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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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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면재집(勉齋集)》은 남송(南宋)시기 주자학자인 황간(黃榦)의 문집(文集)이다.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勉齋先生黃文肅公文集)》, 《황면재선생문집(黃勉齋先生文集)》, 《황간면재집(黃榦勉齋集)》, 《황간문집(黃榦文集)》으로도 부른다.

2. 저자

(1) 성명:황간(黃榦)(1152~1221)
- 황간(黃榦)의 榦을 幹으로도 표기하지만, 황간(黃幹)(자(字) 상질(尙質))과 구별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간(榦)으로 수정하여 표기.
(2) 자(字)·별호(別號):자(字)는계직(季直)‧직경(直卿)이고, 호(號)는 면재(勉齋)‧삼산(三山)‧장락(長樂)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3) 출생지역:복주(福州) 민현(閩縣) (현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주시(福州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남송(南宋) 고종(高宗) 소흥(紹興) 22년에 태어나 남송 영종(寧宗) 가정(嘉定) 14년, 향년 70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황간의 부친인 황우(黃瑀)는 벼슬이 조산랑 감찰어사(朝散郞監察御使)에 이르렀으며, 학덕과 명망을 갖추었다. 그러나 황간의 나이 17세 되던 해에 부친은 세상을 떠났고, 황간은 가학(家學)을 잇고자 이심경(李沈卿)과 임소영(林少穎)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게 된다. 그 후 황간이 24세가 되던 해에 중형(仲兄)인 황동(黃東)이 길주(吉州)의 관리가 되는데, 이 때 황간은 중형을 따라 함께 길주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유청지(劉淸之)를 알게 된다. 유청지는 황간을 보자마자 그가 기이한 인물임을 알아차리고는 주희(朱熹)에게 수업을 받으라고 권유하였고, 황간을 소개하는 편지를 주희에게 보냈다. 이러한 인연으로 황간은 25세 때 처음으로 주희를 만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주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항상 그의 곁에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특히, 황간이 31세가 되던 해에 주희는 자신의 중녀(仲女)를 황간에게 시집보낸다. 이렇듯 황간은 주희의 사위이자 문인(門人)이었으며, 가장 오랜 기간 주희에게 수학하였고 주희와 가장 가까웠다.
황간은 스승인 주희의 가르침을 존중하였고 주희 또한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는 주희의 ‘도덕성명(道德性命)’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과거(科擧)에 대하여는 유념치 않았으나, 1194년 영종(寧宗) 즉위 시 주희의 추천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으며, 이후 안경지부(安慶知府)에 이르기까지 줄곧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황간은 당시의 정치현실과 민생경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그는 관직생활을 통하여 금(金)의 침공에 대비한 성곽의 축조와 쌀의 전매를 통한 민생경제의 안정 등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평생 관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65세가 되도록 변변한 집 한 채가 없었다. 황간은 가난을 단표(簞瓢)의 즐거움으로 여겼으며, 비록 관직에 몸을 담고 있더라도 뜻 있는 선비로서 독서와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5) 주요저작:
《면재집(勉齋集)》 외에 사서(四書) 등 유가 경전에 관한 황간의 전문 주해서로 《논어통석(論語通釋)》과 《효경본지(孝經本旨)》 등의 책명이 언급되고 있으나 현재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황간은 주희의 유지(遺志)를 이어 1220년에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속권인 〈상례(喪禮)〉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제례(祭禮)〉는 끝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황간 역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주희의 문인이자 황간의 문인인 양복(楊復)이 〈제례〉를 중수하여 《속의례경전통해(續儀禮經典通解)》를 완성하였다.

3. 서지사항

현재 통행본(通行本)으로서의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면재집(勉齋集)》은 총 사십권(四十卷)으로 구성되어 있다(四庫全書本 《勉齋集》 〈提要〉). 그러나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서는 《황간면재집(黃榦勉齋集)》 십사권(十四卷)을 기록하면서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사고전서본 《면재집》 〈제요〉와 《속문헌통고》 두 기록이 의존하는 《송사》 〈예문지〉에서는 “《황간문집(黃榦文集)》 십권(十卷)”이라 진술하고 있어서 그 체계가 다소 상이하다.
《면재집》의 판본에 대하여 송(宋)의 황진(黃震)(1213~1280)은 〈발면재집(跋勉齋集)〉에서 순우(淳祐) 병오년(1246)에 10권본인 형양본(衡陽本)을 얻게 되고 그 후 엄계본(巖溪本)‧쌍봉본(雙峯本)‧휘암본(徽庵本)‧삼산본(三山本) 등이 간행되었으며, 그 중 40권본인 삼산본(三山本)을 《면재대전집(勉齋大全集)》으로 편찬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欽定四庫全書本 《黃氏日抄》 卷九十一). 따라서 면재 문집은 남송시기 이미 10권본인 형양본으로부터 40권본에 이르기까지 많은 판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면재집》의 송(宋) 판본은 현재 모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존 최고본은 원각본(元刻本)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勉齋先生黃文肅公文集)》으로 〈부집(附集)〉 1권과 〈어록(語錄)〉 1권 및 〈연보(年譜)〉 1권이 같이 들어있는 40권본이다. 원각본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은 비록 약간의 문자 탈실(脫失)이 있지만, 통행본(通行本)으로서의 사고전서본 《면재집》에 비해 수록된 자료가 풍부하다. 즉, 원각본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은 사고전서본 《면재집》의 원본일 뿐만 아니라, 사고전서본 《면재집》에서 누락된 중요한 사료인 〈부집〉‧〈어록〉‧〈연보〉를 갖추고 있다. 《중국고적선본서목(中國古籍善本書目)》에 의하면, 원각본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은 북경도서관(北京圖書館)과 장춘(長春)의 길림성도서관(吉林省圖書館)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나, 길림성도서관장본(吉林省圖書館藏本)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북경도서관장본(北京圖書館藏本)은 영인되어 《북경도서관고적진본총간(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의 일부로 출판되었다(《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 第90冊, 集部‧宋別集類, 《勉齋先生黃文肅公文集》, 書目文獻出版社).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고전서본 《면재집》은 편찬자가 원각본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의 〈부집〉‧〈어록〉‧〈연보〉를 누락시키고 체계를 달리하여 새로이 사십권으로 구성하였고, 원각본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에서 탈실된 문장을 임의대로 편집하거나 많은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제목과 내용이 상이한 부분이 드러나기도 한다. 《문연각사고전서보유(文淵閣四庫全書補遺)》에서는 사고전서본 《면재집》에 누락된 권6과 권35의 일부분을 밝히고 있으나( 《文淵閣四庫全書補遺》 第3冊, (據文津閣四庫全書補), 「 《勉齋集》 卷六, 卷三十五」, 北京圖書館出版社, 1997年, 567-575쪽), 이 역시 현존 최고본(最古本)으로서의 원각본 《면재선생황문숙공문집》에 수록된 내용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다.

4. 내용

황간(黃榦)은 주희(朱熹)의 문인(門人)이자 사위로서 주희와 가장 친밀하였으며, 평생 가까이 주희를 모시면서 수학(受學)하였다. 따라서 주자학의 핵심과 주희 사후 주자학의 분화와 발전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면재집》은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송(宋) 여정덕(黎靖德)의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주희가 황간을 훈교(訓敎)하거나, 혹은 두 사람 간에 의견을 교류한 내용 등 황간과 관련 있는 조목이 250여 조에 달한다. 그 중에는 이에 관해 여타의 주자문인들이 기록한 내용도 있지만, 황간 본인의 기록도 있다. 1213년, 황간은 주희의 어록을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이도전(李道傳)과 서신을 교환하며 이에 대하여 토론하였고(《勉齋集》 卷十三, 書十三, 〈與李貫之兵部書〉), 아울러 1215년에는 〈지주간주자어록후서(池州刊朱子語錄後序)〉를 쓰기도 하였다(《勉齋集》 卷二十二, 題跋, 〈書晦菴先生語錄〉)
《면재집》은 이 밖에도 습개경(襲蓋卿)이 편찬한 《주자어록(朱子語錄)》의 제발(題跋)(〈書襲夢錫所編晦菴先生語錄〉)과 주자행장(朱子行狀)(《勉齋集》 卷三十六, 〈朝奉大夫文華閣待制贈寶謨閣直學士通儀大夫諡文朱先生行狀〉)의 편찬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황간이 편찬한 주자행장은 여타의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황간의 주자행장은 사건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고 연월(年月)과 각종 문서를 모두 기록해 놓았으며, 임금에 대한 주희의 간쟁과 친구에 대한 타이름 뿐만 아니라, 주희의 학문과 도(道)에 대한 황간 자신의 이해까지도 기록해 놓았다. 황간은 주희의 학문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거경궁리(居敬窮理)로 집약되어 있고, 주희의 도(道)는 천지(天地)와 괴리되지 않으며 성현(聖賢)의 도와 상응한다고 여겼다. 황간은 성현이 전한 유가(儒家)의 도(道)는 모두 유가경전에 실려 있으며, 주희가 유가경전을 연구한 것은 바로 성현의 도통(道統)을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5. 가치와 영향

황간(黃榦)을 비롯한 대표적인 주자문인들은 주희(朱熹) 사후 도통의식을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주자학을 전파하고 발전시켰다. 그 중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대표적 문인(門人)인 황간은 정치참여와 서원교육이라는 도학파(道學派)의 현실참여 방법으로 주자학을 전파하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사회개혁에 관한 혁혁한 치적을 올렸으며, 정치에 물러나서는 서원(書院)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향촌(鄕村)의 교화에 힘씀으로써 현실적인 시대의 문제를 타개하여 갔다. 황간이 일생동안 보여준 서원에서의 강의와 사서(四書)에 대한 연구 그리고 육학(陸學) 비판은 주희의 도통(道統)을 이은 주자문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체용론(體用論)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황간의 사상은 특히 심성론(心性論) 측면에서 주자학을 발전시킨데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이기(理氣)와 관련하여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기가 움직이면 이가 따른다[氣動而理隨之]’와 ‘이가 움직이면 기가 낀다[理動而氣挾之]’라는 두 가지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들은 체용론과 이기심성론이 결합된 황간 철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주희 심성론에 관한 황간의 독보적인 견해는 “보한경(輔漢卿)이 악(惡)도 성(性)이라 여기고, 이공회(李公晦)가 칠정은 인심이고 사단은 도심이라 여긴 것에 대하여 모두 일일이 설명하였다(黃震, 《黃氏日抄》 卷四十, (四庫全書本, 子部一, 儒家類), “如輔漢卿疑惡亦不可不謂性, 如李公晦疑喜怒哀樂由聲色臭味者爲人心 由仁義禮智者爲道心 …… 先生皆一一辨明.”)”는 황진(黃震)의 기록을 통하여도 알 수 있다.
황간은 독서와 강학을 통하여 성현의 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후세에 전해주려고 하였으며, 가르침을 구하는 여러 선비들 또한 사방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각지의 제자들을 가르친 황간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문하에서 절강(浙江) 금화학파(金華學派), 강서(江西) 쌍봉학파(雙峰學派), 신안(新安) 주자학파(朱子學派)가 성립되어 원대 주자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 몸에서 발한 것은 희노애락이고, 이 리(理)에서 발한 것은 인의예지이다.[發於此身者 則喜怒哀樂 發於此理者 則仁義禮智]” 〈권8 복이공회서(復李公晦書)〉
• 도(道)에 체용(體用)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한번 움직이고 한번 멈추는 것이 모두 천리자연의 오묘함이 되어서 조금도 인위(人爲)적인 사사로움이 없게 된다.[知道有體用 則一動一靜 皆天理自然之妙 而無一毫人爲之私也] 〈권3 중용총론(中庸總論)〉
• 존덕성(尊德性)은 마음에 두고 잊지 않게 하여 도체(道體)의 대강을 극진히 할 수 있게 하며, 도문학(道問學)은 지식을 쌓아 도체(道體)의 세미함까지 다 이룰 수 있게 한다.[尊德性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 道問學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 〈권8 복엽미도(復葉味道)〉
(2) 색인어:황간(黃榦), 면재(勉齋), 주자학(朱子學), 주자문인(朱子門人), 도통(道統)
(3) 참고문헌
• 勉齋集(文淵閣四庫全書本, 集部四, 別集類三, 乾隆年間)
• 勉齋先生黃文肅公文集(《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 第90冊, 集部‧宋別集類, 《勉齋先生黃文肅公文集》, 書目文獻出版社, 1988.)
• 宋元學案(黃宗羲全集 3,4,5,6冊,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1992)
• 朱子門人(陳榮捷, 臺灣 學生書局, 民國71)
• 宋明理學(陳來, 遼寧敎育出版社, 1992)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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