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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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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8. 유개劉愷정홍丁鴻이 누가 더 어진가 하는
行文 勝小蘇
글을 쓴 것이 소소小蘇(소철蘇轍)보다 낫다.
君子之爲善 非特以適己自便而已
군자君子선행善行을 하는 것은 다만 자신에게 맞고 스스로 편리하게 할 뿐이 아니다.
其取於人也 必度其人之可以與我也하고 其予人也 必度其人之可以受於我也하나니 我可以取之로되 而其人不可以與我 君子不取하고 我可以予之로되 而其人不可受 君子不予
남에게서 취할 적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나에게 줄 만한가를 헤아려보고, 남에게 줄 적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나에게서 받을 만한가를 살펴보니, 내가 취할 만하더라도 상대방이 나에게 줄 만하지 않으면 군자君子는 취하지 않고, 내가 줄 만하더라도 상대방이 나에게서 받을 만하지 않으면 군자君子는 주지 않는다.
旣爲己慮之하고 又爲人謀之하야 取之 必可予하고 予之 必可受하니 若己爲君子하고 而使人爲小人이면 是亦去小人無幾耳니라
그리하여 자신을 위해 염려하고 또 남을 위해 도모하여, 내가 취하면 상대방이 반드시 줄 만하고 내가 주면 상대방이 반드시 받을 만하게 하였으니, 만약 자신은 군자君子가 되고 남으로 하여금 소인小人이 되게 한다면, 이 또한 소인小人과의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동한東漢 때에 유개劉愷가 아우에게 봉후封侯를 사양하자 황제가 조명詔命을 내려서 이것을 허락하였는데, 정홍丁鴻 또한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아우에게 봉후封侯를 사양하자 친구인 포준鮑駿의리義理로써 꾸짖으니, 정홍丁鴻이 마침내 봉지封地로 나아갔다.
其始 自以爲義而行之라가 其終也 知其不義而復之하니 以其能復之 知其始之所行 非詐也로니
정홍丁鴻이 처음에는 아우에게 봉후封侯를 사양하는 것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서 행하다가 결국에는 의롭지 않음을 알고서 돌아왔으니, 그가 능히 돌아온 것을 가지고 처음의 행위가 속임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범씨范氏(범엽范曄)가 정홍丁鴻을 어질게 여기고 유개劉愷를 낮게 여긴 것이다.
其論
범엽范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稱太伯, 伯夷未始有其讓也
()백이伯夷는 일찍이 그 사양함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다.
이러니 及後世하야는 徇其名而昧其致하니 於是 詭激之行 興矣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태백太伯지덕至德이라고 칭하고 백이伯夷현인賢人이라고 칭하셨는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 이름만 따르고 그 이치에는 어두우니, 이에 궤격詭激한 행실이 일어나게 되었다.
若劉愷之徒 讓其弟하야 使弟受非服하고 而己受其名 不已過乎
유개劉愷의 무리가 아우에게 봉후封侯의 자리를 사양해서 아우로 하여금 받아야 할 것이 아닌 봉후封侯를 받게 하고 자신은 사양했다는 명예를 받았으니, 이는 너무 잘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丁鴻之心 主於忠愛하니 何其終悟而從義也오하니라
정홍丁鴻의 마음은 충애忠愛를 위주로 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끝내 깨달아서 의리를 따랐단 말인가?”
范氏之所賢者 固已得之矣어니와 而其未盡者 請得畢其說호리라
범씨范氏가 어질게 여긴 것은 참으로 에 맞지만, 그 미진한 부분에 대해 청컨대 내가 그 말을 다해보겠다.
夫先王之制 立長 所以明宗이요 明宗 所以防亂이니 非有意私其長而沮其少也
선왕先王의 제도에 장자長子를 세움은 종통宗統을 밝히는 것이요, 종통宗統을 밝힘은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니, 장자長子에게 사정私情을 두고 작은 아들을 저지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天子與諸侯 皆有太祖하니 其有天下一國 皆受之太祖 而非己之所得專有也
천자天子제후諸侯는 모두 건국建國태조太祖가 있으니, 소유한 천하天下와 한 나라는 모두 태조太祖에게서 받은 것으로, 자신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天子不敢以其太祖之天下與人이요 諸侯不敢以其太祖之國與人 天下之通義也
천자天子가 감히 태조太祖천하天下를 남에게 줄 수 없고, 제후諸侯가 감히 태조太祖의 나라를 남에게 줄 수 없으니, 이것은 천하天下의 공통된 의리義理이다.
夫劉愷, 丁鴻之國 不知二子所自致耶
내 알지 못하겠다, 저 유개劉愷정홍丁鴻의 나라는 두 사람이 스스로 이룬 것인가?
將亦受之其先祖耶
아니면 또한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인가?
受之其先祖어늘 而傳之於所不當立之人이면 雖其弟之親이라도 與塗人均耳
선조에게서 물려받았는데 뒤를 이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물려주었다면 비록 친동생이라 하더라도 길 가는 사람과 똑같은 것이다.
, 伯夷 非所以爲法也
나라 태백太伯백이伯夷는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太伯 將以成周之王業이요 而伯夷 將以訓天下之讓하야 而爲是詭時特異之行하니 皆非所以爲法也
태백太伯은 장차 나라의 왕업王業을 이루려고 하였고, 백이伯夷는 장차 천하天下 사람들에게 사양함을 가르치려고 해서 세속과 어긋나는 특이한 행동을 하였으니, 태백太伯백이伯夷는 모두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今劉愷擧國而讓其弟하니 非獨使弟受非服之爲過也 將以壞先王防亂之法하고 輕其先祖之國하야 而獨爲是非常之行하니 考之以禮하고 繩之以法하면 而愷之罪大矣니라
지금 유개劉愷가 나라를 들어서 아우에게 봉후封侯를 사양하였으니, 이는 비단 아우로 하여금 받지 않아야 할 봉후封侯를 받게 한 잘못을 저질렀을 뿐만이 아니라, 장차 혼란을 방지하려 한 선왕先王을 파괴하고 선조先祖의 나라를 경시하여 홀로 이 비상한 행실을 한 것이니, 로써 고찰하고 으로써 가늠해보면 유개劉愷의 죄가 큰 것이다.
이나 漢世 士大夫多以此爲名者 安, 順, 桓, 靈之世 士皆反道矯情하야 以盜一時之名하니 蓋其弊始於하야 而爲世主所賢하야 天下高之
그러나 한대漢代사대부士大夫들 가운데 이러한 방법으로 명성을 구하려는 자가 많았던 것은 안제安帝순제順帝,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에 선비들이 모두 를 위반하고 실정을 속여서 한때의 명예를 도둑질했기 때문이니, 이 병폐는 서한시대西漢時代위현성韋玄成에게 봉후封侯를 사양하자, 세상의 군주가 어질게 여겨서 천하天下 사람들이 그를 높이면서 시작되었다.
漸以成俗하야 履常而蹈易者 世以爲無能而擯之하니 則丁鴻之復於中道 尤可以深嘉而屢歎也니라
그러므로 점점 이러한 풍속을 이루어서 상도常道를 행하고 평탄한 길을 가는 자들을 세상에서는 무능하다 하여 배척하였으니, 그렇다면 정홍丁鴻중도中道로 돌아온 것은 더욱더 깊이 가상해하고 여러 번 감탄할 만한 일인 것이다.
역주
역주1 劉愷丁鴻孰賢 : 이 글 또한 治平 2년(1065)의 秘閣(學士院)의 시험에 제출된 6首 가운데 하나이다.
역주2 東漢劉愷……而詔聽之 : 荊은 本集에 의거하여 封으로 바로잡았다. 劉愷는 後漢 章帝․和帝 때의 황족으로 字가 伯豫이다. 아버지 劉般은 字가 伯興으로 宣帝의 玄孫인데, 居巢侯에 봉해졌다. 劉般이 죽자 劉愷가 작위를 세습하여야 하는데, 劉愷는 아우 憲에게 양보하고 달아났다.
그 후 和帝 永元 10년(98)에 有司가 劉愷의 죄를 아뢰고 처벌할 것을 상주하자, 侍中 賈逵가 상소하기를 “孔子께서 ‘禮와 謙讓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살펴보니, 居巢侯 劉般의 嗣子 劉愷는 평소의 행실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으며 겸손하고 고결하여 아우 憲에게 양위하고 몸을 감추었는데, 有司가 그의 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평소의 법으로 다스리려 하니, 겸양하는 풍속을 기르지 못하고 큰 교화를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전대의 扶陽侯 韋玄成과 근간에 陵陽侯 丁鴻, 鄙侯 鄭彪가 모두 행실을 고상하게 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작위를 사양하였으나 그 봉토를 깎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모두가 이 세 사람의 일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劉愷는 前賢의 덕을 사모하고 우러러보아서 伯夷의 절개를 갖고 있으니, 마땅히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서 그의 先功을 온전히 하여, 우리 조정에서 덕을 숭상하는 아름다움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和帝가 그의 말을 따라 劉愷를 불러 郞으로 제수하고, 뒤에 侍中으로 승진시켰다. 《後漢書 劉愷傳》
역주3 丁鴻亦以陽狂……鴻乃就封 : 丁鴻은 後漢 章帝 때의 명신으로 字가 孝公이며 潁川 定陵 사람이다. 아버지 丁綝이 光武帝(劉秀)를 따라 정벌에 참여하고 공을 세워 陵陽侯에 봉해지고 자신은 嗣子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자, 丁鴻은 상소하여 아우 盛에게 封侯를 계승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아우에게 글을 남기고 도망하였다.
그 뒤에 벗 鮑駿이 “옛날 伯夷는 난세였으므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으나, 《春秋》의 뜻에 의하면 집안일로 국사를 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그대가 형제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부친의 基業을 끊으려 하니,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충고하자, 丁鴻이 크게 깨닫고 탄식하며 돌아와 封侯를 이어받았다. 《後漢書 丁鴻傳》
역주4 此范氏之所以賢鴻而下愷也 : 范氏는 《後漢書》의 저자인 范曄(398~455)으로 南朝 宋나라의 학자이자 史家이다. 字가 蔚宗이며 順陽 사람이다.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南朝 宋 文帝 元嘉 연간에 여러 사가들의 史書를 정리하여 《後漢書》를 완성하였다. 위의 내용은 《後漢書》 〈丁鴻傳〉의 論에서 평한 것이다.
역주5 其論……伯夷稱賢人 : ‘其論’은 《後漢書》 〈丁鴻傳〉의 論을 이른다. 太伯은 주로 泰伯으로 쓰는데, 周 太王의 長子이다. 太王은 商나라를 칠 생각이 있었는데, 太伯이 따르지 않자 군주의 자리를 셋째 아들 季歷에게 전하여 손자 昌(文王)에게 전해주고자 하였다. 太伯이 이를 알고 둘째인 仲雍과 함께 荊蠻으로 도망하여 나라가 季歷에게 전해지게 하였다.
伯夷는 孤竹君의 長子이다. 孤竹君이 생전에 셋째 아들인 叔齊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孤竹君이 죽자 叔齊가 형인 伯夷에게 군주의 자리를 사양하였다. 伯夷는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하여 달아났고, 叔齊 또한 즉위하지 않고 달아나니, 孤竹國은 결국 둘째 아들을 군주로 세웠다.
그 후 伯夷와 叔齊는 周 文王에게 귀의하였는데, 文王이 죽고 武王이 즉위하여 800여 제후들과 함께 殷나라를 정벌하러 가자, 伯夷와 叔齊는 “제후국인 周나라로서 천자국인 殷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다.”라고 하여 말고삐를 붙잡고 만류하였으며, 周나라가 殷나라를 멸망시키고 天子國이 되자 周나라의 녹봉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首陽山에 들어가 은둔하며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주려 죽었다.
‘太伯稱至德’은 《論語》 〈泰伯〉에 “泰伯은 지극한 德이라고 이를 만하다. 세 번 天下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이 그 德을 칭송할 수 없게 하였구나.[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라고 보이며, ‘伯夷稱賢人’은 《論語》 〈述而〉에 “子貢이 ‘伯夷와 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옛날의 賢人이시다.’라고 대답하셨다.[伯夷叔齊 何人也 曰 古之賢人也]”라고 보인다.
역주6 吳太伯 : 太伯은 泰伯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古公亶父의 長子이다. 古公亶父가 쇠퇴해가는 殷나라를 정벌할 마음을 갖고 있었고, 막내인 季歷이 昌을 낳으니 聖德이 있었다. 太伯은 제후왕의 자리를 季歷에게 물려주기 위해 아우 虞仲(仲雍)과 함께 荊蠻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막내인 季歷이 세습하게 되었는데, 昌의 아들 發이 殷나라를 멸망시키고 天子가 되니, 이가 바로 武王이다. 武王은 天子가 된 뒤에 아버지인 昌을 文王으로, 祖考인 季歷을 王季로, 曾祖考인 古公亶父를 太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역주7 西漢之世 韋玄成以侯讓其(弟)[兄] : 본문의 ‘弟’는 文集과 史實에 의거하여 ‘兄’으로 바로잡았다.
韋玄成은 西漢 宣帝․元帝 때의 문신으로, 자가 少翁인데 五經에 밝아 경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버지 韋賢은 저명한 경학자로 丞相을 역임하고 扶陽侯로 봉해졌었다.
본래 後嗣였던 玄成의 형 玄弘이 관직에서 잘못을 저질러 옥에 갇혔는데, 韋賢이 위독하자 그의 門人들이 모의하고 韋賢의 遺命을 사칭하여 玄成을 후계자로 삼았다. 玄成은 부친이 죽은 뒤에 이 사실을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封侯를 받지 않았는데, 얼마 후 벗들의 권유로 부득이함을 알고 封侯를 승계하였다. 宣帝가 그의 절조를 가상히 여겨 河南太守로 제수하였다. 《漢書 韋玄成傳》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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