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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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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亦正大하니라
君以利使臣이면 則其臣皆小人也 幸而得其人이라도 亦不過健於才而薄於德者也 君以禮使臣이면 則其臣皆君子也 不幸而非其人이라도 猶不失廉恥之士也
其臣皆君子 則事治而民安하고 士有廉恥 則臨難 不失其守하나니 小人 反是
先王謹於禮하시니라
以欽爲主하니 宜若近於弱이나 然而服暴者 莫若禮也 以文爲飾하니 宜若近於僞 然而得情者 莫若禮也니라
定公 問君使臣하고 臣事君호되 如之何잇고한대 孔子曰 君使臣以禮하며 臣事君以忠이라하시니
不有爵祿刑罰也乎
何爲其專以禮使臣也
以爵祿而至者 貪利之人也 利盡則逝矣 以刑罰而用之者 畏威之人也 威之所不及則解矣
莫若以禮하니 禮者 君臣之大義也 無時而已也니라
漢高祖以神武 取天下하니 其得人 可謂至矣
이나 恣慢而侮人하야 洗足箕踞하고溺冠跨項하니 可謂無禮矣
하야 幾危劉氏 以廉恥不足故也니라
靑雖富貴 不改奴僕之姿하고어늘 武帝能禮之로되 而不能用하니 可以太息矣니라


10. 군주君主신하臣下 부리기를 로써 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의논이 또한 정대正大하다.
군주가 신하를 이익利益으로 부리면 신하들이 모두 소인小人이 되니, 다행히 훌륭한 사람을 얻더라도 재주에는 뛰어나나 덕에는 부족한 자에 불과할 뿐이요, 군주가 로써 신하를 부리면 신하들이 모두 군자君子가 되니, 불행히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염치廉恥를 아는 선비를 잃지는 않는다.
신하가 모두 군자君子이면 정사가 잘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편안하고, 선비가 염치廉恥가 있으면 환난患難을 만나도 평소의 지조를 잃지 않는데, 소인小人은 이와 반대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를 삼가신 것이다.
는 공경을 위주로 하니 마땅히 나약함에 가까울 듯하나 포악한 자를 복종시키는 것은 만 한 것이 없으며, 문식文飾하여 꾸미니 마땅히 거짓에 가까울 듯하나 실정을 얻는 것은 만 한 것이 없다.
정공定公이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기기를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군주는 신하를 로써 부려야 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忠誠으로써 섬겨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군주에게는 작록爵祿형벌刑罰이 있지 않은가?
어찌하여 오로지 로써 신하를 부려야 하는가?
작록爵祿을 취하려고 온 자는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니 이익이 다하면 떠나가고,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여 쓰여지는 자는 위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위엄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해이해진다.
그러므로 로써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는 군주와 신하의 큰 로 어느 때이든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고조漢 高祖신무神武함으로 천하天下를 얻었으니, 인물을 얻은 것이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조高祖는 평소 행실이 교만방자하고 사람들을 무시해서 발을 씻으면서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 선비를 만나보고, 선비의 에 오줌을 누고 목을 짓밟았으니, 무례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므로 진평陳平고조高祖의 신하들을 논하기를 “모두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가 없는 자들이다.”라고 한 것이니, 이들과 함께 진취進取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수성守成에 이르러서는 위태롭다.
고조高祖가 말년에 숙손통叔孫通육가陸賈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그 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여후呂后의 세상에 진평陳平주발周勃이 맹약을 저버리고 여러 여씨呂氏들을 으로 봉하여 유씨劉氏를 거의 위태롭게 한 것은 염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한 무제漢 武帝가 평상에 걸터앉아서 위청衛靑을 만나보았으나, 을 쓰지 않고서는 급암汲黯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위청衛靑은 비록 부귀富貴하였으나 황제 앞에서 노복奴僕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급암汲黯사직社稷의 신하였는데도 무제武帝가 능히 로 대하였으나 등용하지는 못하였으니, 크게 탄식할 만한 일이다.


역주
역주1 君使臣以禮 : 이 글의 제목은 《論語》 〈八佾〉의 “定公이 ‘군주가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군주를 섬김에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 ‘군주는 신하를 부리기를 禮로써 하고, 신하는 군주를 섬기기를 충성으로써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라는 말에서 나왔다. 蘇軾은 이 글에서 ‘君使臣以禮’의 중요성에 대해 이론적 측면뿐 아니라 실천적 측면까지 모두 논파하고 있다.
역주2 陳平論其臣……至於守成則殆矣 : 陳平(?~B.C. 178)은 陽武縣 戶牖 사람으로 前漢의 謀士이며 名相이다. 漢 高祖를 도와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며 呂后 때에 丞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呂氏들을 평정하고 文帝를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에 “陳平이 高祖에게 아뢰기를 ‘大王께서는 오만하고 예의가 없으시니, 청렴하고 절조가 있는 선비들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大王께서는 능히 사람들에게 爵位와 食邑을 넉넉히 내리시니, 선비 중에 완고하고 이익을 좋아하며 염치가 없는 자들이 또한 漢나라에 많이 귀의하였습니다.’라고 했다.[今大王慢而少禮 士廉節者不來 然大王能饒人以爵邑 士之頑鈍嗜利無恥者亦多歸漢]”라고 보인다.
‘以是進取可也 至於守成則殆矣’는 叔孫通의 “儒者들은 진취하기는 어려우나 더불어 守成은 할 수 있다.[儒者 難於進取 可與守成]”라는 말을 뒤집어 쓴 듯하다.
역주3 高帝晩節……豈可勝言哉 : 叔孫通은 漢나라 초기의 유학자로 薛 땅 사람이다. 秦나라의 博士였으나 陳勝과 吳廣의 반란이 일어나자 귀향하였다가 뒤에 高祖에게 귀순하였다. 高祖가 秦나라의 번거로운 의식을 모두 없애고 간소화시키니, 신하들이 조정에서 술을 마시고 떠들며 자신의 功을 자랑하다가 칼을 뽑아 기둥을 치는 등 기강이 매우 문란해졌다. 高祖가 이를 근심하자, 叔孫通이 “儒者들은 진취하기는 어려우나 더불어 守成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설득하여 儀禮의 제정을 건의하였다. 이에 유학자들을 시켜 의례를 제정하고 이를 시행하자, 비로소 신하들의 기강이 확립되었다. 《史記 叔孫通列傳》
陸賈(B.C. 240~B.C. 170)는 楚나라 사람으로 외교가이자 문장가이다. 陸賈가 高祖에게 《詩經》과 《書經》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주 말하자, 高祖가 화를 내며 “내가 馬上에서 天下를 얻었는데 어찌 詩․書를 일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陸賈는 “폐하께서는 馬上에서 天下를 얻었지만 어찌 馬上에서 天下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간언하였다. 高祖가 “한번 나를 위하여 秦나라가 天下를 잃은 이유와 내가 天下를 얻은 까닭과 古今에 성공하고 실패한 나라의 사실들을 기록하여 책을 지으라.”라고 명하자, 陸賈는 모두 12편의 책을 지어 흥망성쇠의 원인을 밝혔는데, 한 편을 지어 올릴 때마다 高祖가 번번이 “내용이 좋다.”고 감탄하고 책 이름을 《新語》라 하였다. 《史記 陸賈列傳》
馬上은 말 위란 뜻으로 武勇을 이른다. 叔孫通과 陸賈 두 사람은 儒學者로서 高祖로 하여금 天下를 다스림에 있어 儀禮와 學問의 중요성을 알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呂后之世 平勃背約而王諸呂 : 呂后는 高祖의 皇后로 이름이 雉이다. 자신의 아들인 惠帝가 죽고 太子가 섰으나 나이가 어리자 垂簾聽政하면서 친정 조카인 呂台, 呂産, 呂祿과 呂台의 아들 呂通을 王으로 봉하고, 또 詔命을 내려 少帝를 폐위하고 다시 常山王을 세웠으며, 이외에도 趙王 如意 등 高祖의 자손들을 많이 살해하였다.
陳平은 呂后 당시에 丞相으로 있었으며, 周勃(B.C. 240~B.C. 169)은 沛縣 사람인데 前漢 초기의 명장이자 개국공신으로 高祖에 의해 絳侯로 봉해져 흔히 絳侯 周勃로 불리는데, 呂后 당시에 軍權을 책임지는 太尉로 있었다. 高祖가 생전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白馬를 잡아놓고 ‘劉氏가 아니면서 王이 된 자가 있으면 天下가 함께 토벌한다.’라고 맹약하였다. 그러나 丞相 陳平과 太尉 周勃은 呂后가 呂氏들을 왕으로 봉하였는데도 이를 막으려 들지 않았으므로 ‘背約’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5 武帝踞厠而見衛靑 不冠不見汲黯 : 衛靑은 前漢 武帝 때의 명장으로 字가 中卿이며 平陽 사람인데 원래 鄭氏였으나 어머니의 성을 따라 衛氏가 되었다. 어려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신분이 몹시 비천하였으나 武帝의 侍從이 되어 총애를 받아 장군이 되고 匈奴 정벌의 선봉에 서서 많은 공을 세워 長平侯에 봉해졌다. 汲黯(?~B.C. 112)은 武帝 때의 명신으로 字가 長孺이며 濮陽 사람이다. 武帝에게 직간을 잘하여 武帝가 어렵게 여겼다.
《史記》 〈汲鄭列傳〉에 “대장군 衛靑은 때로 궁중에서 모실 적에 上(武帝)이 평상에 걸터앉아서 만나보았고, 丞相 公孫弘이 사사로이 뵐 적에 上이 혹 때로 冠을 쓰지 않았으나, 汲黯을 만나볼 적에는 上이 冠을 쓰지 않으면 만나보지 않았다. 上이 일찍이 武帳 가운데에 앉아 있었는데, 汲黯이 앞으로 와서 일을 아뢰려 하자, 上이 冠을 쓰지 않고 있다가 멀리서 汲黯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는 장막 안으로 피하고 사람을 시켜 그가 아뢴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으니, 황제로부터 공경과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大將軍靑時侍中 上踞厠而視之 丞相弘燕見 上或時不冠 至如黯見 上不冠不見 上嘗坐武帳中 黯前奏事 上不冠 望見黯 避帷中 使人可其奏 其見敬禮如此]”라고 보인다. 武帳은 軍幕을 이른다.
역주6 黯社稷臣也 : 社稷臣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로, 《孟子》 〈盡心 上〉에 “社稷을 편안히 하려는 신하가 있으니, 社稷을 편안히 함을 기쁨으로 삼는 자이다.[有安社稷臣者 以安社稷爲悅者也]”라고 보인다.
《史記》 〈汲鄭列傳〉에 “汲黯이 병이 많자, 莊助가 그를 위하여 告暇(病暇)를 청하였는데, 上이 ‘汲黯은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莊助가 대답하기를 ‘만일 汲黯이 관직을 맡아 관청에 있으면 남보다 나을 것이 없으나, 어린 군주를 보필하여 守成함에 이르러서는 의지가 깊고 견고해서, 다른 사람이 불러도 오지 않고 내쳐도 떠나가지 않을 것이니, 비록 스스로 孟賁과 夏育과 같은 勇士라고 말하더라도 또한 그의 마음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옛날에 社稷의 신하가 있었는데, 汲黯에 이르러는 이에 가깝도다.’라고 하였다.[黯多病 莊助爲請告 上曰 汲黯何如人哉 助曰 使黯任職居官 無以踰人 然至其輔少主守成 深堅 招之不來 麾之不去 雖自謂賁育 亦不能奪之矣 上曰 然 古有社稷之臣 至如黯 近之矣]”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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