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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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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재상을 지낸 상앙(商鞅)의 저서이다.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상앙의 변법과 부국강병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자로 2만 천여 자로 이루어진, 크지 않은 책이지만 풍부하고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매 편이 각 분야의 내용을 담은 작은 책자와 같으므로 사실은 24권으로 구성된 총서인 셈이다.

2. 저자

(1)성명 : 상앙(商鞅)(B.C. 395?~ B.C. 338?)
(2)자(字)·별호(別號) :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앙(鞅)이다. 위왕(衛王)의 후예이므로 위앙(衛鞅)이라고도 하였다. 후에 진 효공이 그를 상(商)·오(於) 일대에 봉하였기 때문에 상군(商君)이라 불렀으며, 이로 인해 역사에서는 그를 상앙이라고 칭한다.
(3)출생지역 : 상앙은 전국시대 위(衛)나라 영군(靈君)의 희첩(姬妾)에게서 태어난 공자였다. 그의 행적에 관한 고대의 기록이 적지는 않지만, 그의 출생연대 및 그의 가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주요활동과 생애
그의 가계에 대하여 《사기(史記)》에서는 위나라 왕족의 서자라 하였고, 《염철론(鹽鐵論)》에서는 그가 “평민으로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그가 비록 위나라 귀족 가문 출신이기는 하나 그의 가정이 이미 몰락해서 귀족의 특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 듯하다. 춘추시대 이래로 위(衛)나라는 줄곧 약소하였고, 그 또한 위나라에서 이미 아무런 지위도 없었으므로, 젊었을 때 당시의 강대국 위(魏)나라로 가서 재상 공숙좌(公叔座)에게 몸을 의탁하여 공숙좌의 가신이 되었다. 법가(法家)의 형명학설(形名學說)을 깊이 연구하였고, 초기 법가 이회(李悝)와 오기(吳起)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천하의 인재들을 초빙하자 상앙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일을 설파하여 효공에게 중용되었다. 진 효공 3년에 상앙은 변법(變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여 본인이 직접 초안하여 법령을 만들었는데, 이는 상앙이 처음 시행하는 제1차 변법이었다. 변법이 시행되자 첫해부터 많은 백성들의 원망이 있었으며 별로 신통한 반응도 없었다.
이에 백성들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진나라 수도의 남문에 장대를 꽂아놓고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겨 꽂아놓는 자에게 황금 열 냥을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백성들은 믿지 않았다. 상앙은 다시 그 장대를 옮기면 황금 50냥을 준다고 하고 상금을 대폭 올렸다. 이때 어떤 사람이 장난삼아 장대를 북문으로 옮겨놓았는데, 정말 상금으로 황금 50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로는 백성들은 나라의 명령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또 그 당시 태자가 법을 어긴 경우가 있었는데, 상앙은 태자는 다음의 보위를 이어 받을 사람이라 형을 내리지 못하고 그의 스승인 공자건(公子虔)과 공손가(公孫賈)에게 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죄로 그들을 법으로 다스리자 이때부터 백성들이 비로소 신법을 따랐다.
변법의 성공으로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자 그 여세를 몰아서 위(魏)나라의 안읍(安邑)을 공격해 항복받고, 그 다음에 다시 위(魏)의 고양(固陽)을 공격하여 투항시켰다. 효공 22년에는 다시 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지난날의 친구인 공자환(公子驩)과 친분을 내세워서 위나라 장수인 공자앙(公子卬)을 꾀어서 사로잡게 하고 위나라 군사를 대파하였다. 이에 효공은 상(商)과 오(於) 등의 15개 성읍을 봉해주었는데 이후부터는 상군(商君)·상앙(商鞅)이라 부르게 되었다.
효공 24년, 많은 귀족들이 그를 원망하였기 때문에 조량(趙良)은 그에게 봉지로 귀환하여 멀리 변두리로 가서 농사 지으며 여생을 보내도록 권유하였으나 상앙은 듣지 않았다.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여 혜문왕(惠文王)이 되자 공자건의 무리들은 상앙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였다. 혜문왕이 상앙을 체포할 것을 명하자 상앙은 달아나 위나라로 갔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앙을 속여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진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상앙은 진나라로 돌아온 후 그의 봉지인 상읍으로 달아나 부하들과 함께 북쪽으로 정현(鄭縣)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상앙을 공격하여 그를 동지(彤地)에서 죽였다. 상앙은 대중 앞에서 시체의 사지를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그의 일가는 몰살되었다.
그는 강력한 법가만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교화는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며, 사람간의 마음이나 인정 등은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반대파를 포용할 줄 몰랐고 그들과 토론할 줄도 몰랐으며 오직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단시간에 큰 성과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대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상앙의 반대파는 이제껏 상앙의 변법을 반대를 해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었다. 진 목공 이후 진나라의 정치는 원로세력과 왕권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점차 그 균형이 무너져 원로세력이 득세하게 되었고, 진 효공 이후 다시 왕권을 회복하고자 변법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5)주요저작 : 미상(未詳)

3. 서지사항 특징

상앙의 저서를 《상군서》라고 한 것은 공손앙이 진나라에 변법을 시행하여 진나라를 전국시대의 강국으로 만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商)과 오(於) 땅에 봉해짐에 따라 상군(商君)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저술을 《상군서》 또는 《상자(商子)》라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상군서》는 모두 26편이다. 그중 두 편은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으므로 사실 24편만 존재하는 셈이다. 처음엔 《상군》으로 불렸는데 《상군서》라고 처음 이름 붙인 사람은 제갈공명이다. 당나라 때는 책을 재정리하며 《상자》로 불렸고, 청나라 말기에 다시 《상군서》란 이름이 회복되었다. 《상군서》는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와 〈내저설 상(內儲說上)〉에 그 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분명 한비(韓非)가 살해된 B.C. 233년 이전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상앙의 〈계색(啓塞)〉을 언급하고, 사마천도 “일찍이 상군의 글 〈개색〉과 〈경전(耕戰)〉을 읽은 적이 있다.[嘗讀商君開塞耕戰書]”고 한 것을 보면 이 책이 서한(西漢) 때에도 전하는 판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유흠(劉歆)이 편찬한 《칠략(七略)》에 근거하여 반고(班固)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지었는데 제자의 법가류(法家類)에서는 “상군 29편[商君二十九篇]”이라 기록하였고, 병권모가(兵權謀家)에서는 “공손앙 27편[公孫鞅二十七篇]”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상앙의 저작이 한대에는 판본이 두 가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대 이후에는 서명에 변화가 생겼는데, 삼국시대 제갈량은 《상군서》라 하였고, 당나라 태종의 칙명으로 위징(魏徵) 등이 편찬한 《군서치요(群書治要)》에서는 《상군자(商君子)》, 《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에서는 《상자(商子)》라 하였다. 또 송대(宋代) 진진손(陳振孫)이 편찬한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를 보면 “《한서》 〈예문지〉에 29편이라 했는데, 지금은 26편이 전하다가 또 한 편이 없어졌다.[漢志二十九篇 今二十六篇 又亡其一]”라는 표현이 있다. 이를 보면 송대 말기까지 이 책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의 판본은 일찍이 이미 망실되었으나, 청대의 엄만리(嚴萬里)가 일찍이 원간본(元刊本)을 얻었는데, 모두 26편으로 이를 통해 송대 판본의 대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 두 편은 본문이 없었으므로 실제는 24편으로, 송대의 판본보다 적다. 엄만리는 이 판본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건륭(乾隆) 58년(1793)에는 명대의 범흠본(范欽本), 진사린본(秦四麟本)을 가지고 교정하였다. 광서(光緖) 2년(1876) 절강서국(浙江書局)에서 엄만리 교정본을 《이십이자(二十二子)》에 넣어 간행하였는데, 이 원간본의 교정본이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원간본은 엄만리의 교정과 절강서국의 중간을 거친 후에 실전되었고,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명각본(明刻本)이다.
상술한 절강서국본과 그 번각본 외의 주요한 청대 판본으로는 다음의 몇 종이 있다. 첫째는 건륭 43년(1778)에 교정하여 베껴 쓴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이다. 사고전서본은 일곱 부를 베껴 썼으나,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했다. 1986년 대만상무인서관(臺彎商務印書館)에서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를 영인하였고, 상해고적출판사에서는 또한 축인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이 판본을 쉽게 구해볼 수 있다.
그 외 저명한 주소(注疎)로는 청조(淸朝)의 엄만리(嚴萬里) 교정본이 있고, 근래에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왕시윤(王時潤)이 주석한 《상군서각전(商君書斠詮)》, 주사철(朱師轍)의 《상군서해고정본(商君書解詁定本)》, 장예홍(蔣禮鴻)의 《상군서추지(商君書錐指)》, 고형(高亨)의 《상군서주석(商君書注釋)》 등이 있다.

4. 내용

《상군서》는 선진 법가의 중요한 전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상앙의 정치사상과 군사사상이며 아울러 진나라 정치제도와 군사제도도 일부 언급하고 있다. 《상군서》는 한자로 2만 천여 자로 이루어진 방대하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풍부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한 편 한 편이 한 분야의 내용을 담은 작은 책자와 같으므로 사실은 24권으로 구성된 총서인 셈이다. 법치와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논리로 일관하고 있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이를 요약하면 크게 다음의 10가지 주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발전하며 옛 것은 반드시 바뀌는 것이므로 정치·사회의 각종 제도 또한 새로운 추세에 맞추어 바뀌어야 한다. 둘째, 세상이 바뀌면 행해야 할 도리도 달라져야 한다. 셋째,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잘 이용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넷째, 훌륭한 정치가는 백성들이 농사와 전쟁에 종사했을 때 이익이 생김을 잘 계산해서 알도록 이끌어야 한다. 다섯째, 공과 사를 명백히 구분하여 공적 이익을 개척하고, 사적으로 재물을 얻는 모든 경로를 막아야 한다. 여섯째, 군주는 최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하며 힘과 세(勢)로써 천하 백성들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일곱째, 부국강병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법으로 철저히 압박해야 한다. 여덟째, 형벌을 무겁게 하면 가벼운 범죄도 생기지 않으므로 상을 받는 것도 이익이지만 벌을 받지 않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생각을 백성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아홉째, 농사와 전쟁 이외의 모든 일은 부국강병이란 국가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이므로 철저히 압박하여 제거해야 한다. 열째, 모든 행동의 표준은 법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상벌·관직·신분의 기준을 법으로 정함으로써 국민의 의식을 법 하나로 통일시켜야 한다.
《상군서》는 당시와 후대의 정치 개혁가들에게 금과옥조였으며, 농사와 전쟁을 위한 그의 정치 개혁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집집마다 상앙이 만든 법률을 가지고 있어 법에 저촉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상앙은 국가의 실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중의 역량을 억압하는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단호함을 견지했다. 또한 그가 언급한 선한 백성으로 간사한 백성을 통치하려면 이는 곧 어지러움과 쇠약을 초래할 것이며, 간사한 백성으로 선한 백성들을 다스리면 오히려 다스려지며 강해질 수 있다는 이론과 백성을 약하게 하면 나라가 강해지고, 백성이 강하면 나라가 약해진다. 따라서 이 이치를 아는 나라는 백성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에 힘쓴다는 이론과 같이 오히려 성품이 아래 중에도 아래라고 평해지는 이들로 하여금 선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해야 한다는 《상군서》의 내용은 국가의 역량과 백성의 역량을 대립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상군서》에는 노동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귀족의 특권을 억제하며 분가(分家)를 장려하고, 경작자에게 경작지를 내주고 제자유세(諸子遊說)의 책모를 금지시키며, 학문문학(學問文學)을 배격하고 상업을 억누르며, 엄벌주의를 취하고, 연좌제(連坐制)를 실시하며, 세제(稅制)와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을 역설한 것 등이 이 책의 골자이다. 혹독하고 박정한 국가통치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진나라 이후 2천 년 동안 중국 정치를 움직여 온 힘은 사실 공자·맹자의 유가 사상이 아니다. 진·한 시대를 거치며 유가 사상으로 겉포장을 삼고 내면은 법가 사상으로 구성된 고도의 정치 이념이 중국을 끌고 왔다. 겉으론 인자한 성인의 정치를 표방하지만 속으론 강력한 군권에 기초한 법치 국가를 유지해 온 것이 중국 정치의 진상이다. 현대 중국 공산당의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 법가 사상의 진면목을 담고 있는 《상군서》는 그래서 여전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 물론 상앙의 정책과 《상군서》의 사상이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며 현실적 적실성을 가졌다고 하여 모든 사유와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현실과 맞대응하면서 개혁을 모색한 상앙의 고민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상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제공해준다.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전쟁은 춘추시대에 비해 한층 빈번해졌을 뿐 아니라 상당히 격렬해져 국가 존망을 결정짓는 국가의 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물질적 토대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각 국에서 부국강병을 위한 변법이 실시되었는데 《상군서》에서는 부국을 일차적이고 최종적인 것으로, 부민(富民)을 부국(富國)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특히 부민은 부국을 위한 수단이므로, 부민에 그치게 되면 오히려 백성들이 사치해지고 게을러져 국가를 악화시킨다는 생각에 관직과 작위를 통해 부를 국가에서 흡수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과거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린 상앙의 삶과 의지는 개혁을 외치는 현대 정치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모범적 태도로 보인다. 그가 추구한 독재 정치의 한계를 보면서 한 국가 또는 정치 지도자가 기본 정책이나 정치 노선의 결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론의 장과 지성의 비판을 필요로 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상군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성공을 미래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는 제도화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이 책을 통해 국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정치 개혁이 필요한지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예와 법은 시세에 맞춰서 확정하고, 제도와 명령은 각각 관련된 일에 순조롭고, 무기와 설비들은 각각 쓰기에 편해야 한다.[禮法以時而定 制令各順其宜 兵甲器備 各便其用]” 〈경법(更法)〉
• “성인은 옛날 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오늘날 것을 고수하지 않는다. 옛날 것을 모범으로 삼으면 시대에 뒤쳐지고, 오늘날 것을 고수하면 시대적 추세와 단절된다.[聖人不法古 不脩今 法古則後於時 脩今則塞於勢]” 〈개색(開塞)〉
• “성인은 공에 따라 관직을 주고 작위를 수여하므로 유능한 사람들이 근심하지 않고, 성인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고 형벌을 사면하지 않으므로 간악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 성인이 국가를 다스리면 상, 형벌, 교화의 통일을 살필 따름이다.[聖人以功授官予爵 故賢者不憂 聖人不宥過 不赦刑 故姦無起 聖人治國也 審壹而已矣]” 〈상형(賞刑)〉
(2)색인어:상군서(商君書), 상앙(商鞅), 공손앙(公孫鞅), 위앙(衛鞅), 변법(變法), 법가(法家), 한비자(韓非子), 진효공(秦孝公).
(3)참고문헌
• 商君書(商鞅 著, 嚴萬里 撰, 刊寫者未詳)
• 商君書錐指(蔣禮鴻 撰, 中華書局)
• 商君書(商鞅 지음, 김영식 옮김, 홍익출판사)
• 상군서(임동석 저, 동서문화사)
• 상군서-부국강병의 공격경영 전략서(신동준 역주, 인간사랑)
【함현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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