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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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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잘 함축한 사서(四書)에 포함된 중요한 경서이다.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고 전해진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는 《대학》의 내용을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면서 ‘경’은 공자의 사상을 제자인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본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는데, 주희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주석을 붙이고 이를 존숭하면서부터 단행본으로 세상에 유행하였다.

2. 저자

(1)성명:증삼(曾參)(B.C. 506~B.C. 436), 공급(孔伋)(B.C. 483?~B.C. 402). 실제 《대학(大學)》의 편저자는 미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서로 함께 들은 내용을 편찬한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고도 하지만 모두 추정한 말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송(宋)나라에서 자사가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한(漢)나라 때 학자인 가규(賈逵)도 “자사가 송나라에서 《대학》을 경(經)으로 삼고 《중용》을 위(緯)로 삼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정현(鄭玄)도 이 설을 지지하였다.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공씨(孔氏)가 남긴 책”이라고만 언급하였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는 《대학》의 내용을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면서 ‘경’은 공자의 사상을 제자인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고, ‘전’은 증자의 생각을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확실한 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사가 바로 증자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도 《대학》은 자사의 저작이라는 견해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다. 이렇듯 《대학》의 작자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데, 전통적으로는 《중용》과 《대학》의 작자에 대해 자사와 증자의 저작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대학》의 저자를 증자로 봄으로써 사서(四書)인 《논어》·《대학》·《중용》·《맹자》의 작자가 공자·증자·자사·맹자(孟子)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통이 체계화되기 때문에, 주희의 이 설은 후대에 큰 영향력을 남겼다. 그러나 청대(淸代)에 실증적·고증적 학풍이 일어나면서, 종래의 자사 저작설도 비판되어 진한(秦漢) 사이에 또는 전국시대 어느 사상가의 저작이라는 설, 자사가 지은 것이 틀림없다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유가의 학자가 지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2)자(字)·별호(別號):증삼의 자는 자여(子輿)이며, 그를 높여 증자(曾子)라 한다.
(3)출생지역:노(魯)나라 남무성(南武城).
(4)주요활동과 생애
자사의 조부는 공자(孔子)이다. 증자의 아버지는 증석(曾晳)인데 이름은 점(點), 자는 자석(子晳)이며 증자와 함께 공자에게서 배웠다. 그는 부친의 권유로 16세에 공자를 스승으로 섬겼다. 공자는 일찍이 증삼을 노둔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지만 증삼은 항상 자신의 수신(修身)에 주의해서 날마다 세 가지, 즉 남을 위해 계획을 세우면서 성실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귀면서 진실하지 않는가. 익히지 않을 것을 전수하였는가를 살피는 공부를 통하여 공자의 충서(忠怒)의 도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27세 때 공자가 서거하자 부친상과 마찬가지로 공자의 상을 치루고 공자묘를 지켰으며, 34세에 노나라의 무성읍(武城邑) 대부가 빈사(賓師)로 초빙하자 무성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54세에 제(齊)나라에서 재상으로 초빙하고, 초(楚)나라에서 영윤으로 영접하려고 했고, 진(晉)나라에서 상경으로 영접하려고 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 도공(魯悼公) 32년(BC.435)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 증삼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에게 학문을 전수했는데, 공급(孔伋)의 자는 자사(子思)이다. 또 공급은 맹자(孟子)에게 학문을 전수했는데,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증삼을 ‘종성(宗聖)’으로 받든다.

3. 서지사항

‘대학(大學)’이란 대인지학(大人之學), 즉 큰 사람이 되기 위한 학문을 줄인 말로 이때의 대인이란 덕이 높고 그릇이 큰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대학》은 자신의 내면을 닦고 나아가 사회를 바로잡는 방법을 내용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은 개인의 수양과 관련된 책이며 아울러 정치와 관련된 책이다.
《대학》은 《중용》과 함께 원래 《예기(禮記)》의 편명이다. 당대(唐代)의 공영달(孔穎達)은 “《예기》의 〈대학〉은 학문을 완성하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고 그 덕을 천하에 선양할 수 있는 데 있음을 논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 《예기》의 제42편이었던 〈대학〉을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따로 떼어서 《대학광의(大學廣義)》를 만들었다. 이후 정이는 《예기》 〈대학〉의 순서가 뒤섞였다고 보고 원문 장절(章節)의 위치를 뒤바꾸어 《대학정본(大學定本)》을 만들고, 그것이 공자의 유서(遺書)이고 학문과 덕망을 닦기 시작할 사람의 입문서라고 단정했다. 그 후 주희는 순서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빠진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서, 《대학》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설하고 정리해서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들어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구별하여 주석을 가하고,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한 〈독대학법(讀大學法)〉을 붙여놓았다. 이 과정에서 주희는 ‘전’의 다섯 번째 장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설명하는 134자를 새로 써넣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학》이 단순히 《예기》 중 한 편으로서의 의미를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경전으로 표장된 것은 송대(宋代)에 들어와서이지만 그 시작은 당(唐)나라 한유(韓愈)에게서 비롯되었다. 한유는 그의 〈원도(原道)〉에서 《대학》의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대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이어서 이고(李翺)는 그의 《복성서(復性書)》에서 《대학》의 ‘격물치지’를 설명하면서 역시 《대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주희가 새롭게 만든 책은 《대학장구(大學章句)》라고 부르며 《예기》에 들어 있던 본래의 대학은 《고본대학(古本大學)》이라고 부른다. 주희가 개정한 《대학장구》는 원명(元明) 시대에 과거시험을 위한 필독서가 되면서 일반인에게 널리 읽혀지게 되었고 다른 이들의 개정본은 유행하지 않았다. 나중에 양명학을 제창한 왕수인(王守仁)(1472~1528)이 주희의 주장을 비판하면서부터 주희의 《대학장구》, 특히 그가 보충한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은 유학자간의 논쟁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왕수인은 《고본대학(古本大學)》에 의거하여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을 지었다. 그 후 학파에 따라 《대학》의 개정작업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양명학파로서 경학자인 계본(季本)은 《사서사고(四書私考)》를 저술하였는데, 그 속에 그가 개정한 《대학》의 내용이 들어 있다.

4. 내용

《대학》은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명덕(明明德)(명덕을 밝히는 일)’·‘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지어지선(止於至善)(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이라 하는데, 강령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라는 뜻을 지닌다.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전 10장은 경의 설명인데, 전 1장은 명명덕을 해석하였고, 전 2장은 신민을 해석하였으며, 전 3장은 지어지선을 해석하였다. 전 4장은 본말(本末)을 해석하였으며, 전 5장은 주희는 격물·치지의 뜻을 해석하였는데 없어졌다고 여기고 보망장(補亡章)을 지었다. 전 6장은 성의를 해석하였고, 전 7장은 정심·수신을 해석하였으며, 전 8장은 수신·제가를 해석하였다. 전 9장은 제가·치국을 해석하였고, 전 10장은 치국·평천하를 해석하였다. 따라서 《대학》은 격물치지에서 시작하여 수신제가를 거쳐 치국평천하에서 끝나는 유학의 목적과 정무(政務)의 근본을 설명한 국가경륜(國家經綸)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유학은 자신의 내면을 닦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를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 면에서 《대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유학의 인문 정신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책이다.
우리나라에 《대학》은 《예기》 가운데 한 편의 형태로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7세기경의 신라(新羅)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예기》를 《시경(詩經)》·《서경(書經)》과 함께 습득할 것을 맹세하는 화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72년에 세운 태학(太學)을 관장한 사람이 오경박사(五經博士)였으니, 고구려에서도 일찍부터 《예기》가 교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기에도 국학 3과정과 독서삼품과의 과목으로 《예기》는 중요시된 경전이었다. 고려 유교의 학풍은 경전중심이어서 예종 때의 국학칠재와 사학(私學) 등에서도 경연의 주요과목으로 《예기》가 자주 강론되었다.
주희의 《대학장구》가 처음 반입된 것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의 일로 당시 명(明)나라에서 《대통력(大統曆)》·《육경(六經)》·《통감(通鑑)》과 함께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조선의 태조(太祖)는 송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유창(劉敞)에게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대학연의》는 제왕이 정치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내용을 《대학》의 체재에 따라 편찬한 책이다. 그 뒤 《대학연의》를 어전에서 강의하는 전통이 마련되었다.
세종 5년(1423)에는 《대학》을 포함한 사서오경(四書五經) 10부를 성균관·오부 학당에 분급(分給)하였고, 1435년 각 도의 수령에게 향교에 비치할 것을 명하였다. 개인이 자비로 갖추고자 할 때는 종이를 보내면 주자소에서 찍어주게 하였다. 15세기 말에 이르면 함경도·평안도·제주도까지 《대학》이 보급되었다. 선조 때부터 진행된 언해 사업은 1576년(선조 9) 이이(李珥)가 왕명을 받아 13년 만에 완성·간행하여 도산서원에 하사되었으며, 1605년에 재반포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관학으로 정립되고 성현의 편언척구(片言隻句)가 신성시되던 조선 중기에는 주희의 체계를 긍정한 바탕에서 나름의 해석을 모색하는 데 그쳤다.
조선에서 주희의 《대학장구》에 대한 비판적 이해는 이언적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학장구》에서 주희가 보충한 134자를 빼고 또 순서를 더욱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바꾸어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또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을 저술하였다. 이는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大學惑問)》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에서는 주희의 ‘일경십전(一經十傳)’ 체제를 ‘일경구전(一經九傳)’으로 산정(刪正)하면서 편차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준다.
윤휴는 당시 주자학의 고식적인 풍토에 반발하여 《대학고본별록(大學古本別錄)》과 《대학전편대지안설(大學全篇大旨按說)》을 지었다. 주희의 방법론적 준거였던 ‘격물’이 지적 탐구가 아니라 종교적 경건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본래 《예기》 안에 있던 《고본대학》이 아무런 착간도 없는 정본임을 주장하였다. 박세당 역시 《대학사변록(大學思辨錄)》에서 철저한 고증에 의해 《대학》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희가 가한 해석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고답적이라 비판하면서 구체적 실천의 관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정조와의 문답을 정리한 《대학강의(大學講義)》, 그리고 《고본대학》에 입각해 《대학》 본래의 정신을 탐색한 《대학공의(大學公議)》를 저술해 격물치지에 입각한 성리학적 사유의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大學의 道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히 선함에 그치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경(經) 1장〉
•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自天子 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경(經) 1장〉
• “덕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이니, 근본을 밖으로 하고 말단을 안으로 하면, 백성을 다투게 해서 겁탈하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들이 모인다. 그러므로 말이 도리에 어긋나게 나간 것은 또한 도리에 어긋나게 들어오고, 재물이 도리에 어긋나게 들어온 것은 또한 도리에 어긋나게 나간다.[德者本也 財者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전(傳) 10장〉
(2)색인어: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적자(赤子), 혈구(絜矩).
(3)참고문헌
• 大學章句(朱熹, 德巖精舍)
• 大學章句大全(胡廣 等 奉勅纂, 刊寫者未詳)
• 讀四書大全說 大學(王夫之, 河洛圖書出版社)
• 懸吐完譯 大學·中庸集注(성백효, 전통문화연구회)
• 大學中庸講說(이기동,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왕부지 대학을 논하다(왕부지 저, 왕부지사상연구회 역, 소나무)
【함현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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