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以利使臣이면 則其臣皆小人也니 幸而得其人이라도 亦不過健於才而薄於德者也요 君以禮使臣이면 則其臣皆君子也니 不幸而非其人이라도 猶不失廉恥之士也라
其臣皆君子면 則事治而民安하고 士有廉恥면 則臨難에 不失其守하나니 小人은 反是라
禮는 以欽爲主하니 宜若近於弱이나 然而服暴者는 莫若禮也요 禮는 以文爲飾하니 宜若近於僞나 然而得情者는 莫若禮也니라
定公이 問君使臣하고 臣事君호되 如之何잇고한대 孔子曰 君使臣以禮하며 臣事君以忠이라하시니
以爵祿而至者는 貪利之人也니 利盡則逝矣요 以刑罰而用之者는 畏威之人也니 威之所不及則解矣라
故로 莫若以禮하니 禮者는 君臣之大義也니 無時而已也니라
然이나 恣慢而侮人하야 洗足箕踞하고溺冠跨項하니 可謂無禮矣라
靑雖富貴
나 不改奴僕之姿
하고 而
어늘 武帝能禮之
로되 而不能用
하니 可以太息矣
니라
10. 군주君主가 신하臣下 부리기를 예禮로써 해야 한다는 데에 대한 논論
군주가 신하를 이익利益으로 부리면 신하들이 모두 소인小人이 되니, 다행히 훌륭한 사람을 얻더라도 재주에는 뛰어나나 덕에는 부족한 자에 불과할 뿐이요, 군주가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면 신하들이 모두 군자君子가 되니, 불행히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염치廉恥를 아는 선비를 잃지는 않는다.
신하가 모두 군자君子이면 정사가 잘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선비가 염치廉恥가 있으면 환난患難을 만나도 평소의 지조를 잃지 않는데, 소인小人은 이와 반대이다.
예禮는 공경을 위주로 하니 마땅히 나약함에 가까울 듯하나 포악한 자를 복종시키는 것은 예禮만 한 것이 없으며, 예禮는 문식文飾하여 꾸미니 마땅히 거짓에 가까울 듯하나 실정을 얻는 것은 예禮만 한 것이 없다.
정공定公이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기기를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군주는 신하를 예禮로써 부려야 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忠誠으로써 섬겨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군주에게는 작록爵祿과 형벌刑罰이 있지 않은가?
어찌하여 오로지 예禮로써 신하를 부려야 하는가?
작록爵祿을 취하려고 온 자는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니 이익이 다하면 떠나가고,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여 쓰여지는 자는 위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위엄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해이해진다.
그러므로 예禮로써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예禮는 군주와 신하의 큰 의義로 어느 때이든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고조漢 高祖가 신무神武함으로 천하天下를 얻었으니, 인물을 얻은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조高祖는 평소 행실이 교만방자하고 사람들을 무시해서 발을 씻으면서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 선비를 만나보고, 선비의 관冠에 오줌을 누고 목을 짓밟았으니, 무례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므로 진평陳平이 고조高祖의 신하들을 논하기를 “모두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가 없는 자들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들과 함께 진취進取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수성守成에 이르러서는 위태롭다.
고조高祖가 말년에 숙손통叔孫通과 육가陸賈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그 화禍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여후呂后의 세상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맹약을 저버리고 여러 여씨呂氏들을 왕王으로 봉하여 유씨劉氏를 거의 위태롭게 한 것은 염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한 무제漢 武帝가 평상에 걸터앉아서 위청衛靑을 만나보았으나, 관冠을 쓰지 않고서는 급암汲黯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위청衛靑은 비록 부귀富貴하였으나 황제 앞에서 노복奴僕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급암汲黯은 사직社稷의 신하였는데도 무제武帝가 능히 예禮로 대하였으나 등용하지는 못하였으니, 크게 탄식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