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在於失攻守之勢
하고 子瞻過秦
은 在於破壞先王之法
하니라
昔者生民之初에 不知所以養生之具하야 擊搏挽裂하야 與禽獸爭一旦之命하야
是以로 作爲器用, 耒耜, 弓矢, 舟車, 網罟之類하사 莫不備至하야
使民樂生便利하야 役御萬物而適其情하시니 而民이 始有以極其口腹耳目之欲하니라
器利用便而巧詐生하고 求得欲從而心志廣하니 聖人이 又憂其桀猾變詐而難治也라
聖人
이 非不知
와 不揖而食
이 便於人情而適於四體之安也
언마는
將必使之習爲迂闊難行之節
하시니 寬衣博帶
와 은 所以回翔容與而不可以馳驟
라
上自朝廷으로 而下至於民히 其所以視聽其耳目者 莫不近於迂闊이라
其衣
를 以
하고 其食
을 以
하고 其耕
을 以
하고 其進取選擧
를 以學校
하고 其治民
을 以諸侯
하며 嫁娶死喪
에 莫不有法
하고 嚴之以鬼神
하고 而
하야
周公, 孔子所以區區於升降揖讓之間하사 丁寧反覆하야 而不敢失墜者는 世俗之所謂迂闊이나 而不知夫聖人之權이 固在於此也라
自
로 相承而不敢破
러니 至秦有天下
하야 始皇帝以詐力而幷諸侯
하니 自以爲智術之有餘
어늘 而
라
於是에 廢諸侯하고 破井田하야 凡所以治天下者를 一切出於便利하고 而不恥於無禮하야
故로 自秦以來로 天下惟知所以求生避死之具하야 而以禮者로 爲無用贅疣之物하니 何者오
苟生之無事乎禮인댄 則凡可以得生者를 無所不爲矣리니 嗚呼라
昔者
에 始有書契
하야 以
爲文
이러니 而其後
에 始有䂓矩摹畫之迹
하니 蓋今所謂
者
요 至秦而更以
하고 其後
에 日以變革
하야 貴於速成
하야 而從其易
하고 又創爲紙
하야 以易簡策
이라
是以로 天下簿書符檄이 繁多委壓하야 而吏不能究하야 姦人이 有以措其手足하니
如使今世而尙用古之篆書簡策이면 則雖欲繁多나 其勢無由리라
由此觀之컨대 則凡所以便利天下者는 是開詐僞之端也니라
秦旣不可及矣어니와 苟後之君子 欲治天下而惟便利之求인댄 則是引民而日趨于詐也니 悲夫라
가의賈誼가 진秦나라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공격과 수비의 형세를 잃음에 있었고, 자첨子瞻이 진秦나라의 잘못을 지적한 것은 선왕의 법을 파괴함에 있었다.
옛날 사람이 태어난 초기에는 양생養生하는 도구를 알지 못해서, 금수禽獸와 치고 때리고 잡아 찢으면서 함께 하루아침의 목숨을 다투었다.
그리하여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아침에도 저녁의 일을 도모하지 못하여 죽음을 걱정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공교로운 꾀와 속임수가 생기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무지하였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백성들이 금수와 구별이 없음을 싫어하고 살아갈 길이 없음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기용器用(기물)과 쟁기와 쟁기자루와 활과 화살과 배와 수레와 그물 따위를 만들어서 구비하고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을 즐기고 편리하게 이용해서 만물을 마음대로 부려 사람들의 마음에 맞게 하니, 백성들이 이에 비로소 입과 배와 귀와 눈의 욕망을 지극히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용器用이 편리해지고 도구들이 편리하게 되자 공교로운 재주와 꾀가 생겨나고, 바라는 것을 얻고 욕망이 채워지자 심지心志가 넓어지게 되니, 성인聖人은 또다시 백성들이 교만하고 교활하며 변덕스럽고 속여서 다스리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였다.
이 때문에 예禮를 만들어서 시초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예禮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고 시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으며 읍하여 사양하지 않고 먹는 것이 인정에 편하고 사체四體의 편안함에 합당한 줄을 모르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차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우활迂闊하여 행하기 어려운 예절을 익히도록 하였으니, 품이 넓은 옷과 넓은 띠와 패옥佩玉과 신발은 몸의 움직임을 여유롭게 할 뿐 달릴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위로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하는 것들이 우활迂闊에 가깝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옷에는 보불黼黻과 문장文章을 사용하고, 음식에는 변두籩豆와 보궤簠簋를 사용하며, 경작에는 정전법井田法을 사용하고, 선비들을 진취시키고 선발하고 천거하는 제도는 학교學校로써 하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제후諸侯를 봉하는 제도를 썼으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과 죽음과 초상에 예법禮法이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었고, 귀신鬼神으로써 두렵게 하고 사시四時로써 중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함부로 간악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예禮가 인정人情에 가까운 것은 지극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께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읍하고 사양하는 사이에 정녕丁寧하고 반복反覆하여 감히 실추하지 않게 하신 것은 세속에서 이른바 우활迂闊하다는 것이나, 〈세속 사람들은〉 저 성인聖人의 권도權道가 진실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제五帝와 삼대시대三代時代로부터 서로 계승하여 감히 이것을 파괴하지 못하였는데, 진秦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게 되자, 시황제始皇帝가 속임수와 무력으로써 천하를 겸병하니, 스스로의 지혜와 꾀만 가지고도 충분한데 우왕禹王과 탕왕湯王,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이것으로 나올 줄(이렇게 할 줄)을 몰랐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후諸侯를 봉건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정전법井田法을 파괴하여,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일체 편리함에서 나오게 하고, 예禮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의 울타리를 터버리고 담장을 파괴하여 편리한 기구를 가지고 천하에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진秦나라 이래로는 천하 사람들이 오직 삶을 추구하고 죽음을 피하는 도구만을 알아서 예禮를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여겼으니, 어째서인가?
그들이 생각하기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예禮를 일삼을(행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일 살아가는 데에 예禮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모두 하지 않는 짓이 없을 것이니, 아!
이것이 진秦나라의 화禍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옛날에 처음 서계書契가 있게 되어 과두科斗를 문자로 삼았는데, 그 뒤에 비로소 동그라미와 네모를 본떠 그린 필적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지금의 이른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라는 것이며, 진秦나라에 이르러는 예서隷書로 바뀌었고, 그 뒤에 날로 변하여 속성速成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 되도록 쉽게 쓰는 방법을 따랐으며, 또 처음 종이를 만들어서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을 대체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문서와 부절符節과 격문檄文이 너무 많아지고 크게 쌓여서 관리가 이것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들이 그 수족을 놀릴 수 있었다.
만일 지금 세상에 아직도 옛날의 전서篆書와 죽간竹簡을 사용하고 있다면 비록 이런 것들을 번다繁多하게 사용하려고 하더라도 형편상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무릇 천하를 편리하게 하는 것은 속임수와 거짓의 단서를 열어놓는 것이다.
진秦나라는 이미 미칠 수 없지만 만일 후세의 군자가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면서 오직 편리함만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날로 속임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