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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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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당서》는 북송(北宋) 때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이다. 중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전의 왕조사를 정리해 왔는데, 그중 기전체로 쓰인 공신력 있는 서적을 보통 정사(正史)라고 일컬었다. 《신당서》는 바로 이 정사의 하나로서 총 22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당서(唐書)》이고, 전근대 시기의 문헌은 대부분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 오대(五代) 시기에 나온 동일한 명칭의 서적 곧 《구당서(舊唐書)》와 구별하기 위해, 근래에는 이 책을 《신당서》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당서》와 《신당서》가 모두 당조의 정사로 인정되는데, 두 책 각각의 특징이 있으므로 양자를 서로 비교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2. 저자


(1) 성명:구양수(歐陽脩)(1007~1072), 송기(宋祁)(998~1061) 등
《신당서》는 ‘설관수사(設館)(官)修史’ 곧 전문적인 관청 혹은 관료를 두어 사서를 수찬(修撰)하는 제도의 산물로서, 그 저자를 한두 명으로 국한할 수 없다. 인종(仁宗)(재위 1022~1063)의 명령으로 장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책의 편찬에는 재상으로서 총괄적인 관리를 맡은 제거관(提擧官)과 실질적인 책임자인 간수관(刊修官), 집필자인 편수관(編修官) 등 다수의 인물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은 《신당서》가 “구양수(歐陽修)(구양수의 한자를 이렇게 쓰기도 함), 송기(宋祁)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였다.[歐陽修宋祁等奉敕撰]”고 하였다. 이 책이 만들어지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한 이가 구양수와 송기였던 것이다. 실제로 송기는 《신당서》의 편찬 과정 내내 간수관이었던 유일한 인물이고, 지화(至和) 원년(1054)에 간수관이 된 구양수는 본기(本紀)·지(志)·표(表)를 실질적으로 완성하는 등 이 책의 마무리 작업을 책임졌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신당서》의 저자들 가운데 구양수, 송기 두 사람만 설명하겠다.
(2) 자(字)·별호(別號)
구양수의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號)가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송기의 자는 자경(子京)이고, 소자(小字)는 선랑(選郞)이며,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3) 출생지역
구양수는 길주(吉州) 영풍(永豐)(현 중국 강서성(江西省) 길안시(吉安市)) 사람으로서, 부친의 임지(任地)이던 면주(綿州)(현 중국 사천성(四川省) 면양시(綿陽市))에서 태어났다. 송기의 본적은 안주(安州) 안륙(安陸)(현 중국 호북성(湖北省) 안륙시(安陸市))인데, 고조부 때 개봉(開封) 옹구(雍丘)(現 중국 하남성(河南省) 상구시(商丘市) 민권현(民權縣))로 이주하였다.
(4) 주요활동과 생애
구양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인종 천성(天聖) 8년(1030)의 진사과를 거쳐 재상으로까지 승진한 사대부(士大夫)의 전형이다. 실제로 그는 ‘경력신정(慶曆新政)’에 동참하고 고문(古文)의 부흥을 주도하는 등 송대의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여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구양수는 개인적으로 쓴 《오대사기(五代史記)》 곧 《신오대사(新五代史)》가 훗날 오대 시기의 정사로 간주될 만큼 뛰어난 역사가이기도 하다.
송기는 천성(天聖) 2년(1024)의 진사과 급제자로서 공부상서(工部尙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후대에 구양수만큼 높이 평가되지는 않으나, 그 역시 당시 재능 있는 문장가이자 관료로 유명했다. 송기는 천 편이 넘는 시(詩)와 사(詞)를 남겼으며, 기거주(起居注) 등의 사서 편찬에 참여한 적이 있다.
(5) 주요 저작
구양수는 생전에 스스로 《거사집(居士集)》을 만들었고, 사후(死後)에도 그의 시문(詩文)을 모은 책들이 여러 명칭으로 간행되었다. 구양수의 글들은 현재 《구양수전집(歐陽修全集)》에 대부분 들어가 있으나, 이밖에 독립된 저작으로 전술한 《오대사기》와 함께 《집고록발미(集古錄發微)》가 주목된다. 현존하는 최초의 금석학(金石學) 문헌인 이 책은 송대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송기 역시 개인 문집으로 《(송)경문집(宋景文集)》을 남겼고, 일부 저술은 별도의 책으로 유통되어 왔다. 중국 사천성 지역의 식물·동물이나 약재 등을 소개한 《익부방물략기(益部方物略記)》, 필기류(筆記類) 도서인 《송경문필기(宋景文筆記)》 등이 그것이다.

3. 서지사항


후주(後周)를 이은 송나라는 앞선 오대(五代)의 왕조들과 달리 안정된 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가 무르익자, 인종은 경력 4년(1044)에 혼란기에 만들어진 《구당서》의 내용에 불만을 갖고 당대의 역사를 다시 정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가창조(賈昌朝)(997~1065)를 제거관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서의 편찬 작업은 지지부진하였다. 인종은 지화 원년에 속히 이 책을 완성하라고 재차 명령하면서 구양수를 간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수사(修史) 작업이 촉진되어 마침내 가우(嘉祐) 5년(1060)에 《신당서》가 완성되었다.
송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융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당서》는 《구당서》에 비하여 내용이나 형식 모두 훨씬 정밀하고 체계화되었다. 번다한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위해 ‘표’의 형식을 채용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구당서》보다 적은 분량에 더 많은 사실을 기록했다는 〈진신수당서표(進新修唐書表)〉의 자부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오진(吳縝)(?~?)이 《신당서규류(新唐書糾謬)》를 지어 그 결함을 지적하였지만, 당시 이러한 비판적 분위기야말로 《신당서》와 같은 빼어난 사서가 출현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신당서》는 여느 정사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여러 차례 판각(板刻)되었고,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이들 중 예전에 가장 중시된 것은 1927~1937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발행한 백납본(百衲本)24사(史)였다. 하지만 1959~1977년에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표점(標點)·교감(校勘)한 25사(24사에 《청사고(淸史稿)》 포함)가 나온 뒤, 대부분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 중화서국본 《신당서》는 1975년에 나왔고, 현재 그 수정·보완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4. 내용


《신당서》는 본기 10권, 지 50권, 표 15권, 열전 1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구당서》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25권이 증가한 셈이나, 본기의 경우 오히려 반감(半減)되었다. 따라서 본기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고, 이것은 후대에 자주 《신당서》의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지는 예악(禮樂)(12권)·의위(儀衛)(1권)·거복(車服)(1권)·역(曆)(6권)·천문(天文)(3권)·오행(五行)(3권)·지리(地理)(7권)·선거(選擧)(2권)·백관(百官)(4권)·병(兵)(1권)·식화(食貨)(5권)·형법(刑法)(1권)·예문(藝文)(4권)으로 구성되어, 그 종류나 분량 모두 《구당서》보다 많다. 특히 기존에 없던 의위·병·선거란 명칭의 지를 추가한 것이 주목되는데, 선거지의 경우 과거제도의 등장이란 새로운 역사상(歷史像)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기미주(羈縻州) 관련 사실을 잘 정리한 지리지, 당 후기 도서까지 망라한 예문지 등 여타 지들도 대부분 《구당서》에 비하여 충실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구당서》와 다른 《신당서》의 가장 큰 특징은 표의 존재이다. 이러한 형태의 기록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있었지만 그 이후 기전체 사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서》에 실린 재상(宰相)(3권)·방진(方鎭)(6권)·종실세계(宗室世系)(1권)·재상세계(宰相世系)(5권)의 4표는 그 형식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이 표를 통해 재상이나 방진 곧 번진(藩鎭) 등 유관 사실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손쉬워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열전은 《구당서》와 동일한 권수(卷數)이나 입전된 인물은 200명 이상 증가하였다. 그 결과 내용이 소략해진 곳도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간명한 서술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또 인물에 대한 평가를 중시하여 유사한 성격의 사람을 한 데 모은 유전(類傳)을 많이 만들었다. 특정 번진과 관련된 인물들을 정리한 열전을 새로 만든다거나, 간신(姦臣)·반신(叛臣)·역신(逆臣)을 구분해 별도의 열전을 세운 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신당서》의 열전은 《구당서》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5. 가치와 영향


송 인종 연간은 왕조의 안정과 번영 속에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대부(士大夫) 계층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시기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조직적으로 또 장기간에 걸쳐 편찬된 《신당서》는 매우 훌륭한 사서로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구당서》의 권위는 이 책이 나온 뒤 현격히 추락하였다.
《신당서》의 장점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계화된 서술이다. 복잡한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만든 표가 단적인 증거이다. 이는 기전체 사서의 원형인 《사기》·《한서》 체재(體裁)의 복원임과 동시에 후속 정사 찬수의 전범(典範) 역할도 하였다. 후대에 미친 영향이란 점에서 본다면, 지의 다양한 구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신당서》에 처음 나타난 의위·병·선거지가 대부분의 후속 정사들에서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당서》의 이러한 특징은 편찬에 참여한 걸출한 학자들에게 힘입은 바 큰데, 특히 구양수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중시한 그는 기존의 관찬(官撰) 《구오대사》에 불만을 품고 혼자서 독창적인 형식과 내용의 《신오대사》를 쓴 유능한 역사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양수가 최종 정리한 《신당서》는 일관성과 체계성이 뛰어나고 이 점에서 《구당서》와 확연히 대비된다.
그런데 개성이 강했던 구양수는 본인의 입장을 지나칠 정도로 드러내었다. 원래 변려문(騈儷文)으로 적은 글을 자신이 선호한 고문(古文)으로 바꾸거나 불교 관련 내용을 과감히 삭제해 버리는 등 당대의 자료와 사실을 변형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신당서》의 편찬과 당조의 멸망 사이에 존재하는 150년 이상의 긴 시차(時差)와도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이 기간은 ‘당송변혁기(唐宋變革期)’로 여겨질 만큼 거대한 변혁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비단 구양수 개인 탓만이 아닐 수도 있으며, 《신당서》는 송인(宋人)의 관점에 입각한 당대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책이 독자적 시각으로 정리된 좋은 사서일지라도 당대의 실상을 가감(加減) 없이 그대로 반영한 기록이라고 하기는 힘든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신당서》를 매우 중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찍이 태종(太宗) 12년(1412) 8월에 충주사고(忠州史庫)에 있던 이 책을 춘추관(春秋館)으로 가져왔고, 세종(世宗) 12년(1430) 4월의 태후(太后) 명칭과 관련된 예조(禮曹) 주장은 《신당서》를 주요 논거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세종 즉위년(1418) 11월에 허조(許稠)(1369~1439) 등이 상장(喪葬) 관련 기구의 설치를 논할 때 “《당서》 〈백관지〉”를 거론하고 있으므로, 당시 이 책이 《당서》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문헌에 나오는 《당서》는 대부분 《신당서》를 가리키는 듯한데, 이는 남송부터 청 중엽까지 중국에서의 일반적인 용법과도 부합한다.

6. 참고사항


(1) 《신당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록
‧ [당대 문헌의 채록(採錄) 방법] “〈유상도(劉祥道)(596~666)가 상주하기를〉 첫째, 현재 사인(士人)을 선발하는 것이 많고 또 함부로 합니다. 입류(入流)하는 자가 해마다 1400명이므로 많다는 것이고, 잡색(雜色)이 입류할 때 〈엄격하게〉 가려서 떨어뜨리지 않으니 함부로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료로〉 함께 일하는 이들 중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습니다. [其一曰 今取士多且濫 入流歲千四百 多也 雜色入流 未始銓汰 濫也 故共務者 善人少 惡人多]” 〈권106, 〈유상도〉〉
‧ [한유(韓愈)(768~824)에 대한 평가] “예전에 맹가(孟軻)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한 것은 공자(孔子)〈의 시대〉에서 겨우 200년 뒤였다. 한유가 도교와 불교를 배척한 것은 〈공자의 시대에서〉 천여 년이나 지났지만 그 쇠퇴함을 바로잡아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그 공로가 〈맹자와〉 같아도 힘이 배로 들었다. 따라서 〈한유가〉 순황(荀況)이나 양웅(揚雄)보다 뛰어난 것이 적지 않다. 한유가 죽은 뒤 그 말이 크게 행해져서, 배우는 이들이 그를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우러러보았다.[昔孟軻拒楊墨 去孔子才二百年 愈排二家 乃去千餘歲 撥衰反正 功與齊而力倍之 所以過況雄爲不少矣 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 〈권176, 찬왈(贊曰)〉
(2) 색인어: 신당서(新唐書), 구양수(歐陽修), 송기(宋祁), 설관수사(設館)(官)修史, 표(表), 의위지(儀衛志), 선거지(選擧志), 병지(兵志), 오대사기(五代史記)(신오대사(新五代史)), 송인종(宋仁宗), 구당서(舊唐書)
(3) 참고문헌
‧ 舊唐書 標點本(中華書局)
‧ 중국정사조선전2(국사편찬위원회, 신서원)
‧ 중국정사외국전11(김유철 등 역주, 동북아역사재단)
‧ 二十二史箚記4(趙翼, 박한제 역주, 소명출판)
‧ 二十四史全譯 新唐書(許嘉璐 주편, 漢語大詞典出版社)
‧ 舊唐書與新唐書(黃永年, 人民出版社)
‧ 歐陽修全集(中華書局)


【하원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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