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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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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은 남송의 원추(袁樞)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거하여 사건별로 내용이 연결되도록 편찬한 역사책이다. 〈삼가분진(三家分晉)〉에서부터 〈주세종지정회남(周世宗之征淮南)〉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의 《자치통감》의 기사를 분류하여 배열하고, 사건의 전말을 서술하면서 표제어를 붙였다. 원추는 중국에서 첫 번째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를 창시하였다.

2. 저자

(1) 성명:원추(袁樞)(1131~1205)
(2) 자(字)·별호(別號):자는 기중(機仲)
(3) 출생지역:건안(建安)(현 중국 복건성(福建省)).
(4) 주요활동과 생애
남송 효종 융흥(隆興) 원년(1163) 예부시(禮部試)에 진사로 급제하여, 온주판관(溫州判官)과 흥화군교수(興化軍敎授)를 지냈다. 건도(乾道) 9년(1173)에는 엄주교수(嚴州敎授)로 나갔다. 이 직은 학관(學官)의 일종으로 경문(經文)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한가한 직무여서 글을 쓸 여유가 있어 《통감기사본말》 42권을 저술하였다. 후에 태부승(太府丞)으로 옮기고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겸했다. 국사를 편찬하는 것을 두고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를 거스를 수는 없다.[不可負天下後世公議]”고 말했다. 거듭 승진하여 권공부시랑(權工部侍郞)과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를 겸했다. 영종(寧宗)이 즉위하자 강릉지부(江陵知府)가 되었지만, 얼마 뒤 대신(臺臣)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원추는 사람됨이 강직하여 정치적인 부패와 붕당의 다툼, 인재에 대한 탄압 등 당시 사회현상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정치상으로는 금(金)나라에 대해 항거할 것을 주장하고, 남송 정권이 구차하게 안주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며, 민간의 어려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현실 정치에서 직접적인 자극을 받은 것도 《통감기사본말》을 편찬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다.
또한 《송사(宋史)》 〈원추전(袁樞傳)〉에는 그가 “《자치통감》을 평소 즐겨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한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사건별로 구별해 그 내용이 연결되도록 하고 이것을 《통감기사본말》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추는 《자치통감》의 내용과 사마광의 역사적 관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나아가 과감하게 《자치통감》을 개편하는 창조성을 발휘한 것이다.
(5) 주요저작:《역전해의(易傳解義)》, 《역전변이(易傳辨異)》, 《동자문(童子問)》 등.

3. 서지사항

《자치통감》에 기재된 중요한 사실(史實)을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자치통감》의 원래의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분류하고 편집하였다. 원문과 더불어 사마광의 사론(史論)도 초록하여 사건마다 제목을 붙였다. 원추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지도 않았고,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렇게 전국시대부터 오대까지의 역사를 239가지 사건을 항목으로 분류하여 각각 표제를 달고, 이외에 66개 사건은 부록으로 편집하였다. 모두 42권이다.

4. 내용

《자치통감》은 내용이 방대하고, 편년체의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편년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기술하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 여러 해에 걸쳐 분산 기술되고, 다른 역사적 사건도 기술할 수밖에 없다. 특정한 사건의 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권의 책을 읽어야만 했다. 원추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건별로 구별하여 그 내용이 연결되도록 하여” 사건을 중심으로 개편했던 것이다.
《통감기사본말》은 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관련된 자료를 한 항목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자치통감》의 “치도(治道)를 돕는다.”는 편찬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었다. 이 책이 완성되자 당시 조정의 호평을 받았고, 인쇄하도록 하여 신속하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통감기사본말》은 자료의 선택이 《자치통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원추 자신이 증보하지 않았으므로 사료적 가치는 《자치통감》보다 못하였다. 또한 기사본말체의 사서는 역사적 사건을 때로 고립적으로 기술하거나 각 주제 사이에 내재적인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단점이 있다.
원추는 왕조지배체제 하에서의 정치적인 주요한 문제를 “제후, 대도(大盜), 여주(女主), 외척, 환관, 권신(權臣), 이적(夷狄), 번진(藩鎮)” 등으로 보았다.(《통감기사본말》 〈서(敍)〉) 이들을 책의 기본내용으로 삼아서 당시와 후세 군신들에게 감계(鑑戒)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한족(漢族) 정권의 회복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예를 들어 “조적북벌(祖逖北伐)”, “송명제북벌(宋明帝北伐)”등은 특별히 서술하였고, 이에 비해 중원에 들어와 거병했던 한족이 아닌 민족들은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주희(朱熹)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보여주는 정통론(正統論)과 같은 입장이다.

5. 가치와 영향

원추는 《자치통감》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사료의 취사선택과 배열에 공을 들였다. 그리하여 《통감기사본말》이 중국 사서편찬에 있어서 새로운 체제인 기사본말체의 효시가 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기사본말체는 이전까지 기전체와 편년체에 한정되어 있던 중국 역사서술 방법상 큰 발전이었다. 이는 요점을 부각시켜 역대 중요 사건을 전부 포괄할 수 있었고, 사건의 순서에 따라 기술하여 수미일관되고 중복도 없었다. 이러한 체제는 주희(朱熹), 장학성(章學誠), 양계초(梁啟超) 등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통감기사본말》의 영향은 대단히 커서 동시대는 물론 명·청대 이후에 기사본말체 저작들이 매우 많이 저술되었다. 대표적으로 동시대 장충(章沖)의 《춘추좌전사류시말(春秋左傳事類始末)》, 송 이종(理宗) 시대 양중량(楊仲良)의 《속자치통감장편기사본말(續資治通鑑長編紀事本末)》이 있다. 이후 주요한 책으로는 명대 진방첨(陳邦瞻)의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과 《원사기사본말(元史紀事本末)》, 곡응태(穀應泰)의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청대 고사기(高士奇)의 《좌전기사본말(左傳紀事本末)》, 장감(張鑑)의 《서하기사본말(西夏紀事本末)》 이유당(李有棠)의 《요사기사본말(遼史紀事本末)》과 《금사기사본말(金史紀事本末)》 등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문장은 기전체보다 간략하고, 사건은 편년체보다 분명하다. 사료의 취사선택에 있어서 원칙은 원만하며 방법이 신통하다.[文省于紀傳 事豁于編年 決斷去取, 體圓用神]” 장학성(章學誠), 《장씨유서(章氏遺書)》 〈권1 문사통의(文史通義) 내편(內篇)1 서교(書敎) 下〉
• “수천 년 동안의 사적을 포괄하면서도 경위(經緯)가 분명하며 절목이 자세히 갖춰졌다. 전후의 시말이 한 번 보아도 명료하다. 기전체과 편년체를 관통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니 실로 예전에는 없었던 것이다.[包括數千年事跡 經緯明晰 節目詳具 前後始末 一覽了然 遂使紀傳編年貫通爲一 實前古之所未有也]” 《四庫全書總目提要》 〈권47 사부(史部) 편년류(編年類)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 색인어: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원추(袁樞),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3) 참고문헌
• 通鑑紀事本末點校本(中華書局)
• 資治通鑑刊本識誤(張敦仁)
• 胡刻通鑑正文校宋記(章鈺)

【박지훈】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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