 가운데에서 등용할 만한 자를 가려 등용하고 그 권한을 빼앗지 말게 하며, 대사농大司農으로 하여금 매년 두 오랑캐에게 주는 재물을 일정한 액수로 제한하여 미리 대비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조정朝廷에서 관여하여 따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쪽에서 오랑캐에게 보내는 사신과 우리쪽에서 오랑캐 사신을 접대하는 자들을 모두 이들이 스스로 가려서 쓰게 하고, 오랑캐의 포악하고 무례한 비상非常한 말과 끝없는 요구와 부응하기 어려운 요청을 또한 이들이 스스로 대응하게 하여, 하여금 그 의논이 조정朝廷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로운 때에는 천하天下준걸俊傑스러운 인재들을 거두어 망라해서 싸우고 공격하고 수비하고 방어하는 대책을 세우게 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듣고 널리 채택해서 적국의 허실을 두루 알게 해서 국경 밖에 관계되는 모든 일들을 다 이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천자天子재상宰相은 다만 그들의 능함과 능하지 못함을 따라서 내칠 것인가 승진시킬 것인가만 정할 뿐이니, 그 실제는 매우 간략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재상宰相으로부터 이하 백관百官들이 무관심하여 그 책임을 맡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 한 사람을 들어서 그에게 오랑캐를 대비하는 일을 전담시켜 밤낮으로 두 오랑캐를 대비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면 마땅히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편안히 거처하고 고요히 생각해서 천하天下의 큰 계책을 강구한다면 오직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되어서 장차 불가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을 위해 계책을 세우건대, 다만 모름지기 병부兵部 안에 별도로 한 협부상서協部尙書협부시랑協部侍郞을 세워서 오로지 북쪽 오랑캐의 일을 관장하게 하되, 변방의 장수를 등용하고 군량을 다스리고, 오랑캐를 막는 장벽을 수리하고 아울러 오랑캐의 실정을 정탐해서 문서로 보고하며 변방의 인재를 모아 기르는 것을 모두 이들이 관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마다 한 번 봄에 변경을 순행하고 여름 4, 5월 사이에는 다시 조정朝廷으로 돌아와서 병부兵部호부戶部와 서로 상의하게 한다면, 아마 계책 중에 좋은 것일 것이다.


역주
역주1 策略 二 : 이 글은 仁宗 嘉祐 6년(1061)에 蘇軾이 올린 〈策略〉 5편 가운데 두 번째 편이다.
역주2 當宁 : 天子의 자리를 이르는데, 후대에는 今上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禮記》 〈曲禮 下〉에 “天子가 宁(문 가리개)를 마주하여 서 있으면 諸公은 東向을 하고 諸侯는 西向하여 뵙는 것을 ‘朝’라 한다.[天子 當宁而立 諸公東面 諸侯西面 曰朝]”라고 보이는데, 疏에 “宁는 《爾雅》에 ‘門屛의 사이를 宁라 이르니, 君主가 조회 볼 적에 기다리며 서 있는 곳이다.’ 하였으니, 諸侯가 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기 때문에 ‘宁를 마주하여 서 있다.’고 말한 것이다.[宁者 爾雅云 門屛之間 謂之宁 人君視朝所宁立處 蓋竚立以待諸侯之至 故云當宁而立也]”라고 하였다.
역주3 柄用二三大臣 : 柄用은 政權을 맡겨 등용함을 이른다. 仁宗 慶曆 연간에 范仲淹, 韓琦, 富弼 등을 발탁하여 政事를 개혁한 일을 이르는데, 이를 慶曆新政이라 한다.
역주4 二虜 : 遼와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5 執事者不取 : 執事는 본래 측근에서 신변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이르는데, 옛날에는 상대방을 직접 호칭하는 것을 결례라고 생각하고, 執事 또는 左右라고 호칭하여 공경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여기서는 執政大臣을 이르나 실제는 황제를 가리킨 것이다.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게 여김을 이른다.
역주6 昔者大臣之議……歲出金繒數十百萬以資彊虜 : 眞宗 景德 원년(1004) 윤9월에 遼나라(契丹)의 聖宗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大臣인 寇準은 眞宗에게 직접 정벌할 것을 권하여 眞宗이 澶淵에 행차하여 독전하였다. 이에 사기가 오른 宋나라의 군대가 11월에 李繼隆 등의 지휘 아래 遼나라의 大將을 사살하고 크게 승리하자, 遼나라가 두려워하여 講和를 요청하였다. 평소에 전쟁을 싫어하던 眞宗이 은밀하게 遼나라와 회담하여 12월에 결국 강화를 맺으니, 바로 ‘澶淵의 맹약’이다. 이 맹약에서 宋나라는 매년 遼나라에게 歲幣로 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주기로 하고 아울러 遼나라 군대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戰況이 宋나라에 유리하였는데도 강화에 급급하여 불리한 조건으로 강화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數乘之傳 : 乘은 수레 한 대이고, 傳은 파발마로 몇 대의 역마를 이른다.
역주8 中書者……天子之所與宰相論道經邦 : 宋代에는 樞密院은 軍務를 관장하였고 나머지 조정의 모든 政務는 中書省에서 관장하였다. 그러므로 中書省의 長인 ‘同中書門下平章事’는 바로 재상을 지칭하였다.
역주9 臣嘗讀吳越世家……不絶於吳府 : 〈吳越世家〉는 《史記》의 〈吳泰伯世家〉와 〈越王句踐世家〉를 합칭한 것으로, 句踐은 越王 句踐을 이른다. 그는 B.C. 495년에 吳王 夫差와 싸워 대패하고는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會稽山으로 들어가 죽음을 각오하고 농성하였는데, 대부 文種의 계책을 따라 吳나라 太宰 伯嚭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였다.
越나라로 돌아온 句踐은 吳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겨 吳나라의 온갖 부역에 자청하여 종사하였으며 해마다 貢物을 바쳤으나 속으로 절치부심하여 쓸개를 씹으며 올바른 정사를 펴서 나라의 중흥을 이루어 마침내 吳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업을 이룩하였다. 會稽는 會稽山으로 지금의 浙江省 紹興縣 동남쪽에 있다.
역주10 范蠡大夫種 : 范蠡는 越王 句踐을 보필한 유명한 정치가이자 정략가로 字가 少伯이다. 越나라가 吳나라에게 패한 이후 句踐을 도와 각고의 노력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결국 吳나라를 멸망시켰다. 范蠡는 吳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越나라를 떠나 齊나라에 가서 姓名을 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수천만금이나 모았으나 齊나라에서 그를 정승으로 삼으려 하자 齊나라를 떠났다. 그 후 陶 지방에 가서 스스로 陶朱公이라 이름하고 농업과 무역에 종사하면서 끝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大夫 文種은 字가 子禽이며 본래 楚나라 郢 땅 출신인데 越나라에 등용되어 대부가 되었다. 뛰어난 정치력으로 范蠡와 함께 越王 句踐을 보필하여 吳나라와의 전쟁으로 멸망 직전에 몰린 越나라를 구하고, 끝내 吳王 夫差를 패망시켜 句踐을 霸者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句踐의 곁을 떠나라는 范蠡의 권유를 듣지 않고 越나라에 남아 있다가, 의심이 많은 句踐에게 반역의 누명을 쓰고 자결하였다.
역주11 四封 : 국가의 사방 국경을 이른다. 인신하여 四封之內는 국내의 政務를 이르며 四封之外는 국가의 대외적인 外交와 國防을 이른다.
역주12 司農 : 원래는 大司農으로 국가의 모든 재정을 관장하는 戶部를 가리켰으나, 후대에는 기구가 축소되어 賦稅로 거둔 미곡을 저장하고 창고를 관리하며 京官의 祿米를 제공하는 일을 관장하고 司農寺라고 칭하였는데, 장관은 司農寺卿이다. 그러나 여기에 “天下의 재정을 모두 司農에게 돌린다.”라고 말한 것과 뒤에 ‘大司農’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면 大司農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
역주13 廷尉 : 刑獄과 司法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직으로 그 長官을 後代에는 大理寺卿이라고도 불렸다.
역주14 樞密 : 樞密院으로 中書省과 함께 兩府라고도 칭하는데, 軍務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였는바, 장관은 樞密使이다.
역주15 諸侯四朝 : 四方의 제후들이 天子에게 조회하는 것을 말한다. 《書經》 〈虞書 舜典〉에 “天子가 5년에 한 번 순수하면 여러 제후는 네 번 조회하니, 펴서 아뢰기를 말로써 하며 밝게 시험하기를 功으로써 하며 수레와 의복으로 功을 표창하였다.[五載一巡守 群后四朝 敷奏以言 明試以功 車服以庸]”라고 하였는데, 蔡沈의 《書經集傳》에 “5년 안에 天子가 巡守하는 것이 한 번이고 제후가 來朝하는 것이 네 번이니, 순수한 다음 해에는 東方의 제후가 天子國에 내조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南方의 제후가 내조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西方의 제후가 내조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北方의 제후가 내조하며 또 그 다음 해에는 天子가 다시 순수하니, 이는 天子와 제후가 비록 尊卑의 구분이 있으나 한 번 가고 한 번 와서 禮에 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역주16 春秋時秦聘於晉……三軍暴骨 : 叔向은 晉나라 平公의 대부인 羊舌肸의 字이며, 子員과 子朱는 모두 晉나라 대부들이다. 當御는 지금의 當直과 같은 말로 자신이 외교 임무를 담당할 차례가 되었음을 강조한 말이다. 三軍暴骨은 장차 전쟁이 일어나, 군사들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굴 것이란 말이다.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26년에 보인다. 이해 봄에 秦나라 임금의 아우 鍼이 襄公 24년에 양국이 맺은 맹약을 다지기 위해 晉나라에 왔는데, 이 일을 중시한 叔向이 行人의 순번을 바꿔 사심이 없는 子員에게 사신을 응대하는 行人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역주17 伍員 : 楚 平王 때 사람으로 자가 子胥이다. 아버지 伍奢가 平王의 太子 建의 스승이었는데, 태자와 사이가 나쁜 費無忌가 태자를 모함하면서 伍奢를 참소하여 큰 아들 伍尙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에 伍員은 吳나라로 도망하여 당시 공자 신분이던 闔閭를 도와 吳王 僚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한 다음 行人으로 등용되었다. 뒤에 伍員은 孫武와 함께 楚나라를 다섯 번 공격한 끝에 楚나라의 수도인 郢에 들어가서 平王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에 채찍질하여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하였다.
역주18 西劉之興 有典屬國 : 西劉는 前漢을 가리킨다. 前漢은 서쪽인 長安에 도읍하여 西漢이라고 칭하고 後漢은 동쪽인 洛陽에 도읍하여 東漢이라고 칭하였으며, 황제의 姓이 劉氏이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典屬國은 소수민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직으로 秦나라 때 처음 설치하였다.
역주19 中行說 : 漢 文帝 때의 환관으로 성이 中行이고 이름이 說이다. 文帝가 흉노와의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막 즉위한 稽粥單于에게 公主를 시집보냈는데, 이때 宦者인 中行說로 하여금 공주를 수행하게 하였다.
中行說은 흉노에 가는 것을 싫어하여 말하기를 “내가 그곳에 가면 반드시 漢나라를 배반하여 漢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中行說은 흉노에 가자마자 漢나라를 배반하고 單于에게 항복하여 漢나라의 은밀한 일을 다 말해주어 漢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史記 匈奴傳》
역주20 兩制 : 宋代에는 翰林學士와 知制誥를 이렇게 칭하였다. 황제의 명령을 ‘制’라 하여, 翰林學士는 內制를 관장하고 知制誥는 外制를 관장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영재들로 충원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翰林學士나 知制誥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하여 변방의 일을 전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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