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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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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論亦是 終不出蘇氏法門하니라
孔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이니 觀過 斯知仁矣라하시니
聞之於師호니 曰 此 論語之라하니 請得以論其詳호리라
人之難知也 江海不足以喩其深이요 山谷不足以配其險이요 浮雲不足以比其變이라
라하니 夫苟見其作而不見其輟이면 雖盜跖爲伯夷라도 可也
이나 古有名知人者하야 其效如影響하고 하니 此何道也
彼其觀人也 亦多術矣 委之以利하야 以觀其節하고 乘之以猝하야 以觀其量하고 伺之以獨하야 以觀其守하고 懼之以敵하야 以觀其氣
하고 하니 是豈一道也哉리오
何則 功者 人所趨也 過者 人所避也 審其趨避하면 而眞僞見矣


09. 잘못한 것을 보면 을 안다는 것에 대한
이 논이 또한 옳으나 끝내 소씨蘇氏법문法門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잘못은 각각 그 부류를 따르니, 잘못한 것을 보면 그가 한지를 안다.”라고 하셨는데, 공안국孔安國 이후로 이 글을 해석한 자들 중에 그 뜻을 제대로 안 자가 있지 못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인자仁者공효功效를 함께 하면 그가 한지를 알 수 없고, 인자仁者와 잘못을 함께 한 뒤에야 그가 한지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내 스승에게 들으니, 말씀하기를 “이것은 논어論語의소義疏이다.”라고 하였으니, 내가 청컨대 그 자세한 내용을 논해보겠다.
사람은 알기가 어려우니, 이는 강해江海로도 그 속내의 깊이를 비유할 수가 없고, 산골짝으로도 그 험함을 비견할 수가 없고, 뜬구름으로도 그 변화를 비유할 수가 없다.
양웅揚雄이 말하기를 “보는 사람이 있으면 잘하고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둔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잘하는 것만을 보고 그만두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비록 도척盜跖과 같은 나쁜 사람도 백이伯夷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이름난 자가 있어서, 그 효험이 형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목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있는 것과 같았고, 그 미더움이 시초점蓍草占이나 거북점과 같았으니, 무슨 방법으로 그러하였겠는가?
저들이 사람을 관찰할 적에는 또한 방법이 많았으니, 이익을 맡겨주어서 절개를 관찰하고 갑작스러운 일을 틈타서 국량局量을 관찰하고 홀로 있을 때를 살펴서 평소의 품행을 관찰하고 으로 두렵게 해서 기개를 관찰하였다.
그러므로 진 문공晉 文公은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조쇠趙衰를 얻었고 곽림종郭林宗은 깨진 시루를 가지고 맹민孟敏을 얻은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한 방법으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인자仁者와 더불어 공효功效를 함께 하였다고 하여 그를 인자仁者라고 말한다면, 공손홍公孫弘이 삼베 이불을 덮은 것이 자로子路가 해진 옷을 입은 것과 무슨 차이가 있으며, 진중자陳仲子가 벌레 먹은 오얏을 먹은 것이 안연顔淵이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를 먹은 것과 어떻게 구별되겠는가?
공효功效는 사람들이 쫓아가는 것이요 허물은 사람들이 피하는 것이니, 사람들이 쫓아가고 피하는 것을 보면 진짜와 거짓이 드러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예鉏麑가 왕명을 어겼는데 그 함을 미루어보면 그에게 나라를 맡길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허물을 보면 그가 한지를 아는 것이 될 것이다.


역주
역주1 觀過斯知仁 : 本集에는 제목이 〈觀過斯知仁矣〉로 되어 있다. 이 말은 《論語》 〈里仁〉에서 나왔는데, 蘇軾은 이 글에서 ‘觀過斯知仁’의 道理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논파하고 있다.
역주2 自孔安國以下 解者未有得其本指者也 : 孔安國은 字가 子國으로 孔子의 11대(혹 12대) 후손인데, 經傳에 대한 학식이 풍부하여 前漢 武帝 때에 諫議大夫, 臨淮太守 등의 벼슬을 지냈다. 申公에게 《詩經》을 배우고 伏生에게 《尙書》를 배워 당대의 경학가로 명망이 높았다.
魯恭王 劉餘가 孔子의 옛집의 벽을 허물다가 科斗文字로 된 《尙書》와 《論語》, 《孝經》을 얻자 孔安國이 이를 今文으로 정리하고 주해를 달았으니, 바로 《古文尙書》와 《孝經傳》, 《論語訓解》이다. 科斗文字는 蝌蚪文字로도 표기하는데, 과두는 올챙이로 옛날 한자의 모습이 올챙이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글자의 모습이 篆․隷․楷․行으로 바뀌어 점점 간편하게 되었다.
역주3 禮曰 與仁同功……其仁可知也 : 《禮記》 〈表記〉에 孔子가 말씀하기를 “仁이 세 가지가 있다. 仁者와 功效는 같으나 實情은 다르니, 仁者와 功效를 함께 하면 그 사람이 仁한지를 알 수 없고, 仁者와 잘못을 함께 한 뒤에야 그가 仁한지를 알 수 있다.[仁有三 與仁同功而異情 與仁同功 其仁未可知也 與仁同過 然後其仁可知也]”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이에 대해 呂氏(呂大臨)는 “仁을 편안히 여기고 仁을 이롭게 여기고 仁을 힘씀은 세 가지의 功效가 똑같이 仁에 돌아가나 그 실정은 다르니, 이는 堯․舜이 性대로 한 것과 湯王․武王이 몸소 행한 것과 五霸가 빌린 것의 차이가 되는 이유이다.
桓公이 諸侯들을 규합하여 天下를 한 번 바로잡았으니, 비록 湯王과 武王의 행동이라도 이보다 더하지 않으나 실정은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仁한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허물은 사람이 피하는 것이지만 불행히 초래하는 경우가 있으니, 周公이 管叔을 시켜서 殷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管叔이 殷나라를 가지고 배반함은 형을 사랑함에 잘못했을 뿐이요, 孔子가 陳나라 司敗에게 昭公이 禮를 안다고 대답함은 군주의 잘못을 숨김에 잘못되었을 뿐이니, 모두 실정에서 나와 仁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堯․舜이 性대로 했다.’는 것은 仁․義․禮․智의 本性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행한 것이고, ‘湯王과 武王이 몸소 행했다.’는 것은 비록 本性을 일부 잃었으나 몸을 닦고 도를 체행하여 本性을 회복한 것이고, 五霸는 단지 仁․義의 이름만을 빌어 실제로는 행하지 않았으므로 빌렸다고 말하였는바, 이 내용은 《孟子》 〈盡心 上〉에 나온다.
管叔은 이름이 鮮으로 武王의 아우이고 周公의 庶兄이다. 周公이 武王을 보필하면서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에 봉하고 管叔 등으로 하여금 武庚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여 周公이 섭정을 하자, 管叔은 周公이 어린 成王을 해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周公의 토벌을 받고 죽었다.
昭公(B.C. 560~B.C. 509)은 魯 襄公의 아들로 이름이 稠인데, 威儀에 밝아 禮를 잘 안다고 이름났었다. 당시 풍습에 同姓끼리 혼인하는 것은 禮가 없는 행위로 여겼었는데, 昭公은 똑같은 姬姓인 吳나라에서 夫人을 취하고서 자신의 夫人을 吳孟子라고 칭하였다. 夫人의 칭호 뒤에 붙는 글자는 그녀의 姓을 표시하는 바, 昭公의 夫人은 마땅히 孟姬라고 칭하여야 하나, 姬는 魯나라의 國姓이므로 이를 숨기고자 吳孟子라고 칭하여 宋나라 公族의 딸인 子姓인 것처럼 한 것이다. 宋나라는 國姓이 子姓이었다.
이에 대해 陳나라 司敗가 孔子에게 “昭公이 禮를 알았습니까?”라고 묻자, 孔子는 “禮를 아셨다.”라고 대답하였다. 司敗가 물러가 孔子의 제자인 巫馬期에게 이르기를 “君子도 偏黨을 하는가? 昭公이 吳나라에서 장가드셨으니, 同姓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숨겨서 그 夫人을 吳孟子라고 칭했으니, 昭公이 禮를 알았다면 누가 禮를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巫馬期가 이것을 아뢰자, 孔子께서 “나는 다행이다. 잘못이 있으면 남들이 반드시 아는구나.”라고 하시어,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시고 변명하지 않으셨다. 《論語 述而》
역주4 義疏 : 經文이나 舊注의 뜻을 소통시키기 위한 자세한 註釋을 이른다.
역주5 揚雄有言 有人則作之 無人則輟之 : 揚雄(B.C. 53~A.D. 18)은 前漢 말기의 학자이며 문인으로 자는 子雲이고 蜀郡 成都 사람이다. 박학다식하고 뛰어난 문장가였으나 王莽의 新나라 때에 王莽을 찬미하는 글을 지어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저서로는 《易經》을 모방하여 지은 《太玄經》과 《論語》를 모방하여 지은《法言》이 있다.
이 내용은 《法言》 〈孝至篇〉에 “혹자가 ‘어떻게 僞善을 분별합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보는 사람이 있으면 잘하고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두는 것을 일러 위선이라 한다.’라고 하였다.[或曰 何以處僞 曰 有人則作之 無人則輟之之謂僞]”라고 보인다.
역주6 其信如蓍龜 : 蓍는 蓍草로 옛날 《周易》으로 점을 칠 적에 蓍草 50줄기를 사용하였으며, 龜는 거북껍질로 옛날 오래된 거북을 영험하게 여겨서 거북껍질을 불에 구워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쳤는바, 이 두 가지는 미래를 정확히 일러준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晉文公以壺飧得趙衰 : 晉 文公(B.C. 697~B.C. 628)은 이름이 重耳인데 獻公의 아들로 驪姬의 참소에 의해 太子 申生이 자살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고 도망하여 19년간 天下를 유랑하였다. 유랑하는 동안 뛰어난 인덕과 능력으로 여러 나라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결국 秦나라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아우 夷吾(惠公)의 아들 懷公을 몰아내고 晉나라 임금이 되었다.
趙衰(?~B.C. 622)는 자가 子餘이고 시호는 成子이다. 文公의 명신 중의 하나로 文公이 전국을 유랑할 적에 護從하였다.
僖公 25년(B.C. 632) 文公이 原나라를 점령하고 이를 다스릴 대부를 선발할 적에 내시인 勃鞮에게 물으니, 勃鞮가 이르기를 “예전에 趙衰가 밥그릇에 밥을 넣어 가지고 주군을 따를 적에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趙衰를 原의 대부로 삼아 原에 거처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25년》
역주8 郭林宗以破甑得孟敏 : 郭林宗은 郭泰(128~169)로 後漢의 高士인데 林宗은 그의 자이며 太原 介休 사람이다. 그는 인물을 잘 알아보고 품평을 잘하였다.
孟敏은 자가 叔達로 鉅鹿의 楊氏 사람인데 젊었을 적에 太原 땅에서 객지살이를 하였다. 어느 날 孟敏이 장에 팔기 위해 시루를 지고 가다가 떨어뜨려 깨졌으나, 孟敏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太原 지방의 명사였던 郭泰가 이를 보고 孟敏에게 깨진 시루를 돌아보지 않고 가는 이유를 묻자, 孟敏이 “시루가 이미 깨졌는데 돌아본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郭泰는 孟敏의 인물이 비범함을 알아보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유하였는데, 10년이 지나 孟敏은 이름이 天下에 알려지고 三公의 지위에 올랐다. 《後漢書 郭泰傳》
역주9 公孫之布被 與子路之縕袍何異 : 公孫은 公孫弘(B.C. 200~B.C. 121)으로 字가 季이며 菑川 사람인데 겉으로 꾸미기를 잘하였다. 前漢 武帝 때에 御史大夫를 역임하고 丞相에 제수되었다. 布被는 삼베로 만든 이불이다.
《史記》 〈公孫弘傳〉에 “公孫弘이 삼베로 이불을 만들고 밥을 먹을 적에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았는데, 汲黯이 말하기를 ‘公孫弘은 三公의 지위에 있어 봉록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삼베 이불을 만들어 덮으니, 이는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上(武帝)이 公孫弘에게 묻자, 公孫弘이 사례하기를 ‘그런 일이 있습니다. 三公으로서 삼베 이불을 만들어 덮었으니, 진실로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낚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또 汲黯의 충직함이 없었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얻어 들을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하니, 天子가 겸양한다고 여겨 더욱 후대하였다.[弘爲布被 食不重肉 汲黯曰 弘位在三公 奉祿甚多 然爲布被 此詐也 上問弘 弘謝曰 有之 夫以三公 爲布被 誠飾詐以釣名 且無汲黯忠 陛下安得聞此言 天子以爲謙讓 愈益厚之]”라고 보인다.
子路는 仲由(B.C. 542~B.C. 480)의 字이다. 魯나라 卞 땅 사람인데 孔子의 문인으로 10哲 중의 한 사람이다.
《論語》 〈子罕〉에 孔子께서 “해진 솜옷을 입고서 여우나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由(子路)일 것이다.[衣敝縕袍 與衣狐貉者 立而不恥者 其由也與]”라고 말씀한 내용이 보인다.
공효만을 따져 仁者라 한다면 公孫弘의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행한 검약과 子路의 진실된 검약에 차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0 陳仲子之螬李 與顔淵之簞瓢何辨 : 陳仲子는 전국시대 齊나라의 宗族이다. 그는 스스로 일하지 않고 세습된 官祿으로 먹고 사는 것을 不義라고 여겨 於陵에 거주할 적에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청렴하다는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孟子》 〈滕文公 下〉에 匡章이 말하기를 “陳仲子는 어찌 참으로 청렴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於陵에 거주할 적에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으며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우물가에 벌레가 절반을 넘게 파먹은 오얏이 있자, 가져다가 먹어 세 번 삼킨 뒤에야 귀에 들리는 것이 있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陳仲子 豈不誠廉士哉 居於陵 三日不食 耳無聞 目無見也 井上有李 螬食實者過半矣 匍匐往將食之 三咽然後 耳有聞 目有見]”라고 한 내용이 보이는데, 孟子는 “陳仲子가 청렴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어머니를 버리고 형을 멀리하고서 오직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데 급급하였으니, 그의 지조는 지나친 결벽이지 진실한 청렴이 아니다.”라고 혹평하였다.
顔淵(B.C. 521~B.C. 490)은 이름이 回이고 字가 子淵이며 魯나라 사람으로 德行에 뛰어났다. 安貧樂道하여 孔子께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꼽았으며 후대 사람들은 ‘復聖’으로 칭하였다.
《論語》 〈雍也〉에 孔子께서 “어질다, 顔回여.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顔回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顔回여.[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라고 말씀한 내용이 보인다.
이 또한 공효만을 따져 仁이라고 한다면 陳仲子의 지나친 결벽과 顔子의 安貧樂道를 구별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1 古人有言曰……推其(人)[仁]可以託國 : 古人은 未詳이다. 鉏麑는 춘추시대 晉 靈公 때의 力士이다.
靈公이 무도한 짓을 자행하자 卿인 趙盾이 자주 간하였는데, 이를 미워한 靈公이 역사 鉏麑를 보내 趙盾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鉏麑가 趙盾을 죽이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니, 침문이 열려있었으며, 趙盾은 조복을 입고 조회에 나가기 위해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鉏麑가 탄복하기를 “이 사람은 집에서도 恭敬함을 잊지 않으니, 참으로 백성의 주인이다. 백성의 주인을 해치는 것은 충성스럽지 못한 행위이고, 임금의 명령을 저버리는 것은 신실하지 못한 행위이다. 나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에 처하게 될 것이니, 죽느니만 못하다.”라고 하고 머리로 槐木을 들이받고 죽었다. 《春秋左氏傳 宣公 2년》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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