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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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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는 남송(南宋)의 주자가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사서의 주석서이다. 흔히 《사서집주(四書集注)》라고 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 1권, 《중용장구(中庸章句)》 1권, 《논어집주(論語集注)》 10권, 《맹자집주(孟子集注)》 14권, 총 2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2. 편자

(1) 성명:주희(朱熹)(1130~1200)
(2) 字·別號:처음 자는 원회(元會)였으나 뒤에 중회(仲晦)로 바꾸었다. 호는 회암(晦庵)이다.
(3) 출생지역:1130년 9월 15일에 남검주(南劍州) 우계(尤溪)(現 복건성(福建省)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났다. 휘주(徽州) 무원(婺源)(現 강서성(江西省) 무원(婺源)) 만안향(萬安鄕) 사람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5세에 처음으로 《효경(孝經)》과 사서(四書)을 읽었으며, 6세 무렵 처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뵈었다. 9세에 부친을 모시고 당대의 대유(大儒) 윤돈(尹焞)을 만났으며, 이후 윤돈의 《논어해(論語解)》를 베껴 읽었으며, 10세 무렵 임안(臨安)에서 끊임없이 사서를 읽었다. 11세에 부친을 따라 숭안(崇安)의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를 처음 뵈었다. 14세 3월에 부친 주송(朱松)이 세상을 떠났고, 유자우(劉子羽)가 숭안 오부리(五夫里)의 병산(屛山) 아래 집을 마련해 주어 이곳에서 살았다. 주자는 부친의 유명을 받들어 적계(籍溪) 호헌(胡憲), 백수(白水) 유면지(劉勉之), 병산 유자휘를 어버이처럼 섬기며 배웠다. 15세에 숭안현 오부리의 서탐산(西塔山)에 부친을 안장하였다. 이때부터 사서를 깊이 읽었다. 여대림(呂大臨)의 《중용해(中庸解)》를 읽었고, 《맹자》의 ‘자포자기(自暴自棄)’ 장을 읽고 분발하여 〈불자기문(不自棄文)〉을 지었다. 이 해에 유자휘의 처소에서 종고(宗杲)의 제자 도겸선사(道謙禪師)를 만나 처음을으로 불법을 배웠다.
20세에 상채(上蔡) 사량좌(謝良佐)의 《논어해》를 얻어 잠심하여 독서하였으며, 서산(西山) 이욱(李郁)의 《논맹설(論孟說)》을 얻어 읽었다. 육경(六經)과 《논어》‧《맹자》를 새로이 읽고 느낀 바 있어 이때부터 유교 경전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4세에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의 주부로 부임하였고 아울러 현학(縣學)을 주관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현학의 학생들에게 《논어》 등을 강설하였다. 27세에 천주의 객사에서 《맹자》를 정독하였으며, 이때부터 《맹자집해(孟子集解)》를 짓기 시작했다. 또 《상채어록(上蔡語錄)》을 얻어 잠심하여 읽었다. 28세에 외루암(畏壘庵)을 짓고 《논어》에 잠심하여 읽었으며, 의심나는 것을 기록하였다. 29세에는 호헌(胡憲)‧범여규(范如圭) 등과 편지로 ‘충서일관(忠恕一貫)’의 뜻을 토론하였으며, 이통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설과 절충하여 〈충서설(忠恕說)〉을 지었다. 이 무렵 계속하여 《논어》‧《맹자》를 읽는 한편 이통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하였다.
30세에 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에 제수되었으며, 이해에 《논어집해》 초고를 완성하였다. 31세에 호헌‧범여규 등과 계속하여 토론하였으며, 이통과는 35세까지 지속적으로 《논어》‧《맹자》의 주해를 토론하였다. 33세 10월에 고종형 구희(丘羲)의 《논어찬훈(論語纂訓)》에 서문을 지었으며, 34세에 《논어요의(論語要義)》와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를 완성하였다. 35세에 이통을 곡하고, 4월에 위섬지(魏掞之)에게 편지를 보내어 《맹자집해》를 토론하였다. 37세에 《논맹훈석(論孟訓釋)》을 읽고 축징청(祝直淸)에게 편지를 보냈고, 장식(張栻)과 이발미발(已發未發)을 토론하며 중화(中和)에 대한 초설을 세웠다. 《이정어록(二程語錄)》을 편찬하고, 《맹자집해》를 수정하였으며, 《논어요의》를 판각하였다. 39세에 《상채어록》을 수정하였으며, 《정씨유서(程氏遺書)》를 수정하고 천주에서 판각하였다.
40세 봄, 채원정과 강학하다가 중화(中和)에 대한 새로운 설을 깨닫고 대지(大旨)를 확립하였다. 41세에 여조겸과 《중용》 제1장을 강론하고 〈중용수장설(中庸首章說)〉을 지었으며, 《정씨유서》‧《정씨문집》‧《정씨경설(程氏經說)》을 建寧에서 판각하였다. 43세에 《어맹정의》가 완성되어 건양(建陽)에서 판각하였다. 이해 8월 1일에 〈중용구설(中和舊說)〉을 수정하였고, 이어 12월에 《대학장구》와 《중용장구》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44세 6월에 《정씨외서(程氏外書)》의 편찬을 완성하였고, 9월에 석돈(石)𡼖을 도와 《중용집해(中庸集解)》를 편집‧교정하고 그 서문을 지었다. 45세 4월에 《대학》과 《중용》의 신본(新本)을 편집‧교정하고 경문(經文)과 전문(傳文)을 구분한 다음 장구(章句)의 차례를 새로 정리하여 건양에서 판각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48세 6월 24일에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와 《사서혹문(四書或問)》 및 《중용집략(中庸輯略)》을 완성하고 차서를 정하였다.
50세에 석돈의 《중용집해》를 판각하였고, 51세에 《어맹정의》를 보완한 다음 서명을 《어맹요의(語孟要義)》로 고치고, 융흥(隆興)에서 판각하였다. 53세에 《사서장구집주》를 모아 한 질로 만들고 무주(婺州)에서 판각하였다. 곧 《사서집주》이다. 주자가 기획한 사서(四書) 체제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60세 2월에 《대학장구》의 차례를 확정하고 서문을 지었으며, 3월에 《중용장구》 차례를 확정하고 서문을 지었다. 이후 61세에 임장군(臨漳郡)에서 사서를 간행하였다. 이어 63세 5월에 《사서집주》를 수정하고 남강군에서 판각하였고, 또 이해에 《맹자요략(孟子要略)》을 완성하였다. 67세 되던 해 국자감에서 주자의 《사서집주》를 금서에 포함시켰다. 71세 2월에 《대학장구》를 수정하여 완성하고 요덕명(廖德明)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해 3월 3일에 세상을 떠나 11월에 20일에 건양현 당석리(唐石里) 대림곡(大林谷)에 안장되었다.
(5) 주요저작 및 편찬서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 《근사록(近思錄)》,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한문고이(韓文考異)》,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

3. 서지사항 특징

(‘사서집주의 구성과 체제’에서 ‘서지사항 특징’과 관련된 서술을 그대로 가져와 편집하였습니다.)
《대학》은 본래 《예기》 49편 중 제42편에 편차되어 있었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일찍부터 경학자들에게 주목받아왔다. 북송으로 들어와 숙정자인 정이(程頤)는 특히 중시하였는데, 다만 간책(簡冊)에 뒤섞인 부분이 있다고 추정하여 원문을 교정하고 전체적인 편차를 새로이 정하려 노력하였다. 정자를 이어 주자는 옛 태학의 학문하는 차례를 볼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문헌으로 이 《대학》을 주목하여 경문과 전문을 나누고 편차를 대대적으로 수정한 다음 결락되었다고 추정되는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을 보완하여 보망장(補亡章)을 지어 채워넣었다. 원래 구본(舊本)에는 전체가 하나의 문장이지만, 주자가 경문과 전문을 나누고 편차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대지의 전개에 따라 장절을 나누고 그에 따라 주석을 붙였기 때문에 ‘장구(章句)’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제목 역시 옛 태학에서 배우는 《태학》이라는 의미에서 대인(大人)의 학문(學問)이라는 의미로 전환하여 《대학》이라 고쳐 확정하였다. 《대학장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48세에 처음 《대학장구》를 완성하고 53세에 처음 판각한 뒤로도 60세에 차례를 다시 고쳐 확정하였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수정을 가하여 눈을 감기 한 달 전까지 수정을 계속하였다.
《논어》는 한(漢)나라 때 3종이 있었다. 《노론(魯論)》과 《제론(齊論)》, 그리고 후한 경제(景帝) 때 공자 집안의 옛 벽을 허물다고 발견한 《고론(古論)》이 그것이다. 안창후(安昌侯)가 《노론》을 중심으로 《제론》을 참고하여 통합본을 만들었으며, 공안국(孔安國), 마융(馬融), 정현(鄭玄) 등이 여기에 주석을 달았다. 삼국시대에 와서 위(魏)나라 하안(何晏)이 《논어집해》를 엮었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펴냈고, 북송에 와서 형병(邢昺)이 《논어정의(論語正義)》를 펴내었다. 귀에 남송 말엽 광종(光宗) 소희(紹熙) 연간(1190~1194)에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간행할 때 하안의 《논어집해》와 형병의 《논어정의》가 합해져 《논어주소(論語注疏)》가 되었다. 주자는 이학적 시각에서 제가의 학설 및 송나라 시대 《논어》 해석의 성과를 담아 《논어집주(論語集注)》 10권을 펴내었다.
《맹자》는 전국시대 사상가 맹가(孟軻)가 자신의 자상을 담아 제자들과 저술한 7편의 저작이다. 《한서문예지(漢書文藝志)》에는 《맹자》가 11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4편의 외서(外書)는 위작이라 추정되며 전하지 않는다. 후한(後漢) 말엽의 학자 조기(趙岐)가 각 편의 문장을 장구(章句)로 정리하여 주석을 달 때 매 편을 상하편으로 나누어 14편으로 만들었고, 이후 지금까지 그 체제로 굳어졌다. 《맹자》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에 《논어》‧《효경》‧《이아》와 함께 학관에 세워져 사박사(四博士)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무제 때에 제자서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으나 북송 신종(神宗) 때에 와서 다시 경(經)의 지위를 회복하였으며, 정자와 주자 이후 확고하게 사서(四書)의 지위를 지니게 되었다.
《중용》 역시 《예기》의 제31편이었다. 《중용》에 대해 《공총자(孔叢子)》에서는 49편이라 하고 《한서》에서는 2편이라고 하였지만, 이들과 현행본 《중용》과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현행본 《중용》은 1편으로 되어 있는데, 다만 두 개 이상의 상이한 저작이 합쳐져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중용》 또한 일찍부터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여 정현이 주를 달고 공영달이 소를 남겼으며, 1편 전체의 문장을 33절로 나누었다. 북송의 정자에 와서 본격적으로 표장(表章)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였는데, 정자는 37절로 나누었다. 주자는 정자의 해석에 바탕하고 석돈의 견해로 보완한 다음 자신의 기준에 따라 33장으로 새로이 나누고 장구(章句)라고 이름하였으며, 주제에 따라 4대절 혹은 6대절로 나누었다.

4. 내용

주자는 《대학》을 학문의 강목이라 하여 입문서로 삼고, 《논어》와 《맹자》로 학문의 구체적인 모습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삼고, 《중용》을 학문의 완성으로 삼아 사서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대학장구》는 경(經) 1장과 전(傳) 10장, 그리고 가운데 보망장이 삽입된 완전히 새로운 체제와 구성으로 완성되었으며,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역시 이 바뀌어진 체제와 구성에 맞추어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였다.
《논어집주》는 고주 가운데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합리주의적 관점에 어긋나는 것은 과감히 삭제하고, 종래의 훈고 방식 대신 글자의 뜻을 부연하여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자는 《논어》의 장절을 일부 새롭게 고쳐 정하였으며, 《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산략한 것과 정자의 독법(讀法)을 합하여 책의 앞머리에 〈서설(序說)〉이란 이름으로 실어놓았다. 자신이 직접 지은 글이 아니라 타인의 글을 산략하였기 때문에 서(序)가 아니라 서설(序說)이라 한 것이다.
《맹자집주》는 《논어집주》와 마찬가지로 이학적 시각에서 송나라 학자들의 견해를 담아 펴내었고, 부분적으로 조기의 장구와 구두를 고쳐 정하였다. 또한 《사기》 〈맹가열전(孟軻列傳)〉의 내용을 산략한 것과 정자와 양시(楊時) 등의 독법을 합한 〈서설〉을 맨 앞에 실었다.
《중용장구》는 《대학》과 짝을 지어 사서(四書) 공부의 완성으로 삼았다. 〈독중용법(讀中庸法)〉과 주자 자신이 지은 서문을 책의 맨 앞에 실어놓았으며, 또 편제(篇題)에 관한 정자의 해석을 소서(小序) 형식으로 붙여놓았다. 장구의 장하주(章下註)에 따라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제1~제11장은 중용(中庸)의 의미를 밝힌 것이고, 제12~제20장은 비은(費隱)의 의미를 밝힌 것이고, 제21~제32장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말한 것이고, 제33장은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유교 경전과 문헌 가운데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사서장구집주》라고 할 수 있다. 고려말 안향(安珦)(1243~1306)이 주자학 서적을 수입하고 그의 제자 국재(菊齋) 권보(權溥)(1262~1346)가 《사서집주》를 간행하여 전파시킨 이래, 이 책은 주자학 수용과 연구는 물론 한문 학습에 제일 중요한 책이 되었다. 세종조 이래 경연과 시강원의 강의가 집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사대부의 학문도 모두 집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집주의 해석은 경문 해석의 표준이 되어 《사서언해》 역시 집주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만큼 간행도 많이 되어 현재 《논어집주》는 48종, 《맹자집주》는 49종, 《대학장구》는 36종, 《중용장구》는 45종의 간행본이 확인된다. 언해본 역시 《논어언해》는 17종, 《맹자언해》는 18종, 《대학언해》는 20종, 《중용언해》는 21종의 간행본이 확인된다. 확인되지 않거나 실전(失傳)된 것까지 고려하면 이보다 더 많이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필사본까지 치면 《사서장구집주》의 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고주(古注)나 집해(集解) 등이 없어 사서에 관한 연구와 논의는 거의 《사서장구집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국경학자료집성 시리즈에는 《논어》에 관한 저술이 43종, 《논어》에 관한 저술이 40종, 《대학》에 관한 저술이 37종, 《중용》에 관한 저술이 52종이 실려 있다. 이들 저술 가운데 주자의 경문 해석에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모두 주자의 집주를 기준으로 논박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사서장구집주》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지대다하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힘을 쓴 지 오래되어 하루아침에 확 트여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정밀하고 거친 것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온전한 體와 커다란 用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대학장구》 전5장
• 상고하건대, 《禮記》 〈內則〉에 “10세에 어린이의 의절(儀節)을 배우고, 13세에 악(樂)을 배우고 시(詩)를 외우며, 20세가 된 뒤에 예(禮)를 배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장에서 말한 세 가지(詩, 禮, 樂)는 小學에서 傳受하는 차례가 아니라 바로 大學에서 종신토록 工夫하여 얻는 難易와 先後와 淺深이다.[按內則 十歲學幼儀 十三學樂誦詩 二十而後學禮 則此三者 非小學傳授之次 乃大學終身所得之難易先後淺深也] 《논어집주 태백(泰伯)》 9장
• 대체로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자신에게 돌이켜 그것을 찾아 스스로 터득하여 저 밖으로부터 오는 유혹의 사사로움을 제거하고 그 本然의 善을 확충하기 바란 것이니, 楊時가 말한 ‘中庸 한 책의 요체’라는 것이 이것이다.[蓋欲學者於此 反求諸身而自得之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 楊氏所謂一篇之體要 是也] 《중용장구》 경1장
(2) 색인어
주희(朱熹), 주자(朱子), 사서(四書), 장구(章句), 집주(集注), 사서집주(四書集注),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3) 참고문헌
• 朱熹, 《四書章句集注》, 中華書局
• 佐野公治, 《四書學史의 硏究》, 創文社
• 王懋宏, 《朱熹年譜》, 中華書局
• 李申, 《四書集注全譯》, 巴蜀書社
• 陳逢源, 《朱熹與四書章句集注》, 仁里書局

【이규필】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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