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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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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연대기로 황제(黃帝)에서 위나라 양애왕(襄哀王) 재위 20년(기원전 299년)까지의 간략한 역사를 담고 있다. 급총기년(汲冢紀年)이라고도 부른다.

2. 저자: 미상



3. 서지사항

《죽서기년》은 서진(西晉) 무제(武帝) 시기인 281년(혹은 279년) 오늘날 하남성(河南省) 급현(汲縣)에서 도굴된 한 무덤에서 《국어(國語)》와 《역경(易經)》, 《목천자전(穆天子傳)》 등 다양한 죽간 문헌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묘는 전국시대 위나라 양애왕(襄哀王)(기원전 318~296년 재위)의 무덤으로 추정되지만, 이론의 소지도 있다. 《죽서기년》은 발견 당시 그 지역명을 따라 급총기년으로 명명되었다. 급총에서 출토된 문헌들을 직접 살펴본 두예(杜預)(222~284)는 《좌전후서(左傳後序)》에서 훼손이 심한 다른 문헌들과 달리 《죽서기년》은 비교적 완전했다고 전한다. 이 발견 후 약 10여 년 동안 당시 최고 학자들의 정리를 거쳐 두 가지 이상의 《죽서기년》 저본이 산출된 것으로 보인다. 즉 순욱(荀勗)(?~289)과 화교(和嶠)(?~?)의 정리본과 위항(衛恒)(?~291)과 속석(束晳)(?~300 이후)의 수정본이다.
그러나 이른바 이들 원본 《죽서기년》은 송대(宋代)까지 상당 부분 유실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저본은 명대(明代)의 장서가인 범흠(范欽)(1508-1585)의 천일각(天一閣) 소장본이다. 사부총간(四部叢刊)에 포함된 이 저본이 이른바 《금본(今本)죽서기년》이다. 문제는 《금본죽서기년》이 소실된 원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청대(淸代) 이래로 전대흔(錢大昕)(1728~1804)이나 주우증(朱右曾)(19세기), 왕국유(王國維)(1877~1927) 등은 이를 후대인의 위작으로 의심했다.
따라서 주우증은 서진 이후의 문헌들에 《죽서(급총)기년》이 인용된 부분들을 모아서 집본(輯本) 형식으로 재구성한 《급총기년존진(汲冢紀年存眞)》을 펴냈다. 왕국유가 이를 보완하여 《고본죽서기년집교(古本竹書紀年輯校)》를 편찬했는데, 이른바 《고본(古本)죽서기년》이 바로 이것이다. 왕국유는 또한 《금본죽서기년》이 위작임을 밝히기 위하여 그 원인을 제공했을 만한 자료를 제시하며 《금본죽서기년소증(疏證)》을 펴내기도 했다.

4. 내용

《금본죽서기년》은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상권은 황제(黃帝)에서 상(商)의 마지막 왕 제신(帝辛) 재위기까지 포괄한다. 그 첫 부분이 이른바 “오제기(五帝紀)”로 황제와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체로 《송서(宋書)》 〈부서지(符瑞志)〉의 내용과 일치한다. 두 번째가 우왕(禹王)에서 걸왕(桀王)까지 471년 존속했음을 명시한 “하기(夏紀)”로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와 일부 다른 부분이 있다. 세 번째는 “은기(殷紀)”로 탕왕(湯王) 이래 29명의 왕이 496년 동안 재위했다고 한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의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 《사기》 〈은본기(殷本紀)〉와 다른 내용이 나온다.
하권은 “주기(周紀)”와 “진기(晉紀)”, “위기(魏紀)”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 주 왕실의 연대에 의거하여 기술되어 있다. 서주시대를 다룬 “주기”는 기원전 841년부터 14년 동안의 공위기인 “공화(共和)”에 대해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공동 통치로 보는 《사기》 〈주본기(周本紀)〉와 달리 “공백(共伯) 화(和)”의 섭정으로 기술한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역사를 다룬 “진기”에는 주(周) 평왕(平王)의 동천 당시 진의 문후(文侯)가 평왕의 라이벌 격인 휴왕(携王)을 살해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기》 등 다른 문헌에 거의 언급되지 않은 이 사건은 최근 발견된 청화간(淸華簡) 《계년(繫年)》이라는 초나라 죽간 문헌을 통해서 입증된 바 있다. “위기”는 진에서 갈라진 삼진(三晉) 중 하나인 전국시대 위(魏)나라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금본죽서기년》이 위작이라는 가정 하에 편찬된 《고본죽서기년》은 일종의 발췌본으로 “금본”과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여러 문헌에서 인용한 그 내용 중 일부는 이른바 원본 《죽서기년》에서 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원본의 내용에 가공을 거친 것일 수 있고, 《금본죽서기년》에서 유래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편의상 이를 “고본”으로 부르고, 그 역시 자료로서 가치가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고본”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5. 가치와 영향

20세기 초반 왕국유 등의 연구로 인해 이른바 《고본죽서기년》이 《금본죽서기년》보다 더 큰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 서양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서주(西周)의 기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죽서기년》의 신빙성을 천착한 데이비드 니비슨David S. Nivison과 에드워드 쇼네시Edward L. Shaughnessy는 일부 일탈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금본죽서기년》이 대체로 원본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원본 《죽서기년》이 기원전 299년쯤 무덤에 부장되어 기원후 281년쯤 발견되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사기》를 작성할 때 그 문헌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사기》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고, 특히 최근의 고고학 성과는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 《죽서기년》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 신빙성 여부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중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태갑) 원년 신사일에 왕이 즉위하여 박에 거하며 이윤을 경사로 임명했다. 이윤이 태갑을 동으로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7년 왕(태갑)이 동에서 도망 나와 이윤을 죽였다.[元年辛巳王卽位居亳命卿士伊尹 伊尹放太甲于桐乃自立 七年王潛出自桐殺伊尹]” 〈今本竹書紀年 上〉
• “(여왕) 12년 왕이 체로 망명했다. 국인들이 왕궁을 포위하고 소목공의 아들을 붙잡아 죽였다. 13년 왕이 체에 있었고, 공백 화가 천자의 직무를 대행했다.[(厲王)十二年王亡奔彘, 國人圍王宮執召穆公之子殺之 十三年王在彘 共伯和攝行天子事]” 〈今本竹書紀年 下〉
• “(유왕) 11년, 신나라 사람들과 증나라 사람들 및 견융이 종주로 진입하여 유왕과 정 환공을 시해했다. 견융은 왕자 백복을 살해하고 포사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신후와 노후, 허남, 정자가 신에서 의구(평왕)를 옹립했다. 괵공 한이 왕자 여신을 휴에서 옹립했다....(평왕) 21년, 진 문후가 휴에서 왕자 여신을 살해했다.[(幽王)十一年申人鄫人及犬戎入宗周弒王及鄭桓公犬戎殺王子伯服執褒姒以歸 申侯魯侯許男鄭子立宜臼于申 虢公翰立王子余臣于攜...(平王)二十一年晉文侯殺王子余臣于攜]” 〈今本竹書紀年 下〉
(2) 색인어:죽서기년(竹書紀年), 급총기년(汲冢紀年),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 양애왕(襄哀王)
(3) 참고문헌
• 朱右曾, 古本竹書紀年輯校 (王觀堂先生全集)
• 王國維, 今本竹書紀年疏證 (王觀堂先生全集)
• 范祥雍, 古本竹書紀年輯校訂補 (上海人民出版社, 1962)
• 方詩銘, 王修齡, 古本竹書紀年輯證 (上海古籍出版社, 1981)
• 張玉春, 竹書紀年譯注 (黑龍江人民出版社, 2003)
• Michael Loewe ed., Early Chinese Texts: A Bibliographical Guid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 Edward L. Shaughnessy, Rewriting Early Chinese Text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6)
• David Nivison, The Riddle of the Bamboo Annals (Taipei: Airiti Press, 2009)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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