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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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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確이라
秦始皇帝十八年 取韓하고 二十二年 取魏하고 二十五年 取趙, 取楚하고 二十六年 取燕, 取齊하야 初幷天下하니라
蘇子曰
秦幷天下 非有道也 特巧耳 非幸也
이나 吾以爲巧於取齊而拙於取楚하니 其不敗於楚者 幸也라하노라
嗚呼
秦之巧 亦創於智伯而已
하니 秦知創智伯이어늘 而諸侯終不知師魏韓하니 秦幷天下 不亦宜乎
法章死하고 王建立六年 而秦攻趙하니 齊楚救之러니
趙乏食 請粟於齊호되 而齊不予한대
秦遂圍邯鄲하야 幾亡趙하니 趙雖未亡이나 而齊之亡形 成矣
秦人知之 不加兵於齊者 四十餘年이라
夫以法章之才 而秦伐之어늘 建之不才 而秦不伐 何也
太史公曰 君王后事秦謹이라 不被兵이라하니
夫秦欲幷天下耳 豈以謹故 置齊也哉
吾故曰 巧於取齊者 所以大慰齊人之心而解三晉之交也니라
齊秦不兩立하니
秦未嘗須臾忘齊也어늘 而四十餘年 不加兵者 豈其情乎
齊人不悟하고 而與秦合이라 秦得以其間으로 取三晉하니 三晉亡이면 齊蓋岌岌矣
方是時하야 猶有楚與燕也하니 三國合이면 猶足以拒秦이어늘
秦大出兵하야 伐楚伐燕호되 而齊不救
二國亡 而齊亦虜不閱歲하야하니 可不謂巧乎
二國旣滅 齊乃發兵守西界하야 不通秦使하니 嗚呼
亦晩矣
使齊有하야 知亡之無日하야 而掃境以伐秦이런들 以久安之齊 而入厭兵空虛之秦이면 覆秦如反掌也
吾故曰拙於取楚라하노라
然則奈何
曰 古之取國者 必有數하니 如取齠齒也 必以漸이라 齒脫而兒不知하나니라
今秦易楚하야 以爲是齠齒也可拔이라하야 遂抉其口하야 一拔而取之하니 兒必傷이요 吾指必齧이라
秦之不亡者 幸也 非數也니라
吳爲三軍하야 迭出以肄楚하야 三年而入郢하니 晉之平吳 隋之平陳 皆以是物也
不然하니
使堅知出此하야 以百倍之衆으로 爲迭出之計런들이라도 不能支어든 而況謝玄, 牢之之流乎
吾以是知之一律也로니 始皇幸而堅不幸耳니라


04. 나라에 대한 1
의논이 확고하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즉위 18년(B.C. 229)에 나라를 점령하였고, 22년에 나라를 점령하였고, 25년에 나라와 나라를 점령하였고, 26년에 나라와 나라를 점령하여 처음으로 천하를 겸병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자蘇子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나라가 천하를 겸병한 것은 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공교로웠을 뿐이요, 그렇다고 요행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건대 나라를 점령하는 데는 공교로웠으나 나라를 점령하는 데는 졸렬하였으니, 나라에게 패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고 여겨진다.
아!
나라의 공교로움은 지백智伯을 징계한 것일 뿐이다.
나라와 나라가 팔뚝과 발처럼 붙어 연합해서 지백智伯이 죽었는데, 나라는 지백智伯을 징계할 줄 알았으나 제후들은 끝내 을 본받을 줄 몰랐으니, 나라가 천하를 겸병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라 민왕湣王이 죽고 법장法章이 즉위하자 군왕후君王后가 그를 보좌하였으나, 나라는 그대로 나라를 정벌하였다.
그러다가 법장法章이 죽고 제왕 건齊王 建이 즉위한 지 6년에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니, 나라와 나라가 구원하였다.
나라가 양식이 떨어지자 나라에 양식을 보내줄 것을 청했으나 나라는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라가 마침내 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여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이때 나라가 비록 망하지는 않았으나 나라가 망할 형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나라는 이것을 알았으므로 나라에게 무력을 가하지 않은 것이 40여 년이었다.
법장法章과 같이 훌륭한 재주로도 나라가 정벌하였는데 제왕 건齊王 建처럼 재주 없는 사람을 나라가 정벌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군왕후君王后나라를 지성으로 섬겼기 때문에 병란(공격)을 입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나라가 천하를 겸병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지성으로 섬긴다 하여 나라를 내버려두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나라를 취하는 데 공교로웠다고 말한 것은 나라가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해주어 삼진三晉과의 연합을 와해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라와 나라는 양립할 수가 없었다.
나라가 잠시도 나라를 잊지 않았는데, 40여 년 동안 무력을 가하지 않은 것이 어찌 그 실정實情이었겠는가?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라와 연합하였으므로 나라는 그 틈을 이용하여 삼진三晉을 점령하였으니, 삼진三晉이 망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아직도 나라와 나라가 남아 있었으니, 3국이 연합했다면 아직도 충분히 나라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군사를 크게 출동하여 나라를 정벌하고 나라를 정벌하였으나, 나라는 이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 나라가 멸망하였고, 나라 또한 1년이 넘지 않아 제왕齊王이 포로가 되어 춘추시대春秋時代나라가 나라와 나라를 점령한 것처럼 하였으니, 공교로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나라가 멸망하자 나라는 그제야 비로소 군대를 내어 서쪽 경계를 지키고 나라와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했으니, 아!
또한 늦은 것이다.
나라가 처음 이신李信을 보내어 20만 군대로 나라를 공격하게 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이에 왕전王翦으로 하여금 60만 대군으로 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니, 이는 나라를 텅 비워두고 싸운 것이다.
만일 나라에 중간 정도의 군주와 보통의 신하가 있어서 나라가 언제 망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온 경내를 다 동원하여 나라를 공격했더라면, 오랫동안 편안한 나라 군대로 병란에 시달린 채 텅 비어 있는 나라로 쳐들어간 것이 되니, 그렇다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라를 점령하는 데는 졸렬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했는가?
옛날에 남의 나라를 점령하는 자들은 반드시 술수가 있었으니, 마치 어린아이의 삭은니(젖니)를 뽑을 적에 반드시 점진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가 빠져도 아이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라는 나라를 깔보고 이것을 삭은니를 뽑듯이 단번에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마침내 어린아이의 입을 벌리고 일거에 뽑아 취하려 하였으니, 아이는 반드시 입 안이 상할 것이고 내 손가락을 반드시 깨물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요 술수가 아닌 것이다.
나라가 3을 만들어 번갈아 출동시켜 나라를 피곤하게 해서 3년 만에 나라 수도인 영읍郢邑으로 쳐들어갔으니, 나라가 나라를 평정한 것과 나라가 나라를 평정할 적에도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부견苻堅만은 그렇지 않았다.
만일 부견苻堅이 이 방법을 사용할 줄 알아서 백 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번갈아 출동하는 계책을 썼더라면, 비록 한신韓信백기白起와 같은 명장이라도 버틸 수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사현謝玄유뇌지劉牢之와 같은 무리에 있어서랴!
나는 이 때문에 두 나라가 똑같은 방법을 썼음을 알 수 있으니, 다만 시황始皇은 요행이고 부견苻堅은 불행일 뿐이었다.


역주
역주1 秦論 一 : 《總案》에는 “東坡의 글이 너무 많아 이루 다 실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正統論〉만 至和 2년에 지었다고 自注했을 뿐 나머지 젊은 시절에 지은 글들은 지은 시기가 자세하지 않다. 아마도 당시에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글짓기가 이와 같았을 것이다. 東坡가 이런 글을 지을 적에는 郡縣마다 學校가 설립되지 못하였고 學官 또한 완전히 설치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여 이 글이 蘇軾이 젊었을 적에 쓴 것으로 보았으나, 《志林》 〈論古〉에 이 글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蘇軾이 해남도에 유배되어 있을 적인 紹聖 4년(1097) 7월부터 元符 3년(1100) 5월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세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역주2 魏韓肘足接 而智伯死 : 肘足은 팔뚝과 발로 肘足接은 서로 협력함을 이른다. 智伯은 春秋時代 晉나라 六卿의 하나인 智瑤로 시호는 襄子이다. 趙氏․韓氏․魏氏와 함께 中行氏와 范氏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가장 강성한 세력을 보유하였으나, 趙襄子를 공격하다가 魏桓子와 韓康子의 협공을 받고 결국 패망하였다. 智瑤는 趙襄子가 있는 晉陽城에 물을 주입시켜 곤경에 빠뜨렸으나, 趙襄子의 부하인 張孟談이 은밀히 城을 빠져나가 魏桓子와 韓康子를 보고 “내 들으니, 속담에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智伯이 우리 趙氏를 공격하여 거의 멸망하게 되었으니, 만일 우리 趙氏가 멸망하고 나면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魏氏와 韓氏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趙氏와 협력하여 강성한 智氏를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晉나라는 결국 韓․魏․趙 세 나라로 분할되었고, 이들을 三晉이라 칭하였다.
역주3 齊湣王死……君王后佐之 : 戰國時代에 齊나라 宣王이 죽고 아들 地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湣王이고, 그의 아들 法章이 즉위하니 이가 襄王인데 그의 太子 建이 즉위하여 40여 년 만에 齊나라는 秦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湣王은 宋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교만해져서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다가 燕나라 장군 樂毅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때 齊나라를 구원하러 온 楚나라 장수 淖齒에게 살해당하였다. 齊나라는 70여 개의 城邑을 잃고 겨우 莒와 卽墨 두 고을만 남아 있었는데, 장군 田單의 기지와 용맹으로 燕軍을 물리치고 다시 전 국토를 수복하였다. 이때 法章은 도망하여 성명을 바꾸고 太史 敫의 집에 들어가 머슴이 되었다가, 太史 敫의 딸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 齊나라가 수복된 다음 齊나라 사람들은 法章을 찾아 王으로 추대하고 太史 敫의 딸을 后妃로 세우니, 이가 바로 君王后이다. 君王后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襄王을 잘 보필하였다.
역주4 晉取虞虢也 : 春秋時代 강대국인 晉나라는 虢나라를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虞나라에게 길을 빌리지 않으면 정벌하러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많은 보물을 虞나라에 보내주자, 虞나라 임금은 마침내 길을 빌려주었다. 晉나라는 虢나라를 점령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虞나라마저 점령하였다.
역주5 秦初遣李信……以六十萬攻之 : 秦始皇이 楚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장군 李信에게 “楚나라를 공격하려면 병력이 얼마나 필요한가?”라고 묻자, 李信은 “20만 명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백전노장인 王翦에게 물으니, 王翦은 “60만 대군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秦始皇은 王翦에게 “당신은 참으로 늙었소.”라고 핀잔하고는 李信과 蒙恬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출정시켰으나 대패하고 돌아왔다. 이에 秦始皇은 王翦을 찾아가 사과하고 그의 말대로 병력을 총동원하여 60만 대군을 주어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끝내 楚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다.
역주6 中主具臣 : 中主는 지혜가 뛰어나지 않은 중간 정도의 군주를 이르며, 具臣 역시 훌륭한 신하가 아니고 단지 자리를 지키는 보통의 신하를 이른다.
역주7 苻堅 : 五胡十六國時代 先秦의 군주이다. 명재상인 王猛을 등용하여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였으나, 王猛이 죽은 뒤에 보병 60여만 명과 기병 27만 명으로 東晉을 공격했다가 東晉의 장수 謝玄과 劉牢之 등에게 대패하고, 결국 나라가 멸망하였다.
역주8 韓白 : 韓信과 白起이다. 白起는 戰國時代 秦나라의 명장이며, 韓信은 뛰어난 책략으로 漢의 高祖인 劉邦을 도와 垓下의 一戰에서 項羽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開國三傑로 알려진 인물이다.
역주9 二秦 : 秦始皇의 秦나라와 苻堅의 先秦을 가리킨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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