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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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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부지(王夫之)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거유(巨儒)이자 사상가로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세계관을 토대로 하는 기철학(氣哲學)을 종합하였다. 그는 관념적인 이론을 비판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실제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철학은 중국철학사 뿐만 아니라, 세계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 선산전서는 16책 341권의 방대한 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철학, 역사,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문학, 미학 등 다양한 내용을 취급하고 있다.

2. 저자


(1) 성명:왕부지(王夫之)(1619~1692)
(2) 자(字)·호(號):자는 이농(而農), 호는 선산(船山), 강재(薑齋), 일호도인(一瓠道人), 선산선생(船山先生), 석당선생(石堂先生).
(3) 출생지역:형주부(衡州府) 성의 남쪽인 회안봉(回雁峰) 왕아평(王衙坪)(現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왕부지는 1619년 9월 1일(음력)에 유학자 집안의 아버지 조빙(朝聘)(50세)과 어머니 담(譚)부인(47세)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맏형(介之)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십삼경(十三經)》을 비롯하여 많은 고전을 읽었다. 1637년(19세) 봄에 고향의 처사인 도만오(陶萬梧)의 딸(16세)과 결혼하였다. 1638년(20세)에 장사(長沙)의 악록서원(岳麓書院)에서 공부하였고, 1642년(24세) 4월에 맏아들인 물약(勿葯)을 낳았다.(1643년 11월에 죽음)
1644년(26세) 3월에 이자성에 의해 명왕조가 멸망하였고, 그 해 5월에 오삼계(吳三桂)가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거쳐 북경을 함락하였다. 왕부지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비분시(悲憤詩)>를 지었다. 그해 8월에 둘째 아들인 반(攽)을 낳았다. 12월 중순에 남악(南嶽)의 흑사담(黑沙潭) 부근에 초옥을 짓고 ‘속몽암(續夢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645년(27세) 5월에 청나라 군대가 남경(南京)을 공격하여 홍광제(弘光帝)인 주유숭(朱由崧)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속비분시>를 지었다. 1646년(28세) 여름에 상음(湘陰)에 가서 첨도어사(僉都御史)인 호북순무(湖北巡撫) 장광(章曠)에게 상서(上書)하여 남북독사(南北督師)와 농민 봉기군을 연합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 11월에 부인이 죽었다. 그는 그 해에 《주역패소(周易稗疏)》 4권과 《주역고이(周易考異)》 1권을 지었으며, 《연봉지(蓮峰志)》 5권과 《악여집(岳余集)》 1권을 편찬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춘추가설(春秋家說)》을 찬하였다. 1647년(29세)에 청나라 군대가 형주(衡州)를 점령하자 하여필(夏汝弼)과 함께 상향현(湘鄕縣) 남쪽 백석봉(白石峰)으로 도피했다. 도피하는 기간인 8월에 둘째 형이 죽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와 숙부가 잇달아 죽었다.
1648년(30세) 봄 《역(易)》의 이치를 강술하고, 10월에 관사구(管嗣裘)‧하여필‧승성한(僧性翰) 등과 함께 남악의 방광사(方廣寺)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이리저리 피신하였다. 1650년(32세) 봄에 계림에서 정의가(鄭儀珂)의 딸(18세)과 재혼했다. 8월에 어머니인 담(譚)씨가 죽었다. 1651년(33세) 1월에 아내‧조카와 함께 형양으로 돌아왔다. 1653년(35세) 1월에 <장영부(章靈賦)>를 짓고, 2월에 셋째 아들인 물막(勿幕)을 낳았다.
1654년(36세) 8월에 청나라 정부의 수색을 피해 다시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겨울에 상령(常寧)에서 《주역》과 《춘추》를 강의했다. 1655년(37세) 봄에 침주(郴州) 흥령산(興寧山)의 절에 기거하면서 《주역외전(周易外傳)》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 해 8월에 《노자연(老子衍)》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56년(38세)에 서장원(西庄源)으로 돌아왔고, 그 해 3월에 《황서(黃書)》를 집필했으며, 같은 해 5월에 넷째 아들인 어(敔)를 낳았다. 1657년(39세) 4월에 유랑 생활을 마치고 ‘속몽암’으로 돌아왔다. 그 해 12월에 유근노(劉近魯)를 방문하였고, 이후에 유근노의 장서 6000여 권을 자주 빌려 보았다.
1658년(40세) 9월에 《가세절록(家世節錄)》을 썼다. 1660년(42세)에 셋째 아들인 물막이 죽었다. 후에 형향현 금난향 고절리에 초옥을 짓고 이름을 ‘패엽려(敗葉廬)’라고 하였으며, 겨울에 《정락화시(正落花詩)》 10수를 지었다. 1661년(43세) 6월에 둘째 부인인 정씨가 죽었다. 1662년(44세)에 ‘패엽려’에 거하면서 남명(南明)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속비분시>를 지었다. 1663년(45세) 9월에 《상서인의(尙書引義)》의 초고를 썼다. 1664년(46세)에 둘째 아들인 반이 유근노의 딸과 결혼하였다. 1665년(47세)에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을 수정하였다. 1666년(48세)에 《사서훈의(四書訓義)》를 집필하였고, 1667년(49세)에 오랜 벗인 유상현(劉象賢)과 어울리면서 유상현의 딸을 넷째 아들인 어와 혼인시키자고 하였다. 1668년(50세)에 《춘추가설》 3권과 《춘추세론(春秋世論)》 2권을 집필하였다. 1669년(51세)에 장(張)씨 부인을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해 봄에 《오십자정고(五十自定稿)》를 편찬했으며, 여름에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상‧하권을 찬술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초당을 지어 ‘관생거(觀生居)’라고 이름 지었다.
1671년(53세)에 《시광전(詩廣傳)》을 수정하였다. 1672년(54세)에 ‘관생거’에 살면서, 여름과 가을에는 여전히 ‘패엽려’에서 머물렀다. 그 해 봄에는 《노자연》을 다시 고쳤고, 8월에는 친구인 방이지(方以智)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시 두 수를 지어 애도를 표했다. 1673년(55세)에 《예기장구(禮記章句)》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74년(56세)에 오삼계의 군대가 호남성의 각 곳을 공격하자, 제자인 당단홀(唐端笏)과 함께 배를 타고 도피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1675년(57세) 가을에 ‘관생거’에 돌아온 후, 석선산(石船山) 기슭에 초당을 지어 ‘상서초당(湘西草堂)’이라고 이름 짓고, ‘상서초당’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676년에 ‘상서초당’에서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를 찬하기 시작했다. 1677년(59세)에 《예기장구》 49권을 완성하였다.
1678년(60세) 윤3월에 오삼계가 형주에서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며 그의 무리들이 강제로 권진표(勸進表)를 쓰라고 하자, 그것을 거절하고 깊은 산 속으로 피난하여 <볼계부(祓禊賦)>를 지었다. 1679년(61세)에 청의 군대가 형주를 수복하자 장유모(章有謀)와 함께 청의 군대를 피해 숲속에 들어가서 《장자통(莊子通)》을 지었다. 1680년(62세)에 시집인 《육십자정고(六十自定稿)》를 편찬했다. 1681년(63세)에 《장자해(莊子解)》를 썼다. 1682년(64세) 9월에 《설문광의(說文廣義)》 2권을 썼고, 10월에 《악몽(噩夢)》 1권을 썼다. 1684년(66세)에 《사해(俟解)》를 썼다. 1685년(67세) 봄에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9권을 썼고, 8월에 《초사통석(楚辭通釋)》 14권을 썼으며, 9월에 《주역내전(周易內傳)》 6권과 《주역내전발례(周易內傳發例)》 1권을 지었다. 1686년(68세) 봄에 맏형이 죽었다. 1687년(69세)에 《독통감론(讀通鑑論)》을 찬하기 시작하였고, 1688년(70세)에 《칠십자정고(七十自定稿)》를 편성했다. 1691년(73세)에 오래된 병에도 불구하고 《독통감론》 30권과 《송론(宋論)》 15권의 집필을 완성하였다. 1692년(74세) 1월 2일(음력)에 ‘상서초당’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주역내전(周易内傳)》, 《주역외전(周易外傳)》,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상서인의(尚書引義)》, 《사서훈의(四書訓義)》, 《독통감론(讀通鑑論)》, 《사문록내‧외편(思問錄内)‧外篇》, 《설문광의(說文廣義)》, 《송론(宋論)》,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장자통(莊子通)》, 《노자연(老子衍)》, 《시광전(詩廣傳)》, 《황서(黄書)》, 《소수문(搔首問)》, 《주역내전발례(周易内傳發例)》,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사해(俟解)》, 《악몽(噩夢)》 외 다수

3. 서지사항


왕부지는 약 100여 종 4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글자 수는 약 800만 자이다. 《선산전서(船山全書)》(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嶽麓書社, 1988~1996)는 이미 유실된 약 20여 종을 제외한 왕부지의 모든 글을 16冊으로 구성하여 편집하였다.
제1책(1988年) : 선산전서서례‧총목(船山全書序例)‧總目, 주역내전(周易内傳), 주역내전발례(周易内傳發例),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주역패소(周易稗疏), 주역고이(周易考異), 주역외전(周易外傳)
제2책(1988年) : 상서패소(尚書稗疏), 상서인의(尚書引義)
제3책(1992年) : 시경패소(詩經稗疏), 시경고이‧엽운변(詩經考異)‧葉韻辨, 시광전(詩廣傳)
제4책(1991年) : 예기장구(禮記章句)
제5책(1993年) : 춘추패소(春秋稗疏), 춘추가설(春秋家說), 춘추세론(春秋世論),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제6책(1991年) : 사서패소(四書稗疏), 사서고이(四書考異), 사서전해(四書箋解),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제7책(1990年) : 사서훈의(상), 四書訓義(上)
제8책(1990年) : 사서훈의(하), 四書訓義(下)
제9책(1989年) : 설문광의(說文廣義)
제10책(1988年) : 독통감론(讀通鑑論), 서론(敍論)
제11책(1992年) : 송론(宋論), 영력실록(永曆實錄), 탁사(籜史), 연봉지(蓮峰志)
제12책(1992年) :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사문록내외편(思問錄内外篇), 사해(俟解), 황서(黄書), 악몽(噩夢), 지소록(識小錄), 소수문(搔首問), 용원야화(龍源夜話)
제13책(1993年) : 노자연(老子衍), 장자해(莊子解), 장자통(莊子通), 상종락색(相宗絡索), 우고사(愚鼓詞), 선산경의(船山經義)
제14책(1996年) : 초사통석(楚辭通釋), 고시평선(古詩評選), 당시평선(唐詩評選), 명시평선(明詩評選)
제15책(1995年) : 강재문집‧보유(薑齋文集)‧補遺, 강재시집(薑齋詩集), 강재사집(薑齋詞集), 강재시화(薑齋詩話), 용주회잡극(龍舟會雜劇), 습유(拾遺)
제16책(1996年) : 전기(傳記), 연보(年譜), 잡록(雜錄), 선산전서편집기사(船山全書編輯紀事)

4. 내용


《선산전서》에는 왕부지의 총체적인 철학사상이 담겨 있다. 왕부지가 살았던 17세기의 중국은 총체적으로 격변기였다. 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짐에도, 통치자들은 민중의 어려운 삶을 헤아리지 않았다. 마침내 명나라는 1644년 3월 ‘귀천균전(貴賤均田)’‧‘균전면부(均田免賦)’의 구호를 내걸고 봉기한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 등의 농민군에 의해 붕괴되고, 농민군은 그해 5월 청나라에 의해 무너졌다.
또한 당시에는 강남 지역에 농업과 수공업 및 상품 경제가 소규모로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 사상과 자연 과학에 대한 지식이 광범위하게 소개되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철학적 사조는 송명(宋明)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리학(理學)의 위상이 약화되고, 기학(氣學)의 위상이 제고되었다.
왕부지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 주체적인 자세로 임하면서 관념론 계열의 이론을 비실제적인 사상으로 여기며 비판하고, 실제적인 역할을 중시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철학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특히 송명 시대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성리학과 양명학은 물론 불교와 도가의 이론 가운데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비판하고, 장재(張載)(1027~1077)와 왕정상(王廷相)(1474~1544) 등의 이론을 계승하며 기철학의 이론 체계를 종합적으로 구축하였다.
《선산전서》에는 이러한 왕부지철학의 총체적인 내용이 광범위하게 담겨 있다.

5. 가치와 영향


《선산전서》에는 과학적이며 변증법적인 사유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는 《선산전서》가 선험적인 관념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온갖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적으로 왕부지철학은 20세기 이후에 중국과 대만은 물론 한국과 전 세계에서 영향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2019년 10월 왕부지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여 왕부지철학사상에 대한 국제학술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된 것은 이러한 학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음과 양의 두 기가 태허에 충만하다. 이 밖에 다시 다른 것은 없으니, 또한 틈도 없다.[陰陽二氣 充滿太虛 此外更無他物 亦無間隙]”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태화편(太和篇)>
‧ “일에 나아감으로써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있어도, 이치를 세움으로써 일을 제한하는 것은 없다.[有卽事以窮理 無立理以限事]”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卷下, <사문백론일식(士文伯論日食)>
‧ “하늘은 날마다 인간에게 명(命)하고, 인간은 날마다 하늘로부터 명을 받는다. 그러므로 ‘성(性)은 생겨나는 것이니, 날마다 생겨나면서 날마다 이룬다.’고 한다.[天日命於人 而人日受命於天 故曰 性者生也 日生而日成之也]” 《상서인의(尙書引義)》 <태갑2太甲二>
‧ “배움이란 천하의 이치를 거두어 들여서 자신의 마음에 더하는 것이고, 힘씀이란 자신의 덕(德)을 행하여 천하에 베푸는 것이다.[學者收天下之理以益其心 務者行己之德以施於天下]”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권4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2) 색인어:왕부지(王夫之), 선산(船山), 강재(薑齋), 선산전서(船山全書), 기철학(氣哲學)
(3) 참고문헌
‧ 船山全書 全16冊(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嶽麓書社)
‧ 船山學譜(王孝魚, 廣文書局有限公司)
‧ 王船山哲學(曾昭旭, 遠景出版事業公司)
‧ 王夫之評傳(蕭萐父‧許蘇民, 南京大學出版社)
‧ 王船山硏究著作述要(朱迪光, 湖南大學出版社)
‧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相關論文題錄索引〉(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中心, 2019. 10)
‧ 〈紀念王船山誕辰400周年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論文集〉上‧下(2019. 10)


【이철승】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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