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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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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해남화진경(句解南華眞經)》은 조선시대에 남송 임희일(林希逸)의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1258)에 현토를 붙여 간행한 책이다. 조선조에 다수의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널리 애독되던 책이지만, 언제 최초로 간행되었으며 누구에 의해 현토가 붙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2. 저자

(1) 성명:임희일(林希逸)(1193~1271)
(2) 자(字)・호(號):자(字)는 숙옹(肅翁), 연옹(淵翁)이고, 호(號)는 죽계(竹溪), 권재(鬳齋), 헌기(獻機) 또는 헌재(獻齋)이다.
(3) 출생지역:남송(南宋) 복주(福州) 복청현(福淸縣) 어계(漁溪)(현 복건성(福建省) 복청시(福清市))
(4) 주요 활동과 생애
남송 광종(光宗) 소희(紹熙) 4년(1193)에 태어나 도종(度宗) 함순(咸淳) 7년(1271)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희일은 어렸을 때 부친을 잃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의탁하여, 외할머니 왕씨와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종(理宗) 단평(端平) 원년(1234)에 해시(解試) 제일(第一)로 합격하고, 다음해 단평(端平) 2년(1235) 43세의 나이로 성시(省試) 제일(第一), 전시(殿試) 중 갑과(甲科) 제사인(第四人)으로 합격했다. 단평 2년(1235)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처음에는 평해군(平海軍)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는데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다. 순우(淳祐) 원년(元年) 천주(泉州)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임희일은 당시 천주군연(泉州郡掾)으로 부임해 있었으므로 아침에는 죽을 나눠주고 오후에는 쌀을 풀어서 구휼했다. 순우 6년(1246)에 비성정자(秘省正字)로 옮겼고, 7년(1247) 비서원편수관(秘書院編修官)을 제수받았으며, 8년(1248)에 직비각(直祕閣) 지흥화군(知興化軍)이 되었다. 보우(寶祐) 3년(1255)에 요주(饒州)의 태수(太守)가 되었다가 경정(景定) 4년(1263)에 사농소경(司農少卿) 등이 되었다. 이후에 7년간 한거(閑居)하다가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1269) 9월부터 6년(1270) 봄까지 계속해서 서울에 들어와 사한(詞翰)을 관장하라는 명이 내려왔는데, 자주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져 결국 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후의 일은 상세하지 않다. 다만 임희일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벼슬을 끝마쳤다고만 전해지는데, 중서사인의 벼슬을 언제 맡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임희일은 애헌학파(艾軒學派)의 삼전제자(三傳弟子)인데, 그의 학적인 계보는 멀리 정이(程頤)의 문인(門人)인 윤화정(尹和靖)(1071~1142, 윤돈(尹焞). 자(字)는 언명(彦明))으로부터 연결된다. 그런데 이정(二程)의 학설에 충실하였던 윤화정과 달리 애헌학파의 사상적 색채는 뒤로 갈수록 변화하기 시작한다. 윤화정의 문인인 애헌(艾軒) 임광조(林光朝)(1114~1178, 자(字)는 겸지(謙之), 호(號)는 애헌(艾軒))에게는 이정의 ‘리(理)의 철학’적 요소가 매우 희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荒目見悟, 〈林希逸の立場〉, 《九州大學中國哲學論集》 7號, 九州大學中國哲學會 1981.10, 48쪽)하고 있다. 또한 임광조는 주자와도 친분이 있었으며(《애헌집(艾軒集)》 제요(提要)와 서(序)에 주희(朱熹)가 애헌을 존경했다거나 형으로 섬겼다는 설명이 나온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타난 애헌에 관한 인용과 평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매우 호의적으로 애헌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임광조는 이천(伊川)의 문학경시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이후로 문장을 중시하는 풍조는 애헌학파 전통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애헌 임광조의 학통은 임역지(林亦之)(1136~1185, 자(字)는 학가(學可), 호(號)는 망산(網山) 또는 월어(月漁))→진조(陳藻)(자(字)는 원결(元潔), 자호(自號)는 낙헌(樂軒))→임희일로 이어지는데, 임광조에 이르러서는 아직 도불(道佛)에 대한 이단관(異端觀)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뒤로 갈수록 그 사상적인 색채가 달라졌다. 특히 진조의 경우 “낙헌선생은……우리 유가의 도(道)를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 매우 엄했다.[樂軒……其衛吾道 闢異端甚嚴](유극장(劉克莊), 《후촌선생대전집(後村先生大全集)》 권90, 〈흥화군산성삼선생사당기(興化軍山城三先生祠堂記)〉)”라는 평가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낙헌〉선생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불서(佛書)는 우리 유가서(儒家書)를 입증・설명하기에 가장 좋다.’[先生嘗曰 佛書最好證吾書](《장자구의(莊子口義)》 권3)”라는 언급도 존재한다. 따라서 진조는 명목상으로는 불교 등 이단에 대한 변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남송 말기의 임희일에 와서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한 도불사상의 수용 또는 포섭’이라는 결과로 나아가게 된다. 비록 임희일의 세계관에 유가〉노장〉불가라는 위계가 설정되어 있으며, 유가경전의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적 효용성으로 도불의 수용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사유의 바탕에는 도불사상의 대의가 유가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는 맥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주요저작
그의 저작은 매우 많지만, 현존하는 저서는 《고공기해(考工記解)》 2권, 《노자권재구의(老子鬳齋口義)》 2권,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 10권,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 2권(이상의 세 책은 《(노장열(老莊列))삼자구의(三子口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권재속집(鬳齋續集)》(《죽계권재십일고속집(竹溪鬳齋十一稿續集)》) 30권, 《죽계십일고시선(竹溪十一稿詩選)》 1권, 《심유적고서(心游摘稿序)》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공기해》는 그의 재전(再傳) 스승인 임역지(林亦之)를 비롯하여 송대(宋代) 학자들이 주해한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주석이다.(《주례》 〈고공기〉에 대한 주석으로는 당대(唐代) 두목(杜牧) 주(注)가 있고, 송대(宋代)에는 진상도(陳祥道), 임역지(林亦之), 왕염(王炎) 등의 주가 있으나 지금 전하지 않고, 유독 임희일의 주만 간신히 남아 있다.(《考工記解》 《欽定四庫全書》 經部 提要)
이외에도 《춘추삼전(春秋三傳)(정부론(正附論))》 13권, 《역강(易講)》 4권, 《양조보훈(兩朝寶訓)》 21권, 《권재전집(鬳齋前集)》 6권, 《산명별집(山名別集)》과 《수목청화시(水木淸華詩)》 1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3. 서지사항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는 남송 보우(寶祐) 6년(1258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최재목의 조사에 의하면, 세종 7년(1425) 경자자본(庚子字本) 《장자권재구의》와 《노자권재구의》가 있고 또한 《열자권재구의》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최재목, 〈朝鮮時代における林希逸《三子鬳齋口義》の受容〉, 《양명학》 제10호, 한국양명학회, 2003)
《구해남화진경(句解南華眞經)》은 임희일의 《장자권재구의》에 현토를 붙여 간행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구해남화진경》이 언제 처음으로 발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최재목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구해남화진경》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갑인자본(甲寅字本)(선조대(宣祖代)(1568~1608))이다.(최재목, 상동(上同), 2003)
또한 《구해남화진경》에 현토를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도 불확실하다. 엄영봉嚴靈峯은 《노열장삼자지견서목(老列莊三子知見書目)》(중편(中篇)) 〈한국장자서목록(韓國莊子書目錄)〉(중화총서편심위원회(中華叢書編審委員會), 1965)에서 《구해남화진경》 10권을 언급하고 있는데, 1567년 경에 간행된 것으로 조선함흥활자배인본(朝鮮咸興活字排印本)이며, 한국어 구두(句讀)와 음주(音註)가 달려 있고, 이 책의 저자를 최립(崔岦)(1539~1612)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장원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자연구론집(莊子硏究論集)》(木鐸編輯室 編輯‚ 臺北:木鐸出版社‚ 1981)에 실려 있는 〈장자목록팔종(莊子目錄八種)-한국장자목록(韓國莊子目錄)〉에는 1567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해남화진경》을 언급하고 이 책의 저자를 최립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현토와 간행 과정에 최립이 간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최립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 《구해남화진경》의 간행과 관련된 기록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장원태, 규장각해제)
‘구의(口義)’라는 말은 《신당서(新唐書)》 〈선거지(選擧志)〉에 보이는데, 묵의墨義라는 지필고사 방식과 상대되는 시험의 방식으로, 일종의 구술고사의 형식으로 경전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송대에 이르러 호원(胡瑗)의 《주역구의(周易口義)》・《홍범구의(洪範口義)》라는 두 권의 책이 있었고, 호원의 뒤를 이어 ‘구의’라는 말로 주소(注疏)의 명칭을 삼은 것이 임희일의 《삼자구의(三子口義)》이다. 임희일의 《삼자구의》에서 ‘구의’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임경덕(林經德)의 〈장자권재구의서(莊子鬳齋口義序)〉(일명 〈남화진경후서(南華眞經後序)〉)와 임계유(任繼愈)의 《도장제요》에 잘 나타난다. 임경덕의 〈서(序)〉에서는 “이 책을 ‘구의’라고 이름 지은 것은 그 문장이 이속(里俗)의 통속적인 말을 섞어서 직접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도장제요》에서는 “《도덕진경구의(道德眞經口義)》는……그 글이 문장을 따라 직접적으로 풀이하였는데, 바로 구어(口語)로 의미를 강설하였기 때문에 ‘구의’라고 명명하였다.”라고 하였다.(陳怡燕, 〈林希逸《莊子口義》思想硏究〉, 臺北:國立師範大學國文硏究所 碩士論文, 2009)

4. 내용

판본에 따라 순서는 다르지만, 〈서〉의 내용은 서림경(徐霖景)의 〈장자후서(莊子後序)〉(1621)‚ 임희일(林希逸)의 〈구해남화진경발제(句解南華眞經發題)〉‚ 임경덕(林經德)(1260)‚ 임동(林同)(1261)의 서(序), 그리고 이사표(李士表)의 〈장자십론(莊子十論)〉이 포함되어 있다. 본문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권1:〈소요유(逍遙遊)〉・〈제물론(齊物論)〉
권2:〈양생주(養生主)〉・〈인간세(人間世)〉・〈덕충부(德充符)〉
권3:〈대종사(大宗師)〉・〈응제왕(應帝王)〉・〈병무(騈撫)〉・〈마제(馬蹄)〉
권4:〈거협(胠篋)〉・〈재유(在宥)〉・〈천지(天地)〉
권5:〈천도(天道)〉・〈천운(天運)〉・〈각의(刻意)〉・〈선성(繕性)〉
권6:〈추수(秋水)〉・〈지락(至樂)〉・〈달생(達生)〉・〈산목(山木)〉
권7:〈전자방(田子方)〉・〈지북유(知北游)〉・〈경상초(庚桑楚)〉
권8:〈서무귀(徐無鬼)〉・〈칙양(則陽)〉・〈외물外物〉
권9:〈우언(寓言)〉・〈양왕(讓王)〉・〈도척(盜跖)〉・〈설검(說劍)〉
권10:〈어부(漁父)〉・〈열어구(列御寇)〉・〈천하(天下)〉

5. 가치와 영향

임희일의 《삼자구의》는 13세기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최재목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7년(1425)에 이미 경자자본(庚子字本) 《삼자권재구의》가 판각된 이래로, 조선시대 내내 여러 차례 발간되어 사대부들에게 널리 애독되었다. 특히 《구해남화진경》은 11개의 판본이 있는데 그 중에는 퇴계소장본으로 추정되는 판본도 있을 정도이다. 또한 일본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복영광사(福永光司)는 “에도(江戶) 시대의 노장학은 무로마치(室町) 시기의 선승이 계승한 당시의 노장학이며, 아울러 송대 임희일의 《노자구의(老子口義)》와 《장자구의(莊子口義)》 등을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도교여일본문화(道敎與日本文化)》)라고 지적하였다. 특히 《장자구의》의 성서(成書) 시기는 13세기였는데, 14세기에 이미 일본으로 전파되고 17세기 하야시 라잔(林羅山)에 의해 높이 존숭되었다.
이와 같이 임희일의 주석이 13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널리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임희일의 《삼자구의》 중 《장자구의》가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다(《사고전서총목제요》 등). 그런데 《장자구의》는 기본적으로 송대 이학理學적 관점에서 《장자》를 재해석한 것인데, 해석의 과정에 선불교의 내용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유불도 삼가의 사상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송대 노장학의 주요 특징은 유불도 삼가사상의 융합을 기반으로 《노자(老子)》・《장자(莊子)》 텍스트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많았으므로, 임희일의 관점은 시대적인 요구에도 부합했다. 더욱이 임희일의 《장자구의》는 의리나 훈고 방면에만 집중했던 기존의 장자주석과는 달리 문장학의 관점에서도 장자의 문장에 주목하여 장자의 난해한 표현법, 문체, 개념어, 비유 등을 분석하였다. 이는 도(道)와 문(文)을 함께 중시했다는 애헌학파(艾軒學派)의 문장관(文章觀)을 이어받은 임희일의 관점이 그의 도가 텍스트(《노자》・《장자》・《열자》)의 해석에서 잘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목에서부터 장자의 문장을 통속적이고 쉬운 글을 뜻하는 구의(口義)라는 쉬운 글의 형태로 풀이하겠다고 표방하고 있다. 이는 원전의 난해한 내용을 일상용어인 구어체(spoken language)로 풀이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임희일의 《삼자구의》가 인기가 끌게 된 이유에 대해 단지 ‘구의’라는 주소(注疏) 형식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임희일은 각 구절들의 의미와 문맥을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임희일의 주석은 전통시대에 상당히 많이 읽히게 되었다.”(장원태, 규장각 해제)라는 식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 대표적인 주석서로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게 된 원인에 대해 단순히 쉽고 평이한 문장 때문이라는 인식은 너무나 평면적인 분석으로 보인다.
실제로 임희일의 《삼자구의》에 대해서는 평이하고 간명하다는 평가와 천박하다는 평가로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전자에는 진고응(陳鼓應)(《노자금주금역급기평개(老子今註今譯及其評介)》), 아카츠카 키요시(赤塚忠)(《제자사상연구(諸子思想硏究):平明の解釋》), 모리 미키사부로(森三樹三郞)(《老子・莊子:平易に說》)등의 평이 있고, 후자에는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평가(享保12년(1727)의 〈답문서(答問書)〉 하(下)),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의 평가(〈자지만필(紫芝漫筆)〉 권8)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어체식의 풀이는 당송대(唐宋代) 선불교(禪佛敎)의 어록체로부터 비롯되어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까지 당시 신유학자들에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쉬운 구어체로 풀이했다는 점이 인기를 끌었던 원인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송유(宋儒)들의 수많은 도가서(道家書) 주해 가운데 특별히 임희일의 주석이 공통적으로 성행했던 것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하다.
한편으로 《한적국자해전서(漢籍國字解全書)》 제28권에서는 임희일에 대한 《총목제요(總目提要)》의 비판에 대해 만청(滿淸) 학자들이 송유(宋儒)를 배척하던 누습(陋習)에 의한 것이지만, 임희일의 설이 송유의 눈으로 장자를 곡해하고 있는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임희일의 주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고전서총목제요》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학파는 오히려 고증학이나 한학(漢學)적 관점에서 임희일의 송학(宋學)적 장자(莊子)해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임희일의 《삼자구의》의 특징은 단순히 쉽고 평이한 구의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송학을 기반으로 송유의 시각으로 도가사상을 재해석했다는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임희일의 《삼자구의》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게 된 원인은 위에서 언급했던 《삼자구의》자체의 세 가지 측면의 특징, 즉 송학을 기반으로 한 유불도 삼교사상의 소통과 융합, 문장학을 중시한 도가텍스트 원전의 분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유행했던 구어체(어록체, 백화체)로 분명한 의미 설명 등을 모두 지적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장자의〉 대강령(大綱領)과 대종지(大宗旨)는 일찍이 성인(聖人)과 다른 적이 없었다.[大綱領 大宗旨未嘗與聖人異]” 《장자권제구의(莊子鬳齋口義)》 〈발제發題〉
• “‘소요유(逍遙遊)’란 이 편이 근거하는 바의 이름이다.……‘유(遊)’란 마음속에서 천연스레 노닒이 있는 것이다. ‘소요(逍遙)’란 넉넉하게 자재自在한 것이다. 《논어》에서 문인들이 공자(孔子)를 다만 ‘락(樂)’이란 한 글자로 형용하였고, 시경 삼백편에서 인물을 형용하면서 예를 들어 〈남유규목(南有樛木)〉편이나 〈남산유대(南山有臺)〉편 같은 경우에 ‘즐겁도다 군자여!’라고 말했으니, 또한 ‘락’이란 한 글자로 그쳤을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소요유’이니, 《시경》과 《논어》의 이른바 ‘락’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락’이라는 한 글자로 가장 처음을 시작하였으니, 이 늙은이의 흉중을 보면 과연 어떠한 것인가?[逍遙遊者 此篇所立之名也……遊者 心有天遊也 逍遙 言優游自在也 論語之門人形容夫子只一樂字 三百篇之形容人物 如南有樛木 如南山有臺曰 樂只君子 亦止一樂字 此之所謂逍遙遊 卽詩與論語所謂樂也 一部之書 以一樂字爲首 看這老子胸中如何]” 《장자권재구의》 〈소요유逍遙遊〉
• “이 부분은 사생(死生)을 일관하는 이치를 드러내 밝힌 것이다. 동이를 두드렸다는 이야기는 또한 우언(寓言)일 뿐이다. 또 원양(原壤)이 나무에 올라가 노래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가족이 죽었을 때 완전히 사람의 마음(人心)이 없겠는가! 만일 사람의 마음이 없다면 이는 승냥이나 이리이니, 부자(夫子)께서 오히려 그와 벗이 되었겠는가! 성문(聖門)의 학(學)은 효모(孝慕)를 다하는 것인데, 어찌 생사의 이치를 모르겠는가! 원양(原壤)이나 장자(莊子)의 무리는 사람의 마음의 미혹과 집착을 깨뜨릴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합당함에서 지나친한 예를 들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경》 〈대우모〉편에서 말한 ‘도심은 오직 은미하다.’는 것인데, 홀로 세상에서 행해질 수 없어서, 그래서 중(中)을 잡으라는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莊子)나 열자(列子)의 무리가 어찌 이것을 몰랐겠는가. 다만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싫어해서, 그래서 이런 의론을 한 것이다.[此一段乃是發明死生一貫之理 鼓盆之說 亦寓言耳 且如原壤之登木而歌 豈其親死之際 全無人心乎 若全無人心 是豺狼也 夫子尙肯與之友乎 聖門之學 所以盡其孝慕者 豈不知生死之理乎 原壤․莊子之徒 欲指破人心之迷着者 故爲此過當之擧 此便是道心惟微 不可以獨行於世 所以有執中之訓 莊列之徒 豈不知此 特矯世厭俗 故爲此論耳]” 《장자권재구의》 〈지락(至樂)〉
• “예로부터 이와 같이 세속을 떠나 절연하는 학문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다만 말하길, 불교가 〈한(漢)나라〉 명제(明帝)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불교를 배우기를 기다릴 것 없이 〈《장자》에 이같은 이치가〉 본래부터 있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自古以來 有此一等離世絶俗之學 今人但云 佛至明帝時始入中國 不知此等人不待學佛而自有也]” 《장자권재구의》 〈대종사(大宗師)〉
• “대장경 540함은 모두 여기(《장자(莊子)》)로부터 풀어낸 것이다.[大藏經五百四十函 皆自此中紬繹出]” 《장자권재구의》 〈발제〉
• “주자가 상산의 학문을 비판하여 말하길, 강서학자들은 모두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눈을 깜박하는 순간에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고 하시고 깊이 꾸짖으며 힘써 배척하셨다. 그러므로 《논어집해》에서 ‘識’에 ‘지’라는 발음을 달아서, ‘묵묵히 마음 속에 간직할 뿐이다.’라고 했으니, 《맹자(孟子)》의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행해진다.’는 것 또한 남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이다. 돈오처(頓悟處)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상산(象山)의 학문을 비판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논어》 《맹자》의 본 뜻이 아니다.……돈오(頓悟)와 점수(漸修)는 본래 두 개의 기틀이니 점수는 있으면서 돈오는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사람마다 모두 돈오로써 깨달음을 얻는다고만 할 필요도 없다. 중궁(仲弓)이 경(敬)을 지킨 것은 점(漸)이고 안자(顔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한 것은 ‘돈(頓)’이다.[晦翁懲象山之學 謂江西學者 皆揚眉瞬目 自說悟道 深詆而力闢之 故論語集解以識音志 曰黙而識之爾 孟子不言而喩 亦曰不待人言而自喩 不肯說到頓悟處 蓋有所懲而然 非語孟二書之本旨也……頓漸自有二機 不可謂有漸而無頓 亦不必人人皆自頓悟得之 仲弓之持敬 漸也 顔子之克己復禮 頓也]” 《장자권재구의》
(2) 색인어:임희일(林希逸), 권재(鬳齋),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 삼자구의(三子口義), 애헌학파(艾軒學派)
(3) 참고문헌
• 《莊子鬳齋口義》(林希逸, 周啓成 校注, 中華書局)
• 《南華眞經口義》(林希逸, 陳紅映 校點, 雲南人民出版社)
• 《莊子-道的思想及其演變》(池田知久, 黃華珍 譯, 國立編譯館)
• 《中國莊學史》上(熊鐵基 主編, 劉固盛․肖海燕․熊鐵基 著, 福州市:福建人民出版社)
• 〈林希逸《莊子口義》思想硏究〉(陳怡燕, 臺北:國立師範大學國文硏究所 碩士論文, 2009)
• 〈林希逸《三子鬳齋口義》の韓國版本調査〉(崔在穆, 《郭店楚簡の思想史的硏究》(〈古典學の再構築〉東京大學郭店楚簡硏究會編) 第五卷, 2001)
• 〈남송 임희일의 신유학적 노장해석에 관한 연구〉(김형석,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2006)
• 〈《구해장자(句解莊子)》 역주(譯註)- 〈逍遙遊, 齊物論〉〉(서원식, 전남대 한문고전번역협동과정 석사학위논문, 2020)

【김형석】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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