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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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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子瞻 悲亞夫以下八人不得其死
痛而發論하니라
하야 請去三族하고 而以鄭爲內臣이어늘 公將許之러니 管仲不可
公曰 諸侯有討於鄭이나 未捷하니 苟有釁이면 從之不亦可乎 管仲曰 君若綏之以德하고 加之以訓辭하고
而率諸侯以討鄭이면 鄭將覆亡之不暇하리니 豈敢不懼리잇고
若總其罪人以臨之하면 鄭有辭矣리이다한대
公辭子華러니 鄭伯 廼受盟하니라
蘇子曰
大哉
管仲之相桓公也
辭子華之請하고 而不違 皆盛德之事也
齊可以王矣로되 恨其不學道하야 不自하야 使하고
桓公不王하야
이나 其予之也亦至矣하사
如其仁이리오하시니 孟子蓋過矣니라
吾讀春秋以下史하야 而得七人焉하니 皆盛德之事 可以爲萬世法이요 又得八人焉하니 皆反是하야 可以爲萬世戒
具論之하노라
太公之治齊也 擧賢而尙功한대 周公曰 後世 必有簒弑之臣이라하사 天下誦之하니 齊其知之矣
하야 皆知其當有齊國也하니 簒弑之疑 蓋萃於敬仲矣
이나 桓公, 管仲 不以是廢之하고 廼欲以爲卿하니 非盛德이면 能如此乎
而世之論者 則以爲此七人者 皆失於不殺하야 以啓亂이라하니 吾以謂不然이라하노라
七人者 皆自有以致敗亡이니 非不殺之過也니라
秦之 漢之 唐之之流 皆蕃種也로되 何負於中國哉이완대 而獨殺元海, 祿山乎
且夫自今而言之하면 則元海, 祿山 死有餘罪어니와 自當時而言之하면 則不免爲殺無罪하니 豈有天子殺無罪하고 而不得罪於天者리오
上失其道하면 塗之人 皆敵國也 天下豪傑 其可勝旣乎
久矣
世之以成敗爲是非也
夫嗜殺人者 必以하나니 以鄧之微 無故殺大國之君하야 使楚人擧國而仇之 其亡 不愈速乎
吾以謂 爲天下 如養生이요 (愛)[憂]國備亂 如服藥이라
養生者 不過愼起居飮食, 節聲色而已 節愼 在未病之前이요 而服藥 在已病之後
하고 則病未作而藥殺人矣리니 彼八人者 皆未病而服藥者也니라


03. 관중管仲에 대한 1
자첨子瞻(소식蘇軾)은 주아부周亞夫 이하 여덟 사람이 제명에 죽지 못한 것을 서글퍼하였다.
그러므로 애통해하여 이 을 지은 것이다.
나라 태자 화太子 華가 은밀히 제 환공齊 桓公에게 ‘자기 나라에 있는 세 집안을 제거하고 나라를 내신內臣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환공桓公이 이것을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관중管仲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환공桓公이 말하기를 “제후諸侯들이 나라를 토벌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나라에 틈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군주께서는 나라를 으로써 편안하게 해주시고 나라를 훈계하는 말로써 가르치소서.
그러고 나서 〈이렇게 하는 데도 나라가 배반할 경우〉 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토벌하신다면 나라는 장차 전복하여 멸망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니, 어찌 감히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죄인인 태자太子를 거느리고 나라에 임하신다면 나라는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환공桓公나라 태자 화太子 華의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정백鄭伯(나라 임금 문공文公)이 마침내 나라의 맹약盟約을 받아들였다.
소자蘇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위대하다.
관중管仲환공桓公을 도움이여!
자화子華(태자 화太子 華)의 요청을 거절하고 조말曹沫의 맹약을 어기지 않은 것은 모두 성덕盛德의 일이다.
나라는 충분히 왕도王道를 행할 수 있었는데, 한스럽게도 관중管仲를 배우지 아니하여 스스로 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해서, 자기 집안에는 삼귀三歸의 병폐가 있고 나라에는 육폐六嬖가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환공桓公 노릇하지 못하여 공자孔子께서 관중管仲기국器局을 작게 여기신 것이다.
그러나 관중管仲을 인정해주심이 또한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말씀하시기를 “환공桓公제후諸侯를 규합하되 병거兵車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공이었으니, 누가 그 만 하겠는가?
누가 그 만 하겠는가?”라고 하셨으니, 맹자孟子가 ‘중니仲尼(공자孔子)의 문도門徒들은 제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의 일을 말한 자가 없다.’고 한 것은 말씀이 지나친 것이다.
나는 《춘추春秋》 이하 역사책을 읽고서 일곱 사람을 얻었으니 이들은 모두 성덕盛德의 일로 만세萬世의 모범이 될 만하였으며, 또 여덟 사람을 얻었으니 이들은 반대로 만세萬世의 경계가 될 만하다.
그러므로 모두 갖추어 함께 논하는 바이다.
태공太公(여상呂尙)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이 있는 사람을 높이자, 주공周公이 말씀하시기를 “후세에 반드시 찬탈하고 시해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천하 사람들이 이 말을 외고 있었으니, 나라에서도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경중田敬仲이 처음 태어났을 적에 나라 사관史官시초점蓍草占을 쳤고, 그가 나라로 망명왔을 적에 나라 의씨懿氏가 거북점을 쳐서 그가 마땅히 나라를 소유할 줄을 모두 알았으니, 찬탈하고 시해하리라는 의심이 아마도 전경중田敬仲에게로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환공桓公관중管仲은 이 때문에 그를 버리지 않았고 마침내 그를 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성덕盛德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건대, 초 성왕楚 成王나라가 반드시 패자霸者가 될 줄을 알았으나 중이重耳를 죽이지 않았고, 한 고조漢 高祖가 동남 지방에서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알았으나 오왕 비吳王 濞를 죽이지 않았고, 진 무제晉 武帝제왕 사마유齊王 司馬攸의 말을 들었으나 유원해劉元海(유연劉淵)를 죽이지 않았고, 부견苻堅왕맹王猛을 믿었으나 모용수慕容垂를 죽이지 않았고, 나라 명황明皇(현종玄宗)이 장구령張九齡을 신용하였으나 안녹산安祿山을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성덕盛德의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이 일곱 군주들은 모두 이들을 죽이지 아니하여 을 열어놓는 잘못을 저질렀다.”라고 하니, 나는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위의 일곱 군주들은 모두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였던 것이니, 일곱 사람을 죽이지 않은 잘못 때문에 패망한 것이 아니다.
제 경공齊 景公이 형벌을 번거롭게 하고 세금을 무겁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전씨田氏가 있었더라도 나라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요, 초 성왕楚 成王자옥子玉을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진 문공晉 文公이 있었더라도 전쟁에 패하지 않았을 것이요, 한 경제漢 景帝나라 태자太子를 살해하지 않고 조조晁錯를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오왕 비吳王 濞가 있었더라도 스스로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요, 진 무제晉 武帝효혜제孝惠帝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비록 유원해劉元海가 있었더라도 난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요, 부견苻堅장강長江 이남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비록 모용수慕容垂가 있었더라도 배반하지 못했을 것이요, 나라 명황明皇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을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비록 안녹산安祿山이 있었더라도 또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라의 유여由余나라의 김일제金日磾나라의 이광필李光弼, 혼감渾瑊의 무리는 모두 오랑캐 종족이었지만 언제 중국을 저버린 적이 있었기에, 어찌 홀로 〈죄가 드러나지도 않은〉 유원해劉元海안녹산安祿山을 〈오랑캐라고 하여〉 죽인단 말인가?
또 지금의 입장에서 말하면 유원해劉元海안녹산安祿山은 죽어도 남을 죄가 있지만, 그 당시로 말한다면 〈이들을 죽이는 것은〉 무고한 사람을 죽임이 됨을 면치 못하니, 어찌 천자天子로서 무고한 자를 죽이고도 하늘의 죄를 얻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윗사람이 를 잃으면 길 가는 사람도 다 적국敵國이 되는 것이니, 천하天下의 호걸을 어찌 모두 없앨 수 있겠는가?
한 경제漢 景帝는 앙앙불락하고 원망한다 하여 주아부周亞夫를 죽였고, 조조曹操는 명망이 대단하다 하여 공융孔融을 죽였고, 진 무제晉 武帝와룡臥龍이라 하여 혜강嵆康을 죽였고, 진 경제晉 景帝 또한 명망이 대단하다 하여 하후현夏侯玄을 죽였고, 송 명제宋 明帝는 집안이 너무 번성하다 하여 왕욱王彧을 죽였고, 북제北齊후주後主동요童謠 때문에 곡률광斛律光을 죽였고, 당 태종唐 太宗도참설圖讖說 때문에 이군선李君羨을 죽였고, 측천무후則天武后 또한 동요童謠 때문에 배염裵炎을 죽였으니, 세상에서는 모두 이들의 잘못이라고 하나, 이 여덟 군주들이 당시에 후환을 염려한 것이 어찌 나라를 걱정하고 난을 대비하여 유원해劉元海안녹산安祿山의 후환을 걱정한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오래되었구나!
세상에서 사람들이 성공과 실패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삼음이여.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은 반드시 나라 임금이 나라 임금을 죽이지 않은 것을 가지고 구실을 삼는데, 약소한 나라가 만약 까닭없이 대국大國군주君主를 죽여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온 나라가 나라를 원수로 삼게 했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 더욱 빠르지 않았겠는가?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양생養生과 같고, 나라를 걱정하고 환난을 대비하는 것은 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양생養生하는 것은 기거起居와 음식을 삼가고 음악과 여색女色을 절제함에 지나지 않으니, 음악과 여색女色을 절제하고 삼감은 병들기 이전에 있는 일이며, 약을 먹는 것은 이미 병든 뒤에 있는 일이다.
이제 내가 한질寒疾(감기感氣)을 걱정하여 미리 열성이 강한 오훼烏喙를 먹고, 또 열병熱病을 걱정하여 몸을 차게 하는 감수甘遂를 먹는다면, 병이 생기기도 전에 이 사람을 죽일 것이니, 저 여덟 군주들은 모두 병이 들기 전에 약을 복용한 것이다.


역주
역주1 管仲論 一 : 이 글 역시 과거공부를 위해 젊은 시절 지은 작품인 듯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저작 연도는 미상이다.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의 명재상으로 이름이 夷吾이며, 仲은 그의 字인데 평소 字로 행세하였다. 潁上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鮑叔牙와 친하여 管鮑之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원래 桓公의 政敵이었으나 桓公의 중신인 鮑叔牙의 천거로 재상이 되었다.
齊 襄公이 무도하자 鮑叔牙는 공자 小白을 받들고 莒나라로 피난하였고, 管仲은 公子 糾를 모시고 魯나라로 피난하였다. 뒤에 無知가 襄公을 시해하자, 小白과 糾가 각각 莒나라와 魯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齊나라로 들어오다가 싸움을 벌였는데, 小白이 승리하고 입국하여 즉위하니 이가 바로 桓公이다. 두 군대가 교전할 당시 管仲은 小白을 활로 쏘았으나 화살이 허리띠의 갈고리를 맞히는 바람에 小白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糾의 군대가 패하자 魯나라에서는 부득이 糾를 죽이고 管仲을 가두었다.
鮑叔牙가 桓公에게 魯나라에 잡혀 있는 管仲을 데려와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으나, 桓公은 “魯나라에는 명신 施伯이 있으니, 우리가 管仲을 등용하려는 뜻을 알고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라며 의심하였다. 鮑叔牙가 “사신을 보내어 ‘管仲을 데려다가 우리의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살하려고 하니 보내달라.’고 요청하면 魯나라가 따를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桓公이 魯나라에 管仲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魯 莊公이 施伯과 의논하였는데, 施伯이 “이는 주륙하려는 것이 아니라 管仲을 등용하려는 것이니, 管仲이 등용되면 인접국인 우리 魯나라가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를 죽여 시신을 보내십시오.”라고 하였으나, 魯 莊公은 齊나라와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管仲을 살려 보냈다. 이에 管仲이 재상이 되어 桓公을 도와 齊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최초로 제후를 규합하여 천하의 패업을 이루었다.
역주2 鄭太子華……而以鄭爲內臣 : 太子 華는 鄭 文公의 아들이고, 三族은 당시 鄭나라의 대부로 국정을 전횡하던 洩氏, 孔氏, 子人氏의 세 집안을 이르며, 內臣은 국내의 신하처럼 남의 나라를 섬김을 이른다.
魯 僖公 5년에 齊나라를 주축으로 하여 제후들이 首止에 모여 회맹하였는데, 楚나라를 주축으로 한 반대 진영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때 鄭伯이 회맹에서 이탈하여 楚나라에 붙자, 齊나라가 鄭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僖公 7년에 제후들이 魯나라 땅인 寗母에서 회맹하여 鄭나라를 토벌할 것을 논의하자, 鄭伯이 太子 華를 사신으로 齊나라에 보내어 명을 듣게 하였는데, 이때 太子 華가 桓公에게 이르기를 “우리 鄭나라의 洩氏, 孔氏, 子人氏의 세 집안이 실로 우리 군주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으니, 만약 임금께서 이들을 제거하고 우리나라와 우호를 맺는다면 저는 鄭나라로써 齊나라의 신하가 되게 할 것이니, 임금님께서도 불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齊나라의 힘을 빌려 鄭나라의 정권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7년》
역주3 桓公 : 저본에는 ‘桓’을 諱하여 威公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本集에 의거하여 모두 수정하였다. 宋나라 欽宗의 이름이 趙桓이므로 桓을 피휘한 것이다.
역주4 曹沫之盟 : 曹沫은 魯나라 장수로 《春秋左氏傳》에는 曹劌로 표기되어 있다. 齊 桓公이 즉위한 뒤에 魯나라는 齊나라와 세 번 전쟁하였는데, 魯나라 曹沫이 지휘한 군대가 모두 패하여 적지 않은 영토를 빼앗겼다. 桓公 5년에 다시 싸워 魯나라 군대가 대패하자, 魯 莊公이 마침내 遂邑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다.
이에 양국은 柯 땅에서 회맹하였는데, 회맹의 자리에서 曹沫이 비수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와 桓公에게 강화의 조건으로 빼앗은 땅을 돌려달라고 위협하자, 桓公은 위협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땅을 돌려줄 것을 허락하였다. 曹沫이 물러가자, 桓公이 노하여 曹沫을 죽이고 회맹을 파기하려 하였으나 管仲이 말하기를 “曹沫의 요청을 허락하시고는 곧바로 신의를 저버리고 그를 죽이신다면, 마음은 다소 후련하시겠지만 제후들에게 신의를 얻지 못하여 천하의 협조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桓公이 管仲의 말을 따라 약속을 지켜 빼앗았던 땅을 돌려주고 맹약을 실천하였다.
제후들이 이 말을 듣고 桓公의 신의에 크게 복종하여 이후 桓公은 패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史記 齊太公世家》 柯는 지명으로 지금 河南省 黃縣의 경내 안에 있었다.
역주5 誠意正心以刑其國 : 誠意․正心하고 修身․齊家하여 남의 모범이 되어 나라를 다스림을 이른다. 誠意와 正心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몸을 닦는 공부를 이르며, 修身과 齊家는 위정자가 먼저 자기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함을 이른다.
《大學》에 “옛날에 明德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였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루었고, 그 마음을 바루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생각)을 성실히 하였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知識을 지극히 하였으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함에 있다.[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라고 하였다.
역주6 家有三歸之病 : 三歸는 《史記》 〈管晏列傳〉에 “管仲의 부유함이 公室과 같아서 집안에 三歸를 두었다.”라고 보이며, 또 《論語》 〈八佾〉에 “혹자가 ‘管仲은 검소했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管氏는 三歸를 두었으며 家臣의 일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라고 보인다. 三歸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어, 管仲이 축조한 臺의 이름이라는 說과, 歸를 시집온다는 뜻으로 보아 姓이 다른 세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이외에도 세 여인을 얻어 이 臺에 거처하게 하였다는 설이 있다.
옛 주석에는 모두 ‘세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나 劉向의 《說苑》에는 “三歸는 臺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는데 朱子는 이를 따랐고, 明나라 학자인 孔貞運은 “歸字는 셈법의 歸除라는 歸字이니, 三歸法을 써서 臺를 지음을 말한 것으로, 곧 그 높음을 나타내는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모두 管仲의 사치함을 지적한 것이다.
역주7 國有六嬖之禍 : 六嬖之禍는 桓公이 말년에 6명의 처첩을 고루 총애하여 후사를 결정하지 않은 이유로 公子들끼리 후사를 다투면서 일어난 환난을 이른다.
桓公은 王姬․徐嬴․蔡姬의 세 부인에게 모두 아들이 없었으며, 평소 여색을 좋아하여 처첩을 많이 두었는데, 말년에는 6명의 처첩을 고루 총애하였다. 6명의 처첩은 모두 公子를 낳았는데, 두 명의 衛姬 중에 언니는 武孟을 낳고, 동생은 惠公(公子 元)을 낳고, 鄭姬는 孝公(公子 昭)을 낳고, 葛嬴은 昭公(公子 潘)을 낳고, 密姬는 懿公(公子 商人)을 낳고, 宋華子는 公子 雍을 낳았다.
이들이 서로 후사를 다투자, 桓公은 管仲과 함께 公子 昭(孝公)를 세자로 세웠으나, 管仲이 죽은 뒤에 桓公은 이를 번복하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에 公子들이 후사가 되려고 서로 다투어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는데, 桓公은 이 와중에 숨을 거두고 67일간 시체가 방치되는 변을 당하였다.
결국 제나라 군주의 지위는 孝公․昭公․懿公․惠公으로 이어졌으나, 이들의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급속히 쇠퇴하여 霸者의 자리를 晉나라에 내주게 되었다. 嬖는 총애받는 빈첩을 이른다.
역주8 孔子小之 : 小之는 管仲의 기국을 작게 여긴 것으로, 《論語》 〈八佾〉에 “管仲의 기국이 작다.[管仲之器小哉]”라고 하신 孔子의 말씀이 보인다.
역주9 桓公九合諸侯……如其仁如其仁 : 이 내용은 《論語》 〈憲問〉에 그대로 보이는데, 朱子의 集註에 “九는 《春秋左氏傳》에 糾로 되어 있는바 감독함이니, 古字에 통용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0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 桓文은 춘추시대의 霸者인 齊나라의 桓公과 晉나라의 文公을 이른다.
《孟子》 〈梁惠王 上〉에 “齊 宣王이 묻기를 ‘齊 桓公과 晉文公의 일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孟子께서 ‘仲尼의 門徒들은 桓公과 文公의 일을 말한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어 臣이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만두지 말고 기어이 말하라고 하신다면 王道를 말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齊宣王 問曰 齊桓晉文之事 可得聞乎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是以 後世 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則王乎]”라고 보인다.
역주11 田敬仲之始生也……齊懿氏卜之 : 田敬仲은 陳完을 이르는데, 陳나라의 공자로 敬仲은 그의 字이며, 陳과 田은 음이 비슷하여 뒤에 氏를 陳에서 田으로 바꾸었다. 懿氏는 齊나라의 대부 懿仲을 이른다.
周나라 王室의 太史가 陳나라를 지나다가 갓 태어난 陳完을 보고 시초로 점쳤는데, 점괘에 이르기를 “陳完이 장차 다른 나라의 정권을 얻을 것이다. 다만 陳完 본인이 아니라 후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齊 桓公 14년에 陳完이 齊나라로 망명하였는데, 懿仲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려고 거북점을 쳤다가 周나라 太史와 똑같은 점괘를 얻었다. 그 후 陳完은 桓公의 신임을 얻어 工官으로 등용되었는데, 이때 성을 田氏로 바꾸었다. 이후 田氏는 대대로 齊나라의 대부가 되어 국정을 전횡하였는데, 田完의 후손인 田常(陳恒) 때에 이르러 마침내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옹립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마침내 康公 19년에 田和가 康公을 폐위하고 齊나라를 찬탈하였다.
역주12 楚成王……而不殺重耳 : 楚 成王은 춘추시대 楚나라의 군주로 文王의 아들이고 이름은 熊惲이며, 重耳는 晉 文公의 이름이다. 重耳는 獻公의 아들로 驪姬의 참소에 의해 太子 申生이 자살하자 도망하여 19년간 전국을 유랑하였다. 유랑하는 동안 뛰어난 인덕과 능력으로 여러 나라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결국 秦나라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아우 夷吾(惠公)의 아들 懷公을 몰아내고 晉나라 임금이 되었다.
楚 成王 35년에 重耳가 楚나라를 지나가자, 成王은 그가 귀국하면 뒤에 霸者가 될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죽이지 않고, 제후의 禮로써 맞이하여 향연을 베풀고 후한 예물을 갖추어 秦나라로 전송하였다. 그 후 重耳는 귀국하여 즉위한 다음 부국강병을 이루고 霸者가 되어 齊 桓公과 함께 桓․文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楚나라는 후일 文公이 이끄는 晉나라 군대와 城濮에서 중원의 霸權을 놓고 싸웠으나 패전하여 霸權을 晉나라에 넘겨주었다.
역주13 漢高祖……而不殺吳王濞 : 濞는 高祖의 형 劉仲의 아들이다. 淮南王 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高祖가 친히 정벌하였는데, 濞가 高祖를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高祖는 吳와 會稽 지역 사람들이 경솔하고 용맹한데 이들을 다스릴 강력한 군주가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며, 여러 아들들이 어리므로 濞를 吳王으로 세워 3郡과 53城의 왕이 되게 하였다. 
高祖가 濞를 吳王으로 봉하고 나서 그를 불러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너의 관상에 모반할 상이 있구나.”라고 하고는 홀로 마음속으로 후회하였다. 그러나 이미 봉하였기 때문에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도참설에 ‘50년 뒤에 우리 漢나라의 동남쪽에서 난을 일으키는 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너인가 보다. 그러나 천하가 劉氏 姓으로 한집안이 되었으니, 부디 조심하여 모반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濞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吳王의 태자가 天子國에 朝會 갔다가 文帝의 皇太子인 啓와 바둑을 두던 중에 다툼이 벌어져 皇太子에게 바둑판으로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吳王 濞는 이를 원망하였으며, 영토가 광활하고 재물이 많은 것을 믿고 황제에게 朝會하지 않다가 결국 楚나라 등과 모의하여 吳․楚 7國의 난을 일으켰으나 장군 周亞夫의 토벌을 받고 죽었다. 《史記 吳王濞列傳》 皇太子인 啓는 뒤에 文帝를 이어 즉위하여 景帝가 되었다.
역주14 晉武帝……而不殺劉元海 : 晉 武帝는 西晉을 개국한 司馬炎이며, 司馬攸는 그의 아우로 齊王에 봉해졌다. 劉元海는 흉노족으로 이름은 淵이며 元海는 그의 字인데, 이때 晉나라에 인질로 들어와 황제를 모시는 侍從으로 있었다.
司馬炎이 즉위한 뒤에 齊王 司馬攸가 劉元海의 재능을 염려하여 아뢰기를 “폐하께서 劉淵(劉元海)을 제거하지 않으면 臣은 幷州 지방이 오랫동안 편안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때 王渾이 “大晉은 이제 信義로써 풍속이 다른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있으니, 어찌 드러나지 않은 의심 때문에 남의 侍子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만류하자, 武帝는 王渾의 말을 따라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아비 劉豹가 죽자 그 지위를 계승하도록 허락하였다.
뒤에 劉淵은 晉나라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漢나라를 개국하고 晉나라를 공격하였으며, 뒤에 국명을 前趙로 개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晉나라는 懷帝와 愍帝가 漢나라에 잡혀가 죽었고 司馬睿가 강동 지방에서 국통을 이어 東晉이라고 칭하였다. 이후로 五胡十六國의 혼란한 시기가 전개되어 중국은 백여 년 동안 南朝와 北朝로 갈리었다.
역주15 苻堅……而不殺慕容垂 : 苻堅은 氐羌 출신으로 남북조시대 前秦의 제3대 황제이며, 王猛은 苻堅을 도와 前秦을 당대의 최강국으로 만든 명재상이다. 苻堅은 王猛을 존경하여 모든 정사에 王猛의 말을 따랐으나, 당시 前燕에서 망명해 온 慕容垂를 죽여야 한다는 王猛의 주청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慕容垂를 중용하였다.
慕容垂는 前燕의 왕족으로 吳王으로 봉해졌으나, 叔父 慕容評에게 쫓겨 369년 前秦으로 망명해서 중용되자, 사방을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고 세력을 키운 다음 386년에 자립하여 後燕을 개국하였다. 苻堅은 東晉을 공격하지 말라는 王猛의 유언을 듣지 않고 東晉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였고, 부하인 慕容垂만이 남아 있다가 결국 前秦은 멸망하고 後燕이 뒤를 이었다.
역주16 唐明皇……而不殺安祿山 : 唐 明皇은 唐 玄宗으로 明皇은 그의 시호이다. 張九齡은 字가 子壽이며 曲江 사람인데, 玄宗 開元 연간에 同平章事 中書令으로 등용된 명재상이다. 이때 安祿山이 군대를 거느리고 거란을 토벌하다가 크게 패하자, 張九齡이 아뢰기를 “安祿山이 전쟁에서 패했으니, 주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지금 주벌하지 않으면 장차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玄宗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 후 安祿山은 玄宗과 楊貴妃의 신임을 얻어 范陽․平盧․河東 三鎭의 절도사를 지내면서 군권을 장악한 다음 天寶 14년(755) 간신 楊國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唐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수도인 長安과 東京인 洛陽이 모두 함락되었고 玄宗은 蜀 지방으로 피난하였다. 安祿山은 肅宗 至德 2년(757)에 죽었으나 뒤이어 그의 부하인 史思明이 난을 일으켜 혼란이 계속되었으니, 이것을 安史의 亂이라 하였다. 唐나라는 郭子儀, 李光弼 등의 활약으로 나라를 수복하였으나, 이후 藩鎭의 발호가 계속되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역주17 齊景公不繁刑重賦……齊不可取 : 齊 景公은 춘추시대의 군주로 靈公의 아들이고 莊公의 아우이며, 田氏는 田常(陳恒)을 가리킨다. 齊 景公은 사치를 좋아하여 궁실을 아름답게 짓고 유명한 사냥개와 말을 모았으며, 백성들에게 賦稅를 무겁게 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이때 田氏는 公室보다 賦稅를 낮추는 등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어 자신들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史記 齊太公世家》
蘇軾은 景公이 賦稅를 경감시키고 善政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더라면 아무리 田氏가 있더라도 齊나라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18 楚成王不用子玉……兵不敗 : 楚 成王은 齊 桓公이 죽자 중원의 패권을 놓고 宋 襄公과 泓水에서 싸워 승리하였으나, 城濮의 싸움에서 晉 文公에게 패하여 패자의 자리를 晉나라에게 넘겨주었다.
子玉은 成得臣의 字이다. 若敖氏의 后裔로 성질이 모질고 고집이 셌는데, 成王 때에 최고 집정자인 令尹이 되었다. 子玉은 城濮의 싸움에서 楚나라 군대를 지휘하였는데, 晉 文公에게 패하자 자살하였다.
역주19 漢景帝不害吳太子……無自發 : 漢 景帝는 文帝의 아들로 이름이 啓이며, 吳太子는 吳王 濞의 태자인 劉賢이다. 景帝가 皇太子로 있을 적에 吳太子가 조회 왔다가 입궁하여 皇太子와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었는데, 吳太子가 바둑의 길을 다투며 불손하게 굴자 皇太子가 바둑판을 던져 吳太子를 죽였다. 이에 吳王 濞가 크게 원망하여 반역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史記 吳王濞列傳》
晁錯는 鼂錯로도 쓰는데, 文帝와 景帝 때의 문신으로 潁川 사람이다. 法家를 배워 평소 道德보다는 法律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으며, 景帝가 즉위한 다음 御史大夫에 임명되자 吳․楚 등 제후국의 세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제후국의 봉지를 삭탈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에 吳․楚 등 7국의 제후들이 간신 晁錯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景帝와 晁錯가 토벌군의 군량 조달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吳王의 相인 袁盎이 竇嬰을 통하여 景帝와의 독대를 허락받고 입궁하자, 景帝는 晁錯를 東廂으로 물러나 있게 하고 袁盎을 만났다. 이때 袁盎이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가며 “吳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전히 晁錯 때문이니, 시급히 晁錯를 斬하고 吳나라를 달래면 吳나라의 군대는 저절로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景帝가 그의 말을 믿고 晁錯에게 저자를 순행하라고 속여 東市에 보내 처형하게 하니, 晁錯는 朝衣를 입은 채로 영문도 모른 채 斬首되었다. 그러나 吳․楚 등 7국은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토벌되었다.
역주20 晉武帝不立孝惠……不能亂 : 孝惠는 晉 惠帝 司馬衷을 이른다. 武帝의 둘째 아들로 태자가 되었는데 본래 어리석고 용렬하여 황제가 될 자질이 부족하였으나, 그의 아들 皇孫 司馬遹이 뛰어난 재주로 武帝의 총애를 받아 태자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즉위 후 皇后 賈氏가 정사를 어지럽혀 결국 ‘八王의 亂’이 일어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晉나라의 국세가 급속히 쇠퇴하여 懷帝와 愍帝가 차례로 오랑캐에게 잡혀가 죽었으며, 五胡十六國의 난립으로 왕조가 南과 北으로 나뉘게 되었다.
역주21 苻堅不貪江左……不能叛 : 江左는 揚子江의 동쪽 지역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東晉을 가리킨다. 苻堅은 명재상인 王猛이 죽을 적에 자신에게 東晉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그의 말을 무시하고 建元 19년(383)에 東晉을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출병하였다가 東晉의 장군 謝玄과 劉牢之에게 淝水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해 前秦은 급속히 약해져서 394년에 멸망하였는데, 이때 慕容垂는 苻堅을 배반하고 자립하여 後燕을 개국하였다.
역주22 明皇不用李林甫楊國忠……亦何能爲 : 李林甫와 楊國忠은 모두 玄宗 말년의 간신들로 정권을 농단하여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이다.
玄宗은 唐나라를 중흥시킨 군주로, 中宗을 시해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황후 韋氏를 토벌한 뒤에 즉위하여 姚崇․張九齡 등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고 開元 연간의 태평성세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天寶 연간 이후 楊貴妃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李林甫․楊國忠 등 간신들로 하여금 국정을 전횡하게 함으로써, 끝내는 安祿山이 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天寶의 亂’을 촉발하였다. 《新唐書 玄宗本紀》
역주23 由余 : 춘추시대 秦나라의 명재상이다. 본래 晉나라 사람으로 西戎에 들어가 戎王에게 등용되었다. 戎王의 사신이 되어 秦나라에 왔었는데, 穆公이 그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계략을 써서 억류시키고 戎王과 틈이 벌어지게 한 다음 재상으로 발탁하였다. 由余는 이에 穆公을 도와 西戎을 정벌해서 20여 개의 나라를 얻고 국토를 천 리나 넓혀 秦나라가 서쪽 지방의 패자가 되게 하였다. 《史記 秦本紀》
역주24 金日磾 : 본래 匈奴 休屠王의 태자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漢나라에 끌려가 官奴가 되어 말을 길렀다. 그 뒤 근신하고 충직한 성격을 인정받고 武帝에게 발탁되어 시종이 되었다가 이어 車騎將軍으로 제수되었는데, 이때 반란을 일으킨 莽何羅를 진압하여 그 공으로 秺侯에 봉해졌다. 霍光과 함께 武帝의 遺詔를 받들어 정사를 보필하였으며, 자손들이 7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역임하여 漢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되었다. 《漢書 金日磾傳》 일설에는 우리나라의 김씨가 그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역주25 李光弼渾瑊 : 李光弼은 본래 契丹族으로 營州 柳城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가 則天武后 때에 귀의하였다. 어릴 때부터 무예가 뛰어나 무장이 되었는데, 安祿山의 난에 郭子儀의 천거로 河東節度使가 되어 많은 군공을 세우고 臨淮郡王에 봉해졌다.
渾瑊은 本名이 進으로 西域의 皐蘭州 사람인데, 용감하고 강직하였으며 무예에 뛰어났다. 李光弼, 郭子儀를 따라 安祿山의 반당과 싸웠으며, 뒤에 朱泚의 난에 큰 공을 세워 咸寧郡王에 봉해졌다.
역주26 漢景帝以鞅鞅而殺周亞夫 : 周亞夫는 漢나라의 개국공신인 絳侯 周勃의 아들로 文帝, 景帝 때의 명장이다. 景帝 때에 吳․楚 7국의 반란이 일어나자, 太尉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이 공으로 승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천성이 강직하고 굽힐 줄 몰라 젊은 景帝와 자주 충돌하여 서로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자신의 사후 장례에 쓸 집기로 순장용 갑옷과 방패 5백 개를 준비하였다가 景帝의 노여움을 사서 역모죄로 하옥되었는데, 5일간의 단식 끝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역주27 曹操以重名而殺孔融 : 曹操는 字가 孟德이고, 廟號는 太祖이며, 諡號는 武帝이다. 沛國 譙縣 사람으로 後漢 말기 黃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여러 군벌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獻帝로부터 魏王에 봉해졌다. 뒤에 아들 曹丕가 獻帝에게 선양을 받아 魏나라 황제가 된 뒤에 太祖 武帝로 추존되었다.
孔融은 지금의 山東省 曲阜인 魯國 사람으로 자는 文擧이며, 孔子의 후손이다. 獻帝 建安 연간에 학문이 뛰어난 문사들을 일컫는 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北海相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워 孔北海로 알려지고 고상한 풍류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曹操가 승상이 되어 정권을 전횡할 적에 孔融은 太中大夫로 있었는데, 자주 曹操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평소 孔融의 명망을 질시하던 曹操는 장차 자신의 霸業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孔融에게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였다.
역주28 晉武帝以臥龍而殺嵇康 : 嵇康은 字가 叔夜로 安徽省 宿縣 사람인데. 竹林七賢 중의 한 명으로 玄學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臥龍은 누워 있는 龍으로 하늘에 날아오르는 飛龍과 상대되는 말인데, 飛龍은 황제를 의미하는 반면 와룡은 諸葛亮처럼 훌륭한 인물을 비유한다.
嵇康은 司馬昭의 측근이었던 鍾會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鍾會가 司馬昭에게 아뢰기를 “嵇康은 臥龍이니, 몸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公께서 이 세상에서 염려하실 것은 오직 嵇康 한 사람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司馬昭는 263년에 嵇康을 죄로 엮어 참형에 처했는데, 이때는 晉나라 개국 2년 전으로 실권자는 司馬昭였다.
저본에 武帝라고 한 것은 轉寫의 오류이거나 著者의 착각으로 보인다. 司馬昭는 武帝 司馬炎의 아버지로 武帝가 개국한 다음 文帝로 추존되었다. 竹林七賢은 晉나라 때에 無爲와 淸談을 일삼으며 竹林에서 詩酒를 즐기던 일곱 명의 명사로 嵇康․阮籍․山濤․向秀․劉伶․王戎․阮咸을 이른다.
역주29 晉景帝亦以重名而殺夏侯玄 : 晉 景帝는 司馬懿의 長子로 武帝의 큰아버지인 司馬師이다. 晉나라가 개국한 이후 景帝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는 世宗이다.
夏侯玄은 曹操의 명장 夏侯淵의 종손으로 字는 太初인데, 司馬氏와 정권을 다투던 曹爽의 외사촌 형제이며 司馬師의 매부이다. 夏侯玄은 명가의 자제일 뿐만 아니라 文武에 두루 뛰어나고 명망이 높아 어린 나이에 출사하여 太常의 지위에 올랐으나, 이로 인해 司馬師의 질시를 받고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그리하여 李豊, 張輯 등과 함께 司馬師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되었다.
역주30 宋明帝以族大而殺王彧 : 宋 明帝는 南朝의 황제 劉彧으로 조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의심이 많아 많은 황족과 신하들을 죽였다. 王彧은 자가 景文인데, 晉나라 이래 謝氏와 함께 최고의 명문가로 꼽히는 琅琊王氏로 明帝의 처남이었다. 의심이 많은 明帝는 王彧의 집안이 너무 강성하여 장차 황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사약을 내려 賜死하였다.
역주31 齊後主以謠言而殺斛律光 : 北齊의 後主는 北朝의 後主 高緯를 이르는데, 혼우하여 간신 祖挺이 정권을 농단하였다. 斛律光은 北齊 명장으로 자는 明月이며 朔州 사람이다.
北齊와 北周는 北朝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서로 싸웠는데, 北周는 北齊의 斛律光에게 자주 패하였다. 이에 北周의 장군 韋孝寬이 반간계를 쓰기 위해 간첩을 北齊의 都城인 鄴都에 보내어 “百升이 하늘을 날고 明月이 長安을 비추네. 高山은 밀지 않아도 절로 무너지고 떡갈나무는 부축하지 않아도 절로 견고해지네.[百升飛上天 明月照長安 高山不推自崩 槲樹不扶自堅]”라는 謠言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때 斛律光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祖挺이 이를 後主에게 “100升은 1斛이니 斛氏를 가리키고 明月은 斛律光의 字이며, 高山은 왕조인 高氏를 이르고 槲樹는 斛氏를 이른다.”라고 참소하여 斛律光을 멸족시켰는데, 北齊는 5년 뒤에 北周에게 멸망당하였다.
역주32 唐太宗以讖而殺李君羨 : 讖은 圖讖說을 이른다. 太宗 당시에 “唐나라는 3대 이후에 여자 군주 武王이 천하를 대신 차지한다.[唐三世之後 則女主武王代有天下]”라는 圖讖說이 전해지고 있었다. 李君羨은 太宗 때의 무장으로 洛州 武安 사람이다. 그의 아명은 여자 이름인 五娘이고 관직은 武威將軍이며 봉읍은 武連縣으로 모두 武字가 들어 있었다.
太宗은 圖讖說에서 말하는 女主武王이 정말 여자가 아니고 여자 이름을 가진 武자와 관계가 있는 자일 것이라고 여겨 李君羨을 의심하였다. 뒤에 李君羨이 華州刺史가 되었는데, 布衣인 員道信이란 자가 스스로 佛法을 통달하여 곡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李君羨이 그를 좋아하여 자주 사람들을 물리치고 둘만이 밀담을 나누곤 하였는데, 御史가 “李君羨이 요망한 자와 왕래하여 모반을 한다.”고 탄핵하자, 太宗은 이것을 빌미로 그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도참설은 則天武后의 등장을 예언한 것이라 한다.
역주33 武后亦以謠言而殺裴炎 : 裴炎은 字가 子隆이며 絳州 聞喜 사람으로 唐 高宗 때에 中書令을 지냈다. 武后는 唐나라의 則天武后로 武后가 中宗을 폐위시키고 睿宗을 세울 적에 裴炎은 이 일에 참여하여 武后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후에 徐敬業의 반란 때에 민요를 이용하여 睿宗에게 정권을 돌려줄 것을 권유하다가 武后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혀 죽었다.
역주34 鄧侯不殺楚子 爲口實 : 鄧은 춘추시대 나라 이름으로 지금 河南省 鄧縣에 소재하였다. 당시 약소국이었으나 처음에 侯爵으로 봉해졌으므로 鄧侯라 칭하였다.
당시 鄧侯는 鄧나라 19대 군주로 이름은 宣이고 자는 吾離이다.
楚子는 楚나라 武王인 熊通을 이른다. 武王이 夫人을 얻기 위해 鄧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鄧侯에게 이 틈을 타서 武王을 죽일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으나, 鄧侯가 그 말을 물리치고 武王으로 하여금 그대로 돌아가게 한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 후 鄧나라는 끝내 楚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역주35 今吾憂寒疾而先服烏喙 : 寒疾은 추위로 생기는 병으로 감기를 이르며, 烏喙는 天雄이나 附子 또는 草烏 따위를 이르는데, 독성이 강한 熱性 약재이다.
역주36 熱疾而先服甘遂 : 熱疾은 熱病을 이른다. 甘遂는 大戟科에 속하는 풀의 이름인데 뿌리는 약재로 사용한다. 맛은 쓰고 성질이 차가우므로 熱病을 다스리는 데에 처방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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