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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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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희(朱熹)의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은 송대(宋代) 정치가와 학인(學人)들의 행적 및 발언을 집록(輯錄)한 책이다. 오늘날 통상 《송명신언행록》이라 불리는 책은 처음부터 하나의 저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고, 주희(朱熹)와 이유무(李幼武)의 저술 6개를 후대에 하나로 합본(合本)한 것이다. 남송(南宋) 초 주희가 먼저 북송(北宋) 시대 명신들의 언행을 집록하여 《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 10권과 《삼조명신언행록(三朝名臣言行錄)》 14권으로 간행하고, 그 뒤 이와는 별도로 주희의 외손인 이유무가 이종(理宗)시기에 《황조명신언행속록(皇朝名臣言行續錄)》 8권․ 《사조명신언행록(四朝名臣言行錄)》 상하 각 13권, 《황조도학명신언행외록(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 17권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저작들이 남송 말부터 《송명신언행록》 75권이란 단일의 책으로 합본(合本)되며 주희의 저술이 〈전집(前集)〉과 〈후집(後集)〉, 그리고 이유무의 저술이 각각 〈속집(續集)〉 〈별집(別集)〉 〈외집(外集)〉이라 불리게 된다. 이후 《송명신언행록》이라 하면 대부분 이를 지칭하였으나, 주희의 원래 저작 또한 그 합본서(合本書)와 병행하여 후대로 전해졌다. 특히 청말(淸末)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으로 원래의 저작인 《오조명신언행록》과 《삼조명신언행록》이 출판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어, 합본(合本)인 《송명신언행록》과 주희의 원작이 함께 통행되고 있다.

2. 저자

(1)성명:주희(朱熹)(1130~1200), 이유무(李幼武)(?~?)
(2)자(字)·별호(別號):주희의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별호(別號)는 고정(考亭)・자양(紫陽). 시호(諡號)는 문공(文公). 주자(朱子)는 존칭(尊稱)이다. 이유무(李幼武)의 자(字)는 사영(士英)이다.
(3)출생지역:주희는 남송(南宋) 남검주(南劍州)(현 복건(福建)) 우계현(尤溪縣)에서 출생이고, 이유무는 남송(南宋) 길주(吉州) 여릉(廬陵) 출신이다.
(4)주요활동과 생애
주희는 명문집안 출신으로 복건 건양(建陽)에서 살았다. 14세 때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전념하였다. 남송(南宋) 소흥(紹興) 18년(1148)에 진사가 되어 천주(泉州) 동안현(同案縣) 주부(主簿)가 되고 이후 지남강군(知南康軍)·지장주(知漳州) 등 50여 년간 관직생활을 했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장식(張栻)·여조겸(呂祖謙)과 절친하였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주돈이(周敦頥), 장재(張載)의 학설을 종합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고, 송대(宋代) 이학(理學)을 집대성하였다. 원·명·청대에 그의 이학은 유학의 정종적(正宗的) 지위를 차지하였다. 원대에는 모든 과거시험에서 모두 그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를 표준으로 삼았다. 사후 송 영종(宋寧宗) 연간에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송 이종(宋理宗) 연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신국공(信國公)으로 추봉되었다가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고쳐 봉해졌고 문묘(文廟)에 배향 종사되었다.
주희의 외손자 이유무의 생애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종(理宗) 연간(1225~1264)에 《황조명신언행속록》과 《사조명신언행록》, 《황조도학명신언행외록》을 저술하였다. 그는 《명신언행록》을 교정한 이형(李衡)의 일족이기도 하다. 이형의 교정본을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주희의 《팔조명신언행록》을 보완하기 위해 남송시대의 인물을 선별하여 별도의 서적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황조명신언행속록》이다. 이유무가 그의 저술에서 금(金)나라를 대하는 태도는 강경 일변도의 주전론(主戰論)으로 이는 외조부였던 주희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그의 정치적 지향을 알 수 있다.
(5)주요저작:주희의 저서로는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 《근사록(近思錄)》,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사서집주(四書集註) 등이 있다. 후대에 그의 글은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편집되었고, 제자들과 토론할 때 남긴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로 편찬되었다.

3. 서지사항

주희는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의 〈자서(自叙)〉에서 편찬의 의도와 저술 방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이란 세상의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한 것이며, 이를 위해 각종 서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명신(名臣)의 발언과 행적을 집록(輯錄)하였다는 것이다. 명신들의 언행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으로써 교화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주희 자신이 밝히고 있는 저술의 취지였다.
주희가 저술한 《팔조명신언행록》은 북송 시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후 이 저작이 각처로 유포되며 다양한 판본이 형성되었는데 그중 점차 이형의 교정본(校正本)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게 된다. 이형의 교정본이 통용본(通用本)으로 자리잡는 데는 이유무(李幼武)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주희의 외손이기도 했던 이유무는 남송 말기, 주희 저작의 속편을 저술하는 형식으로 《황조명신언행속록(皇朝名臣言行續錄)》과 《사조명신언행록(四朝名臣言行錄)》․ 《황조도학명신언행외록(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을 편찬하고, 이를 주희가 지은 《팔조명신언행록》과 합각(合刻)하여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이란 서명을 붙였다. 이 오집합각본(五集合刻本)에서는 주희의 저술을 〈전집〉과 〈후집〉으로, 자신의 저술은 〈속집〉 〈별집〉 〈외집〉이라 불렀다. 이형의 교정본은 주희의 저술을 대폭 축약한 것이었다. 특히 주희는 이른바 ‘명신’들의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게 채록(採錄)하였지만 이형은 가능한 한 가언의행(嘉言懿行)만 남기고 나머지는 삭제하고 있다.
《송명신언행록》에는 북송과 남송을 통해 주요 정치적 현안에 참여한 인물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송명신언행록》은 명신이라는 중요인물을 중심으로 엮은 새로운 형식의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여기에다가 〈속집(續集)〉에 수록된 대금(對金) 전쟁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신료들의 행태라든가, 혹은 〈외집(外集)〉에 수록된 송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의 행적과 사상까지를 감안하면, 《송명신언행록》이 지닌 역사기록으로서의 가치는 더욱 제고된다. 따라서 그 편찬 과정에서 역사 사건 인식 내지 인물평가가 반영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4. 내용

통용본(通用本)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의 다섯 부분(〈전집(前集)〉 〈후집(後集)〉 〈속집(續集)〉 〈별집(別集)〉 〈외집(外集)〉)의 원래 명칭은 《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 《삼조명신언행록(三朝名臣言行錄)》, 《황조명신언행속록(皇朝名臣言行續錄)》, 《사조명신언행록(四朝名臣言行錄)》, 《황조도학명신언행외록(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이다. 이 가운데 〈전집〉과 〈후집〉은 남송 초 주희(朱熹)가 나머지 〈속집〉 〈별집〉 〈외집〉은 남송말 주희의 외손인 이유무(李幼武)가 주희의 소저(所著)를 보완하는 형식으로 저술한 것이다. 그런 만큼 〈전집〉과 〈후집〉, 그리고 〈속집〉 〈별집〉 〈외집〉의 체제와 구성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명신들의 간략한 소전(小傳)을 기록하고 그들이 남긴 언행의 자취들을 기존의 서적에서 채록하여 나열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세밀히 고찰할 경우 주희와 이유무의 저술은 상이한 면모를 보이며, 그 편찬의 안목에서도 편차가 드러난다. 우선 각 부분의 권수와 수록 인물의 숫자를 보면 주희의 저술 부분은 합계 24권, 수록 인물 102명임에 반하여 이유무의 저술 부분은 합계 51권에 수록 인물은 138명에 달한다. 그러나 통행본(通行本)에서 채택하고 있는 이형(李衡)의 교정본(校正本)이 주희의 원본을 약 6할 정도 산거(刪去)했던 것을 감안하면, 최초 주희가 저술한 분량은 이유무의 저술량을 약간 상회하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주희는 원래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전집〉(《오조명신언행록》)은 북송 시대 다섯 황제(태조(太祖)·태종(太宗)·진종(眞宗)·인종(仁宗)·영종(英宗)) 시기의 명신, 〈후집〉(《삼조명신언행록》)은 북송 시대 후반기 세 황제(신종(神宗)·철종(哲宗)·휘종(徽宗)) 시기의 명신들을 수록, 〈전집〉과 〈후집〉을 통해 사실상 북송 시대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고자 하였다.
이유무의 〈속집〉(《황조명신언행속록》)에는 대략 북송 말부터 남송 초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대금(對金)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절의를 지켜 순사(殉死)했던 자들이다. 〈별집〉(《사조명신언행록》)은 남송의 네 황제(고종(高宗)·효종(孝宗)·광종(光宗)·영종(寧宗)) 시기 명신들의 언행을 수록하고 있지만 책 이름만 남송 네 황제시기를 포괄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남송 초 고종시대의 인물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별집〉을 상하로 구분한 기준도 모호하다. 〈외집〉(《황조도학명신언행외록》)은 송대 주요 도학자들을 수록하고 있다. 다른 네 부분과는 달리 ‘도학’이라는 단일의 기준을 가지고 인물을 선별하였다. 또 그 수록 범위도 송대의 일부 시기가 아니라 북송과 남송 전 시기를 포괄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주희가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을 간행한 이후 그것은 사대부들 사이에 급속히 유포되어 갔다. 그러한 정황을 두고 주희 자신이 ‘언행록이 심히 널리 유포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 그 편찬 방식을 원용한 이른바 언행록체(言行錄體) 역시 상당히 광범위하게 답습되어 이후 수많은 아종(亞種)의 저작이 간행되기도 한다. 황종희(黃宗羲) 같은 인물은, 언행록체를 역사서술의 새로운 형식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주희의 명성과 함께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은 전근대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 폭넓게 유포되어 다양한 영향을 주었다.
조선조에서는 《송명신언행록》의 영향을 받아 명신언행록이 저술되었다. 주세붕(周世鵬)은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2권을 저술하였고, 유성룡(柳成龍)은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을 저술하였다. 김육(金堉)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저술하여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여광헌(呂光憲)은 《동명신록(東名臣錄)》을 저술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초년의 절개를 지키기는 쉽지만 만년의 절개를 지키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만년의 절개를 위해 매사에 더욱 힘써야 한다.[保初節易 保晩節難 故晩節 事事尤著力]” 〈한기(韓琦) 위국충헌왕(魏國忠獻王)〉
• “공자(孔子)께서 조문 가서 곡(哭)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하례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가서 조문한다면 가당하겠는가.[子於是日哭則不歌 豈可賀赦才了 却往弔喪]” 〈정이(程頤) 이천선생정공(伊川先生正公)〉
• “나와 그대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이 열전에 오를 것이다.[吾與子生同志 死當同傳]” 〈범진(范鎭) 촉군충문공(蜀郡忠文公)〉
(2)색인어: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주희(朱熹), 이유무(李幼武), 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 삼조명신언행록(三朝名臣言行錄), 황조명신언행록(皇朝名臣言行續錄), 사조명신언행록(四朝名臣言行錄), 황조도학명신언행외록(皇朝道學名臣言行外錄)
(3)참고문헌
• 宋名臣言行錄(張采)
• 宋名臣言行録(梅原郁 編譯, 筑摩書房)
• 宋名臣言行錄(정현우 역, 명문당)
• 宋元時代 학맥과 학자들(최석기 등, 보고사)
• 〈≪송명신언행록≫의 편찬과 후세 유전〉(이근명, 한국기록학회)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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