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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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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유학의 생활 및 학문 지침서로서,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등 네 학자의 글에서 학문의 중심 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뽑아 편집하였다. 총 14권, 622조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2. 저자

(1)성명:주희(朱熹)(1130~1200), 여조겸(呂祖謙)(1137~1181)
(2)자(字)·별호(別號):주희의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다. 여조겸(呂祖謙)의 자는 백공(伯恭), 호는 동래(東萊)이다.
(3)출생지역:주희는 중국 복건(福建) 우계(尤溪). 여조겸은 절강성(浙江省) 금화(金華).
(4)주요활동과 생애
주희의 부친인 주송(朱松)은 남송(南宋) 휘주(徽州) 무원(婺源) 사람이다. 자는 교년(喬年)이고, 호는 위재(韋齋)이며, 시호는 헌정(獻靖)이다. 건주(虔州) 정화현위(政和縣尉)와 남검주(南劍州) 우계현위(尤溪縣尉)를 지냈으며, 교서랑(校書郞)과 저작좌랑(著作佐郞) 등을 역임했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4년 호세장(胡世將) 등의 천거로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에 올랐다. 주송은 경학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의 가치를 중시했고, 《예기(禮記)》는 노(魯)나라 학자들의 설이 많이 섞여 있다고 여겨 회의적인 입장을 가졌다. 그는 나종언(羅從彦)에게 수학하여 이정(二程)(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이학(理學)을 배웠는데, 이정과 나종언의 학문이 주희에게 이어지도록 교량적 역할을 했다. 또한 사마광(司馬光)의 학문을 존중했다. 당시 재상 진회(秦檜)의 화의(和議) 결정에 동료들과 같이 불가함을 주장하다 미움을 받아 요주지주(饒州知州)로 밀려났는데,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저서에 《위재집(韋齋集)》 등이 있다.
주희는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24세 때 이통(李侗)을 만난 이후 10년 동안 세 차례 가르침을 받으면서 유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주희는 불교(佛敎)와 노장(老莊)사상을 융합하여 이학(理學)의 공고한 기초를 세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주희는 그 이전 시대까지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주자학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른바 북송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북송시대 유학자 다섯 명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명의 유학자들은 북송시대의 학자인 소옹(邵雍),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頤)이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사서(四書)를 집주(集註)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성리학(性理學)의 기반을 다졌다. 철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무원칙하다고 여기고 그것을 다시 재편집하여, 1172년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으며, 또한 프랑스의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 드 마이야(J.M.de Mailla)에 의해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인 《중국통사(中國通史)》의 토대가 되었다. 1200년 건양 고정에서 병사(病死)하였으니, 향년 71세였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에 추증(追贈)되었다.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孔子) 사당에 모셔졌다.
여조겸의 조부(祖父)는 상서우승(尙書右丞)을 지낸 여붕중(呂弸中)이며, 아버지는 여대기(呂大器)이다. 여대기의 자는 치선(治先)이고 일찍이 호안국(胡安國)을 따라 배웠으며, 표은당(豹隱堂)에서 강학하였고 주희 부자와 왕래가 있었다. 우조산랑(右朝散郎)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은 상서창부랑(尙書倉部郎)에 올랐다.
여조겸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책을 접할 수 있었으며, 임지기(林之奇)·왕응신(汪應辰) 등을 사사하고, 주희·장식(張栻)·육구연(陸九淵) 등과 더불어 강학에 힘써 대성하였다. 주희와 육상산 두 사람의 아호사(鵝湖寺)에서의 회합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주희와 함께 북송(北宋) 도학자의 어록을 편집하여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다.
이들이 살았던 시기는 중국 남송 시대이다. 1127년에 금(金)나라 군대에 의해 북송(北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이 함락되고 휘종(徽宗), 흠종(欽宗)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북송이 멸망하자, 이 해에 고종(高宗) 조구(趙構)가 응천부(應天府), 즉 하남(河南) 상구(尙丘)에서 송(宋)나라를 다시 세우고 임안(臨安)(현 절강(浙江) 항주(杭州))에 수도를 두었는데, 이를 남송(南宋)이라 부른다. 강남(江南) 지역으로 쫓겨난 남송은 정치가·군인·학자 사이에 주전론(主戰論)이 강하였으나 문약하여 여진족을 당해내지 못하고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에 따라 군비는 날로 늘어났으며 백성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한 무거운 세금에 허덕여서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송 고종 때, 재상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등 군벌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하였으나 금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화평은 영속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주희는 이부(吏部) 임관 시험에 합격하여 동안현(同安縣) 주부(主簿)가 되었다. 동안현에 부임하는 길에 이통을 방문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유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통은 송대(宋代)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안에서 주부를 지낸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던 중 1175년(순희(淳熙) 2년) 주희가 한천정사(寒泉精舍)에 머물면서 여조겸과 함께 초학자들을 위한 사상의 줄거리와 학문을 다스리는 대강 및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 등을 북송 시대 학자들의 어록·문집 중에서 뽑아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이 바로 《근사록》이다.
(5)주요저작
주희의 저작에는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 《근사록(近思錄)》,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예의경전통해(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이외에도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과,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여조겸의 저작에는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25권, 《여씨가숙독지기(呂氏家塾讀持記)》 32권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근사록(近思錄)’이란 서명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근사(近思)’란 일상생활에 절실한 사실을 묻고 생각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나의 몸에 가까운 문제에서 출발하여 깊은 이치에까지 미친다는 말이다.
주희가 한천정사(寒泉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 여조겸이 주희를 방문하여 10일간 머물면서 함께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의 어록·문집 등 총 18종의 문헌을 읽고, 그들의 학문이 대단히 높고 넓은 것에 감탄하였는데, 동시에 처음 배우는 학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글을 읽고 어디서부터 학문을 시작해야 될지 모르게 될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 사상의 줄거리 가운데 학문을 다스리는 대강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 622조목을 뽑고, 왕복 편지를 편집해서 1178년 4월에 완성하여 책 제목을 《근사록》이라고 하였다.
《근사록》은 모두 14권, 622조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학문하는 사람이 ‘단서를 찾아 힘쓰고[求端用力], 자신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處己治人] 요점과 이단을 변별하고[辨異端], 성현의 대략을 보는 일[觀聖賢之大略]’의 큰 줄기가 《근사록》에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희는 14권을 여섯 강목으로 요약했는데, 첫째 구단(求端)은 권1 〈도체(道體)〉, 둘째 용력(用力)은 권2 〈위학(爲學)〉·권3 〈치지(致知)〉·권4 〈존양(存養)〉, 셋째 처기(處己)는 권5 〈극기(克己)〉·권6 〈가도(家道)〉·권7 〈출처(出處)〉, 넷째 치인(治人)은 권8 〈치체(治體)〉·권9 〈치법(治法)〉·권10 〈정사(政事)〉·권11 〈교학(敎學)〉·권12 〈경계(警戒)〉, 다섯째는 권13 〈변이단(辨異端)〉, 여섯째는 권14 〈관성현(觀聖賢)〉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5에서는 편에 따라 강목을 만들어 14권을 총괄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1) 도체(道體), 2) 위학대요(爲學大要), 3) 격물궁리(格物窮理), 4) 존양(存養), 5) 개과천선(改過遷善)·극기복례(克己復禮), 6) 제가지도(齊家之道), 7) 출처진퇴사수지의(出處進退辭受之義), 8) 치국평천하지도(治國平天下之道), 9) 제도(制度), 10) 군자처사지방(君子處事之方), 11) 교학지도(敎學之道), 12) 개과급인심자병(改過及人心疵病), 13) 이단지거(異端之擧), 14) 성현기상(聖賢氣象)이다. 그러나 주희가 죽은 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표현해내기가 불편하다 하여 그 대의를 취하고 개수하여 다시 두세 글자로 편명을 정했다. 이렇게 한 것은 중국 남송(南宋) 때의 섭채(葉采)의 집해본이 처음이며, 이후 관례가 되어 통행되고 있다.

4. 내용

권1 〈도체〉는 도의 본연의 체단을 밝히고 학술의 요점을 총론한 것이다. 권2 〈위학〉은 도체를 나에게 온전하게 하기 위한 공부를 서술한 것으로 학문의 본뜻은 수기·치인 두 가지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까지가 〈위학〉의 본론이고, 권3에서 권12까지는 〈위학〉의 강목이다. 권3 〈치지〉는 격물궁리로서의 심체의 밝음을 다하는 방법을 밝히고 있는데, 치지의 본질과 방법을 총론했고, 독서론과 독서의 방법에 대해 경전을 인용하여 논했다. 권4 〈존양〉에서는 송학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었던 존양공부로서의 교(敎)에 대해 주돈이의 주정(主靜)에 입각하여 정호·정이의 교설을 말했다. 권5 〈극기〉에서는 주로 실천궁행을 말했고, 권6 〈가도〉에서는 제가의 도로서 윤리와 인의를 말했다. 권7 〈출처〉에서는 벼슬에 나아가고 집에 처하는 방법을 고어를 인용하고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서술했다. 권8 〈치체〉에서는 예·악·형·정을 비롯한 제반의 제도를 논했으며, 학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권9 〈치법〉에서는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방법과 군자의 일처리 하는 방법, 인재육성, 국방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 말했다. 권10 〈정사〉에서는 정치에 임하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논했는데, 여기에는 정이의 《역전(易傳)》을 싣고 역의 도리로써 서술한 곳이 많다. 권11 〈교학〉에서는 의리를 가르쳐 인륜을 밝게 하는 것이 교학의 근본 의미라고 했다. 권12 〈경계〉에서는 대체로 적절한 실무를 방해하는 마음의 편견과 고집 등의 병폐들을 지적하였고, 인심의 위태로움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있다. 권13 〈변이단〉에서는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의 학문을 이단으로 보았고, 위아설(爲我說)의 양주(楊朱)와 겸애설(兼愛說)의 묵적(墨翟)의 폐해는 그것보다 심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노자·불교의 학설은 고상한 형이상학의 설로써 사람을 미혹에 빠지게 하므로 양주·묵적의 해보다 더욱 심하다고 했고, 신선술에 대해서도 이단으로 보고 비판했다. 특히 〈변이단〉은 불교 비판과 신유학의 정당화를 위한 논거를 제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권14 〈관성현〉에서는 요·순으로부터 주돈이·정호·정이·장재에 이르기까지 성현의 지극한 기상을 논했다.

5. 가치와 영향

《근사록》은 예로부터 성리학을 배우는 사람들의 필독서였으며, 일종의 철학 선집으로서 ‘송학(宋學)의 《논어(論語)》’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며, 《성리대전(性理大全)》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주희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05에서 “육경(六經)을 알려면 사서(四書)를 읽어야 하고, 사서를 알려면 《근사록》부터 읽어야 한다.”라고 권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근사록》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성리학의 교본으로써 유학자들이 애독했던 필독서였다. 《근사록》은 주자학이 창도한 우주적 인간론의 철학적 토대를 보여주고, 그 우주적 본성을 개인과 가족, 공동체와 국가의 지평에서 발견하고 실현해나가는 통합적 구상을 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매우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리성과 합리적인 면으로 성리학의 이념과 체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책이며, 동양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공부에 있어서 지식과 자기 수행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책이다.
《근사록》은 이미 고려조에 우리나라에 수입되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 국가 지도이념으로서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조선조의 학자들은 주자학의 보급과 함께 이 책을 존중하여 사서 및 《소학(小學)》 등과 같이 병칭하였다. 즉 주희의 《소학》과 사서집주(四書集註)와 《근사록》을 통하여 조선의 학자들은 주자학의 본질과 성리학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황(李滉)은 《근사록》과 남송(南宋)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을 특히 존중하였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 등도 이 책을 애독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연구하여 관련된 저술이 다수 남아 있다. 이이의 《근사록구결(近思錄口訣)》, 김장생(金長生)과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이익(李瀷)의 《근사록질서(近思錄疾書)》, 박지계(朴知誡)의 《근사록의의(近思錄疑義)》, 박이곤(朴履坤)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송병선(宋秉璿)의 《근사속록(近思續錄)》, 이한응(李漢膺)의 《속근사록(續近思錄)》, 김평묵(金平黙)의 《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 등이 대표적이다.

6. 참고사항

(1)명언
• “덕의 속성 중에서 사랑의 원리를 인, 마땅함의 원리를 의, 조리·질서의 원리를 예, 통달의 원리를 지, 지키는 원리를 신이라고 한다.[德 愛曰仁 宜曰義 理曰禮 通曰智 守曰信]” 〈도체(道體)〉
• “사람이 부모가 없으면 생일날에는 당연히 비통함이 배가되니, 어찌 차마 술판을 벌이고 음악을 연주하여 즐길 수 있겠는가?[人無父母 生日 當倍悲痛 更安忍置酒張樂 以爲樂]” 〈가도(家道)〉
• “격한 마음으로 자기 몸을 죽이기는 쉬우나, 조용히 의로움에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感慨殺身者易 從容就義者難]” 〈정사(政事)〉
•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항상 사람을 부리기 전에 자기에게 그 일의 경험이 있어야 잘 다스릴 수가 있다.[大抵使人 常在其前 己嘗爲之 則能使人]” 〈정사(政事)〉
(2)색인어:주희(朱熹), 여조겸(呂祖謙), 근사록(近思錄),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소옹(邵雍), 정이(程頤), 정호(程顥), 태극(太極), 이(理), 성(性), 천명(天命)
(3)참고문헌
• 近思錄集解(葉采, 晋州, 刊寫者未詳)
• 近思錄集註(江永, 江蘇書局)
• 譯註 近思錄集解(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 근사록(주희·여조겸 엮음, 이기동 옮김, 홍익출판사)
• 근사록-덕성에 기반한 공동체, 그 유교적 구상-(한형조 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근사록(박일봉 역, 육문사)
• 신완역 근사록(김학주 역, 명문당)
【함현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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