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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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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蘇長公 乃歐文忠公極得意門生이니 此序却亦不負歐公이니라
夫言有大而非夸하니 達者 信之하고 衆人 疑焉하나니라
文章之得喪 何與於天이완대 而禹之功 與天地竝이어늘 孔子, 孟子以空言配之하시니 不已夸乎
自春秋作으로 而亂臣賊子懼하고 孟子之言行 而楊墨之道廢하니 天下以是爲固然하야 而不知其功이러니
孟子旣沒 違道而趨利하고 殘民以厚(生)[主]하야 其說 至陋也어늘 而士以是 罔其上하고 上之人 僥倖一切之功하야 靡然從之로되
而世無大人先生如孔子孟子者 推其本末하고 權其禍福之輕重하야 以救其惑이라
方秦之未得志也 使復有一孟子런들 則申, 韓爲空言이요 作於其心하야 害於其事하며 必不至若是烈也리라
使楊墨得志於天下런들 其禍豈減於申, 韓哉리오
由此言之컨대 雖以孟子配禹라도 可也니라
不足道也어니와 而誼亦爲之하니 予以是 知邪說之移人 雖豪傑之士라도 有不免者하니 況衆人乎
自漢以來 道術 不出於孔氏하야 而亂天下者多矣
호되 莫或正之러니 五百餘年而後하니 學者以愈配孟子하니 蓋庶幾焉이라
愈之後三百有餘年而後 得歐陽子하니 其學 推韓愈, 孟子하여 以達於孔氏하고 著禮樂仁義之實하야 以合於大道
其言 簡而明하고 信而通하야 引物連類하야 折之於至理하야 以服人心이라 天下翕然師尊之
自歐陽子之存으로 世之不說(悅)者 譁而攻之하야 能折困其身이로되 而不能屈其言이라
士無賢不肖 不謀而同曰 歐陽子 今之韓愈也라하나니라
宋興七十餘年 民不知兵하고 하야로되 而斯文 終有愧於古하고 士亦因陋守舊하야 論卑而氣弱이러니
自歐陽子出 天下爭自濯磨하야 以通經學古爲高하고 以救時行道爲賢하고 以犯顔納諫爲忠하야 長育成就하야
하야 號稱多士하니 歐陽子之功 爲多
嗚呼
此豈人力也哉
非天이면 其孰能使之리오
賴天子明聖하사 詔修取士法하야 風厲學者하야 專治孔氏하고 黜異端하니 然後 風俗一變하야 考論師友淵源所自하야 復知誦習歐陽子之書하니라
予得其詩文七百六十六篇於하고 乃次而論之曰
此非予言也 天下之言也니라
歐陽子 諱脩 字永叔이니 旣老 自謂六一居士云이라
唐荊川曰
體大而思精하고 議論 如走盤之珠하니 文之絶佳者也


02. 《육일거사문집六一居士文集》의
소장공蘇長公은 바로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의 매우 마음에 드는 문생門生이니, 이 서문은 소장공蘇長公이 또한 구양공歐陽公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말에는 큰소리(흰소리)를 쳐도 과장이 아닌 것이 있으니, 이치를 통달한 자는 이를 믿고 중인衆人들은 의심한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장차 ‘이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고 하셨다면 뒤에 죽는 내가 이 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셨고,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께서는 홍수를 억제하셨고 공자孔子께서는 《춘추春秋》를 지으셨고, 나는 양주楊朱묵적墨翟을 막았다.”라고 하셨으니, 이로써 임금에게 짝하신 것이다.
문장文章의 얻고 잃음이 하늘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임금의 천지天地와 똑같은데, 공자孔子맹자孟子가 공허한 말씀(문장)으로써 임금에게 짝하시니,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춘추春秋》가 나오고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고, 맹자孟子의 말씀이 행해지자 양주楊朱묵적墨翟가 폐지되었으니, 천하가 이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 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맹자孟子가 별세하신 뒤에 신불해申不害상앙商鞅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이 를 저버리고 이익을 따르며 백성을 해치고 군주를 받들게 하여, 말이 지극히 누추한데도 선비들은 이로써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들은 일체의 공을 요행으로 바라서 모두 쏠리듯 이것을 따랐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자孔子맹자孟子처럼 을 미루고 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혹을 바로잡아주는 대인大人선생先生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학설이 마침내 행해져서 나라는 이로써 천하를 잃었고, 침체하여 진승陳勝오광吳廣, 유방劉邦항우項羽에 이르러는 죽은 자가 10명에 8, 9명이 되어 천하가 쓸쓸해졌으니, 홍수洪水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나라가 뜻을 얻지 못했을 적에 만일 다시 맹자孟子와 같은 분이 한 명 더 있었더라면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은 빈말이 되었을 것이요, 마음에서 나와 일에 해를 끼치며 일에서 나와 정사를 해치는 이단異端의 부정한 학설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양자楊子묵자墨子가 천하에 뜻을 얻었더라면, 그 화가 어찌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보다 적었겠는가?
이러한 입장에서 말한다면 비록 맹자孟子임금에게 짝하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개공蓋公황로黃老의 학설을 말하였고, 가의賈誼조조鼂錯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을 밝혔다.”라고 하였다.
조조鼂錯는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가의賈誼도 이러한 일을 하였으니, 나는 이 때문에 부정한 학설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비록 호걸스런 선비라도 면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니,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랴.
나라 이래로 도술道術공씨孔氏에게서 나오지 않아서 천하를 어지럽힌 경우가 많았다.
나라는 노장학老莊學 때문에 망하였고, 나라는 불교佛敎 때문에 망하였으나 혹시라도 이것을 바로잡는 이가 없었는데, 500여 년이 지난 뒤에 한유韓愈를 얻으니, 배우는 자들이 한유韓愈맹자孟子에게 짝하는데, 아마도 거의 옳을 것이다.
한유韓愈로부터 300여 년 뒤에 구양자歐陽子를 얻으니, 그의 학문은 한유韓愈맹자孟子를 미루어 공자孔子에 도달하였고, 인의仁義예악禮樂의 실제를 드러내어 대도大道에 합하였다.
그리고 그 말씀이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고 신실信實하면서도 통달하여, 사물을 이끌고 비슷한 종류를 연결해서 지극한 이치에 절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므로 천하에서는 모두 구양자歐陽子를 스승으로 높였다.
구양자歐陽子가 생존하였을 적에는 세상의 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공격하여, 공의 몸을 좌절시키고 곤궁하게 하였으나 공의 말씀을 굽히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비 중에 어진이나 불초한 이를 막론하고, 상의하지 않고도 똑같이 말하기를 “구양자歐陽子는 지금의 한유韓愈이다.”라고 한다.
나라가 일어난 지 70여 년에 백성들은 병란을 몰랐으며,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잘 가르쳐서 천성天聖경우景祐 연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으나, 사문斯文(유학儒學)은 끝내 옛날에 비해 부끄러움이 있었고, 선비들 또한 누추함을 따르고 구습을 지켜서 의논이 낮고 기개가 약하였다.
그런데 구양자歐陽子가 나오고부터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정신을 연마하여,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옛 법도를 배우는 것을 높게 여기며 세상을 구제하고 를 행하는 것을 어질게 여기며 군주의 얼굴을 범하고 용감히 간하는 것을 충성으로 여겨 인재人材장육長育하고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가우嘉祐 말년에 이르러는 선비가 많다고 알려졌으니, 구양자歐陽子의 공로가 많다고 하겠다.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하늘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구양자歐陽子가 별세한 지 10여 년만에 선비들이 비로소 신학新學을 하여 와 유사한 것을 가지고 주공周公공자孔子의 실제를 어지럽히니, 식견이 있는 자들이 근심하였다.
그런데 천자天子의 밝고 스러움을 힘입어, 조칙을 내려 선비들을 뽑는 법을 닦아(개정하여) 배우는 자들을 격려하고 고무시켜 오로지 공씨孔氏의 학문을 다스리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니, 그런 뒤에야 풍속이 한 번 변해서 사우師友들의 연원淵源의 유래를 상고하고 논하여 다시 구양자歐陽子의 글을 외고 익힐 줄 알게 되었다.
내가 그의 766편을 그의 아들 에게서 얻어 차례로 엮고, 논하기를
구양자歐陽子대도大道를 논한 것은 한유韓愈와 같고, 정사政事를 논한 것은 육지陸贄와 같고, 일을 기록한 것은 사마천司馬遷과 같고, 시부詩賦이백李白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다.
구양자歐陽子이고 영숙永叔이니, 늙어서는 스스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하였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체재體裁가 크면서도 생각이 정밀하고 의논이 쟁반에 굴러가는 진주와 같으니, 문장文章 중에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역주
역주1 六一居士集序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 따르면 이 편은 元祐 3년(1088) 12월에 쓰여졌다. 六一居士는 歐陽脩가 말년에 쓴 自號인데, 歐陽脩는 스스로 〈六一居士傳〉을 지어 六一居士에 대해 밝히기를 “우리 집에는 藏書 1만 권이 있고 三代 이래의 金石遺文集錄 1천 권이 있으며 거문고 하나가 있고 바둑판 하나가 있고 여기에 항상 술 한 병이 있다.……내가 한 늙은이로 이 다섯 물건 가운데에서 늙고 있으니, 어찌 여섯 가지가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六一居士集》은 말년에 歐陽脩가 직접 편찬한 자신의 문집이다.
역주2 孔子曰……不得與於斯文也 : 斯文은 斯道와 같은 뜻인데 孔子께서 겸손하여 ‘이 道’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 文’이라고 칭한 것이라 한다.
孔子의 모습이 魯나라 季氏의 가신인 陽虎와 비슷하였는데, 陽虎가 일찍이 匡 땅에서 포학한 짓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孔子가 匡 땅을 지나가자, 匡 땅 사람들이 孔子를 陽虎로 오인하고 억류하니, 孔子께서 경계하는 마음을 품으셨는바, 위의 내용은 제자들을 위로하려 하신 말씀이다.
《論語》 〈子罕〉에 孔子께서 “하늘이 장차 이 文을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는 사람(나 자신)이 이 文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나 하늘이 이 文을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匡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말씀한 내용이 보인다.
後死者는 《論語集註》에 馬融의 설을 인용하여 “文王이 이미 별세했기 때문에 孔子께서 자신을 일러 ‘뒤에 죽는 사람’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 孟子曰……而予距楊墨 : 楊墨은 楊朱와 墨翟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인데, 楊朱는 자신의 지조를 잘 지켜야 한다는 ‘爲我說’을 주장하여 세상에 나가 벼슬하지 않았고, 墨翟은 남의 부모와 처자식을 자신의 부모와 처자식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兼愛說’을 주장하여 사랑함에 차등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孟子는 楊朱를 無君이라 비판하고 墨翟을 無父라 비판하였다.
楊朱의 학설은 《列子》 등에 보이는데 老莊思想이 여기에 가까우며, 墨翟의 학설은 《墨子》에 나와 있는데 중국의 康有爲 등은 이를 共産主義에 접목시키기도 하였다.
이 말씀은 《孟子》 〈滕文公 下〉에 “聖王이 나오지 아니하여 諸侯가 방자하며 草野에 있는 처사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楊朱와 墨翟의 말이 天下에 가득해서 天下의 말이 楊朱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墨翟에게 돌아간다.
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는 것이요, 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니,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禽獸이다.
公明儀가 말하기를 ‘〈임금의〉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 살진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으며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는 짐승을 내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楊朱와 墨翟의 道가 종식되지 않으면 孔子의 道가 드러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부정한 학설이 백성(사람)을 속여 仁義의 道를 꽉 막는 것이다. 仁義가 꽉 막히면 짐승을 내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다가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先聖의 道를 보호해서 楊朱와 墨翟을 막으며 부정한 말을 추방하여, 부정한 학설을 하는 자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옛적에 禹임금이 洪水를 억제하시자 天下가 평해졌고, 周公이 夷狄을 兼幷하고 猛獸를 몰아내시자 百姓들이 편안하였고, 孔子께서 《春秋》를 완성하시자 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則歸墨 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公明儀曰 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楊墨之道不息 孔子之道不著 是邪說誣民 充塞仁義也 仁義充塞 則率獸食人 人將相食 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昔者 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라고 보이는데, 이것을 東坡가 요약한 것이다.
역주4 以是配禹 : 孔子께서 《春秋》를 지으신 것과 孟子께서 楊朱와 墨翟의 부정한 학설을 막으신 공로가 禹임금이 治水로 천하를 구한 공로와 비견할 만하다는 것이다.
역주5 申商韓非之學 : 申은 申不害(?~B.C. 337)로 전국시대 韓나라의 명재상이자 사상가이다. 본래 鄭나라 출신으로 韓 昭侯의 재상이 되어 韓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그의 사상은 道家에 근본을 두면서도 刑과 名을 중시하여 뒤에 法家의 기반이 되었다.
商은 商鞅(B.C. 390~B.C. 338)으로 商於라는 땅에 봉해져 商君 또는 商鞅이라고 칭하였으며, 衛나라의 公族이므로 衛鞅 또는 公孫鞅이라 칭하였다. 그는 法家의 대표적 인물로, 秦 孝公에게 등용되자 많은 반대파들을 형벌로 탄압하며 국가의 법령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변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秦나라는 商鞅의 變法으로 비로소 강국의 면모를 갖춰 天下統一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韓非(B.C. 281~B.C. 233)는 韓나라의 사상가로 李斯와 함께 荀卿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諸家의 설을 두루 흡수하여 法家思想을 집대성하였다. 뒤에 秦나라에 사신갔다가 그의 재능을 질시한 李斯의 무고로 옥에 갇히자 자살하였다. 저서에는 《韓非子》 55편이 있다. 이들 학설은 道德과 仁義보다는 法治를 위주하여 가혹한 政令이 많았다.
역주6 秦以是喪天下……天下蕭然 : 法家의 학설을 따라 천하를 통일한 秦나라가 불과 3대 만에 陳勝과 吳廣의 반란으로 야기된 혼란 때문에 멸망하고, 이후 劉邦과 項羽가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5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임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륙되어 열 명에 한두 명만이 남아 천하가 쓸쓸해졌다. 이에 대해 儒家인 東坡는 이 처참한 상황의 책임이 法家의 득세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역주7 作於其心……害於其政者 : 이 내용은 《孟子》 〈滕文公 下〉에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先聖의 道를 보호해서 楊朱와 墨翟을 막으며 부정한 말을 추방하여 부정한 학설을 하는 자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부정한 학설은〉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일에 해를 끼치며 일에서 나와 정사에 해를 끼치니, 聖人이 다시 나오셔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 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 聖人復起 不易吾言矣]”라고 보인다.
역주8 太史公曰……賈誼鼂錯明申韓 : 太史公은 司馬遷을 가리키는 바, 이 내용은 《史記》 〈太史公自序〉에 보인다.
蓋公은 漢나라 초기 사람으로 黃老의 無爲自然을 주장하였다. 曹參이 齊나라 國相이 되었는데 膠西에 蓋公이라는 분이 있어 黃老의 학설을 공부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많은 폐백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蓋公이 와서 “정치하는 방도는 깨끗하고 조용함을 귀하게 여기니,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스스로 안정된다.”라고 말하였다. 《史記 曹相國世家》
蓋公에 대한 내용은 본서 25권 〈蓋公堂記〉에 자세히 보인다.
賈誼는 漢 文帝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鼂錯는 晁錯로도 표기하는바, 文帝 때에 태자의 집안일을 맡아보는 令이 되었는데, 지혜가 뛰어나 智囊으로 불렸다. 뒤에 강대한 제후들의 영지를 깎을 것을 제안하였다가 吳․楚 등 7개 국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평소 사이가 나빴던 袁盎의 참소로 景帝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申韓은 申不害와 韓非를 이르는데, 賈誼와 鼂錯는 모두 정치에 있어서는 法家의 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가의와 조조는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설을 밝혔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9 晉以老莊亡 梁以佛亡 : 晉은 魏나라를 이은 西晉을 이른다. 西晉 말엽에 王衍 등 사대부들이 老莊學을 좋아하여 無爲自然의 淸談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현실 정치에 소홀하다가 五胡에게 멸망당하고 강남으로 천도하여 東晉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梁은 남북조시대 남조의 梁나라를 이른다. 南齊의 和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梁나라를 건국한 武帝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수많은 사찰을 짓고 세 번에 걸쳐 스스로 同泰寺에 舍身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막대한 돈을 들여 자신을 되찾아오게 하여 국고를 크게 탕진하였다. 이후 梁나라는 侯景의 반란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武帝는 결국 굶어 죽었다. 舍身은 불교 용어로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여 佛法의 慈悲精神을 표시함을 이른다.
역주10 韓愈 : 韓愈(768~824)는 唐나라의 대문호이자 정치가로 字는 退之이고 昌黎伯에 봉해져 韓昌黎라 칭하였으며 諡號는 文公이다.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처음으로 사륙변려문을 비판하고 古文復興運動을 주창하였으며, 《昌黎先生集》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역주11 富而敎之 :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교육시킴을 이른다.
《論語》 〈子路〉 에 “孔子께서 衛나라에 가실 적에 제자인 冉有가 수레를 몰았는데, 孔子께서 衛나라에 백성들이 많은 것을 보시고 ‘백성들이 많구나.’ 하셨다. 冉有가 ‘이미 백성들이 많으면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부유하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다. ‘이미 부유해지면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가르쳐야 한다.’라고 하셨다.[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라고 보인다.
이에 朱子의 《論語集註》에 “부유하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禽獸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반드시 學校를 세우고 禮義를 밝혀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2 天聖景祐極矣 : 天聖(1023~1032)과 景祐(1034~1038)는 모두 仁宗의 연호로 이때에 宋나라는 가장 번성하였다.
역주13 嘉祐 : 仁宗의 연호로 1056년부터 1063년까지이다.
역주14 歐陽子沒十有餘年……亂周孔之眞 : 新學은 새로운 학문이란 뜻으로 王安石의 新法을 이르며, 周孔은 周公과 孔子를 이른다.
유교 경전의 실용적인 응용을 중시한 王安石은 《詩經》․《書經》․《周禮》를 새로이 해석한 《三經新義》를 저술하여 전국의 學官에 이를 반포하였으며, 또 《字說》 24권을 지었는데 당대의 식자들이 이를 王氏新學이라고 칭하였는바, 이들의 내용 중에는 禪宗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東坡가 周公과 孔子의 실제를 어지럽혔다고 비판한 것이다.
역주15 其子棐 : 棐는 歐陽棐(1047~1113)로 歐陽脩의 셋째 아들이며 字가 叔弼인데, 英宗 治平 4년(1067)에 進士 乙科로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襄州, 潞州, 蔡州의 知州事를 역임하였다.
역주16 論大道 似韓愈 : 論大道는 儒敎를 존숭하고 佛敎와 老莊을 이단으로 비판함을 이른다. 韓愈는 〈原道〉와 〈佛骨表〉 등을 저술하여 佛․老를 이단으로 비판하고 유교를 높였으며, 歐陽脩 또한 〈本論〉을 지어 佛․老를 비판하였다.
역주17 論事似陸贄 : 論事는 政事를 논함을 이른다. 陸贄(754~805)는 唐나라 嘉興 사람으로 諡號는 宣이다. 代宗 大曆 연간에 進士가 되었고 또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였으며 直諫을 잘하였다. 兵部侍郞에 임명되고 中書平章事에 이르렀으나 간신인 裴延齡의 참소로 인해 忠州別駕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奏議에 뛰어나 그가 쓴 奏議를 모아 ‘陸宣公奏議’라 명칭하였는데, 후대 정치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陸贄와 歐陽脩는 모두 당대의 폐단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능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8 記事似司馬遷 : 司馬遷(?~B.C. 86)은 字가 子長이며 前漢時代 左馮翊 夏陽(지금의 陝西省 韓城縣) 사람이다. 《史記》의 저자로 중국 사학의 鼻祖로 칭해져 흔히 太史公으로 불린다. 歐陽脩가 《新唐書》와 《新五代史》를 편찬하였는데, 그 필력이 뛰어나 司馬遷과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9 詩賦似李白 : 李白(701~762)은 唐나라의 저명한 시인으로 字는 太白이고 號는 靑蓮居士이다. 杜甫와 함께 漢詩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져 李白은 詩仙, 杜甫는 詩聖으로 불린다. 天寶 元年(742) 가을에 처음 長安에 나와 賀知章을 만나 ‘천상의 謫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다. 그 뒤 玄宗을 알현하고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翰林供奉으로 임명되고 궁중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歐陽脩는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散文은 물론이요, 詩賦에도 뛰어났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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