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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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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古之救災 須喫緊先事而慮 如此하니라
臣聞 事豫則立하고 不豫則廢라하니 此古今不刊之語也니이다
至於救災恤患하야는 尤當在早니이다
若災傷之民 救之於未饑하면 則用物約而所及廣하야
不過寬減上供하고 하야 官無大失이로되 而人人受賜하니 今歲之事 是也니이다
若救之於已饑하면 則用物博而所及微하야
至於耗散하고 虧損하야 官爲一困이로되 而已饑之民 終於死亡하니 之事 是也니이다
熙寧之災傷 本緣天旱米貴어늘 而沈起, 張靚之流 不先事奏聞하고 但務立賞閉糶하야
富民 皆爭藏谷(穀)하야 小民 無所得食이라
流殍旣作然後 朝廷知之하야 始勅運江西하고 及截本路上供米一百二十三萬石하야 濟之
巡門하고 攔街散粥호되 終不能救하니이다
饑饉旣成 繼之以疾疫하야 本路死者 五十餘萬人이라
城郭蕭條하고 田野丘墟하야 兩稅課利 皆失其舊하니이다
勘會熙寧八年하면 本路放稅米 一百三十萬石이요 酒課虧減 六十七萬餘貫이니
略計所失하면 共計二百二十餘萬貫石이요 其餘耗散 不可悉數니이다
至今轉運司貧乏하야 不能擧手하니 無他
不先事處置之過也니이다
去年 浙西數郡 先水後旱하야 災傷 不減熙寧하나이다
이나 仁智聰明하사 於去年十一月中 首發德音하사 截撥本路上供斛斗二十萬石하야 賑濟하시고 又於十二月中 寬減轉運司元祐四年上供額斛三分之一하야 爲米五十餘萬斛하고 盡用其錢하야 買銀絹上供하야
了無一毫虧損縣官이로되 而命下之日 所在歡呼하고 官旣住糴 米價自落하니이다
又自正月開倉하야 糶常平米하고 仍免數路稅務所收하시고 且賜三百道하야 以助賑濟하시니
本路帖然하야 遂無一人餓殍者하니 無他
先事處置之力也니이다
由此觀之컨대 事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야 其禍福相絶 如此하니이다
恭惟 二聖 天地父母之心으로 見民疾苦하고 匍匐救之하사 本不計較費用多少로되
而臣愚魯無識하야 但知權利害之輕重하고 計得喪之大小하야
以謂譬如民庶之家 置庄田하고 招佃客 本望租課 非行仁義니이다
이나 猶至水旱之歲하면 必須放免欠負하고 借貸種糧者 其心 誠恐客散而田荒하야 後日之失 必倍於今故也니이다
而況有天下하고 子萬姓하야 而不計其後乎잇가
臣自去歲已來 區區獻言하야 屢瀆天聽者 實恐陛下客散而田荒也니이다
去歲杭州米價 每㪷至八九十이라가 自今歲正月以來 日漸減落이러니 至五六月間하야 浙西數郡 大雨不止하야 太湖泛溢하야 所在害稼한대 六月初間 米價復長하야 至七月初하야 㪷及하니이다
見今新米已出이로되 而常平官米 不敢住糶하니 災傷之勢 恐甚於去年이니이다
何者
去年之災 如人初病하고 今歲之災 如病再發하니 病狀雖同이나 氣力衰耗하야 恐難支持하니이다
又緣春夏之交 雨水調勻하니 浙人 喜於豊歲하야 家家하고 擧債出息하야 以事田作이라
車水築圩하야 高下殆遍하야 計本已重하야
指日待熟이러니 而淫雨風濤 一擧害之하니 民之窮苦 實倍去歲하니이다
近者 어늘 臣密令季孫으로 沿路體訪이러니
季孫還하야 爲臣言호되 此數州 不獨淫雨爲害 又多大風하야 駕起潮浪하야 堤堰圩垾 率皆破損하고
湖州 水入城中하야 民家皆尺餘하니 此去歲所無有也라하니이다
而轉運判官張璹 自常潤還하야 所言略同하야
云 親見吳江平望八尺이요 聞有擧家田苗 沒在深水底 父子聚哭하야
하고 云 半米 猶堪炒喫이요 靑穟 且以喂牛라하니이다
正使自今雨止라도 已非豊歲어늘 而況止不止 又未可知하니 則來歲之憂 非復今年之比矣니이다
何以言之 去年杭州管常平米 二十三萬石이러니 今年 已糶過十五萬石하야 雖餘八萬石이나 而糶賣未已하고 又緣去年災傷放稅하고不行하야 省倉闕數하야
所有上件常平米八萬石 只了兌撥充軍糧하면 更無見在하니이다
惟有糶常平米錢 近八萬貫이나 而錢非救饑之物이라
若來年 米益貴하고 錢益輕하면 雖積錢如山이라도 終無所用하리이다
熙寧中 兩浙 出錢百萬하야 民無貧富 皆得取用이로되 而米不可得이라
曳羅紈하고 帶金玉하야 橫尸道上者 不可勝計하니이다
今來浙東西 大抵皆糶過常平米하야 見在絶數少하니 熙寧之憂 凜凜在人眼中矣니이다
材力短淺하고 加之衰病이나 而一路生齒 憂責在臣이라
受恩旣深하니 不敢別乞閑郡이니이다
日夜思慮하야 求來年救饑之術하니 別無長策이요 惟有秋冬之間 不惜高價하고 多糴常平米하야 以備來年出糶니이다
今來浙西數州 米旣不熟하고 而轉運司又管上供年額斛㪷一百五十餘萬石하니爭糴이면 米必大貴하야 饑饉愈速하고 和糴不行하리니
來年靑黃不交之際 常平 有錢無米하야 官吏拱手하고 坐視人死하면 而山海之間接連 盜賊結集하야 或生意外之患하리니 則誅殛臣等이나 何補於敗리잇가
以此 須至具實聞奏하노이다
伏望聖慈 備錄臣奏하사 行下하야 疾早相度來年하야 合與不合準備常平斛㪷出糶救飢니이다
如合準備인댄 卽具逐州合用數目하소서
臣已約度하오니 杭州合用 二十萬石이라
仍委逐司擘畫하야 合如何措置하야 令米價不至大段翔湧하야 收糴得足이니이다
如逐司以謂 不須準備出糶救濟인댄 卽令各具保明來年 委得不至饑殍流亡하야 結罪聞奏하소서
緣今來已是入秋하야 去和糴月日無幾 比及相度往復取旨하면 深慮不及於事니이다
伏乞詳察하야 速賜指揮하소서
臣屢犯天威하오니 無任戰慄待罪之至로소이다
謹錄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2. 절서浙西재상災傷을 아뢴 첫 번째 글
옛날 재상災傷을 구휼할 적에 모름지기 간절하게 일에 앞서서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이 들으니 “일을 미리 대비하면 성공하고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고금에 없앨 수 없는 훌륭한 말씀입니다.
재상災傷환해患害를 구휼함에 이르러는 더더욱 마땅히 조기에 조처하여야 합니다.
만약 재상災傷을 입은 백성들을 기근이 들기 전에 구휼하면 재물을 적게 쓰고서도 미치는 효과는 큽니다.
그리하여 상공미上供米를 감면해주고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을 방출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여, 관청에는 큰 손실이 없으나 사람마다 모두 혜택을 받으니, 바로 금년의 일이 이것입니다.
만약 이미 기근이 든 뒤에 구휼하려 하면 재물을 많이 쓰면서도 미치는 효과는 적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창고를 다 소모하여 곡식을 흩어 주고 세금을 손실함에 이르러 관청이 일단 곤경에 빠지는데도 이미 굶주린 백성들이 끝내 사망에 이르게 되니, 바로 지난번 희령熙寧 연간의 일이 이것입니다.
희령熙寧 연간의 재상災傷은 본래 날씨가 가물어 쌀이 귀해진 데에서 비롯되었는데, 심기沈起장정張靚의 무리가 일에 앞서 미리 상주하지 않고, 오직 을 내세우고 쌀을 딴 지방에 파는 것을 막는 데에만 힘을 썼습니다.
이에 부자들이 모두 다투어 곡식을 감춰서 가난한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은 시체들이 발생한 뒤에야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비로소 강서江西의 쌀을 운반해 오도록 명하고, 또 본로本路에서 올릴 상공미上供米 120만 석을 방출하여 이로써 구제하였습니다.
순찰사 영문巡察使 營門에서 쌀을 나누어주며 길을 가로막고 죽을 쒀서 나누어주었으나 끝내 구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기근이 든 다음, 질병이 뒤를 이어 본로本路에 죽은 자가 50여만 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 안이 쓸쓸하고 전야田野가 빈 터가 되어서 봄과 가을로 두 번 걷는 세금이 모두 예전의 액수를 잃었습니다.
희령熙寧 8년(1075)을 살펴보면 본로本路에서 세금을 방면(탕감)한 쌀이 130만 석이고 주세酒稅가 줄어든 것이 6, 7만여 입니다.
손실된 바를 대략 계산해보면 합계가 220여만 관석貫石이고 기타 소모되어 흩어진 것을 이루 다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전운사轉運司의 재정이 궁핍해서 손을 든 채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일에 앞서서 미리 조처하지 않은 잘못입니다.
지난해 절서浙西의 여러 고을은 먼저 수해가 있고 뒤에 가뭄이 들어 재상災傷희령熙寧 연간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분 성인聖人께서 인자하고 지혜롭고 총명하셔서 지난해 11월 중에 먼저 은덕의 명령을 내리시어 본로本路에서 상공上供한 곡식 20만 석을 방출하여 구휼하시고, 또 12월 중에 전운사轉運司에서 원우元祐 4년(1089)에 상공上供한 곡식의 3분의 1을 줄여 쌀 50여만 을 만들고 쌀을 방출해서 얻은 돈을 모두 사용하여 은과 비단을 사서 상공上供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털끝만큼도 현관縣官(천자天子)에게 손상됨이 없었으나, 명령이 내리던 날에 곳곳마다 백성들이 환호하였고, 관청에서 쌀을 사들이는 것을 중지하자 쌀값이 저절로 떨어졌습니다.
또 정월부터 창고를 열어서 상평창常平倉의 쌀을 방출하고 이어서 여러 세무稅務에서 거두는 오곡력승전五穀力勝錢을 면제하시고, 또다시 도첩度牒 3백 장을 하사하여 구휼을 도우셨습니다.
그 결과 본로本路가 편안하여 마침내 한 사람도 굶어 죽은 자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일에 앞서서 미리 조처한 효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일을 미리 대비하면 성공하고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실패하여, 그 화복禍福이 서로 격차가 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두 분 성인聖人께서는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는 급히 서둘러 구휼하셔서 본래 비용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은 어리석고 노둔하고 무식해서 다만 이해利害의 가볍고 무거움을 저울질하고, 득실得失의 크고 작음을 계산할 줄만 압니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비유하면 지주地主(서민庶民)들이 전장田庄을 장만하고 소작인(전객佃客)을 불러들이는 것은 본래 소작료를 바라는 것이요, 인의仁義를 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수해水害가 들고 가뭄이 든 해에는 지주地主들이 반드시 먼저 소작인의 부채를 면제해주고 곡식의 종자를 빌려주는 것은, 그 마음이 진실로 소작인이 흩어져 전지田地가 황폐해져서 후일의 손실이 반드시 지금보다 곱절이 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폐하께서는 천하를 소유하고 만백성을 자식으로 삼고 계시니, 후일을 계산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작년 이래로 구구히 말씀을 올려서 여러 번 폐하의 귀를 번거롭게 한 것은 폐하의 소작인(농민)이 흩어져 전지田地가 황폐해질까 두려워해서입니다.
지난해 항주杭州의 쌀값은 매 1마다 8, 9십 에 이르렀다가 금년 정월 이래로 날마다 점점 값이 내렸는데, 5, 6월 사이에 절서浙西의 몇 고을에 큰 비가 멈추지 않아서 태호太湖가 범람하여 곳곳마다 농사를 망치게 되자, 6월초 사이에 쌀값이 다시 올라서 7월초에는 쌀값이 족맥足陌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햅쌀이 이미 나왔으나 상평창常平倉의 방출을 감히 멈추지 못하니, 재상災傷의 형편이 지난해보다 심한 듯합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지난해의 재상災傷은 사람이 처음 병들 때와 같고 금년의 재상災傷은 병이 재발한 것과 같으니, 병의 증상은 비록 똑같으나 기력이 쇠약해져서 지탱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또 봄과 여름 사이에 비가 고르게 내리자, 절강浙江 지방 사람들은 풍년이 들 것을 미리 기뻐하여 집집마다 전당을 잡히고 물건을 팔며 이식을 주고 빚을 내어서 전지의 농사를 일삼았습니다.
수차로 물을 퍼 올리고 제방을 쌓아서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이 모두 이와 같이 농사를 지어, 본전을 계산하면 이미 많았습니다.
이에 날짜를 꼽으며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큰비와 풍랑이 일어 일거에 곡식을 망치니, 백성들이 곤궁하고 고통스러움이 실로 작년의 곱절이 됩니다.
근자에 장관 유계손將官 劉季孫소주蘇州로 조사하러 가기에 이 은밀히 그로 하여금 연로沿路에서 농가들을 몸소 방문하게 하였는데,
유계손劉季孫이 돌아와서 에게 말하기를 “이 몇 고을은 비단 폭우로 피해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또 큰 바람이 많이 불어 조수潮水의 물결을 일으켜서 제방과 논두렁이 모두 파손되었고,
호주湖州는 강물이 성 안으로 밀려 들어와 민가가 모두 한 자쯤 침수되었는데, 이것은 지난해에는 없었던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운판관 장숙轉運判官 張璹상주常州윤주潤州로부터 돌아와서 말한 내용도 대략 비슷하여,
이르기를 “제가 직접 오강吳江이 8척 높이로 평평하게 흐르는 것을 보았으며, 또 모든 농지의 벼싹이 깊은 물속에 잠겨서 부자父子가 모여 통곡하였고,
배와 뗏목을 타고 곡식들을 건지며 말하기를 ‘반여물이 든 쌀은 그래도 볶아서 먹을 수 있고, 푸른 이삭은 우선 소를 먹이겠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지금 즉시 비가 그친다 하더라도 이미 풍년이 아닌데 하물며 비가 그칠지를 아직 알 수 없으니, 내년의 근심은 다시 금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작년에 항주杭州에서는 상평창의 쌀 23만 석을 관장하였는데 금년에 이미 15만 석을 방출하여 비록 8만 석이 남았으나 방출하여 파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고, 또 지난해에 재상災傷으로 세금을 방면하였으며 화적和糴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해서 성창省倉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의 수량이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현재 보유하고 있는 상평창의 쌀 8만 석을 전부 돌려서 군량미로 충당하고 나면 다시 남아 있을 것이 없습니다.
오직 상평창의 쌀을 판 돈이 근 8만 이 있으나 돈은 원래 기근을 구제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만약 내년에 쌀값이 더욱 비싸지고 돈이 더욱 가치가 떨어지면 비록 돈을 산처럼 쌓아두고 있더라도 끝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희령熙寧 연간에 양절兩浙(절동浙東절서浙西)의 시역무市易務에서 돈 백만 을 방출해서 백성들이 빈부를 막론하고 모두 이 돈을 갖다 쓸 수 있었으나 쌀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단옷을 끌고 금옥金玉을 두르고 길가에 가로 누워 죽어서 시신이 된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절동浙東절서浙西는 대체로 모두 상평창의 쌀을 방출하여 현재 보유하고 있는 숫자가 매우 적으니, 희령熙寧 연간의 근심이 두렵고 두려워 눈앞에 선합니다.
은 재주가 부족하며 게다가 노쇠하고 병들었으나 한 생치生齒(백성)들에 대한 근심과 책임이 에게 있습니다.
성은聖恩을 받은 것이 이미 깊으니, 감히 한가로운 고을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으로 고민하여 내년에 기근을 구휼할 방법을 찾아보았는데, 달리 좋은 방법이 없고 오직 가을과 겨울 사이에 높은 값을 아끼지 말고 상평창에 보유할 쌀을 많이 사들여서 내년의 방출에 대비하는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절서浙西의 여러 고을은 곡식이 이미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였고, 전운사轉運司는 또 1년에 상공上供해야 할 곡식 150여만 석을 관장해야 하니, 만약 두 관사에서 다투어 쌀을 사들이면 쌀값이 크게 비싸져서 기근이 더욱 심해지고 화적和糴이 행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내년에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햇곡식이 아직 수확되지 않아 먹을 것이 부족할 시기에 상평창에 돈만 있고 쌀이 없어서 관리들이 팔짱을 끼고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경우, 산과 바다와 접해 있는 절강浙江복건福建에 도적들이 집결하여 혹 뜻밖의 우환을 만들어낼 것이니, 그때 가서 등을 죽인들 화패禍敗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모름지기 사실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스럽고 자애로우신 폐하께서는 이 아뢴 것을 자세히 기록하시어 호부戶部본로本路전운사轉運司제형提刑, 양로兩路검할사鈐轄司에 문서를 내리셔서 서둘러 내년의 상황을 파악해서 기근을 구휼하기 위해 방출할 상평창의 곡식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마땅히 준비해야 한다면 즉시 마다 필요한 숫자를 준비하게 하소서.
이 이미 대략 헤아려보니 우리 항주杭州에서 써야 할 곡식이 합하여 20만 석입니다.
따라서 마다 계획하여 마땅히 어떻게 조치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쌀값이 크게 오르지 않도록 곡식을 충분히 수매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만일 여러 에서 “굳이 기근을 구휼하기 위해 방출할 곡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즉시 그들로 하여금 내년에 백성들이 굶어 죽고 유랑에 이르지 않게 하도록 책임 지우고, 만일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죄를 받을 것을 약속하고 각각 보명서保明書(보증서)를 갖추도록 하소서.
지금 이미 가을이 되어서 화적和糴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헤아려보건대 문서가 오고 가서 폐하의 성지聖旨를 받게 되면 제때에 일에 미치지 못할까 깊이 우려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자세히 살피셔서 속히 지휘를 내려주소서.
은 여러 번 하늘의 위엄을 범하오니, 두려워 떨면서 죄가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지극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기록하여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奏浙西災傷第一狀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元祐五年七月十五日 龍圖閣學士 左朝奉郞 知杭州 蘇軾狀奏’라는 25字가 있다. 浙西는 浙西路로, 杭州에 治所가 있었다.
역주2 糶賣常平 : 常平은 常平倉으로 풍년이 들면 값을 올려서 곡식을 사들이고 흉년이 들면 값을 내려 곡식을 팔아서 물가를 항상 고르게 하는 제도인데, 漢나라 耿壽昌이 처음 만들었다. 糶賣는 흉년에 곡식을 방출하는 것이다.
역주3 省倉 : 尙書省에 소속된 戶部의 창고로 국고를 이른다.
역주4 課利 : 세금의 부과로 얻어지는 이익, 즉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금전을 이른다.
역주5 熙寧 : 神宗의 연호(1068~1077)이다.
역주6 俵米 : 구휼미를 방출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이른다.
역주7 二聖 : 太皇太后인 英宗의 후비인 宣仁聖烈皇后 高氏와 哲宗을 이른다. 당시 哲宗이 연소하여 太皇太后가 수렴청정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8 五穀力勝錢 : 力勝稅는 商稅 가운데 하나로 상인들이 지역을 통과할 적에 받는 脚錢 즉 運送稅인데, 본래 곡물에 있어서는 부과하지 않았으나 熙寧 연간에 처음으로 五穀에도 세금을 징수하고 이를 五穀力勝稅라 칭하였으며, 五穀力勝稅로 거두어들이는 금전을 五穀力勝錢이라 하였다.
역주9 度牒 : 승려로 출가하려 할 적에 나라에서 발급하는 許可狀인데, 승려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소정의 금품을 받고 度牒을 발급하였다. 따라서 度牒을 하사하는 것은 바로 재물을 하사함과 같은 것이다.
역주10 百錢足陌 : 陌은 百으로 足陌은 바로 百이란 뜻이다. 唐나라 이래로 錢陌을 감하여 80으로 지급하였기 때문에 足陌, 省陌의 말이 있게 되었다. 省陌은 이후 또다시 3이 감해져 宋나라 때에는 77이 되었다. 이는 지금의 어음을 할인하는 경우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11 典賣 : 典은 물건을 저당 잡히는 것이고, 賣는 물건을 파는 것으로, 모두 농사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가산을 처분하여 비용을 마련함을 이른다.
역주12 將官劉季孫 往蘇州按敎 : 劉季孫은 당시 兩浙路의 兵馬都監으로 杭州에서 근무하였는데, 武官이므로 將官이라 칭한 것이다. 蘇州는 당시 浙東路에 속해 있었다. 按敎는 관리를 파견하여 민정을 시찰함을 이른다.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蘇州를 浙西路라 하였으나 오기인 듯하다.
역주13 船栰撈摝 : 栰은 뗏목을 이르며, 撈와 摝은 모두 물속에서 건져냄을 이른다. 벼를 심은 밭이 완전히 물속에 잠겼으므로 배와 뗏목을 이용하여 벼를 건져낸 것이다.
역주14 和糴 : 常平倉의 제도에 곡식을 사들이는 것을 糴이라 하고, 방출하여 파는 것을 糶라고 하는데, 和는 서로 가격을 협의함을 이른다.
역주15 市易 : 王安石의 新法 가운데 하나인 市易法에 따라 중요한 도시에 설치된 市易務를 이른다. 市易法은 熙寧 5년(1072)에 실시하여 元豐 8년(1085)에 폐지되었는데, 豪商들로부터 영세상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요한 도시에 市易務를 설치하고 영세상인이 팔지 못한 상품을 사주거나 또는 이를 저당하여 연 2割의 이자로 자금을 융통해주었는데, 이 또한 이자가 높고 관리들의 농간이 많아 영세상인들이 오히려 파탄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역주16 : 宋나라의 화폐단위로 1緡은 1천 文(錢)인데 貫 또는 千이라고도 한다. 이는 돈 한 꿰미에 1천 錢을 꿰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역주17 兩司 : 常平司와 轉運司를 이른다.
역주18 甌閩 : 甌는 본래 浙江省의 溫州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浙江에 인접한 지역을 이른다. 閩은 閩中으로 福建省을 이른다.
역주19 戶部及本路轉運提刑 兩路鈐轄司 : 戶部는 부세를 관장하는 부서이며, 轉運은 轉運使司, 提刑은 提點刑獄司, 鈐轄司는 兵馬鈐轄使司를 이른다. 兩路는 浙西路와 浙東路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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