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任法 不如任人이요 而篇終 專取諸葛之治蜀 王猛之治秦하니 蓋爲英廟之初當熙寧時하야
覽東坡所自爲辨策問箚子하면 得之니라
臣聞 聖王之治天下 使天下之事 各當其處而不相亂하고
天下之人으로 各安其分而不相躐하니
然後 天子得優游無爲而制其上이라하니이다
今也 不然하야 夷狄抗衡 本非中國之大患이어늘 而每以累朝廷이라
是以 徘徊擾攘하야 卒不能有所立이니이다
今委任而責成하야 使西北으로 不過爲未誅之寇 則中國 固吾之中國이니 而安有不可爲哉잇가
於此之時 臣知天下之不足治也니이다
請言當今之勢호리이다
夫天下有二患하니 有立法之弊하고 有任人之失이라
二者 疑似而難明하니 此天下之所以亂也니이다
當立法之弊也하야는 其君 必曰 吾用某也로되 而天下不治하니 某不可用也라하고
又從而易之하야 不知法之弊하고 而移咎于其人하며
及其用人之失也하야는 又從而尤其法하야 法之變 未有已也하니
如此 則雖至于覆敗하야 死亡相繼라도 而不悟하나니 豈足怪哉잇가
昔者漢興 因秦以爲治하야 刑法峻急하고 禮義消亡하야 天下蕩然하니 恐後世無所執守
賈誼, 董仲舒咨嗟嘆息하야 以立法更制爲事하니
後世 見二子之論하고 以爲聖人治天下 凡皆如此
是以 腐儒小生 皆欲妄有所變改하야 以惑世主하니이다
竊以爲當今之患 雖法令有所未安이나 而天下之所以不大治者 失在於任人이요 而非法制之罪也라하노이다
國家法令 凡幾變矣 天下之不大治 其咎果安在哉잇가
曩者 大臣之議 患天下之士 其進不以道하고 而取之不精也
爲之法하야 曰 中年而擧하고 取舊數之半하고 而復라하며
患天下之吏 無功而遷하고 取高位而不讓也
此二者 其名甚美 而其實 非大有益也어늘
而議者欲以此等으로 致天下之大治하니 竊以爲過矣라하노이다
夫法之於人之於樂也하니 法之不能無姦 猶五聲六律之不能無淫樂也
先王知其然이라 存其大略하고 而付之於人하야 苟不至於害人이요 而不可彊去者 皆不變也하니이다
曰 失在任人而已라하노이다
夫有人而不用 與用而不行其言 行其言而不盡其心 其失 一也니이다
古之興王 一人而已
湯以하시고 武王以하사 皆捐天下以與之하시니 而後 伊, 呂得捐其一身하야 以經營天下하야 君不疑其臣하고 功成而無後患이라
是以 知無不言하고 言無不行하야 其所欲用이면 雖其親愛라도 可也 其所欲誅 雖其讐隙이라도 可也하야 使其心無所顧忌
能盡其才하야 而責其成功하니이다
及至後世之君하야는 始用區區之小數하야 以繩天下之豪俊이라
雖有國士 而莫爲之用이니이다
夫賢人君子之欲有所樹立하야 以著不朽於後世者 甚於人君이로되
顧恐功未及成 而有所奪하야 祗以速天下之亂耳 之事 斷可見矣니이다
夫奮不顧一時之禍하고 決然徒欲以身試人主之威者 亦以其所挾者不甚大也 斯固未足與有爲
而沈毅果敢之士 又必有待而後發하나니 苟人主不先自去其不可測하야 而示其可信이면 則彼孰從而發哉리잇고
方其深思遠慮하야 而未有所發也하야는 雖天子라도 亦遲之하시고 至其一旦發憤하야 條天下之利害하야는 百未及一二 而擧朝喧譁하야 以至於逐去하야 曾不旋踵하니
此天下之士 所以相戒而不敢深言也니이다
居今之勢하야 而欲納天下於至治인댄 非大有所矯拂於世俗이면 不可以有成也니이다
何者
天下獨患柔弱而不振하고 怠惰而不肅하고 苟且偸安而不知長久之計하니
臣以爲 宜如 하야 使天下悚然하야 人人不敢飾非하고 務盡其心이니 凡此者 皆庸人之所大惡 而讒言之所由興也
夫天下 未嘗無二子之才也
而人主思治 又如此之勤하야 相須甚急이로되 而相合甚難者 獨患君不信其臣하고 而臣不測其君而已矣니이다
惟天子一日慨然明告執政之臣所以欲爲者하야 使知人主之深知之也하야 而內爲之信이니 然後 敢有所發於外而不顧리이다
不然이면 雖得賢人千萬하고 一日百變法이라도 天下益不可治하야 歲復一歲而終無以大慰天下之望하리니 豈不亦甚可惜哉잇가
唐荊川曰
無沮善篇 嚴密하고 此篇 疏暢하야 各自爲體하니라
只因當時韓魏, 富鄭, 杜祁諸公 紛紛外逐하야 而不能久於其朝 有此議하니라


03. 책략策略 3
에 맡기는 것이 사람에게 맡기는 것만 못한바, 끝에는 오로지 제갈량諸葛亮을 다스린 것과 왕맹王猛나라를 다스린 것을 취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영묘英廟(영종英宗) 초년과 희령熙寧 연간을 당하여 시국時局이 물에 물을 탄 것과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파東坡가 스스로 지은 책문策問차자箚子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들으니, “성왕聖王천하天下를 다스릴 적에 천하天下의 일로 하여금 각각 제자리에 합당하여 서로 어지럽히지 않고,
천하天下의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그 직분을 편안히 여겨 서로 건너뛰지 않게 하였으니,
그런 뒤에 천자天子가 한가로워 하는 일 없이 위에서 통제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오랑캐들이 대항하는 것은 본래 중국의 큰 문제가 아닌데도 매번 이 때문에 조정에 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회하고 소요騷擾해서 끝내 성립하는 바가 있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오랑캐들을 제어하는 임무를 한 사람에게 전담시키고 성공을 책임지워서 서북西北 지방으로 하여금 아직 토벌하지 않은 오랑캐에 지나지 않게 한다면, 중국은 진실로 우리의 중국이니, 어찌 다스리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된 때에는 천하天下를 굳이 어렵게 다스릴 것이 없음을 압니다.
이 청컨대 지금의 형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천하天下에 두 가지 병통이 있으니, 을 잘못 세운 병폐가 있고 사람을 제대로 임용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비슷해서 밝히기가 어려우니, 이 때문에 천하天下가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을 잘못 세운 병폐가 있을 적에는 군주가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아무개를 등용하였으나 천하天下가 다스려지지 못하니, 이는 아무개가 등용할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또 따라서 사람을 바꾸어 의 병폐를 알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사람을 잘못 등용함에 이르러서는 또 따라서 법에 허물을 돌려서 의 변경이 그칠 때가 없습니다.
이와 같다면 비록 나라가 경복傾覆하고 패망함에 이르러 죽음과 멸망이 서로 계속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이니, 어찌 이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옛날 나라가 일어나자, 나라의 정치를 그대로 인습하여 형벌刑罰이 준엄하였고 예의禮義가 사라져서 천하天下에 도덕이 없어지니, 후세에 잡아 지킬 바가 없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가의賈誼동중서董仲舒가 이것을 서글퍼하고 탄식하여 법을 확립하고 제도를 바꾸는 것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서는 두 사람의 의논을 보고 성인聖人천하天下를 다스리는 것이 모두 다 이와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리타분한 선비와 하찮은 유생儒生들이 모두 함부로 법령을 바꾸고 고쳐서 세상의 군주를 미혹시켰습니다.
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지금의 병폐는 비록 법령에 온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나, 천하天下가 크게 다스려지지 못하는 까닭은 잘못이 사람을 임용하는 데에 있고 법제法制의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국가國家법령法令이 모두 몇 번이나 변경되었으니, 천하天下가 크게 다스려지지 못한 것은 그 잘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난번 대신大臣들의 의논은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정도正道대로 진출하지 않고 선비를 선발하는 데에 정밀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을 개정하기를 “격년隔年마다 과거科擧를 실시하고 옛날 숫자의 절반만 뽑으며 명경과明經科를 회복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하天下의 관리들이 이 없이 승진하고 높은 지위를 취하면서도 사양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을 만들기를 “마땅히 승진할 자는 유사有司가 임금에게 보고하게 하고 스스로 자기 공로를 아뢰는 자는 죄가 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명칭은 매우 아름다우나 실상은 크게 유익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의논하는 자들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천하天下를 크게 다스리고자 하니, 은 적이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음악音樂에 있어서 오성五聲육률六律과 같으니, 에 간사함이 없지 못한 것은 오성五聲육률六律에 음탕한 음악이 없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선왕先王은 이러함을 아셨기 때문에 법의 대략만을 남겨두고 이것을 사람에게 맡기시어, 진실로 백성을 해롭게 함에 이르지 않았고 또 억지로 제거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모두 그대로 두고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하기를 “잘못이 사람에게 맡기는 데 있을 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있는데도 등용하지 않는 것과 등용했으면서 그의 말을 시행하지 않는 것과 그의 말을 시행하면서도 그의 마음을 다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잘못이 똑같습니다.
옛날 나라를 일으킨 제왕들은 재상 한 명을 얻으면 충분하였습니다.
성탕成湯이윤伊尹을 얻어 중용하였고 무왕武王태공太公을 얻어 중용하여 모두 천하天下의 일을 관여하지 않고 그에게 맡겨주었으니, 그런 뒤에 이윤伊尹여상呂尙(태공太公)이 자기 한 몸을 돌아보지 않고 천하天下를 경영하여, 군주는 신하를 의심하지 않고 신하는 이 이루어져도 후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하면 시행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자기가 등용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비록 친애하는 사람이라도 괜찮고 자기가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면 비록 자기의 원수라도 괜찮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하가 재주를 다하여 군주가 그에게 성공을 책임지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군주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구구한 작은 술수를 써서 천하天下의 호걸들을 묶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국사國士가 있더라도 그를 위하여 쓰이지 않은 것입니다.
현인賢人군자君子공업功業을 세워 불후의 사업을 후세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군주보다도 더합니다.
다만 이들은 이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빼앗기는 바가 있어서 다만 천하天下의 환란을 부를까 두려워하였으니, 조조晁錯의 일에서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 분발하여 한때의 를 돌아보지 않고, 결연히 자기 한 몸을 가지고 군주의 위엄을 시험하고자 하는 자들은 또한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이 그리 크지 못하니, 군주는 이들과 함께 진실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침착하고 굳세고 과감한 선비들은 또 반드시 군주가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다린 뒤에 나타나니, 만일 군주가 먼저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의심을 제거하여 믿을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저들이 어디로부터 나타나겠습니까?
경력慶曆 연간에 천자天子가 하루빨리 천하天下를 잘 다스리고자 하여 원로대신을 발탁해서 등용하시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밤낮으로 성공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느라 자신의 경륜을 나타내기 전에는 비록 천자天子라도 더디게 여기셨고,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천하天下이해利害를 조목조목 드러냄에 이르러는 백 가지 중에 한두 가지에도 못 미쳤는데 온 조정의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비난하여 발길을 돌릴 겨를도 없이 대번에 쫓겨났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깊이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으로 천하天下를 지극히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세속과 크게 어긋나는 바가 있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천하天下의 병폐는 오직 유약하여 떨치지 못하고 나태하여 엄숙하지 못하고 구차하여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며 고식적으로 편안함을 도모하여 장구長久한 계책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제갈량諸葛亮을 다스리고 왕맹王猛나라(전진前秦)를 다스린 것과 같이 하여, 천하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송연悚然하여 사람마다 감히 자신의 잘못을 꾸미지 않고 되도록 자기 마음을 다하게 해야 하니, 무릇 이것은 모두 용렬한 사람들이 크게 싫어하는 바이고, 참소하는 말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촉한蜀漢선주先主(유비劉備)가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이간을 막은 뒤에야 제갈공명諸葛孔明(제갈량諸葛亮)이 그 재주를 다할 수 있었고, 나라 부견苻堅왕맹王猛을 비난하는 번세樊世를 목베고 구등仇騰을 쫓아내고 석보席寶를 내친 뒤에야 왕맹王猛공업功業을 끝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하天下에 일찍이 제갈량諸葛亮왕맹王猛 두 사람과 같은 재주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군주들의 소망이 또 이와 같이 간절해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필요로 함이 이처럼 급하였는데도,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것은 오직 군주가 신하를 믿지 못하고 신하가 군주의 마음을 측량하지 못할까 걱정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바라건대 천자天子께서 어느 날 개연慨然집정대신執政大臣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분명히 일러주어서 집정대신으로 하여금 군주가 자신을 깊이 인정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마음속으로 군주를 신임하게 해야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집정대신이 감히 재능을 밖에 드러내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천만 명의 현인賢人을 얻고 하루에 백 번 을 변경한다 하더라도 천하天下는 더욱 다스려지지 못하여 해가 갈수록 천하天下 사람들의 기대를 크게 위로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심히 애석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이 말하였다.
“〈무저선無沮善〉편은 문장이 엄밀嚴密하고 이 편은 소창疏暢하여 각각 별도로 하나의 문체文體를 이루고 있다.
다만 당시에 위국공 한기魏國公 韓琦정국공 부필鄭國公 富弼기국공 두연祁國公 杜衍제공諸公들이 분분紛紛히 밖으로 쫓겨나서 조정朝廷에 오래 있지 못하였으므로 동파東坡의 이러한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역주
역주1 策略 三 : 이 글은 仁宗 嘉祐 6년(1061)에 蘇軾이 올린 〈策略〉 5편 가운데 세 번째 글이다.
역주2 以水濟水 : 물에 물을 탄 것과 같아서 특별할 것이 없음을 이른다.
《晏子春秋》에 齊 景公이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梁丘據를 보고 晏嬰에게 “梁丘據는 나와 和하다.”라고 칭찬하자, 晏嬰이 이르기를 “梁丘據는 同이라고 하여야 하니, 어찌 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可라고 말씀하시는 것 중에 否가 있으면 신하가 否라는 의견을 올려서 그 可함을 이루어야 하고, 임금이 否라고 하시더라도 可함이 있으면 신하가 그 可하다는 의견을 올려서 그 否를 없애야 하니, 이 때문에 정사가 공평하여 백성들이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梁丘據는 그렇지 않아서 임금이 可라고 하시면 可라고 찬성하고, 임금이 否라고 하시면 또한 否라고 반대하니, 이는 마치 물에 물을 탄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마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和는 원래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는 것으로 可와 否를 따져 사리에 맞게 함을 이르며, 同은 무조건 남의 비위에 맞추어 아첨하는 것으로, 비유하면 물에 물을 탄 것과 같아 조화로운 맛이 나지 않음을 이른 것이다.
역주3 明經之科 : 科擧 시험의 하나로 唐代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5經, 3經, 2經 등의 名目이 있었는데 經義의 암송 능력을 시험하였다. 宋代에는 詩賦 등의 製述로 뽑는 것을 進士科라 하고 經學으로 뽑는 것을 明經科라고 하였다.
역주4 爲之法曰當遷者……自陳者爲有罪 : 宋 仁宗 嘉祐 연간에 문무관의 磨勘轉官에 관한 제도를 개혁한 것을 이른다. 磨勘은 정기적으로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고과하여 승진을 결정하는 제도이며, 轉官은 다른 관직으로 옮겨 승진시키는 것인데, 宋나라 때에는 관리들이 3년의 임기를 마감하고 큰 허물이 없으면 승진할 수 있었다.
嘉祐 2년(1056) 5월에 審官三班院에 명하여 이전에 문무관이 직접 글을 올려서 磨勘轉官을 청하던 제도는 청렴하고 지조 있는 선비에게 불리하므로 이후로는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지 못하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審官三班院은 審官院과 三班院의 합칭으로 宋나라 초기에 관리를 심의하는 기구들이다. 審官院은 뒤에 東․西 두 원으로 나누어 審官東院은 문관을, 審官西院은 무관을 심의하였으며 三班院은 供奉 이하를 관장하였다.
역주5 五聲六律 : 五聲은 옛날 음악의 5개의 음계인 宮․商․角․徵․羽를 이르는데 五音이라고도 한다. 六律은 옛날 음악에서 소리의 고저와 청탁, 음조를 분별하던 준칙인 12律 가운데 陽聲에 속하는 것으로 黃鍾․大簇․姑洗․蕤賓․夷則․無射을 이르며, 陰聲에 속하는 것은 六呂로 夾鍾․仲呂․林鍾․南呂․應鍾․大呂이다. 그러나 12律은 12개월에 맞추어 제정한 것으로 六律은 통상 六呂를 포함하여 12律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역주6 伊尹 : 商나라를 개국한 成湯의 재상이다.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고 이름은 摯이다. 후세의 冢宰와 같은 阿衡을 맡아 成湯을 도와 夏나라 桀王을 정벌하고 商나라를 개국하였다. 周나라의 周公과 姜太公(呂尙)과 함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재상으로 알려져 伊周 또는 伊呂로 칭해진다.
역주7 太公 : 周나라를 개국한 武王의 재상으로 성이 姜이고 이름이 尙이고 氏가 呂이고 또 다른 이름은 望이어서 太公望, 呂望, 呂尙으로 불렸다. 殷나라 말기 난세를 피하여 渭水에서 낚시질하다가 周나라 文王인 姬昌을 만나 國師로 기용되어 周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文王이 죽고 武王 發이 즉위하자 800명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殷나라 紂王을 공격하여 牧野의 一戰으로 통일천하를 이룩하였다.
역주8 晁錯 : 晁는 ‘鼂’로도 쓰는데, 漢나라의 文帝와 景帝 때의 文臣이며 학자이다. 申不害, 商鞅 등의 刑名學을 배웠고 벼슬이 御史大夫에 이르렀다. 景帝 때에 御史大夫가 되자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여 天子國을 높이려 하다가 제후들에게 미움을 샀다. 吳와 楚 등 7國이 晁錯의 죄를 따진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景帝는 이들에게 해명하여 반란을 중지시키기 위해 晁錯를 거리에서 참수하였다. 《漢書 晁錯傳》
역주9 慶曆中天子急於求治……曾不旋踵 : 慶曆은 仁宗의 연호로 이때 范仲淹, 富弼, 韓琦 등을 중용하여 政治의 改革을 추진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范仲淹과 富弼이 朋黨으로 몰려 축출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역주10 諸葛亮之治蜀 : 諸葛亮(181~234)은 삼국시대 蜀漢의 丞相으로 字가 孔明이고 琅邪 陽都 사람으로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저명한 정치가, 전략가이다.
그는 襄陽의 隆中에 은거해 있었는데, 劉備가 草廬에 세 번 방문하자, 이에 감복하여 軍師가 되어 劉備를 섬겼다. 荊州와 四川의 益州를 차지하고 劉備가 蜀漢의 황제로 등극하자 재상이 되어 모든 정사를 주관하였는데 상벌을 분명히 하였으며, 屯田制를 시행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였다.
劉備가 죽고 난 뒤 後主 劉禪을 도와 天下를 통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며, 後主 建興 12년(234)에 北伐하여 五丈原에서 魏나라의 司馬懿와 대치해 있다가 병으로 쓰러져 죽었다. 죽은 뒤에 武侯라는 시호를 받아 諸葛武侯로 통한다.
역주11 王猛之治秦 : 王猛은 남북조시대 前秦의 3대 황제 苻堅의 재상이다. 字가 景略이며 東晉 明帝 太寧 3年(325)에 青州 北海郡 劇縣에서 태어났다.
큰 뜻을 품은 채 華陰山에 은거하며 飛翔할 때를 기다렸는데, 東晉의 大將軍 桓溫이 찾아오자 베옷을 입고 이를 잡으면서 天下의 일을 막힘없이 논하였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桓溫이 자신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前秦의 황제 苻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예의를 극진히 갖추고 청하자, 마침내 출사하여 재상이 되어 前秦을 당대에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다.
역주12 先主拒關張之間而後 孔明得以盡其才 : 先主는 劉備를 이르고 關張은 劉備의 義兄弟로 蜀漢의 명장들인 關羽와 張飛를 가리킨다. 諸葛亮에 대한 劉備의 신임이 날로 돈독해지자, 關羽와 張飛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諸葛亮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劉備가 “내가 孔明을 만난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니, 그대들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자, 關羽와 張飛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三國志 諸葛亮傳》
역주13 苻堅斬樊世……王猛得以畢其功 : 樊世는 氐族 출신으로 前秦의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워 姑臧侯에 봉해진 功臣이다. 仇騰은 당시 尙書로, 席寶는 長史로 있었다.
苻堅의 王猛에 대한 신임이 날로 깊어져 조정의 모든 일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자, 重臣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樊世가 御前에서 王猛을 모욕하자 苻堅은 樊世의 목을 베었으며, 仇滕과 席寶가 자주 王猛을 참소하자, 苻堅은 이들을 각각 甘松護軍과 白衣領長史로 좌천시켜 王猛의 입지를 굳건하게 해주었다. 이로부터 王猛은 전권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 五胡十六國 가운데 가장 강성한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 《晉書 王猛傳》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