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동양고전해제집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 개요

《검남시고(劍南詩稿)》는 송(宋)나라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를 모은 시집이다. 이 책은 전 85권이며 9,135수를 싣고 있다. 우국시(憂國詩)를 비롯하여 시의 내용과 제재가 다양하고 예술적 성취가 뛰어나다. 풍격은 호건(豪健), 비장(悲壯)과 평담(平淡)을 겸비하고 있다.

2. 저자

(1) 성명:육유(陸游)(1125~1210)
(2) 자(字)·별호(別號):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3) 출생지역:월주(越州) 산음(山陰)(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4) 주요활동과 생애
육유는 남송(南宋)이 금(金)의 침략을 받던 어지러운 시기를 살며 우국(憂國)을 노래한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피란 생활을 하였으며, 1154년(30세)에, 예부(禮部)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도 중원(中原) 수복을 논한 것이 주화파(主和派)인 재상 진회(秦檜)의 비위를 거슬러 낙방을 당했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받고, 1158년(34세) 복주(福州) 영덕현(寧德縣) 주부(主簿)로 임명을 받아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칙령소산정관(勅令所刪定官), 진강(鎭江) 통판(通判), 융흥(隆興) 통판 등을 거쳐 1170년(46세) 기주(夔州) 통판이 되었고, 1172년(48세), 사천선무사(四川宣撫使) 왕염(王炎)의 초청을 받아 남정(南鄭)에 갔으며, 곧이어 성도(成都)로 갔다. 이후, 촉주(蜀州)와 가주(嘉州), 영주(榮州) 등지에서 벼슬을 하였다. 그 뒤 건안(建安)과 무주(撫州)를 거쳐 1186년(62세) 엄주(嚴州) 지사가 되었고, 1189년(65세) 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으로 있다가 11월에 산음으로 돌아갔다. 이후 중간에 사서(史書) 편찬에 잠시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18년 동안 고향에서 지냈다. 가정(嘉定) 3년(1210) 1월 26일(음력 1209년 12월 29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86세였다.
(5) 주요저작:육유의 저작은 《검남시고》, 《위남문집(渭南文集)》, 《방옹사(放翁詞)》, 《입촉기(入蜀記)》, 《남당서(南唐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검남시고》는 육유의 촉(蜀) 지방 생활과 아주 관련이 깊다. ‘검남(劍南)’은 ‘검각(劍閣)의 남쪽’이란 의미로 바로 촉 땅을 가리킨다. 육유는 건도(乾道) 6년(1170)에 촉 지방에 들어온 이후, 순희(淳熙) 5년(1178) 2월 성도를 떠나기까지 7년 남짓 촉에서 살았다. 이곳의 풍토(風土)와 인정(人情)을 매우 좋아했으며, 특히 금나라 군대를 마주 보는 남정의 최전선에서 육유는 한때 중원 수복의 꿈에 불탔지만 북벌(北伐)의 기대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자 그 뒤 실의에 빠져 술로 달래며 지냈다. 이곳 촉 지방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해 자신의 시집 이름을 《검남시고》라고 명명하였다.
순희 14년(1187) 육유가 엄주 지사로 있을 때, 《검남시고》 20권(2524수)을 간행했다. 명말(明末)에 모진(毛晋)(1599~1659)이 《육방옹전집(陸放翁全集)》을 출판했는데, 그중 《검남시고》 85권(9135수)은 육유의 장남 육자거(陸子虡)의 강주(江州) 간행본 《방옹선생검남시고(放翁先生劍南詩稿)》 85권을 조본(祖本)으로 삼아 편집한 것으로, 《검남시고》의 정본(定本)이 되었다. 《검남시고》는 편년체(編年體)로 이루어져 있다. 일시(佚詩)도 다수 전한다.

4. 내용

《검남시고》에 실린 육유의 시는 남송의 사회현실을 광범하게 반영하여 ‘시사(詩史)’라고 일컬어진다. 우국시에서 육유는 중원이 이민족의 통치 하에 놓여 있는데도 남송의 조정이 화친(和親)정책을 고수하며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다양한 제재를 통하여 비분강개한 감정을 비통하고 침울한 어조로 나타내었다. 전원시(田園詩) 또한 많아, 전원의 즐거움, 아름다운 경치, 고향의 풍속, 농민들의 생활 등을 시에 담았다. 또 꿈을 통해 이민족을 몰아내고 옛 땅을 되찾는 숙원을 이루는 등 기몽시(紀夢詩)를 많이 지었으며, 젊어서 당완(唐婉)과 이혼한 뒤, 노년에 들어서도 전처(前妻)를 잊지 못하는 시를 남기고 있다. 육유는 또 ‘광의식(狂意識)’에 의거해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시에서 표명하였다. 이외에 또 사경시(寫景詩), 기행시(紀行詩), 영물시(詠物詩), 회고시(懷古詩), 철리시(哲理詩), 논시시(論詩詩) 등이 있다.

5. 가치와 영향

육유가 살았던 시기의 시단(詩壇)에서는 황정견(黃庭堅)을 추종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가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나, 육유는 강서시파뿐만 아니라 앞 시대의 여러 우수한 시인들(두보(杜甫), 이백(李白), 매요신(梅堯臣), 도연명(陶淵明), 소식(蘇軾) 등)의 시를 두루 학습한 바탕 위에서, 46세에 촉 지방에 들어간 이후 점차 강서시파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시세계를 확립했다. 심후한 서정성(抒情性),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시어(詩語), 유려(流麗)한 음조(音調) 등은 강서시파와 다른 특색이다. 그의 시는 또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특색을 자신의 시 안에 나름대로 하나로 융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유는 양만리(楊萬里), 범성대(范成大), 우무(尤袤)와 더불어 ‘중흥사대가(中興四大家)’,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면서, 남송 후기를 비롯하여 원(元)·명(明)·청(淸) 등 오랜 기간 여러 시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육유의 시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많은 문인들이 즐겨 읽었다. 고려(高麗) 말의 시에 이미 육유의 시구를 점화(點化)한 예가 보이며, 조선(朝鮮) 초기에 서거정(徐居正)은 육유의 시를 배웠다. 성임(成任)은 원간본(元刊本)을 중간(重刊)하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육유 시선집 《명공묘선육방옹시집(名公妙選陸放翁詩集)》의 간행에 착수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신정하(申靖夏)는 고금의 시인은 두보(杜甫) 이후엔 육유 한 사람 뿐이라고 높이 평했다. 정조(正祖)는 당대(當代)의 시풍을 바로잡기 위해 두보와 육유를 전범으로 내세우면서 이들의 시선집을 출간하였는데 모두 율시(律詩)이며, 육유의 경우, 《육율분운(陸律分韻)》, 《두육분운(杜陸分韻)》, 《두육천선(杜陸千選)》 등이 있다. 그 뒤에도 신위(申緯)와 김정희(金正喜) 등에 의해 육유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 말에는 황현(黃玹)이 육유의 시를 추앙하며 많은 차운시(次韻詩)를 남겼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오랑캐와 강화하는 조서 내린지도 15년, 장군은 싸우지 않고 헛되이 변방만 지킨다. 권력자들은 깊고 깊은 집안에서 가무에 박자를 맞추는데, 마구간의 말은 살만 쪄 죽고 활은 쓰지 않아 줄이 끊어져 버렸네. 수루의 조두(刁斗) 소리는 달이 떨어짐을 재촉하고, 나이 서른에 종군한 사람 이제 백발이 되었다. 피리 속의 장사 마음 그 누가 알아줄까, 모래 위의 달은 공연히 전사의 백골을 비춘다. 중원의 전란은 예부터 들은 것이긴 하나, 오랑캐가 자자손손 대를 이음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유민들은 사경을 참고 국토 수복을 바라면서, 몇 군데에서 오늘 밤 눈물지을까.[和戎詔下十五年 將軍不戰空臨邊 朱門沉沉按歌舞 廐馬肥死弓斷弦 戍樓刁斗催落月 三十從軍今白髮 笛裏誰知壯士心 沙頭空照征人骨 中原干戈古亦聞 豈有逆胡傳子孫 遺民忍死望恢復 幾處今宵垂淚痕]” 〈관산월(關山月)〉
• “농가의 섣달 술이 탁하다 웃지 마시라, 풍년이라 손님 접대에 닭이니 돼지니 풍성하다오. 산이 겹겹 물도 겹겹 길이 없나 했더니, 버들빛 짙고 꽃 붉은 곳에 마을이 또 하나 있네. 퉁소 소리 북 소리 서로 이어지니 춘사(春社)가 가까운데, 의관은 소박하여 옛 풍속 보존하고 있네. 앞으로 한가로이 달밤 나들이가 허락된다면, 지팡이 짚고 아무 때나 밤에 문을 두드리리.[莫笑農家臘酒渾 豐年留客足雞豚 山重水複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簫鼓追隨春社近 衣冠簡樸古風存. 從今若許閑乘月 挂杖無時夜叩門]” 〈유산서촌(遊山西村)〉
• “살기는 어둑어둑 변방의 요새 위를 가로지르는데, 동쪽으로 황하(黃河)를 끼고 대장의 막사를 세웠네. 낮에는 깃털 격문을 날려 늘어선 성을 함락시키고, 밤에는 담비 가죽옷 벗어 항복한 장수들을 달랜다. 장군의 마굿간엔 한혈마(汗血馬) 있고, 용사의 허리춤엔 호랑이 무늬 활집 있네. 섬돌 앞엔 흰 칼날이 서리 같이 번뜩이고, 문 밖에는 긴 창이 빽빽하게 마주 향한다. 북풍은 땅을 휘몰아 급하게도 눈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흰 눈은 한 장이나 쌓였네. 누가 말했나 갑옷의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든다고, 의로움과 은혜에 감격하니 솜옷을 껴입은 듯 하도다. 누린내 나는 소굴은 한 번에 깨끗이 소탕되고, 태항산(太行山)과 항산(恒山)은 원래처럼 아무 탈이 없네. 다시 말술 가져 오라 소리치고 긴 노래를 지어, 천산(天山)의 건아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해야겠네.[殺氣昏昏橫塞上 東並黃河開玉帳 晝飛羽檄下列城 夜脫貂裘撫降將 將軍櫪上汗血馬 猛士腰間虎文韔 階前白刃明如霜 門外長戟森相向 朔風卷地吹急雪 轉盼玉花深一丈 誰言鐵衣冷徹骨 感義懷恩如挾纊 腥臊窟穴一洗空 太行北嶽元無恙 更呼斗酒作長歌 要遣天山健兒唱]” 〈구월십육일야몽주군하외견사초항제성교이유작(九月十六日夜夢駐軍河外遣使招降諸城覺而有作)〉
• “성 위로 해는 비끼고 뿔피리 소리 애달픈데, 심(沈)씨 정원은 더 이상 옛날의 연못과 누대가 아니네. 가슴 아프네 다리 아래 푸르른 봄물, 일찍이 아리따운 님의 모습 비추었다네.[城上斜陽畫角哀 沈園非復舊池臺 傷心橋下春波綠 曾是驚鴻照影來]” 〈심원(沈園)〉
• “작은 장터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다가 취해 관을 떨어뜨리고, 남산의 산 경치를 소 등에 탄 채 바라본다. 방옹(放翁)의 가슴 속을 그 누가 측량할 수 있겠는가, 만리에 펼쳐진 가을 하늘도 이보다 넓지는 않으리라.[小市狂歌醉墮冠 南山山色跨牛看 放翁胸次誰能測 萬里秋空未是寬]” 〈소시(小市)〉
• “옷에는 길 먼지와 술 자국 뒤섞이고, 머나먼 나그네길 슬프지 않은 곳 없네. 이 몸은 시인이나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가랑비 속에 나귀 타고 검문산(劍門山)으로 들어선다.[衣上征塵雜酒痕 遠遊無處不消魂 此身合是詩人未 細雨騎驢入劍門]” 〈검문도중우미우(劍門道中遇微雨)〉
• “들으니 매화가 새벽바람에 피었다더니, 눈이 쌓인 듯 온 산에 가득하네. 어떻게 하면 이 내 몸 천 개 억 개로 나누어, 매화 한 그루마다 육방옹(陸放翁) 한 사람씩 마주 설 수 있을까.[聞道梅花坼曉風 雪堆遍滿四山中 何方可化身千億 一樹梅前一放翁]” 〈매화절구(梅花絶句)〉
• “죽어버리면 만사가 헛된 줄 원래 알지만, 단지 중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 임금의 군대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 집안 제사에 네 아비에게 알리는 것을 잊지 마라. [死去元知萬事空 但悲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 〈시아(示兒)〉
(2) 색인어:육유(陸游), 검남시고(劍南詩稿), 송시(宋詩),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두보(杜甫), 매요신(梅堯臣),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강서시파(江西詩派),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
(3) 참고문헌
• 陸游詩硏究(李致洙, 文史哲出版社)
• 劍南詩稿校注(錢仲聯, 上海古籍出版社)
• 陸游詩選(游國恩·李易, 人民文學出版社)
• 陸游選集(朱東潤, 上海古籍出版社)
• 陸游選集(王水照·高克勤, 人民文學出版社)
• 육유시선(이치수 역, 문이재)
• 육유시선(류종목 역, 민음사)
• 陸游(前野直彬, 集英社)
• 陸游(一海知義, 岩波書店)
• 宋詩史(송용준·오태석·이치수, 亦樂)
• 중국시와 시인: 宋代篇(이종진 외 공저, 亦樂)

【이치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