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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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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前引皆博大하니 所謂爲문로공潞公而作者
원우元祐之初 詔起낙양하야 命以重事
公惟인종仁宗, 英인종, 神考三聖眷倚之重하야 不敢以旣老爲辭하고 杖而造朝라가 期年乃求去
詔曰 하고 하니 태공自爲謀則善矣어니와 獨不爲朝廷惜乎아하시고
治亂之效 於斯可見이라하시니라
公讀詔聳然하야 不敢言去
蓋復留四年하야 天下無事하고 朝廷奠安이어늘 乃力請而歸하니라
公之在朝也 거란契丹使야율영창耶律永昌, 유소劉霄來聘이라
奉詔관반하야 與使者入覲할새 望見노국공殿門外하고 却立改容하야 曰 此노국공노국공也耶
所謂以德服人者라하고 問其年하고 曰 何壯也오하다
軾曰 使者見其容하고 未聞其語하니
其綜理庶務하고 酬酢事物 雖精練少年이라도 有不如 貫穿古今하고 洽聞彊記 雖專門名家라도 有不逮라하니
使者拱手하고 曰 天下異人也라하니라
公旣歸낙양 서강西羌首領有온계심溫溪心者 請於邊吏하야 願獻良馬於公이어늘
邊吏以聞한대 詔聽之하니 心服天下하야 至于四夷
이라하니 世所以守하고 以其德也
若夫非德之威 雖猛而人不畏하고 非德之明 雖察而人不服이라
修德於几席之上하야 而其威折衝於萬里之外하고 退居於家 而人望之 如在廊廟하니 可不謂德威乎
하양태수河陽하양태수어늘 公將往臨之한대 吏民喜甚하야 歡呼之聲 相屬이라
作堂以待公하고 而請銘於軾이어늘 乃榜之曰 德威라하고 而銘之曰
德威惟畏 德明惟明하니
惟師潞公이여 展也大成이로다
公在낙사洛師 숭산낙사有光하고
駕言三城 황하流不揚이로다
願公百年이요 子孫千億하야
家于兩황하하야 日見顔色이어다
西戎來朝하야 祗慄公門하니
四方其訓之리라


02. 덕위당德威堂에 대한
서문의 뜻이 모두 넓고 크니, 이른바 문로공文潞公(문언박文彦博)을 위해서 지었다는 것이다.
원우元祐 초년에 황제께서 조명詔命을 내려 태사 노공太師 潞公낙양洛陽에서 불러 나오게 하여 막중한 일을 명하셨다.
인종仁宗영종英宗신고神考(신종神宗) 세 성군聖君께서 깊이 아끼고 중히 여기신 뜻을 생각하여, 감히 늙었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조정에 나아갔다가 1년 만에야 비로소 떠나갈 것을 청하였다.
황제께서 조명詔命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옛날 서백西伯노인老人을 잘 봉양함에 태공太公이 스스로 왔고, 노 목공魯 穆公자사子思 곁에 자신의 성의를 말해줄 사람이 없으면 장자長者가 떠나갈까 염려하였으니, 이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도모하는 것은 좋지만, 어찌 조정을 위하여 떠나가는 것을 애석해하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당 태종唐 太宗은 전쟁하는 일을 가지고도 이미 늙은 이정李靖을 기용하였는데,
목종穆宗문종文宗은 편안한 즈음에 아직 병들지 않은 배도裴度를 등용하지 못했으니,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함의 효험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은 이 조명詔命을 읽고는 두려워하여 감히 떠나갈 것을 말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4년을 머물러서 천하에 일이 없고 조정이 편안해지자, 비로소 강력히 물러갈 것을 청하여 돌아갔다.
이 조정에 있을 적에 거란契丹사신使臣야율영창耶律永昌유소劉霄빙문聘問을 왔다.
내가 명령을 받들고 관반館伴(접반사接伴使)이 되어서 사자使者와 함께 들어가 을 뵐 적에 사자使者전문殿門 밖에서 을 바라보고는 멈춰 서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말하기를 “이 분이 노국공潞國公인가?
이른바 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분이다.”라고 하였고, 의 나이를 묻고는 “어쩌면 이리도 건강한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사자使者의 용모만 보았고 아직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
께서 여러 가지 사무를 종합하여 다스리고 사물에 대처하는 것은 비록 정련된 젊은이라도 그만 못한 점이 있고, 고금古今을 꿰뚫어 알며 박학다식하고 기억을 잘하는 것은 비록 한 분야에 전문가라고 이름난 자라도 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공수拱手하고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비범한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이 이미 낙양洛陽으로 돌아가자, 서강西羌수령首領온계심溫溪心이 변방 관리에게 청하여 에게 좋은 말을 바치고자 하였다.
변방 관리가 보고하자, 성상聖上께서는 명하여 그의 소청을 따르게 하셨으니, 그렇다면 이 천하 사람들을 심복시켜서 사방 오랑캐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으로 위엄을 보이자 두려워하였고 으로 밝히자 밝아졌다.”라고 하였으니, 세상에서 백이伯夷의 법을 잘 지키고 고요皐陶의 법을 잘 따르는 이유는바로 때문이다.
이 아닌 위엄은 아무리 사나워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이 아닌 밝음은 아무리 살펴도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는다.
궤석几席의 위에서 을 닦아 그 위엄이 만 리 밖에서 적의 충돌을 꺾고, 물러나 집에 거처하는데도 사람들이 을 조정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으니, 으로 위엄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 아들 하양태수河陽太守가 되었는데, 이 장차 그리로 가려 하자, 관리와 백성들이 몹시 기뻐하여 낙양洛陽으로부터 삼성三城에 이르기까지 환호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을 짓고 을 기다리면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청하므로 마침내 ‘덕위德威’라 써 붙이고, 다음과 같이 한다.
으로 위엄을 보이자 두려워하고 으로 밝히자 밝아지니
태사 노공太師 潞公이여 참으로 크게 이루었도다.
낙사洛師(낙양洛陽)에 계시니 숭산崧山낙수洛水가 빛나고
멍에하고 삼성三城으로 가시니 황하黃河에 파도가 일지 않도다.
원컨대 은 백 년 장수를 누리고 자손子孫들은 천 명 억 명이 되어서
황하黃河낙수洛水에 집을 지어 날마다 안색顔色을 볼지어다.
서쪽 오랑캐가 와서 조회하여 궁궐 문에서 공경하고 조심하니
어찌 서쪽 오랑캐뿐이겠는가?
사방이 장차 순종하리라.


역주
역주1 德威堂銘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33권에 의하면, 이 글은 東坡가 元祐 6년(1091) 7월에 文彦博을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역주2 太師潞公 : 潞公은 潞國公의 줄임말로 文彦博(1006~1097)을 이른다. 字가 寬夫이며 汾州 介休(지금의 山西省 介休縣) 사람인데, 仁宗 天聖 5년(1027)에 進士로 출사하여 監察御史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仁宗 慶曆 말년(1048)에 貝州의 반란군 王則을 평정한 공으로 宰相에 제수되고 潞國公에 봉해졌다. 神宗 熙寧 연간에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하여 한직으로 있다가, 哲宗 때에 다시 중용되어 平章軍國重事에 제수되고 元祐 5년(1090)에 치사하였다.
역주3 昔西伯善養老 而太公自至 : 이 내용은 《孟子》 〈離婁 上〉에 “太公이 紂王을 피하여 東海의 가에 살았는데, 文王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흥기하여 말씀하기를 ‘내 어찌 그에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내 들으니 西伯은 늙은 자를 잘 봉양한다.’ 하였다.[太公辟紂 居東海之濱 聞文王作 興曰 盍歸乎來 吾聞西伯 善養老者]”라고 보인다.
西伯은 서방의 제후들을 관장하는 우두머리 제후로, 바로 周 文王을 이른다. 太公은 周나라를 개국한 武王의 재상으로 성이 姜이고 이름이 尙이고 氏가 呂이고 또 다른 이름은 望이어서, 太公望․呂望․呂尙으로 불렸다. 殷나라 말기 난세를 피하여 渭水에서 낚시질하다가 文王인 姬昌을 만나 國師로 기용되어 周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文王이 죽고 武王 發이 즉위하자 8백 명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殷나라의 紂王을 공격하여 통일천하를 이룩하였다. 《史記 齊太公世家》
역주4 魯穆公無人子思之側 則長者去之 : 이 내용은 《孟子》 〈公孫丑 下〉에 “옛날에 魯 繆(穆)公은 子思의 곁에 〈자기의 誠意를 전달할〉 사람이 없으면 〈子思께서 떠나가실까 염려하여〉 子思를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였다.[昔者 魯繆公無人乎子思之側 則不能安子思]”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孟子集註》에 “繆公이 子思를 존경하고 예우하여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子思를 모시고 보살피게 해서 자신의 성의를 그 곁에 전달하여야, 子思께서 안심하고 머무실 것으로 여긴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繆公은 전국시대 魯나라의 군주인데, 穆公으로 표기하기도 하며, 子思는 孔子의 손자인 孔伋으로 子思는 그의 字이다.
역주5 唐太宗……尙能起李靖於旣老 : 李靖(571~649)은 唐 太宗 때의 명장으로 字가 藥師이고 雍州 三原(지금의 陝西省 三原縣) 사람이다. 高祖 李淵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고 太宗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군웅들을 평정할 적에 활약하였으며, 行軍總管으로 돌궐을 원정하여 평정하였고 貞觀 8년(634)에 吐谷渾이 국경을 침략하자 老軀를 이끌고 적을 막아 큰 공을 세워 衛國公에 봉해졌다.
《唐書》 〈李靖傳〉에 “吐谷渾이 邊境을 노략질하자, 太宗이 侍臣들을 돌아보며 ‘李靖을 將帥로 삼을 수 있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李靖은 마침내 房玄齡을 만나 ‘내가 비록 늙었으나 진실로 한 번 출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太宗이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李靖을 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았다.[吐谷渾寇邊 太宗顧謂侍臣曰 得李靖爲帥 豈非善也 靖乃見房玄齡曰 靖雖年老 固堪一行 太宗大悅 卽以靖爲西海道行軍大總管]”라고 보인다.
역주6 穆宗文宗……不能用裴度於未病 : 穆宗과 文宗은 모두 唐나라 황제로 穆宗은 820년부터 824까지 재위하였고, 文宗은 826년에서 840년까지 재위하였다.
裴度(765~839)는 唐나라 憲宗, 穆宗, 文宗 때의 名相으로 字가 中立이고 聞喜 사람인데 諡號가 文忠이다. 憲宗 때 中書侍郞으로 淮西節度使 吳元濟의 亂을 平定하여 晉國公에 封해졌으나, 穆宗과 文宗 때에 환관이 정권을 擅斷하여 조정이 어지럽고 선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洛陽에 살면서 午橋에 綠野堂이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白居易, 劉禹錫 등과 함께 詩酒를 나누며 말년을 보냈다.
이때 文宗은 裴度가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精神이 쇠퇴하지 않음을 알고 낙양에서 오는 대신이 있으면 반드시 裴度의 안부를 물었으나 끝내 그를 등용하지는 못하였다. 《唐書 裴度傳》
역주7 書曰 德威惟畏 德明惟明 : 이 내용은 《書經》 〈周書 呂刑〉에 “황제께서 德으로 위엄을 보이시자 두려워하고, 德으로 밝히시자 밝아졌다.[德威惟畏 德明惟明]”라고 보이는데, 蔡沈은 集傳에서 “有苗는 사나움을 위엄으로 삼고 살핌을 밝음으로 삼았는데, 舜帝가 그 道를 반대로 하여 德으로 위엄을 보이자 천하가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고, 德으로 밝히자 천하가 밝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注하였다.
역주8 伯夷之典 : 舜임금의 신하인 伯夷가 관장하고 있던 三禮를 이른다. 《書經》 〈虞書 舜典〉에 “舜임금이 말씀하기를 ‘아! 四岳아. 나의 三禮를 맡을 자가 있는가?’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伯夷입니다.’ 하였다.[帝曰 咨四岳 有能典朕三禮 僉曰伯夷]”라고 하였는데, 朱子의 《書經集傳》에 “三禮는 天神에게 제사하고 人鬼에게 제향하고 地祇에게 제사하는 禮이다. 伯夷는 신하의 이름이니, 姓이 姜이다.”라고 注하였다.
天神은 昊天의 上帝와 日․月․星辰, 司中․司命․風師․雨師를 이르고, 人鬼는 先王의 宗廟를 이르며, 地祇는 社稷과 五嶽, 山林川澤의 神을 이른다.
역주9 皐陶之法 : 皐陶는 舜帝의 신하로 그가 관장하고 있던 刑獄의 法을 이른다. 《書經》 〈虞書 舜典〉에 “皐陶야! 蠻夷가 華夏(中華)를 어지럽히며 약탈하고 죽이며 밖을 어지럽히고 안을 어지럽히므로 너를 士로 삼으니, 五刑에 服罪하게 하되 五刑의 服罪를 세 곳에 나아가게 하며, 다섯 가지 流刑에 머무는 곳이 있게 하되 다섯 가지 머무는 곳에 세 등급으로 거처하게 할 것이니, 밝게 살펴야 백성들이 믿을 것이다.[帝曰 皐陶蠻夷猾夏 寇賊姦宄 汝作士 五刑有服 五服三就 五流有宅 五宅三居 惟明克允]”라고 보인다. 士는 法官의 우두머리이다.
역주10 公之子及 : 及은 文彦博의 여섯째 아들로 字가 周翰이다. 이때 集賢殿의 修撰으로 있다가 河陽知事로 나갔다. 河陽은 지금의 河南省 孟縣이다.
역주11 自洛至三城 : 洛은 낙양이고 三城은 미상이다. 아마도 洛陽에서 河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세 개의 城을 이른 것인 듯하다.
역주12 豈惟西人 四方其訓之 : 西羌뿐만 아니라 사방의 모든 異民族이 順服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西人은 西羌과 西夏를 이른다. 訓은 順과 통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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