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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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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叢目)≫을 보면 “고계(高啓)는 타고난 재주가 높고 뛰어나 실로 명 일대 시인의 위에 있다.[啓天才高逸 實據明一代詩人之上]”라고 하여 고계를 명대 최고의 시인으로 기록하였다. 이 같은 고계의 유편(遺編)을 모아 편집한 책이 ≪고태사대전집≫이다. ≪고태사대전집≫에는 악부(樂府), 고체시(古體詩), 장단구(長短句), 근체시(近體詩) 등 운문 2,000여수가 수록되어 있어, 가행체(歌行體)에 능했던 고계의 시재(詩才)를 살펴볼 수 있다.

2. 저자

(1) 성명:고계(高啓)(1336~1374)
(2) 자(字)·호(號):자는 계적(季迪), 호는 사헌(槎軒), 자호(自號)는 청구자(靑丘子)
(3) 출생지역:장주(長洲)(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洲))
(4) 주요활동과 생애
고계의 사적(事蹟)은 ≪명사(明史)≫ 〈문원전(文苑傳)〉에 실려 있다. 그는 명(明) 홍무(洪武) 원년(元年)(1368)에 부름을 받아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가 되어 ≪원사(元史)≫를 찬수(簒修)하였다. 사람됨이 고고(孤高)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사상은 유가를 근본으로 불가와 도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정치를 혐오하였고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을 가벼이 여겼다. 홍무 3년(1370) 가을 주원장(朱元璋)이 그를 호부우시랑(戶部右侍郞)에 위임하였으나 고사(固辭)하였고 하사(下賜)한 금품을 돌려보냈다. 원말(元末)에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피하여 오송청구(吳淞靑丘)(지금의 소주시(蘇州市) 오중구(吳中區))에 은거하였기에 자호를 청구자라고 하였다.
고계는 청구에 은거한 뒤 글을 가르치며 밭을 갈아 자급하였다. 홍무 6년(1373) 소주지부(蘇州知府) 위관(魏觀)이 부(府)의 옛터에 관아를 수복(修復)하였고 고계는 이를 위하여 〈군치상량문(郡治上梁文)〉을 썼다. 어사(御史) 장도(張度)가 원래 장사성(張士誠)의 궁터였던 곳에 관아를 짓는 것은 위관이 반역의 의도를 품은 것이라 무고(誣告)하였다. 이에 위관은 죽임을 당하였고 평소 고계가 시를 지어 자신을 풍자하였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주원장은 장도의 무고를 빌미로 상량문을 쓴 고계를 요참(腰斬)하였다.
고계는 왕행(王行), 서분(徐賁), 여요신(余堯臣) 등과 더불어 북곽사우(北郭四友)로 시사(詩社) 활동을 하였다. 유기(劉基), 송렴(宋濂)과 더불어 명초시문삼대가(明初詩文三大家)로 불리며, 양기(楊基), 장우(張羽), 서분(徐賁)과 더불어 오중사걸(吳中四傑)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젊어서부터 영민하였고 시를 힘써 공부하였다. 포조(鮑照)와 사령운(謝靈運)을 모의한 시는 그들의 시에 방불(彷彿)하였고,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본받아 시를 짓는데 능하였으며 특히 七言歌行에 뛰어났다. 이에 젊어서부터 시작(詩作)으로 명성을 얻었다. ≪사고전서총목≫을 보면 “한위(漢魏)를 본뜨면 한위와 같고, 육조(六朝)를 본뜨면 육조와 같으며, 당(唐)을 본뜨면 당과 같고, 송(宋)을 본뜨면 송과 같으니 무릇 옛사람의 뛰어난 바를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5) 주요저작:≪고태사부조집≫ 또한 고계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고태사부조집≫에는 논(論), 기(記), 서(序), 전(傳), 찬(贊), 잠(箴), 명(銘), 발(跋), 잡저(雜著) 등 산문이 수록되어 있어, 고계의 문학관, 작시 태도, 당시 문인들과의 교류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그 밖의 중요한 저술로 ≪원사(元史)≫, ≪부명집(缶鳴集)≫ 12卷, ≪구현집(扣舷集)≫ 1卷(詞集)이 있다.

3. 서지사항

≪고태사대전집≫은 고계가 죽은 지 76년이 되는 경태(景泰) 원년(元年)(1450)에 서용(徐庸)이 ≪부명집(缶鳴集)≫ 등 고계의 유편(遺編)들을 모아서 18권으로 편찬한 것으로 유창(劉昌)이 서(序)를 적었다. 권1 : 고악부(古樂府), 권2 : 악부, 권3 : 오언고시(五言古詩), 권4 : 오언고체(五言古體), 권5⋅6⋅7 : 오언고시, 권8⋅9⋅10 : 칠언고체(七言古體), 권11 : 장단구체(長短句體), 권12⋅13 : 오언율시(五言律詩), 권14 : 연구(聯句)⋅육언율시(六言律詩)⋅칠언고체(七言近體), 권15 : 칠언율시, 권16 : 오언절구(五言絶句), 권17⋅18 : 칠언절구로 구성되어 있다.

4. 내용

고계의 시가 작품 가운데 고체시는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으며, 근체시는 소주 일대의 자연환경과 풍물을 노래한 영물시(詠物詩)가 많다. 내용상으로는 크게 산수시(山水詩), 전원시(田園詩), 회고시(懷古詩), 영물시(詠物詩) 등 넷으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시는 체제와 풍격이 다양하며 시재(詩才)와 사상이 뛰어난 까닭에 옛 것을 학습하여 모의한 흔적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가의 상당수가 가작(佳作)으로 평가된다.
고계의 인생관과 더불어 그의 창작 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청구자가(靑邱子歌)〉와 소주 일대의 명승고적을 노래한 〈고소잡영(姑蘇雜詠)〉 132수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관직을 지낸 3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생을 고향에서 보낸 고계는 적지 않은 시구에 농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반영하였다. 이와 같이 천재와 병란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의 삶을 묘사한 작품인 〈목우사(牧牛詞)〉 〈전가행(田家行)〉 〈양잠사(養蠶詞)〉 〈대수(大水)〉 등은 고계 시가의 정화(精華)로 꼽힌다. 아울러 〈심호은군(尋胡隱君〉은 고계 시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5. 가치와 영향

고계가 후대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더욱이 39세의 나이에 요절한 까닭에 그 스스로 주장한 바의 일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연의(演義), 소설(小說), 희곡(戲曲)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시가는 단지 화려한 형식만을 추구할 뿐, 내용은 공허하였던 원말명초(元末明初)의 詩壇에서 고계는 시가 발전의 기치를 든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漢)으로부터 당(唐)⋅송(宋)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며 뭇 시인들로부터 시법(詩法)을 취하여 옛 것을 본받은 뒤에 일가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옛 시인들의 여러 장점을 두루 본받아야 하며 일에 따라 모의하고 때를 기다려 마음이 융합한 뒤 혼연자성(渾然自成)하여야 비로소 대가라 할 수 있으며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해를 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명구
• “세상에는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없으니 스스로 좋은 시를 지어 크게 읊어대리라.[世間無物爲我娛 自出金石相轟鏗]” 〈靑丘子歌〉
• “하찮은 이록을 위하여 굽실거리지 않을 것이요 공명을 얻으려 함부로 혀를 놀리지도 않을 것이다.[不肯折腰爲五斗米 不肯掉舌下七十城]” 〈靑丘子歌〉
• “시의 요체는 셋이니 격과 의와 취일 따름이다.[詩之要三 曰格 曰意 曰趣而已]” 〈獨庵集序〉
(2) 색인어:고계(高啓), 오중사걸(吳中四傑), 고태사대전집(高太史大全集), 고태사부조집(高太史鳬藻集)
(3) 참고문헌
• ≪高太史大全集≫(大本原式精印 四部叢刊正編 法仁文化史)
• ≪高太史鳧藻集≫(大本原式精印 四部叢刊正編 法仁文化史)
• ≪明史≫〈高啓傳〉(北京 中華書局)
• ≪四庫全書叢目≫(北京 中華書局)
• ≪高啓詩選≫(李聖華 選注, 北京 中華書局)
【최웅혁】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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