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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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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대 성리학의 대표 주희(朱熹)의 문집이다. 송대에 이루어진 성리학은 11세기 북송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그리고 12세기 남송의 주희 등이 그 중심인물이어서, 주정장주학(周程張朱學)이라고 한다. 또는 그들의 출생지 이름을 따서 염락관민학(溓洛關閩學)이라고도 한다.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곧 《주자대전》이다. 정식 명칭은 《회암선생주문공문집(晦庵先生朱文公文集)》이다. 이와는 별도로 여정덕(黎靖德)이 편찬한 주희의 어록집인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2. 저자

(1)성명:주희(朱熹)(1130~1200)
(2)자(字)·별호(別號):주자학자들에 의해 주자(朱子)로 존칭된다.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이다.
(3)출생지역: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4)주요활동과 생애
주희는 어려서는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강우(講友)로는 장식(張栻)(남헌(南軒))·여조겸(呂祖謙)(동래(東萊))가 있으며, 논적(論敵)으로는 육구연(陸九淵)(상산(象山))이 있었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다. 46세까지는 북송의 주돈이(周敦頤)(염계(濂溪))·장재(張載)(횡거(橫渠))·정호(程顥)(명도(明道))·정이(程頤)(이천(伊川))의 저서를 교정하고, 《논어(論語)》·《맹자(孟子)》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하였다. 이 시기에 《근사록(近思錄)》을 엮었다. 그 뒤 육구연 형제와 아호사(鵝湖寺)에서 토론하면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 시기에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을 저술하였다. 사서(四書)의 신주(新注)를 완성한 것이다. 61세 이후에는 〈석전예의(釋奠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을 저술하였다. 만년에는 권신 한탁주(韓侂冑)의 미움을 사서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죽은 뒤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을 추증(追贈)받았다.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 여정덕(黎靖德)이 편찬한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주희는 사서에 주석을 하였는데, 《대학》·《중용》의 주석은 ‘장구(章句)’라 하고, 《논어》·《맹자》의 주석은 ‘집주(集注)’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아울러서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혹은 간단히 《사서집주(四書集注)》라고 부른다. 주희는 임종하기 하루 전에도 《대학장구》를 수정했다고 한다. 《사서집주》는 이학(理學)으로 사서(四書)를 주석하고 의리(義理)를 밝힌 것이지만, 훈고의 면에서도 탁월한 방법을 구사하였다. 주희는 한나라 때의 주석[漢注]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묵수하지 않고 의리의 철학을 수립하였다. 그의 경전 주석을 신주(新注)라고 부른다. 주희는 경문(經文)을 해석할 때에 먼저 파독(破讀)의 사실을 알리거나 난독자의 음을 제시한 뒤, 권내주(圈內註)에서 명물(名物)·자구(字句)를 주석하고서 편장(篇章)의 문맥을 해석하였으며, 권외주(圈外註)에서 철학적 의의를 논하였다.
주희는 《시경》 연구에서 한·당의 ‘모정지학(毛鄭之學)’에 대해 회의를 품어, 《시집전(詩集傳)》 8권과 《시서변설(詩序辨說)》을 저술하여 〈시서(詩序)〉의 오류를 비판하고 《시》 본문에 의거하여 시인(詩人)(《시》 시편의 작자)의 본의(本意)를 탐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주희는 《서경》의 문헌학적 연구와 새로운 해석에도 관심을 두었으나, 실제 작업은 제자 채침(蔡沈)에게 맡겼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칙명의 ‘사서오경대전’ 가운데 《서전대전(書傳大全)》은 채침이 완성한 《서집전(書集傳)》의 주를 중심으로 하고, 주희의 설과 주희 이후 주자학자들의 주를 모은 것이다. 그리고 주희는 《주역》 해석에서 상수학(象數學)과 의리학(義理學)을 종합하여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집필하였다. 이외에도 주희는 만년에, 후세 사람들이 참조할 수 있도록 예에 관한 고전을 정리하였다. 즉 《의례(儀禮)》를 중심에 두고 《예기(禮記)》와 《주례(周禮)》, 그리고 경(經)·사(史)·잡서에 나오는 관련 글들을 독특한 분류 체계에 따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황간(黃幹)과 제자 양복(楊復) 등에 의해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결집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주자의 서적으로 간주되고 널리 활용된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는 주희가 직접 저술한 책은 아닌 듯하다. 즉 조선시대 사대부의 관(冠)·혼(婚)·상(喪)·제(祭)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책이 《주자가례》이다. 이 책은 주희가 유가(儒家)의 예법(禮法)·의장(儀章)에 관하여 상술한 책이라고 알려져,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한다. 혹은 이 책은 주희 사후에 세간에 통용된 미완성의 서적이라고 한다.
그밖에 주희는 《초사(楚辭)》를 연구하여 《초사집주(楚辭集注)》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산해경》이 《초사》의 기록을 기초로 환상적인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 《자치통감》은 너무 거질(巨帙)이어서 열람하기 어렵다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59권을 엮었다.
(5)주요저작:사서집주(四書集註), 《시집전(詩集傳)》, 《서집전(書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초사집주(楚辭集注)》,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주자대전》의 완전한 명칭은 《회암선생주문공문집(晦庵先生朱文公文集)》이다. 문집은 전하는 판본이 상당히 많아, 책의 이름과 권수(卷數)가 각각 다르다. 《회암집(晦庵集)》·《회암문집(晦庵文集)》·《주자대전문집(朱子大全文集)》·《주자문집대전(朱子文集大全)》·《주자문집(朱子文集)》·《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이라고도 부른다. 단, 권두서명(卷頭書名)은 ‘회암선생주문공문집(晦庵先生朱文公文集)’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송각(宋刻) 대자본(大字本)은 《회암문집(晦庵文集)》이라 하였는데, 남송 이종(理宗) 때에 이루어진 주재(朱在)의 원본으로 100권이다. 청나라 강희(康熙) 27년(1688) 소방병(蔡方炳)이 판각한 민본(閩本)의 소자본(小字本)은 《회암집(晦庵集)》이라 하였는데, 정집(正集) 100권, 《속집(續集)》 5권, 《별집(别集)》 7권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이 판본을 근거로 저록하였다. 문집의 정집(正集) 100권은 주희의 아들 주재가 편집하였고, 《별집》은 주로 여사로(余師鲁)가 편집하였으나, 《속집》은 누가 편찬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비해 광서(光緖) 2년(1876) 《서경청록총서(西京淸麓叢書)》, 광서 연간의 《유씨전경당총서(劉氏傳經堂叢書)》는 《주자대전문집(朱子大全文集)》이라 하였으며, 모두 하단린(賀端麟)의 《문집정위(文集正僞)》·《기의(記疑)》·《정위기의보유(正僞記疑補遺)》 각 1권을 부록으로 지니고 있다. 송나라 각본(刻本)을 토대로 명나라 때 수보(修補)한 판본은 《주문공집(朱文公集)》이라 하였는데, 정집(正集)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다. 이것은 도종(度宗) 함순(咸淳) 원년(1265)에 주자의 후손 주옥(朱玉)이 교정하여 간행한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과 같은 계통인 듯한데, 표지 서명이 다르다. 《사부총간(四部叢刊)》 수록본은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부비요(四部備要)》 수록본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 하였다. 주옥이 엮고 청나라 함풍(咸豊) 연간에 서수명(徐樹銘)이 간행한 판본은 《주자문집대전유편(朱子文集大全類編)》이라 하였다. 강희(康熙) 연간에 판각된 《주자전서(朱子全書)》 66권본은 《주문공문집》에서 절록(節錄)하여 이룬 것이다.
조선에서도 《주자대전》은 엄밀한 교감이 이루어졌고, 절록본도 다수 나왔다. 16세기 중엽 유희춘(柳希春)이 당시 동지경연성균관춘추관사(同知經筵成均館春秋館事)로서 교서관(校書館)의 제주(提調)로 있으면서 이황(李滉)의 교주본(校註本)을 토대로 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교정(校正)하여 1575년(선조 8) 6월에 선조에게 올리면서 상전문(上箋文)을 함께 바쳐, 교감의 전문적 자세와 선배·동학의 공적을 추허(推許)하는 진심을 토로하였다. 이해 유희춘은 《주자어류》를 영남 감영에서, 《주자대전》을 호남 감영에서 간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치면서 이 책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므로 인조(仁祖)의 명에 의하여 유희춘교정본(柳希春校正本)을 토대로 다시 여러 번 간행되었다. 그중 《주자대전》은 호남(湖南)에서, 《주자어류》는 영남(嶺南)에서 각각 간행되었다. 영조(英祖) 때에 와서 이 판본(板本)이 유실되자, 홍계희(洪啓禧)가 2년에 걸쳐 교정(校正)을 하여 1771년(영조 47)에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 《주자대전》을 간행하고 영남감영에서 《주자어류》를 간행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 후기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그 후학들에 의해 본문을 교정한 《주자대전차의보(朱子大全箚疑補)》 100권 《별집(別集)》 10권 《속집(續集)》 11권이 이루어졌다.

4. 내용

1771년(영조 47)에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 간행된 《주자대전》은 정집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 《유집(遺集)》 1권, 《부록》 12권으로 이루어졌다. 주희의 아들 주재가 편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주자문집대전신묘입재완영장판(朱子文集大全辛卯入梓完營藏板)〉이라는 간기(刊記)와 총목(總目)이 있고, 1575년에 유희춘이 쓴 교정범례(校正凡例), 1770년에 홍계희가 쓴 개간범례(改刊凡例)가 있다. 목록은 상하로 나누어, 집별(集別)·권별(卷別)로 수록 시문의 제목을 기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원집(原集):권수상하(卷首上下) 목록(目錄), 권1 사(詞)·부(賦)·금조(琴操)·시(詩), 권2~9 시(詩), 권10 시(詩)·악부(樂府), 권11~12 봉사(封事), 권13~14 주차(奏箚), 권15 강의(講義)·의장(議狀)·차자(箚子), 권16~19 주장(奏狀), 권20~21 신청(申請), 권22~23 사면(辭免), 권24~64 서(書), 권65~74 잡저(雜著), 권75~80 기(記), 권81~84 발(跋), 권85 명(銘)·잠(箴)·찬(賛)·표(表)·발(跋)·계(啓)·혼서(婚書)·상량문(上樑文), 권87 제문(祭文), 권88~89 비(碑), 권90 묘표(墓表), 권91~94 묘지명(墓誌銘), 권95~97 행장(行狀), 권98 행장(行狀)·사실(事實)·연보(年譜)·전(傳), 권99~100 공이(公移).
② 속집(續集):권1~11 서(書).
③ 별집(別集):권1~6 서(書), 권7 시(詩)·기(記)·축문(祝文)·제문(祭文)·제발(題跋), 권8 잡저(雜著)·진정(陳情)·계(啓), 권9~10 공이(公移).
④ 유집(遺集):권1 사(詞)·부(賦)·시(詩), 권2 주장(奏狀)·서(書)·잡저(雜著)·서(序)·발(跋)·묘명(墓銘)·공이(公移).
⑤ 부록(附錄):권1 도통원류(道統源流)·세계원류(世系原流)·부사유언(父師遺言), 권2 유상(遺像)·본전(本傳)·서술(敍述)·제문(祭文), 권3 행장(行狀), 권4~6 연보(年譜), 권7 택사서원정방사원기제(宅祠書院亭坊祠院記題), 권8~10 사원기제(祠院記題), 권11 제편서발(諸編序跋), 권12 서목(書目)·묵적(墨蹟)·제명록(題名錄)·당금록(黨禁錄)·삼간무어(三姦誣語).
주희는 이한(李漢)이 〈창려문집서(昌黎文集序)〉에서 “글이란 관도의 그릇[貫道之器]”이라고 했던 말에 대해 “문은 모두 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거늘 어찌 문이 도를 꿴다는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這文皆是從道中流出 豈有文反能貫道之理]”라고 반박했다. 주희는 문을 주체로 삼는 논법을 경계하였지, 관도론과 재도론을 분리한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주희의 언급 이후 관도론은 도를 경시하는 논리, 재도론은 문을 경시하는 논리로 그 둘을 양분해서 파악하는 논자들이 나타났다. 주희는 주돈이와 정이의 주장을 이어 작문(作文)이 도에 해가 된다고 언명하고, 고문가가 연구하는 대상과 도학가가 연구하는 대상은 동일하지만 둘의 영역은 다르다고 했다. 〈창주정사에서 학자를 깨우친다[滄洲精舍諭學者]〉라는 글에서 주희는, 소식이 처음 공부를 하여 글을 지을 때 《논어》·《맹자》, 한유의 글과 기타 성현의 글을 취해 종일 읽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고인의 말의 성향(聲響)을 배운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또 한유·유종원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그것도 역시 좋은 문장을 지어 남에게 칭송을 받으려고 한 것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주자어류》에서는 한유가 올바른 도를 터득했지만 작문에 시간을 빼앗긴 탓에 경륜의 실무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주희는 문장을 하찮은 기예로 간주하여 그 예술성을 경시했고, 문장의 주제사상을 중시한 결과 그 형식의 측면을 조금 홀시했다.
《주자대전》에는 주희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시문들이 많다. 주자는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 사고로 고시(考試)에 참가하지 못했거나 고시에 불합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보시(補試)를 주관하면서 〈보시방유(補試榜諭)〉를 내걸어 과거 공부의 폐습(弊習)을 통렬히 지적하고 먼저 자신의 행실을 닦는 군자의 학문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답진사덕(答陳師德)〉·〈답여자약(答呂子約)〉에서는 이학(理学)의 교육사상을 드러내었다. 〈답황도부(答黄道夫)〉·〈답옥자합(答玉子合)〉·〈답육자미(答陸子美)〉·〈답육자정(答陸子靜)〉·〈답진위도(答陳衛道)〉 등의 서신에서 주희는 이(理)를 기(氣)보다 선재하는 것으로 보는 객관유심주의 체계를 서술하였다. 〈답강숙권(答姜叔權)〉·〈답흠부인설(答欽夫仁說)〉·〈답정자상(答鄭子上)〉·〈답채계통(答蔡季通)〉·〈답진기지(答陳器之)〉 등의 서신에서는 천명지성(天命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인성론, 인심과 도심의 관계, 천리와 인욕의 대립 등에 대하여 논하였다. 〈독대기(讀大紀)〉·〈답장경부(答張敬夫)〉·〈송장중륭서(送張仲隆序)〉·〈갑인행궁편전주찰(甲寅行宮便殿奏札)〉 등에서는 정치이념과 역사관을 천명하였다. 주희는 수공전(垂拱殿), 연화전(延和殿), 편전(便殿) 등에서 고종(高宗)에게 올린 주차(奏箚)에서, 시국의 병폐를 지적하는 매우 간절한 직언을 올렸다. 《주자대전》 권13에 〈계미수공주차(癸未垂拱奏箚)〉, 〈신축연화주차(辛丑延和奏箚)〉가 실려 있고, 권14에 〈무신연화주차(戊申延和奏箚)〉, 〈갑인행궁편전주차(甲寅行宮便殿奏箚)〉 등이 실려 있다.
또한 《주자대전》에는 주희의 사상이 미학적으로 표현된 시문이 많다. 〈무원서각기(婺源書閣記)〉는 의론이 위주인 글로, 기문(記文) 양식의 예술적 문장으로서도 전범이 될 만하다. 또한 주희의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과 〈무이도가(武夷櫂歌)〉, 〈운곡기(雲谷記)〉 등은 후대 학자들의 산수자연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5. 가치와 영향

주희는 성리학(性理學)의 집대성자로, 원나라와 조선에서 특히 존숭되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주희의 문집인 《주자대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국가적 사업으로 교정, 간행하였다. 16세기에 이황(李滉)은 주희의 서찰을 수신자의 신분고하에 따라 분류하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엮고, 17세기에 조익(趙翼)은 《주서요류(朱書要類)》 12권 6책을 별도로 엮었다. 1652년(효종 3) 재편하였다. 조익은 1642년(인조 20)에 《근사록》의 체제를 따라 이기성명(理氣性命)에 관계된 서찰을 권수(卷首)에 배열하였다가, 1652년(효종 3)에는 이기성명편(理氣性命篇)을 뒤로 돌리고 논학(論學)에 관한 서찰을 앞에 두었다. 또한 조선후기의 정조는 잠저(潛邸) 시절 1771년(영조 47)에 왕영장판(完營藏板) 《주자대전문집》을 열람하면서 주청(朱靑) 2도의 비점을 붙였다. 규장각본 《주자대전》(규중(奎中) 618 64책 영본(零本))을 보면 목록 2책을 제외한 나머지 62책의 표지 안쪽에 “상재춘저기축(上在春邸己丑)(1769)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 신(臣) 한용화(韓用和) 신(臣) 이술원(李述源) 등(等) 봉령구두점주차의초록(奉令句讀點朱箚疑抄錄)”이라 쓰여 있다.
이황은 〈도산기(陶山記)〉에서 서재 암서헌(巖棲軒)의 이름을, 〈운곡이십육영〉 가운데 〈회암(晦菴)〉 시의 “스스로 믿었어도 오래도록 능하지 못하니, 산속에 깃들어 은미한 효험 바라노라.[自信久未能 巖棲冀微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이황은 “산중에서 세상 마치겠다는 소원이 어찌 유독 노봉(蘆峯)의 산마루에서만 읊어졌겠는가.”라고 했는데, 이 역시 〈운곡이십육영〉 가운데 〈초려(草廬)〉의 “푸른 산이 초가집을 에워싸고 은둔자의 집 문을 가렸네. 죽을 때까지 내 뜻대로 즐기려니, 세속인들이여 돌아보지 마시길.”[靑山繞蓬廬 白雲障幽戶 卒歲聊自娛 時人莫留顧]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6. 참고사항

(1)명언
• “반 묘의 각진 못이 거울처럼 트여, 하늘 빛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서 배회하누나. 묻거니 어이하여 그처럼 해맑을까, 근원에서 생수(生水)가 솟아나기 때문이로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관서유감(觀書有感)〉
• “다만 사람의 마음이 수시로 드나들어 종소리 하나가 쉬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도 이미 수없이 변하던 것을 말하였을 뿐이다.[但言人心出入無時 鐘之一聲未息 而吾之心已屢變矣]” 〈답장경지(答張敬之)〉
• “나의 쇠병이 금년에는 다행히 아주 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정력은 더욱 쇠퇴하고 시력은 완전히 짧아져서 문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노라니 도리어 놓아 달아났던 마음이 수습되어 지난날에 바깥으로 향해 치달려 가던 마음이 적지 않았음을 깨달았기에, 일찍 시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 몹시 한스럽습니다.[熹衰病今歲 幸不至劇 但精力益衰 目力全短 看文字不得 瞑目閒坐 却得收拾放心 覺得日前 外面走作不少 頗恨盲廢之不早也]” 〈답반숙도(答潘叔度)〉
(2)색인어: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朱子), 주희(朱熹), 주자어류(朱子語類), 사서집주(四書集註),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이황(李滉), 유희춘(柳希春), 홍계희(洪啟禧), 운곡이십육영(雲谷二十六詠), 무이도가(武夷櫂歌)
(3)참고문헌
• 朱子大全箚疑補(宋時烈 著)
• 朱書百選·雅誦(서울대학교 규장각)
• 御定大學類義(서울대학교 규장각)
• 朱子書節要(서울대학교 규장각)
• 朱子書節要記疑·朱子書節要講錄(서울대학교 규장각)
• 朱文酌海(鄭經世 編, 서울대학교 규장각)
• 朱書要類(趙翼 編, 서울대학교 규장각)
• 朱子大全拾遺(朴世采 編, 서울대학교 규장각)
• 朱子學大系 第4, 5卷 《朱子文集》上下(荒木見悟·岡田武彦·山下龍二 編, 明德出版社)

【심경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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