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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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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在於失攻守之勢하고 子瞻過秦 在於破壞先王之法하니라
昔者生民之初 不知所以養生之具하야 擊搏挽裂하야 與禽獸爭一旦之命하야
惴惴然朝不謀夕하야 憂死之不給이라
是故 巧詐不生而民無知하니라
이나 聖人惡其無別하고 而憂其無以生也
是以 作爲器用, 耒耜, 弓矢, 舟車, 網罟之類하사 莫不備至하야
使民樂生便利하야 役御萬物而適其情하시니 而民 始有以極其口腹耳目之欲하니라
器利用便而巧詐生하고 求得欲從而心志廣하니 聖人 又憂其桀猾變詐而難治也
是故 制禮以反其初하시니
聖人 非不知 不揖而食 便於人情而適於四體之安也언마는
將必使之習爲迂闊難行之節하시니 寬衣博帶 所以回翔容與而不可以馳驟
上自朝廷으로 而下至於民 其所以視聽其耳目者 莫不近於迂闊이라
其衣하고 其食하고 其耕하고 其進取選擧 以學校하고 其治民 以諸侯하며 嫁娶死喪 莫不有法하고 嚴之以鬼神하고하야
所以使民自尊而不輕爲姦이라
周公, 孔子所以區區於升降揖讓之間하사 丁寧反覆하야 而不敢失墜者 世俗之所謂迂闊이나 而不知夫聖人之權 固在於此也
相承而不敢破러니 至秦有天下하야 始皇帝以詐力而幷諸侯하니 自以爲智術之有餘어늘
於是 廢諸侯하고 破井田하야 凡所以治天下者 一切出於便利하고 而不恥於無禮하야
決壞하고 而以利器 明示天下
自秦以來 天下惟知所以求生避死之具하야 而以禮者 爲無用贅疣之物하니 何者
其意以爲生之無事乎禮也일새라
苟生之無事乎禮인댄 則凡可以得生者 無所不爲矣리니 嗚呼
此秦之禍 所以至今而未息歟인저
昔者 始有書契하야爲文이러니 而其後 始有䂓矩摹畫之迹하니 蓋今所謂 至秦而更以하고 其後 日以變革하야 貴於速成하야 而從其易하고 又創爲紙하야 以易簡策이라
是以 天下簿書符檄 繁多委壓하야 而吏不能究하야 姦人 有以措其手足하니
如使今世而尙用古之篆書簡策이면 則雖欲繁多 其勢無由리라
由此觀之컨대 則凡所以便利天下者 是開詐僞之端也니라
嗟夫
秦旣不可及矣어니와 苟後之君子 欲治天下而惟便利之求인댄 則是引民而日趨于詐也 悲夫


04. 시황始皇에 대한 2
가의賈誼나라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공격과 수비의 형세를 잃음에 있었고, 자첨子瞻나라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선왕의 법을 파괴함에 있었다.
옛날 사람이 태어난 초기에는 양생養生하는 도구를 알지 못해서, 금수禽獸와 치고 때리고 잡아 찢으면서 함께 하루아침의 목숨을 다투었다.
그리하여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아침에도 저녁의 일을 도모하지 못하여 죽음을 걱정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공교로운 꾀와 속임수가 생기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무지하였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백성들이 금수와 구별이 없음을 싫어하고 살아갈 길이 없음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기용器用(기물)과 쟁기와 쟁기자루와 활과 화살과 배와 수레와 그물 따위를 만들어서 구비하고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을 즐기고 편리하게 이용해서 만물을 마음대로 부려 사람들의 마음에 맞게 하니, 백성들이 이에 비로소 입과 배와 귀와 눈의 욕망을 지극히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용器用이 편리해지고 도구들이 편리하게 되자 공교로운 재주와 꾀가 생겨나고, 바라는 것을 얻고 욕망이 채워지자 심지心志가 넓어지게 되니, 성인聖人은 또다시 백성들이 교만하고 교활하며 변덕스럽고 속여서 다스리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였다.
이 때문에 를 만들어서 시초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고 시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으며 읍하여 사양하지 않고 먹는 것이 인정에 편하고 사체四體의 편안함에 합당한 줄을 모르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차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우활迂闊하여 행하기 어려운 예절을 익히도록 하였으니, 품이 넓은 옷과 넓은 띠와 패옥佩玉과 신발은 몸의 움직임을 여유롭게 할 뿐 달릴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위로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하는 것들이 우활迂闊에 가깝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옷에는 보불黼黻문장文章을 사용하고, 음식에는 변두籩豆보궤簠簋를 사용하며, 경작에는 정전법井田法을 사용하고, 선비들을 진취시키고 선발하고 천거하는 제도는 학교學校로써 하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제후諸侯를 봉하는 제도를 썼으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과 죽음과 초상에 예법禮法이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었고, 귀신鬼神으로써 두렵게 하고 사시四時로써 중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함부로 간악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인정人情에 가까운 것은 지극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주공周公공자孔子께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읍하고 사양하는 사이에 정녕丁寧하고 반복反覆하여 감히 실추하지 않게 하신 것은 세속에서 이른바 우활迂闊하다는 것이나, 〈세속 사람들은〉 저 성인聖人권도權道가 진실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제五帝삼대시대三代時代로부터 서로 계승하여 감히 이것을 파괴하지 못하였는데, 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게 되자, 시황제始皇帝가 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천하를 겸병하니, 스스로의 지혜와 꾀만 가지고도 충분한데 우왕禹王탕왕湯王,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이것으로 나올 줄(이렇게 할 줄)을 몰랐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후諸侯를 봉건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정전법井田法을 파괴하여,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일체 편리함에서 나오게 하고, 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의 울타리를 터버리고 담장을 파괴하여 편리한 기구를 가지고 천하에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나라 이래로는 천하 사람들이 오직 삶을 추구하고 죽음을 피하는 도구만을 알아서 를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여겼으니, 어째서인가?
그들이 생각하기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를 일삼을(행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일 살아가는 데에 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모두 하지 않는 짓이 없을 것이니, 아!
이것이 나라의 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옛날에 처음 서계書契가 있게 되어 과두科斗를 문자로 삼았는데, 그 뒤에 비로소 동그라미와 네모를 본떠 그린 필적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지금의 이른바 대전大篆소전小篆이라는 것이며, 나라에 이르러는 예서隷書로 바뀌었고, 그 뒤에 날로 변하여 속성速成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 되도록 쉽게 쓰는 방법을 따랐으며, 또 처음 종이를 만들어서 죽간竹簡목간木簡을 대체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문서와 부절符節격문檄文이 너무 많아지고 크게 쌓여서 관리가 이것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들이 그 수족을 놀릴 수 있었다.
만일 지금 세상에 아직도 옛날의 전서篆書죽간竹簡을 사용하고 있다면 비록 이런 것들을 번다繁多하게 사용하려고 하더라도 형편상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무릇 천하를 편리하게 하는 것은 속임수와 거짓의 단서를 열어놓는 것이다.
아!
나라는 이미 미칠 수 없지만 만일 후세의 군자가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면서 오직 편리함만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날로 속임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역주
역주1 始皇論 二 : 本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秦始皇帝論〉으로 되어 있고, 郎曄本에는 〈秦始論〉으로 되어 있다. 嘉祐 5년(1060) 蘇軾은 歐陽脩의 천거로 才識兼茂科에 응시하였고, 楊畋이 蘇軾의 글 50편을 황제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그 가운데 하나라 한다. 따라서 이 글이 嘉祐 5년 이전에 지어진 것은 분명하나 자세한 저작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始皇論 一〉이 蘇軾의 노년기인 海南島에서 지어졌는데, 〈始皇論 二〉가 소년기에 지어졌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역주2 賈誼過秦 : 賈誼(B.C. 200~B.C. 168)는 西漢(前漢) 때 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다. 過秦은 賈誼가 지은 〈過秦論〉을 이르는데 秦나라의 잘못을 지적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賈誼는 秦나라가 關中의 요새를 점거하여 6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二世皇帝 때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망하였음을 열거하고, 끝에 “秦나라가 구구한 한 州의 땅을 가지고 萬乘의 권세를 얻어 8개 州를 점령하고 同列들에게 조회받은 지가 백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 뒤에 六合을 자기 집으로 삼고 殽山과 函谷關을 宮闕로 삼았는데, 한 匹夫인 陳勝이 난을 일으키자, 七廟가 무너지고 군주가 남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仁義를 베풀지 않아서였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秦以區區之地 致萬乘之權 招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矣 然後以六合爲家 崤函爲宮 一夫作難 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誼不施 而攻守之勢異也]”라고 하였다. 중국은 통상 冀州, 兗州, 青州, 徐州, 揚州, 荊州, 豫州, 梁州, 雍州의 9州로 표현하는데, 秦나라는 雍州 지역에 해당된다. 七廟는 천자의 宗廟는 일곱 개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인데, 이 글은 《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다.
역주3 禮者 所以反本復始也 : 反本復始는 근본으로 돌아가고 시초를 잊지 않는 것으로, 《禮記》 〈禮器〉에 “禮는 근본을 돌이키고 옛 도를 닦아 그 처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禮也者 反本修古 不忘其初者也]”라고 보인다.
역주4 箕踞而坐 : 箕는 곡식을 까부는 기구인 키를 이르는데 두 다리를 뻗고 앉으면 그 모양이 마치 키와 같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踞는 걸터앉는 것으로, 옛날 두 다리를 뻗고 앉거나 걸터앉는 것은 不恭한 모습으로 간주하여 크게 경계하였다.
역주5 佩玉履舃 : 佩玉은 옛날 군자들이 띠의 좌우에 각각 한 줄씩 늘어뜨려 차는 玉을 이른다. 白玉을 이어서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도록 한 것인데, 오른쪽에는 높고 경쾌한 소리가 나는 玉을 차고, 왼쪽에는 낮고 무거운 소리가 나는 玉을 차서 걸으면 소리가 났다. 履舃은 위가 뚫려 있는 신발을 이른다.
역주6 黼黻文章 : 黼는 고대 禮服에 도끼 모양의 수를 놓은 것으로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이고, 黻은 고대 禮服에 己자가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것같은 亞자 모양의 수를 놓은 것으로 청색과 백색이 반반이었다. 文章은 文采로, 청색과 적색을 文이라 하고, 적색과 백색을 章이라 한다.
역주7 籩豆簠簋 : 모두 祭祀에 쓰는 기물이다. 籩은 竹器로 과실이나 乾肉을 담았고, 豆는 木器로 김치나 젓갈을 담았다. 簠는 네모난 竹器로 쌀을 담았고, 簋는 둥근 竹器로 黍稷을 담았다.
역주8 井田 : 井田은 井田法을 이른다. 井田이란 사방 1里의 땅을 네모반듯하게 잘라서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해서 8가구의 농민들에게 지급하여 경작하게 하는 법이다. 이때 배분받은 면적은 각 백 畝인데 이것이 私田이 되며, 한 가운데의 백 畝는 公田이라 하여 국가에 바치는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역주9 重之以四時 : 四時에 모두 제사를 지내어 禮를 중히 하였음을 말한 것으로, 《禮記》 〈禮器〉에 “籩豆를 올림은 四時의 조화로운 기운이 생성된 것이다.[籩豆之薦 四時之和氣也]”라고 하였다.
역주10 禮之近於人情者 非其至也 : 《禮記》 〈禮器〉에 “군자가 말하기를 ‘禮가 人情에 가까운 것은 그 지극한 것이 아니다. 郊祭에는 먼저 희생의 피를 올리고, 大饗에는 먼저 날고기를 올리고, 三獻에는 먼저 데친 고기를 올리고, 一獻에는 먼저 익은 고기를 올린다.[君子曰 禮之近人情者 非其至者也 郊血 大饗腥 三獻爓 一獻孰]’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군자는 대체로 孔子를 가리키며, 郊祭는 郊野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大祭이고, 大饗은 宗廟에서 祫祭하는 제사이다. 三獻은 社稷과 문이나 부엌에 제사하는 五祀로, 이때 술을 세 번 올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一獻은 여러 작은 神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술을 한 번만 올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人情에 가깝다는 것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데친 고기나 익은 고기를 이른 것이다.
역주11 五帝三代 : 五帝는 黃帝, 顓頊, 帝嚳, 帝堯, 帝舜이라고도 하고, 黃帝 대신에 少昊를 넣기도 하며, 三代는 夏․商․周의 세 왕조를 이른다.
역주12 禹湯文武之不知出此也 : 不知出此는 始皇帝의 편리한 방법을 행할 줄 모른다는 것으로 封建制度와 井田法 및 여러 禮法 등 전통적인 제도를 고수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3 聖人之藩墻 : 藩墻은 울타리와 담장으로 禮法을 가리킨다. 禮法은 인간의 도덕을 수호하는 도구이므로 울타리와 담장이라 한 것이다.
역주14 科斗 : 蝌蚪로도 쓰는데 올챙이를 이른다. 고대의 문자가 올챙이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蝌蚪文字라고 한 것이다. 《帝王世紀》에는 “黃帝 때에 倉頡이 새의 발자국 모양을 본떠 처음 글자를 만들었다.”라고 하였고, 《字源》에는 “高陽氏(顓頊)가 蝌蚪文字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5 大小篆 : 大篆과 小篆을 이른다. 《書斷》에 의하면 “大篆은 周나라 宣王 때의 太史인 籀가 만들었고, 小篆은 秦나라의 丞相 李斯가 만들었다.”고 한다.
역주16 : 隷書를 이르는데, 秦나라의 程邈이 처음 만들었다. 程邈은 字가 元岑으로 下邽 사람이다. 縣의 獄吏였는데 始皇帝의 노여움을 사서 雲陽의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10년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大篆․小篆의 각이 지고 둥근 필획을 개조하여 3천 字의 隷書를 만들었는데, 이를 상주하자 始皇帝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御史로 등용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국가가 통일되고 郡縣制로 정권이 집중되어 公文이 많아져서, 小篆으로 쓰는 일이 불편하였다. 胥吏들은 程邈이 고안한 서체가 쓰기에 아주 간편하여 隷人(胥吏)의 번거로움을 도와주는 글자라고 하여 隷書라고 불렀다. 《書斷》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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