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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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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秦論 二
秦初幷天下 丞相綰等호되 燕,齊, 荊 地遠하야 不置王이면 無以鎭之하니 請立諸子하노이다 始皇下其議한대
群臣皆以爲便이라호되 廷尉斯曰
周文武所封子弟同姓 甚衆이니이다이나 後屬疏遠하야 相攻擊 如仇讐
諸侯更相誅伐호되 天子弗能禁止하니이다
今海內賴陛下神靈하야 一統하야 皆爲郡縣하니 諸子功臣 以公賦稅 重賞賜之하면 甚足易制 天下無異意하리니 則安寧之術也
置諸侯不便하니이다
始皇曰 天下共苦戰鬪不休 以有侯王이러니
賴宗廟之靈하야 天下初定이어늘 又復立國이면 樹兵也 而求其寧息이나 豈不難哉
廷尉議是라하고 分天下하야 爲三十六郡하야 郡置守, 尉, 監하니라
蘇子曰
聖人 不能爲時 亦不失時하나니
非聖人之所能爲也 能不失時而已
三代之興 諸侯無罪하야 不可奪削하야 因而君之하니 雖欲罷侯置守 可得乎
此所謂不能爲時者也
周衰 諸侯相幷하야 齊, 晉, 秦, 楚 皆千餘里 其勢足以建侯樹屛이요 至於하야는 皆稱王하야 行天子之事
이나 終不封諸侯하고 不立彊家世卿者 爲戒也 久矣일새라
世之畏諸侯之禍也 非獨李斯始皇知之
始皇旣幷天下 分郡邑하야 置守宰 理固當然이니 如冬裘夏葛하야 時之所宜
非人之私智獨見也 所謂不失時者어늘 而學士大夫多非之하나니라
漢高帝欲立六國後어늘 以爲不可라호되 世未有非之者하니 李斯之論 與子房何異리오
世特以成敗爲是非耳
高帝聞子房之言하고 하니 知諸侯之不可復 明矣
이나 卒王하니 豈獨高帝리오
子房亦與焉이라
昔之論封建者 其後하니 宗元之論出 而諸子之論 廢矣 雖聖人復起라도 不能易也
吾取其說而附益之하노라
曰 凡有血氣 必爭이요 爭必以利하나니 利莫大於封建하니
封建者 爭之端而亂之始也
自書契以來 臣弑其君하고 子弑其父하며 父子兄弟 相賊殺 有不出於襲封而爭位者乎
自三代聖人으로 以禮樂敎化天下하야 至刑措不用이라이나 終不能已簒弑之禍
至漢以來 君臣父子相賊虐者 皆諸侯王子孫이요 其餘 卿大夫 不世襲者 蓋未嘗有也
近世 無復封建하야 則此禍幾絶이어늘 仁人君子忍復開之歟
吾以爲李斯始皇之言 柳宗元之論 當爲萬世法也라하노라


05. 나라에 대한 2
나라가 처음 천하를 겸병(통일)하자, 승상 왕관丞相 王綰 등이 말하기를 “() 지방은 지역이 멀어서 을 두지 않으면 진무할 수가 없으니, 여러 아들들을 으로 세울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시황始皇이 그 의논을 신하들에게 내렸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을 세우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였으나, 정위 이사廷尉 李斯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봉한 자제와 동성同姓이 매우 많았으나 뒤에 친족(후손)들이 소원해져서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후들이 서로 죽이고 공격하는데도 천자가 이것을 금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해내海內가 폐하의 신령스러우심에 힘입어 하나로 통일이 되어 모두 군현郡縣이 되었으니, 여러 왕자王子공신功臣들은 공적公的부세賦稅로 중하게 상을 준다면 매우 풍족하면서도 제재하기 쉬울 것이요, 천하에 다른 마음을 먹는 자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안녕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편치 못합니다.”
그러자 시황始皇은 말하기를 “천하가 함께 괴롭게 전투하여 그치지 않은 것은 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묘宗廟신령神靈에 힘입어 천하가 처음 평정되었는데, 또다시 제후국諸侯國을 세운다면 이것은 병란을 세우는 것이니, 편안히 쉬기를 바라나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廷尉의 의론이 옳다.”라고 하고, 이에 천하를 나누어 36개 을 만들어서 마다 을 설치하였다.
소자蘇子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성인聖人은 때를 만들지 못하고 또한 때를 잃지도 않는다.
때는 성인聖人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때를 잃지 않을 뿐이다.
삼대三代가 일어났을 적에 제후諸侯들은 아무 죄가 없으므로 땅을 빼앗거나 봉지를 떼어낼 수가 없어서 그들을 그대로 제후諸侯로 세웠으니, 비록 제후諸侯를 파하고 군수郡守를 설치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때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라가 쇠약해지자, 제후諸侯들이 서로 겸병하여 나라와 나라, 나라와 나라는 모두 땅이 천여 리였으니 그 형세가 충분히 제후諸侯를 세워 울타리로 삼을 수 있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의 7국에 이르러서는 모두 (천자)을 칭하여 천자의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끝내 제후諸侯를 봉하지 않고 강성한 대부大夫의 집안을 세경世卿으로 세우지 않았던 것은 나라의 삼환三桓나라의 육경六卿나라의 전씨田氏를 오래 전부터 경계 삼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후諸侯의 화를 두려워할 줄 안 것은 비단 이사李斯진시황秦始皇만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겸병한 다음, 을 나누어 를 세운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으니, 마치 겨울에는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는 것처럼 때에 마땅한 것이었다.
이는 사람의 사사로운 지혜와 남다른 견해가 아니요, 이른바 때를 잃지 않는다는 것인데, 학사學士대부大夫들은 대부분 이것을 비난한다.
나라 고제高帝육국六國의 후예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장자방張子房이 불가하다 하였으나 세상에서는 이것을 비난하는 자가 있지 않았으니, 이사李斯의 의논이 자방子房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에서는 다만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옳고 그름으로 삼을 뿐이다.
고제高帝자방子房의 말을 듣고 먹던 밥을 뱉고 역생酈生을 꾸짖었으니, 제후諸侯를 다시 세워서는 안 됨을 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끝내 한신韓信팽월彭越, 영포英布노관盧綰을 왕으로 봉했으니, 이 일이 어찌 다만 고제高帝 혼자 한 일이었겠는가?
자방子房 또한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유종원柳宗元이 말하기를 “봉건封建한 것은 성인聖人의 본의가 아니니, 형세를 따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옛날에 봉건封建을 논한 자들은 조원수曹元首육기陸機유송劉頌나라 태종太宗 때의 위징魏徵이백약李百藥안사고顔師古이며, 그 뒤에 유질劉秩두우杜佑유종원柳宗元이 있었는데, 유종원柳宗元이 나오자 여러 사람의 이 모두 폐기되고 말았으니,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더라도 이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유종원柳宗元의 말을 취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바이다.
무릇 혈기血氣가 있으면 반드시 다투게 마련이고 다툼은 반드시 이익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이익은 봉건보다도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봉건이라는 것은 분쟁의 발단이요 병란의 시작인 것이다.
문자가 있은 이래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며 부자간과 형제간이 서로 해치고 죽이는 것이 봉후封侯의 세습과 왕위의 쟁탈에서 나오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가?
삼대三代성인聖人으로부터 으로 천하를 교화하여 형벌을 버려두고 쓰지 않음에까지 이르렀으나, 끝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고 군주를 시해하는 화를 그치게 하지는 못하였다.
나라 이래로 군신간과 부자간에 서로 해치고 모질게 대한 것은 대부분 제후왕諸侯王의 자손이었고 그 나머지는 경대부卿大夫였으니, 세습하지 않은 자는 일찍이 있지 않았다.
근세에는 다시 제후諸侯를 봉하지 않아서 이 가 거의 끊기게 되었는데 인인仁人군자君子들이 차마 다시 이것을 만든단 말인가?
나는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사李斯진시황秦始皇의 말과 유종원柳宗元의 의논은 마땅히 만세의 법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七國 : 戰國時代에 강대하였던 일곱 나라로, 秦․楚․燕․齊․韓․魏․趙를 가리킨다. 이들을 七雄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뒤에 천하를 통일한 秦나라를 빼고 나머지 여섯 나라를 六國이라 하였다.
역주2 魯三桓……齊田氏 : 三桓은 春秋時代 魯나라의 世卿인 孟孫氏(仲孫氏), 叔孫氏, 季孫氏를 이르는데, 이들은 모두 桓公의 후손이었으므로 三桓 또는 三家라 불렸으며 대대로 魯나라의 國政을 맡아 권력이 막강하였다. 昭公은 季孫氏를 제거하려다가 쫓겨나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다. 晉나라의 六卿은 中行氏․范氏․智氏(荀氏)․韓氏․魏氏․趙氏인데 이들 역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가 자기들끼리 공격하여 韓氏․魏氏․趙氏만 남았는데, 戰國時代에 이르러 晉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韓․魏․趙가 되었다. 齊나라 田氏는 陳完의 후손을 이른다. 陳完은 원래 陳나라 公族이었는데, 齊나라로 망명 가서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후손 陳恒이 簡公을 시해하고 뒤에 姓을 田으로 바꾸었는데, 戰國時代에 이르러 마침내 田和가 齊나라를 차지하였다.
역주3 張子房 : 子房은 漢나라 高祖의 謀士인 張良의 字이다.
역주4 吐哺罵酈生 : 吐哺는 먹던 밥을 뱉는 것이며, 酈生은 楚․漢時代 齊나라의 辯士인 酈食其를 이른다. 漢나라 高祖 劉邦이 項羽에게 쫓겨 설 자리가 없자 酈食其에게 방책을 물으니, 酈食其는 “멸망한 六國의 후손을 제후로 봉해주면 각자 힘을 다해 項羽를 막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劉邦은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六國의 王의 印章을 새겨 六國의 후손을 제후로 봉하려 하였다. 마침 張良이 외출하였다가 돌아오자, 밥을 먹고 있던 劉邦이 그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張良은 깜짝 놀라며 “이대로 하면 大王의 일은 영영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六國을 봉하게 되면 大王을 따르는 여러 신하들은 모두 자기 故國의 군주를 따라갈 것이니, 大王께서는 누구와 천하를 다투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劉邦은 이에 먹던 밥을 뱉고 酈食其를 꾸짖으며 새겨놓았던 제후왕의 印章을 즉시 녹여 없애게 하였다. 《史記 留侯傳》
역주5 韓彭英盧 : 漢나라 高祖의 功臣인 韓信․彭越․英布와 高祖와 한 마을에 살아 친했던 盧綰으로, 高祖는 천하를 통일한 다음 韓信을 楚王에, 彭越을 梁(魏)王에, 英布를 九江王에, 盧綰을 燕王에 봉하였다.
역주6 柳宗元曰……勢也 : 柳宗元은 唐나라의 文章家로 字는 子厚이다. 古文운동으로 韓愈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封建한 것은 聖人의 本意가 아니니, 형세를 따른 것이다.”라는 말은 그가 지은 〈封建論〉에 보인다.
역주7 曹元首陸機劉頌 : 元首는 曹景의 字이며, 魏나라 少帝의 族祖이다. 일찍이 〈六代論〉을 지었는데, 여기에 “夏․商․周는 건국한 다음 수십 대를 전하였으나 秦나라는 2대에 망하였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三代의 군주들은 封建을 하여 백성들을 천하와 함께 소유하였으므로 천하가 우환을 함께하였는데, 秦王은 封建을 하지 않고 홀로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구원해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陸機는 晉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士衡이며 吳郡 吳縣 사람이다. 일찍이 〈五等諸侯論〉을 지었는데, 여기에 “다섯 등급의 諸侯를 세우는 제도는 黃帝와 唐堯 때에 시작되었고, 郡縣의 제도는 秦․漢時代에 시작되었다. 先王은 帝王의 基業이 지극히 소중하고 천하가 지극히 넓음을 알았기 때문에 다섯 등급의 제후를 세웠으니, 이는 다스림을 넓힌 것이었다. 그런데 멸망한 秦나라로 내려와서는 道德을 버리고 술수에만 맡겨 周나라의 잘못을 징계하여 郡縣제도를 만들고서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자랑하였다. 秦나라가 빨리 망하고 혼란했던 이유는 비록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위태로운 발단은 실로 封建을 하지 않아 孤立한 데에서 연유했다.”라고 하였다. 다섯 등급의 제후는 公․侯․伯․子․男을 이른다. 劉頌 역시 晉나라 武帝에게 封建을 찬성하는 上疏를 올렸다. 이상의 내용은 《文選》과 《晉書》 〈劉頌列傳〉에 각각 보인다.
역주8 唐太宗時魏徵李百藥顔師古 : 唐나라 太宗은 천하가 평정된 다음 재상 蕭瑀 등과 함께 封建하는 일을 논하였는데, 魏徵과 李百藥은 封建제도를 반대하였으나 顔師古는 제후들을 封建하되, 나라를 작게 하여 郡縣제도와 함께 뒤섞어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魏徵과 李百藥은 모두 唐나라의 名臣이며, 顔師古는 《漢書》에 注를 낸 사람이다.
역주9 劉秩杜佑柳宗元 : 劉秩은 唐나라 玄宗 때의 학자로 《政典》을 저술하였다. 則天武后의 禍를 들어 주장하기를 “郡縣제도가 조금은 편안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편안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는데, 曹景과 陸機의 논과 대동소이하였다. 그러나 杜佑와 柳宗元은 고금의 역사를 근거로 封建제도를 비판하였다. 杜佑는 “제후국을 세우는 제도는 처음에는 반석처럼 견고해 보이지만, 피폐해지면 나라가 각각 鼎立하여 다투어서 침체한 뒤에야 끝나기 때문에 폐해가 길다. 郡縣제도는 처음에는 천하가 통일되어 좋으나, 피폐해지면 민란이 일어나 모두 궤멸된다. 그러나 난을 다스려 평정하기 쉽기 때문에 폐해가 짧다.”라고 하였다. 杜佑는 唐나라 代宗, 德宗 때의 博學多才한 문인으로 《通典》을 지은 인물이다. 柳宗元은 〈封建論〉에서 “봉건제도는 본래 聖人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堯․舜과 三代時代를 지나도록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는 제거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형편상 제거할 수 없어서였다. 秦나라가 六國을 깨뜨리고 守令과 邑宰를 설치하여 천하의 지도를 살펴보고 四海를 통치하였으니, 이것이 맞는 제도이다.”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이 문제가 통일되지 않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았다. 程伊川(程頤)은 封建제도를 지지하였으며, 朱子 역시 초년에는 封建制를 옹호하였으나, 말년에는 “지금 세상에는 시행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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