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1)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辨晳이라
伏見九月二十二日하니 俟郊禮畢하야 集官詳議祠皇地祇事 及郊祀之歲 廟饗典禮聞奏者하니이다
臣恭覩 陛下近者 至日親祀郊廟하시니 神祇饗答하야 實蒙休應하니
然則圓丘合祭 允當天地之心이니 不宜復有改更이니이다
臣竊惟 議者欲變祖宗之舊하야 圓丘祀天而不祀地하니
不過以謂冬至祀天於南郊 陽時陽位也
夏至祀地於北郊 陰時陰位也
以類求神이면 則陽時陽位 不可以求陰也라하니 是大不然하니이다
冬至南郊 旣祀上帝 則天地百神 莫不從也니이다
古者 秋分 夕月於西郊하니 亦可謂陰位矣니이다
至於從祀上帝하야는 則以冬至而祀月於南郊 議者不以爲疑어늘 今皇地祇亦從上帝而合祭於圓丘 獨以爲不可라하니 則過矣니이다
舜之受禪也 自上帝 六宗山川群神 莫不畢告어늘 而獨不告地祇 豈有此理哉잇가
武王克商하시고 하시니 祭上帝也 祭山川也
一日之間 自上帝而及山川하니 必無南北郊之別也리니 而獨略地祇 豈有此理哉잇가
臣以知古者祀上帝 則幷祀地祇矣니이다
何以明之 라하니 此乃合祭天地 經之明文이어늘
而說者乃以比之豐年秋冬報也하야 曰 秋冬各報 而皆歌豐年하니 則天地各祀 而皆歌昊天有成命也라하니 是大不然하니이다
豐年之詩曰 豐年多黍多稌하야 亦有高廩하야 萬億及秭
爲酒爲醴하야 烝畀하야 以洽百禮하니 降福孔皆라하니
歌於秋可也 歌於冬亦可也니이다
昊天有成命之詩曰 昊天有成命이어늘 하시니라
成王不敢康하야 夙夜基命宥密하야
於緝熙하야 單厥心하야 肆其靖之라하야 終篇言天而不及地하니
所以告神明也 未有歌其所不祭하고 祭其所不歌也니이다
今祭地於北郊 歌天而不歌地 豈有此理也잇가
臣以此知周之世 祀上帝則地祇在焉하니 歌天而不歌地 所以尊上帝니이다
其序曰 郊祀天地也라하니이다
春秋 書不郊猶三望이라한대 左氏傳曰 望 郊之細也라하니
說者曰 三望 太山, 河, 海라하고 淮, 海也라하고 分野之星 及山川也라하니이다
諸侯也 郊之細 及其分野山川而已어니와 周有天下하니 則郊之細 獨不及五嶽四瀆乎잇가
嶽瀆猶得從祀어늘 而地祇獨不得合祭乎잇가
秦燔詩書하야 經籍散亡하야 學者各以意推類而已 之流 未必皆得其眞이니이다
臣以詩書春秋考之하면 則天地合祭久矣니이다
議者乃謂 合祭天地 始於하니 以爲不足法이라하니이다
臣竊謂 禮當驗其是非 不當以人廢니이다
光武皇帝 親誅莽者也로되 尙采用元始合祭故事하니이다
謹按 初制郊兆於洛陽하야
爲圓壇八陛하고 中又爲重壇하야 이라하니
此則漢世合祭天地之明驗也니이다
又按 伊水東北至洛陽縣圓丘東하니 大魏郊天之所
準漢故事하야 爲圓壇八陛하고 中又爲重壇하야 天地位其上이라하니
此則魏世合祭天地之明驗也니이다
할새 賈曾議曰 하고 夏后氏 禘黃帝而郊鯀하니
郊之與廟 皆有禘하니 禘於廟 則祖宗 合食於太祖하고 禘於郊 則地群祇望 皆合於圓丘호되 以始祖配享하니 蓋有事祭 非常祀也니이다
祭於圓丘호되 上帝后土位皆南面이라하니 則漢嘗合祭矣라하니이다
皆以曾言爲然하니이다
明皇天寶元年二月 勅曰 凡所祠享 必在躬親하리니 朕不親祭 禮將有闕이라
其皇地祇 宜如南郊合祭하라하고 是月二十日 合祭天地於南郊러니
自後 有事於圓丘 皆合祭하니 此則唐世合祭天地之明驗也니이다
今議者欲冬至祀天하고 夏至祀地하니 蓋以爲用周禮也 臣請言周禮與今禮之別하노이다
古者 이요 이요 爲此十五者 皆天子親祭也
而又朝日, 夕月 四望山川 社稷, 及群小祀之類 亦皆親祭하니 此周禮也니이다
太祖皇帝 受天眷命하사 肇造宋室하시니 建隆初郊 先饗宗廟하고 竝祀天地하시며
自眞宗以來 三歲一郊호되 必先有事하고 徧饗太廟하고 乃祀天地하시니 此國朝之禮也니이다
夫周之禮 祭如彼其多로되 而歲行之 不以爲難하고 今之禮 親祭如此其少로되 而三歲一行 不以爲易 其故何也
古者 天子出入 儀物不繁하고 兵衛甚簡하고 用財有節하며 而宗廟在大門之內하여 朝諸侯하고 出爵賞 必於太廟하니 不止時祭而已니이다
天子所治 不過王畿千里하야 唯以齊祭禮樂으로 爲政事하니 能守此 則天下服矣
是故 歲歲行之하야 率以爲常하니이다
至於後世하야는 海內爲一하야 四方萬里 皆聽命於上하야
機務之繁 億萬倍於古하야 日力有不能給하니이다
自秦漢以來 天子儀物 日以滋多하야 有加無損하야 以至於今하니 非復如古之簡易也니이다
今所行 皆非周禮
三年一郊 非周禮也 先郊二日而告하고 一日而祭太廟 非周禮也 郊而肆赦 非周禮也 優賞諸軍 非周禮也 自后妃以下 至文武官 皆得陰(蔭)補親屬 非周禮也 自宰相宗室以下 至百官 皆有賜賚 非周禮也니이다
此皆不改하고 而獨於地祇하야는 則曰 周禮不當祭於圓丘라하니 此何義也잇고
議者必曰 今之寒暑 與古無異어늘하야 六月出師하니 則夏至之日 何爲不可祭乎아하니
臣將應之曰 하니 亦今之寒暑也어늘 後世人主能行之乎
周所以十二歲一巡者 唯不能如舜也니이다
夫周已不能行舜之禮어늘 而謂今可以行周之禮乎잇가
天之寒暑雖同이나 而禮之繁簡則異
是以 有虞氏之禮 夏商有所不能行하고 夏商之禮 周有所不能用하니 時不同故也니이다
宣王以六月出師하야 驅逐玁狁 蓋非得已爲將하고 王不親行也어늘
今欲定一代之禮하야 爲三歲常行之法 豈可以六月出師爲比乎잇가
議者必又曰 夏至 不能行禮 則遣官攝祭祀 亦有故事라하니 非臣之所知也니이다
周禮大宗伯 若王不與 則攝位라하니 鄭氏注曰 王有故 則代行其祭祀라하고 賈公彦疏曰 有故 謂王有疾及哀慘 皆是也라하니
然則攝事 非安吉之禮也니이다
後世人主不能歲歲親祭 命有司行事하니 其所從來久矣니이다
若親郊之歲 遣官攝事 無故而用有故之禮也니이다
議者必又曰 省去繁文末節이면 則一歲可以再郊라하니
臣將應之曰 古者 以親郊爲常禮 無繁文이어니와 今世 以親郊爲大禮하니 則繁文 有不能省也
若帷城幔屋 盛夏則有風雨之虞
陛下自宮入廟出郊 冠通天하고 乘大(太)輅하고 日中而舍하시며 百官衛兵 暴露於道하고 鎧甲具裝하야 人馬喘汗하니 皆非夏至所能堪也니이다
王者父事天하고 母事地하야 不可偏也 事天則備하고 事地則簡 是於父母 有隆殺也 豈得以爲繁文末節이라하야 而一切欲損去乎
國家養兵 異於前世
自唐之時 未有軍賞이로되 猶不能歲歲親祠(祀)
天子出郊 兵衛 不可簡省이요 大(太)輅一動이면 必有賞給이라
今三年一郊 傾竭帑藏이로되 猶恐不足하니 郊賚之外 豈可復加리오
若一年再賞이면 國力將何以給이리오
分而與之 人情豈不失望이리오하리이다
議者必又曰 三年一祀天하고 又三年一祀地라하니 又非臣之所知也니이다
三年一郊 已爲疏闊이어늘 若獨祭地而不祭天이면 因事地而愈疏於事天이니 自古 未有六年一祀天者
如此則典禮愈壞하니 欲復古而背古益遠이면 神祇必不顧饗하리니 非所以爲禮也니이다
議者必又曰 當郊之歲하여 則可以免方暑擧事之患이라하니 又非臣之所知也니이다
夫所以議此者 爲欲擧從周禮也 今以十月 易夏至하고 以神州 代方澤이면 不知此周禮之經耶잇가 抑變禮之權耶잇가
若變禮從權而可 則合祭圓丘 何獨不可리잇고
十月 親祭地하고 十一月 親祭天하야 先地後天 古無是禮 而一歲再郊 軍國勞費之患 尙未免也리이다
議者必又曰 當郊之歲하야 以夏至 祀地祇於方澤호되 上不親郊하고하야 天子於禁中望祀라하니 又非臣之所知也니이다
皆謂山川在境內 而不在
遠望而祭也니이다
今所在之處 俛(俯)則見地어늘 而云望祭 是爲京師不見地乎잇가
此六議者 合祭可否之決也니이다
夫漢之郊禮 尤與古戾하고 唐亦不能如古하니이다
本朝祖宗 欽崇祭祀하사 儒臣禮官 講求損益하니 非不知圓丘方澤 皆親祭之爲是也 蓋以時不可行이라
是故 參酌古今하야 上合典禮하고 下合時宜하니 較其所得하면 已多於漢唐矣니이다
天地宗廟之祭 皆當歲徧이로되 今不能歲徧이라 是故 徧於三年當郊之歲하고 又不能於一歲之中 再擧大禮 是故 徧於三日하니 此皆因時制宜 雖聖人復起라도 不能易也리이다
今竝祀 不失親祭로되 而北郊則必不能親往하리니 二者孰爲重乎잇가
若一年再郊而遣官攝事 是長不親事地也 三年間郊 當行郊地之歲하야 而暑雨不可親行하야 遣官攝事 則是天地皆不親祭也니이다
夫分祀天地 決非今世之所能行이니이다
議者不過欲於當郊之歲 祀天地宗廟 分而爲三耳니이다
分而爲三 有三不可하니 夏至之日 不可以動大衆, 擧大禮 一也 軍賞 不可復加 二也 自有國以來 天地宗廟 唯饗此祭하고 累聖相承하야 唯用此禮하니 此乃神祇所歆이요 祖宗所安이니 不可輕動이라
動之則有吉凶禍福하야 不可不慮 三也니이다
凡此三者 臣熟計之컨대 無一可行之理하니 伏請從舊爲便하노이다
伏望陛下詳覽臣此章하시면 則知合祭天地 乃是古今正禮 本非權宜시리이다
不獨初郊之歲 所當施行이라 實爲無窮不刊之典이니이다
願陛下謹守太祖建隆, 神宗熙寧之禮하야 無更改易郊祀, 廟饗하야 以敉寧上下神祇하시고 仍乞下臣此章하야 付有司集議호되 如有異論이면 卽須畫一解破臣所陳六議하야 使皆屈伏하시면
上合周禮하고 下不爲當今軍國之患하야 不可固執하야 更不論當今可與不可施行이니이다
所貴 嚴祀大典 以時定이니이다
取進止하소서
蘇氏諸箚中 此箚爲最
歷覽宋時廷議컨대 亦無有能及之者하니 當與西漢韋元成, 劉歆等廟議 相伯仲이니라


05. 원구圓丘에서 합제合祭하는 여섯 가지 의논을 올린 차자箚子
분변이 명석하다.
이 9월 22일에 내린 조서詔書절문節文을 엎드려 보니, “교사郊祀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관원들을 모아 황지기皇地祇(土地神)에게 제사하는 일과 교사郊祀하는 해에 태묘太廟에 제향하는 전례典禮를 자세히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이 엎드려 보건대 폐하께서 근자에 동짓날 교사郊祀태묘太廟에서 제사하셨는데, 천신天神지기地祇가 흠향하고 보답하여 실로 아름다운 응험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원구圓丘에서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합하여 제사함)하는 것은 더욱 하늘과 땅의 마음에 합당하니, 마땅히 다시 고쳐서는 안 됩니다.
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의논하는 자들이 조정의 옛 제도를 변경하여 원구圓丘에서 하늘에만 제사하고 땅에는 제사하지 않고자 합니다.
이는 ‘동지冬至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함은 의 때에 의 자리이고
하지夏至북교北郊에서 땅에 제사함은 의 때에 의 자리이니,
같은 종류로써 을 찾아보면 의 때와 의 자리에서 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여김에 불과할 뿐인데, 이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동지冬至남교南郊에서 상제上帝를 제사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들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옛날 추분秋分서교西郊에서 저녁에 달을 맞이하여 제사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의 자리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상제上帝종사從祀함에 있어서는 의논하는 자들이 동지冬至남교南郊에서 달에게 제사하는 것은 의심하지 않으면서, 이제 황지기皇地祇 또한 상제上帝종사從祀하여 원구圓丘에서 합제合祭하는 것은 유독 불가하다 하니, 이것은 잘못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상제上帝제사를 지내고 육종六宗제사를 지내고 산천山川제사를 지내며 여러 에게 두루 제사했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이 선양禪讓을 받았을 적에 위로는 상제上帝로부터 아래로는 육종六宗산천山川과 여러 에 이르기까지 다 고유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어찌 유독 지기地祇에게만 고유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무왕武王나라를 이기시고 경수일庚戍日을 지냈으니, 상제上帝에게 제사하는 것이고 산천山川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하루 사이에 위로는 상제上帝로부터 아래로는 산천山川에까지 미쳤으니, 반드시 남교南郊북교北郊의 구별이 없었을 터인데, 어찌 유독 지기地祇만을 생략할 리가 있겠습니까?
은 이로써 옛날 상제上帝에 제사할 적에 지기地祇를 함께 제사한 것을 미루어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를 증명할 수 있는가 하면, 《시경詩經》의 소서小序에 이르기를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은 교외郊外에서 하늘과 땅을 제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경문經文의 분명한 글입니다.
그런데 해설하는 자가 도리어 이 를 가지고 〈풍년豐年〉의 ‘가을과 겨울의 보답하는 제사’에 비하여 이르기를 “가을과 겨울에 각각 보답하는 제사를 지낼 적에는 모두 〈풍년豐年〉을 노래하니, 그렇다면 하늘과 땅을 각각 제사할 적에는 모두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을 노래한다.”라고 하니, 이것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풍년豐年〉의 에 이르기를 “풍년에 기장이 많고 벼가 많아, 또한 높은 곳집이 이거늘,
술을 빚고 단술을 만들어, 조비祖妣에게 나아가 올려서 온갖 를 모두 구비하니, 을 내리심이 심히 두루 하리로다.”라고 하였으니,
이 내용은 가을에 노래하는 것도 괜찮고 겨울에 노래하는 것도 또한 괜찮습니다.
그러나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에는 이르기를 “호천昊天이 이룬 이 있으시어, 두 임금께서 받으셨네.
성왕成王께서 감히 편안히 계시지 못하시어, 밤낮으로 을 다지기를 크게 하고 치밀하게 하셨네.
아! 이어 밝혀 그 마음을 다하시니, 이러므로 천하를 안정시키셨네.”라고 하여, 편을 마치도록 하늘만 말하고 땅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송시頌詩신명神明에게 고하는 것이니, 제사하지 않는 바를 노래하고 또 노래하지 않는 을 제사하는 일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교北郊에서 땅에 제사함에 어찌 하늘만 노래하고 땅을 노래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 이로써 나라 시대에 상제上帝에게 제사하면 지기地祇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으니,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에 하늘만 노래하고 땅을 노래하지 않은 것은 상제上帝를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서小序에 이르기를 “교외郊外에서 하늘과 땅을 제사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교사郊祀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세 제사를 지냈다.”라고 썼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교사郊祀의 작은 일부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해설하는 자가 이르기를 “세 제사는 태산泰山황하黃河와 바다이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태산泰山과〉 회수淮水와 바다이다.”라고 하였고, 또 혹자는 “나라에 해당되는 분야分野의 별과 과 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라는 제후국이기 때문에 교사郊祀의 작은 일부분이 그 분야分野의 별과 에 미쳤을 뿐이지만, 나라는 온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교사郊祀의 작은 일부분이 어찌 오악五嶽사독四瀆에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오악五嶽사독四瀆도 오히려 종사從祀할 수 있는데, 유독 지기地祇합제合祭할 수 없단 말입니까?
나라가 를 불태워 경적經籍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학자들이 각각 자기 생각으로 유추했을 뿐이니, 왕숙王肅정현鄭玄, 가공언賈公彦복건服虔의 무리들이 반드시 모두 그 참된 뜻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춘추春秋》를 가지고 고찰하여 보건대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마침내 이르기를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한 것은 왕망王莽에게서 시작되었으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합니다.
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는 마땅히 그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것이고, 사람이 나쁘다 하여 이 때문에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광무황제光武皇帝는 직접 왕망王莽을 주벌한 분인데도 원시元始 연간에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한 고사를 그대로 채용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後漢書》 〈교사지郊祀志〉에 이르기를 “건무建武 2년(26)에 처음으로 교사郊祀의 터를 낙양洛陽에 만들어
원구圓丘 여덟 계단을 만들고 중앙에 또다시 이중의 을 만들어서 하늘과 땅이 그 위에 자리하였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고 서쪽을 위로 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 때에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또 살펴보건대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이수伊水 동북쪽으로 가면 낙양현洛陽縣 원구圓丘의 동쪽에 이르는데 이곳은 대위大魏(曹魏)가 하늘에 교사郊祀한 곳이니,
나라의 고사를 따라서 원구圓丘 여덟 계단을 만들고 중앙에 또다시 이중의 을 만들어 하늘과 땅이 그 위에 자리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 때에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한 분명한 증거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라 예종睿宗이 장차 남교南郊에 제사 지내려 할 적에 가증賈曾이 건의하기를 “유우씨有虞氏황제黃帝에게 체제禘祭를 지내고 제곡帝嚳에게 교사郊祀를 지냈으며, 하후씨夏后氏황제黃帝에게 체제禘祭를 지내고 에게 교사郊祀를 지냈습니다.
교사郊祀와 사당(종묘)에는 모두 체제禘祭가 있으니, 사당에서 체제禘祭를 지내면 태조太祖의 사당에서 합하여 흠향하며, 교사郊祀에서 체제禘祭를 지내면 지기地祇와 여러 제사의 들을 모두 원구圓丘에서 합제合祭하는데 시조始祖로써 배향配享하니, 이것은 일이 있을 때에 특별히 지내는 제사이고 매년 지내는 일정한 제사가 아닙니다.
삼보고사三輔故事》에 이르기를 “원구圓丘에서 제사하되 상제上帝후토后土의 자리가 모두 남향한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나라도 일찍이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무량禇无量곽산운郭山惲 등이 모두 가증賈曾의 말을 옳다고 했습니다.
나라 명황明皇(玄宗)의 천보天寶 원년元年(742) 2월에 칙명을 내리기를 “모든 은 반드시 이 몸소 친히 행할 것이니, 이 친히 제사하지 않으면 에 결함이 있게 될 것이다.
황지기皇地祇에도 마땅히 남교南郊에서 합제合祭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고는 이달 20일에 남교南郊에서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하였습니다.
이후로는 원구圓丘에서 제사 지내는 일이 있으면 모두 합제合祭하였으니, 이것은 나라 때에 하늘과 땅에 합제合祭한 분명한 증거라 하겠습니다.
이제 의논하는 자들이 동지冬至에 하늘에 제사하고 하지夏至에 땅에 제사하고자 하니, 이는 나라 를 따르려는 것인데, 나라 와 지금 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한 해에 하늘에 제사한 것이 세 번이고 명당明堂에서 상제上帝에게 제향한 것이 한 번이고 사시四時기후氣候를 맞이하여 제사한 것이 다섯 번이고 땅에게 제사한 것이 두 번이고 종묘에 제향한 것이 네 번으로, 이 열다섯 번의 제사는 모두 천자天子가 친히 제사하였습니다.
또 〈춘분春分에는〉 아침에 해를 맞이하여 제사하고 〈추분秋分에는〉 저녁에 달을 맞이하여 제사하며 사방으로 산천山川제사를 지내고 사직社稷오사五祀와 또 군소群小에 대한 제사에도 모두 천자天子가 친히 제사하였으니, 이것이 나라의 입니다.
태조황제太祖皇帝(趙匡胤)께서 하늘이 돌아보는 을 받으시어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셨는데, 건륭建隆 연간에 처음 교사郊祀를 지낼 적에 먼저 종묘宗廟에 제사하고 아울러 하늘과 땅에 제사하셨습니다.
진종眞宗 이래로 3년에 한 번씩 교사郊祀를 지냈는데 반드시 먼저 경령궁景靈宮에서 제사를 지내고 태묘太廟에서 두루 제향하였으며, 그런 뒤에 비로소 하늘과 땅에게 제사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국조國朝(宋나라)의 입니다.
나라 천자天子가 친히 제사함이 저와 같이 많은데도 해마다 행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지금의 는 친히 제사함이 이와 같이 적은데도 3년에 한 번 행하는 것을 쉽게 여기지 않으니, 그 연고는 어째서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천자天子가 나가고 들어올 적에 의장물儀仗物이 많지 않고 군대의 호위가 매우 간략하고 재물을 쓰는 것이 절제가 있었으며, 종묘宗廟가 대문(궁궐) 안에 있어서 제후들에게 조회받고 관작과 상을 내리는 것을 반드시 태묘太廟에서 하였으니, 다만 시제時祭를 지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곳은 왕기王畿가 천 리를 넘지 않아서 오직 재계하고 제사하고 예악禮樂을 다스리는 것으로 정사政事를 삼았으니, 이것만 잘 지키면 천하가 복종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매년 이것을 행하고 따라서 떳떳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해내海內가 하나가 되어 사방 만리萬里의 넓은 지역이 모두 황제의 명령을 듣습니다.
그리하여 기무機務의 많음이 옛날보다 억만 배나 늘어나서 일력日力(시간)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래로 천자의 의장물儀仗物은 더욱더 많아져서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 않아 지금에 이르렀으니, 다시 옛날처럼 간략하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시행하는 것은 모두 나라 가 아닙니다.
3년에 한 번 교사郊祀를 지내는 것도 나라 가 아니고, 교사郊祀를 지내기 이틀 전에 원묘原廟에 고유하고 하루 전에 태묘太廟에 제사하는 것도 나라 가 아니고, 교사郊祀를 지내고 사면령을 내리는 것도 나라 가 아니고, 호종한 군사들에게 넉넉하게 을 내리는 것도 나라 가 아니고, 후비后妃 이하 문무백관에 이르기까지 친족親族들에게 음보蔭補를 내리는 것도 나라 가 아니고, 재상과 종친으로부터 백관百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사恩賜가 있는 것도 나라 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바꾸지 않으면서 유독 지기地祇에 대해서만 “나라 에 의하면 마땅히 원구圓丘에서 제사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니, 이것이 무슨 의의意義입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지금의 추위와 더위는 옛날과 차이가 없는데 나라 선왕宣王험윤玁狁(匈奴)을 정벌하려고 6월에 군대를 출동하였으니, 그렇다면 하지夏至에 어째서 제사를 지낼 수 없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은 장차 여기에 응대하기를 “임금이 1년에 사악四岳을 순행하여 5월에 한창 더운데도 남쪽으로 형산衡山에 이르고 11월에 한창 추운데도 북쪽으로 상산常山(恒山)에 이르렀으니, 이때에도 또한 지금처럼 춥고 더웠는데, 후세의 군주가 이것을 행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12년에 한 번 순행한 것은 임금처럼 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라가 임금의 를 행하지 못했는데, 지금 우리가 나라의 를 행할 수 있다고 한단 말입니까?
하늘의 추위와 더위는 비록 똑같으나 의 번거롭고 간략함은 다릅니다.
이 때문에 유우씨有虞氏(舜)의 나라와 나라가 행하지 못한 것이 있었고, 나라와 나라의 나라가 쓰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이니, 이는 시대가 똑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왕宣王이 6월에 출병하여 험윤玁狁을 정벌한 것은 부득이해서였으며, 또 이때 윤길보尹吉甫가 장수로 군대를 거느렸고 왕이 직접 출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한 시대의 를 정하여 3년마다 떳떳이 행하는 법을 만들고자 하면서 어찌 나라 선왕宣王이 6월에 출병한 것을 가지고 비교한단 말입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또 말하기를 “하지夏至를 행할 수 없다면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대행하는 것 또한 고사가 있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은 이 알 바가 아닙니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이르기를 “만약 왕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섭위攝位한다.”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에 이르기를 “왕이 연고가 있으면 그 제사를 대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가공언賈公彦에 이르기를 “연고가 있다는 것은 왕이 질병이 있거나 또한 을 당하여 슬픔이 있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대행하는 것은 편안하고 길한 가 아닙니다.
후세의 군주들이 해마다 친히 제사할 수 없기 때문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으니, 그렇게 해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친히 교사郊祀를 지낼 해에 관원을 보내어서 제사를 대행하게 한다면 이는 연고가 없으면서 연고가 있을 적의 를 행하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또 말하기를 “번거로운 문식과 지엽적인 예절을 줄이면 1년에 두 번 교사郊祀를 지낼 수 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은 장차 응대하기를 “옛날에는 천자가 친히 교사郊祀 지내는 일을 떳떳한 라고 여겼기 때문에 번거로운 문식이 없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친히 교사郊祀를 지내는 것을 큰 로 여기고 있으니, 그렇다면 번거로운 문식을 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막으로 을 만들고 장막으로 지붕을 만드는 것은 무더운 여름철에는 비바람이 몰아칠 우려가 있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폐하께서 에서 사당으로 들어가고 교외로 나가실 적에 무거운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태로太輅를 타고 거동하시어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관사에 머무시며, 백관百官과 호위병들이 길에서 땡볕에 몸이 들어난 채로 투구와 갑옷을 갖추고 있어서 사람과 말이 헐떡거리며 땀을 흘리니, 이것은 모두 하지夏至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자王者는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고 땅을 어머니로 섬겨서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데, 하늘을 섬길 적에는 다 갖추고 땅을 섬길 적에는 간략히 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높이고 낮춤이 있는 것이니, 어찌 번거로운 문식과 지엽적인 예절이라 하여 일체를 다 덜어버리고자 한단 말인가?
그리고 국가에서 군대를 기르는 것은 전대前代와 다르다.
나라 때까지만 해도 군대에 을 내리지 않았으나 그때에도 천자가 매년 친히 제사하지 못하였다.
천자가 교외郊外로 나가게 되면 호위병을 줄일 수가 없고 태로太輅가 한 번 출동하면 반드시 상을 내리게 마련이다.
지금 3년에 한 번 교사郊祀를 지냄에 있어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다 써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우니, 재정의 형편상 교사郊祀을 내리는 것 외에 어찌 더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1년에 두 번 상을 내린다면 국가의 재력이 장차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눠서 상을 내린다면 인정人情이 어찌 실망하지 않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또 말하기를 “3년에 한 번 하늘에 제사하고 또 3년에 한 번 땅에 제사한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도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3년에 한 번 교사郊祀를 지내는 것도 이미 너무 드문 것인데 만약 홀로 땅에만 제사하고 하늘에는 제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땅을 섬긴다는 이유로 하늘을 섬기는 것을 더욱 소홀히 하는 것이니, 예로부터 6년에 한 번 하늘에 제사한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전례典禮가 더욱 파괴될 것이니, 옛날의 를 회복하고자 하면서 옛날과 위배되는 것이 더욱 심해진다면 신기神祇(天神과 지기地祇)가 반드시 돌아보고 흠향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를 행하는 바가 아닙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또 반드시 말하기를 “교사郊祀하는 해가 되어 10월 신주神州의 제사로 하지夏至방택方澤의 제사를 바꾸면, 한여름 더울 때에 제사를 거행하는 폐해를 면할 수 있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도 이 알 바가 아닙니다.
이것을 의논하는 까닭은 모두 나라 를 따르고자 해서인데, 지금 10월로 하지夏至를 바꾸고 신주神州방택方澤을 대신한다면,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 인지, 아니면 권도權道로써 변례變禮를 행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권도權道로써 변례變禮를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원구圓丘에서 합제合祭하는 것이 어찌 홀로 불가하단 말입니까?
황제가 10월에 친히 땅을 제사하고 11월에 친히 하늘을 제사해서 땅을 먼저 하고 하늘을 뒤에 하는 것은 옛날에 이런 가 없었고, 또 1년에 두 번 교사郊祀를 지내면 군국軍國의 수고로움과 비용이 많이 드는 폐해를 그대로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또 말하기를 “교사郊祀 지낼 해가 되어 하지夏至방택方澤에서 지기地祇를 제사하되 황상皇上께서 친히 교사郊祀를 지내지 않고 관화爟火를 통하여 천자가 궁중에서 바라보고 제사 지낸다.”라고 하니, 이것도 이 알 바가 아닙니다.
서경書經》의 망질望秩과 《주례周禮》의 사망四望과 《춘추春秋》의 삼망三望은 모두 제사하는 산천山川이 국경 안에 있고 저 사교四郊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 바라보고 제사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사 지낼 대상이 있는 곳은 고개를 숙이면 그 땅이 보이는 가까운 곳인데 이것을 망제望祭라고 한다면 경사京師에서 그 땅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 여섯 가지 의논은 합제合祭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나라의 교사郊祀하는 는 더욱 고례古禮와 어긋났고 나라 또한 옛날처럼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조종祖宗들이 제사를 높이고 공경하여 유신儒臣예관禮官들이 가감할 것을 강구講究하였으니, 원구圓丘방택方澤이 모두 황제皇帝께서 친히 제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때가 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금古今를 참작하여 위로는 전례典禮에 맞게 하고 아래로는 시의時宜에 맞게 하였으니, 그 얻은 바를 비교해보면 나라와 나라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하늘과 땅, 종묘宗廟의 제사는 다 마땅히 해마다 두루 제사해야 하지만 지금 해마다 두루 제사할 수 없기 때문에 3년마다 교사郊祀하는 해에 두루 제사하고, 또 1년 안에 두 번 큰 를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3일에 두루 제사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때에 따라 마땅하게 만든 것으로,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바꾸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하늘과 땅을 함께 제사하는 것은 천자天子가 친히 제사하는 를 잃지 않은 것이나 북교北郊에는 반드시 직접 가시지 못할 것이니, 사람을 시켜 한 해에 두 번 제사함과 친히 가시는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중합니까?
만약 1년에 두 번 교사郊祀를 지내면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대행하게 한다면 이것은 영원히 친히 땅을 섬기지 않는 것이요, 3년에 한 번씩 번갈아 하늘과 땅에 교사郊祀를 지내는데 땅에 교사郊祀할 해에 무더위와 비로 인해 황제가 친히 제사를 행하지 못하시고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대행하게 한다면 이것은 하늘과 땅을 다 친히 제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나누어 제사하는 것은 결코 지금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교사郊祀하는 해에 하늘과 땅과 종묘宗廟에 제사하는 것을 나누어 셋으로 만들고자 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나누어서 셋으로 만드는 것에는 세 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무더운 하짓날에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큰 를 거행할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군사들에게 더 이상 상을 줄 수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유요,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하늘과 땅과 종묘宗廟가 오직 이 제사만을 흠향하였고 여러 황제들이 서로 계승해서 오직 이 만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천신天神지기地祇가 흠향하는 바이고 조종祖宗의 영령들이 편안히 여기시는 바이니,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움직이면 길흉과 화복이 뒤따라서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바,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무릇 이 세 가지를 이 익숙히 따져보았는데, 한 가지도 행할 만한 이치가 없으니, 엎드려 청하건대 옛 제도를 따르시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옛날 서한西漢(前漢)이 쇠퇴했을 적에 원제元帝공우貢禹의 말을 받아들여서 종묘宗廟를 허물었고 성제成帝광형匡衡의 의논을 따라서 교사郊祀하는 자리를 고쳤는데, 모두 앙화가 있어서 이것이 역사책에 드러나 있으니, 지난날의 경계가 매우 분명하여 참으로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 이 글을 자세히 보신다면 하늘과 땅을 합제合祭하는 것이 바로 고금古今의 올바른 이고, 본래 마땅함을 저울질해서 임시방편으로 한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처음 교사郊祀하는 해에 마땅히 시행해야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무궁한 세대에 없앨 수 없는 규정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태조太祖건륭乾隆 연간과 신종神宗희령熙寧 연간의 를 삼가 지키시고, 다시 교사郊祀종묘宗廟의 제향을 바꾸지 말아서 상하上下(天地)의 신기神祇를 편안하게 하시며, 이어서 의 이 글을 내려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의논하게 하시되 만일 이론이 있으면 즉시 한결같이 이 아뢴 여섯 가지 의논으로 이해시켜 저들로 하여금 모두 굴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나라의 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현재의 군국軍國의 폐해가 되지 않게 하시어, 저들로 하여금 고집할 수 없게 해서 다시는 지금 시행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의논하지 않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중한 것은 엄숙한 제사의 큰 예전禮典을 제때에 정하시는 것입니다.
재량裁量하소서.
소씨蘇氏의 여러 차자箚子 가운데 이 차자箚子가 으뜸이다.
나라 조정의 의논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또한 여기에 미칠 만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서한시대西漢時代위원성韋元成유흠劉歆 등의 종묘宗廟에 대한 의논과 서로 백중伯仲이 될 만하다.


역주
역주1 上圓丘合祭六議箚子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元祐八年三月日 端明殿學士 兼翰林 侍讀學士 左朝奉郞 守禮部尙書 蘇軾札子奏’라는 33字가 있다. 이로써 이 글이 元祐 8년(1093)에 쓰여졌으며, 이때 蘇軾이 端明殿學士 兼翰林 侍讀學士 禮部尙書로 在任 中이었음을 알 수 있다. 圓丘는 冬至에 천자가 天祭를 지내는 곳으로 둥글게 쌓은 단을 이르는데, 圓丘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편 土地神은 네모난 단인 方澤에서 夏至에 제사하였는데, 方澤은 정방형의 단으로 땅이 네모난 것을 상징한 것이다. 《周禮 春官 大司樂》 合祭는 夏至에 方澤에서 지내는 土地神에 대한 제사를 冬至에 圓丘에서 지내는 天祭에 합하여 제사 지내는 것을 이른다.
역주2 詔書節文 : 詔書는 황제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이르며, 節文은 제사에 관한 예절 또는 의식 등의 규정을 이른다.
역주3 肆類於上帝……徧於群神 : 類‧禋‧望은 모두 제사 이름이다. 郊祀는 하늘의 上帝에게 정기적으로 지내는 제사인데, 특별한 일이 있어 上帝에게 제사하게 되면 郊祀의 禮와 똑같이 지내기 때문에 類라 이름한 것이다. 禋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제사한다는 뜻이고, 望은 멀리서 山川을 바라보고 차례에 따라 제사하기 때문에 望이라 한 것이다. 六宗은 여섯 가지 높이는 神으로 泰昭에서 제사하는 四時의 神, 坎壇에서 제사하는 추위와 더위의 神, 王宮에서 제사하는 해(태양)의 神, 夜明에서 제사하는 달의 神, 幽禜에서 제사하는 별의 神, 雩禜에서 제사하는 水旱의 神이다. 山川은 名山大川으로 東嶽인 泰山, 南嶽인 衡山, 西嶽인 華山, 北嶽인 恒山, 中嶽인 崇山의 五嶽과 長江, 淮河, 黃河, 濟水의 四瀆의 神이며, 여러 神은 구릉과 습지, 옛날 聖賢의 神과 같은 따위이다. 《書經 虞書 舜典》
역주4 庚戍에 柴望 : 柴는 섶을 태워 연기를 피워 올려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다. 《書經 周書 武成》
역주5 詩之序曰……郊祀天地也 : 序는 《詩經》을 傳한 毛萇이 편마다 붙인 小序를 가리킨다. 〈昊天有成命〉과 아래에 보이는 〈豐年〉은 모두 《詩經》 〈周頌〉에 보이는데, 〈豐年〉의 小序에는 “가을과 겨울에 풍년이 든 것에 보답하는 제사이다.”라고 하였다. 頌詩는 모두 神命이나 先祖의 功德을 칭송한 내용으로 제사의 樂章이다.
역주6 祖妣 : 先祖의 祖考와 祖妣로 보기도 하며, 周나라의 시조인 后稷의 어머니인 姜嫄으로 보기도 한다. 姜嫄은 帝嚳의 元妃로 아들을 낳으려고 禖祭를 지내기 위해 들에 가다가 巨人의 발자국을 보고 그 발자국을 따라갔는데, 그 후 임신하여 后稷인 棄를 낳았다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역주7 二后受之 : 二后는 두 임금으로 文王과 武王을 가리킨다.
역주8 或曰 : 이것은 范寧의 說이다.
역주9 又或曰 : 이것은 杜預의 說이다.
역주10 王鄭賈服 : 王肅과 鄭玄, 賈公彦과 服虔으로 모두 郊祀의 제도를 논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역주11 王莽 : 前漢 말기 外戚으로 漢나라를 찬탈하고 帝位에 올랐으며 國號를 新으로 바꾸었으나 곧 光武帝 劉秀의 토벌을 받고 멸망하였다.
역주12 後漢書郊祀志 : 《後漢書》에는 〈郊祀志〉가 없고 〈祭祀志〉만 있으니, 이는 아마도 傳寫의 오류인 듯하다.
역주13 建武二年 : 建武는 光武帝의 연호이다. 光武帝는 建武 元年(25) 鄗에서 즉위하고 鄗의 남쪽에다가 壇을 만들어 하늘과 땅에 즉위한 사실을 고유하였는데, 漢나라 平帝의 元始 연간에 王莽이 건의한 것을 그대로 따랐으며, 다음해 또다시 郊祀의 壇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하였다.
역주14 天地位其上호되 皆南鄕(向)西上 : 西上은 天帝의 자리가 서쪽에 있음을 이른다.
역주15 水經注 : 《水經》은 《山經》과 상대되는 말로 중국의 모든 물을 기록한 책인데, 작자는 분명하지 않다. 《水經注》는 삼국시대 魏나라의 酈道元이 지었다. 이 때문에 아래 글에 魏나라를 높여 大魏라 한 것이다.
역주16 唐睿宗이 將有事於南郊 : 有事는 제사를 지냄을 이른다. 睿宗 太極 元年(712) 정월에 처음으로 南郊에서 祭天하려 하였는데 담당자가 건의하기를 “오직 昊天上帝에게만 제사하고 皇地祇의 神位는 설치하지 말자.”고 하였다. 이에 諫議大夫로 있던 賈曾이 表文을 올려 “미천한 제가 典禮를 살펴보니, 마땅히 하늘과 땅을 合祭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禮記》 〈祭法〉을 근거로 들었다.
역주17 有虞氏는 禘黃帝而郊嚳 : 有虞氏는 舜帝이고 嚳은 帝嚳이다. 禘는 天子가 始祖의 사당을 세우고 始祖의 先祖를 이 사당에서 제사하면서 始祖로 배향하는 제사이며, 郊는 郊祭인데 이때 天帝에게 제사하면서 始祖를 배향한다.
역주18 三輔故事 : 책명으로 三輔 지방의 고사를 모은 책이다. 前漢 때 長安 주위에 있던 京兆와 右扶風, 左馮翊을 三輔라 하였다.
역주19 禇无量, 郭山惲 : 褚无量은 이때 國子祭酒였고, 郭山惲은 國子司業이었다.
역주20 一歲祀天者三 : 옛날 冬至에 圓丘에서 하늘에 제사하였고, 정월 上辛日에 圓丘에서 풍년을 기원하여 제사하였고, 孟夏에 圓丘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역주21 明堂饗帝者一 : 매년 季秋에 明堂에서 크게 祭享하였다. 明堂은 泰山의 明堂으로 옛날 政敎를 반포하고 제후들에게 조회를 받던 곳인데, 上帝와 先祖에게 제사하는 것도 모두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역주22 四時迎氣者五 : 立春에 봄을 맡은 神인 靑帝를 제사하고, 立夏에 여름을 맡은 神인 赤帝를 제사하고, 季夏에 土를 맡은 神인 黃帝를 제사하고, 立秋에 가을을 맡은 神인 白帝를 제사하고, 立冬에 겨울을 맡은 神인 黑帝를 제사한다.
역주23 祭地者二 : 夏至에 皇地祇를 方丘에서 제사하고, 孟冬에 神州를 北郊에서 제사한다.
역주24 饗宗廟者四 : 四時에 先祖에게 지내는 제사로 봄의 禴祭, 여름의 祠祭, 가을의 嘗祭, 겨울의 烝祭를 이른다.
역주25 五祀 : 天子가 올리는 제사로서 句芒, 蓐收, 玄冥, 祝融, 后土에게 社稷에서 血食으로 올리는 다섯 가지 제사를 이르는데. 이 내용은 《周禮》 〈春官 大宗伯〉에 보인다.
역주26 景靈 : 宮의 이름으로 北宋의 眞宗이 聖祖인 太祖가 임어한 곳이라 하여 궁을 세우고 이곳에서 하늘과 땅, 社稷과 宗廟의 제사를 지냈다.
역주27 原廟 : 宗廟 이외에 따로 세운 사당을 가리킨다. 漢나라 惠帝가 高祖를 위하여 沛宮을 原廟로 세운 데서 비롯한 것이다. 宋나라는 황궁에 종묘와 별도로 景靈宮을 두고 여러 전각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역주28 宣王이 薄伐玁狁 : 玁狁은 匈奴의 별칭으로 이 내용은 《國語》 〈周語〉에 보인다.
역주29 舜一歲而巡四岳……北至常山 : 常山은 恒山이다. 《書經》 〈虞書 舜典〉에 이르기를 “歲 2월에 동쪽으로 순수하여 岱宗(泰山)에 이르고, 5월에 남쪽으로 순수하여 南岳에 이르고, 8월에 서쪽으로 순수하여 西岳에 이르고, 11월에 북쪽으로 순수하여 北岳에 이른다.”고 하였다.
역주30 吉甫 : 尹吉甫로 周나라 宣王의 신하인데 文武兼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역주31 以十月神州之祭로 易夏至方澤之祀 : 神州는 中國을 가리키며, 方澤의 제사는 바로 地祇에 대한 제사를 이른다. 옛날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며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하여 地祇에 대한 제사를 方澤의 제사라 한 것이다. 10월에 지내는 神州의 제사로 夏至에 지내는 方澤의 제사를 대신한다는 의미이다.
역주32 通爟火 : 爟火는 불을 들어 올림을 이른다. 《周禮》 〈夏官 司爟〉에 이르기를 “모든 제사에는 爟에게 제사한다.”라고 하였는데, 疏에서 “爟에게 제사함은 맨 처음 불을 낸 사람에게 제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權兵部侍郞으로 있던 杜純이 上林苑 안에 望祀하는 자리를 만들고 爟火를 설치한 다음 황제가 친히 南郊에서 제사할 해를 당하면 夏至에는 北郊에서 上公을 시켜 대신 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역주33 書之望秩……春秋之三望 : 望秩은 名山大川을 바라보며 차례로 제사하는 것이고, 四望은 사방으로 山川을 바라보며 제사하는 것이고, 三望은 泰山과 黃河와 바다를 바라보고 제사하는 것이다. 《書經》 〈虞書 舜典〉에 이르기를 “2월에 동쪽으로 순수하여 岱宗(泰山)에 이르러서 섶을 태워 하늘에 제사하고 山川에 望秩했다.[歲二月 東巡守 至於岱宗 柴 望秩於山川]”라고 하였고, 《周禮》 〈大宗伯〉에 이르기를 “나라에 큰 연고가 있으면 上帝에 旅제사를 지내고 四望을 한다.[國有大故 則旅上帝及四望]”라고 하였고, 《春秋左氏傳》 僖公 31년조에 이르기를 “여름 4월에 郊祭에 대한 거북점을 네 차례 쳤으니, 거북점이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희생을 죽이지 않았으나 오히려 三望을 했다.[夏四月 四卜郊 不從 乃免牲 猶三望]”라고 하였다.
역주34 四郊 : 東‧西‧南‧北 즉 사방의 郊外로 郊는 도성에서 백 리쯤 떨어진 곳을 이른다.
역주35 昔西漢之衰……著於史策 : 前漢(西漢) 元帝 때에 貢禹가 일찍이 아뢰기를 “漢나라의 종묘제사는 古禮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으니,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라고 하자, 元帝는 그 말을 따랐으며, 뒤에 韋元成이 丞相이 되어 郡國에 있는 사당을 없애고 太上皇(高祖의 아버지)과 惠帝의 여러 園寢과 사당을 없앴다. 그런데 뒤에 元帝가 병을 앓게 되자 꿈속에서 없앤 사당의 신들이 나타나 크게 견책을 하였다. 그 후 成帝가 즉위하자, 丞相 匡衡이 “甘泉과 河東의 제사는 신령이 흠향할 만한 장소가 아니니, 마땅히 正陽인 太陽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甘泉에 있던 泰畤를 없앴는데 南郊에서 제사하던 날에 큰 바람이 불어 열 아름이나 되는 나무를 백여 개나 뽑았다고 한다. 《後漢書 郊祀志》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