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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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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사고》는 중화민국 초 북양정부(北洋政府)가 청사관(淸史館)을 설치하고 청조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총 536권으로 본기(本紀) 25권, 지(志)142권, 표(表) 53권, 열전(列傳) 316권이다. 《청사고》는 대청제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모두 담고 있으며 1616년 청 태조 누르하치가 허투알라[hetu ala, 赫圖阿拉]에서 나라를 세우고 한(汗)을 칭한 이후부터 1912년 청조 멸망까지 296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청사고》는 1914년 청사관을 설립한 이후 14-15년에 걸쳐 편수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편찬에 참가한 사람들은 명예직까지 포함해 300여명에 이른다. 주편을 맡은 조이손(趙爾巽)은 1927년에 초고가 만들어지자 《청사고》라는 이름으로 출판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는 《청사고》가 완성된 정본(定本) 즉 《청사(淸史)》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 전통 정사(正史) 체제로 편사(編寫)된 ‘청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청사고》 자체가 청조의 많은 사료들을 근거로 만들어졌으므로 그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는 간과할 수 없다.

2. 편자

(1) 성명: 조이손(趙爾巽)(1844~1927), 가소민(柯劭忞)(1848~1933), 김량(金梁)(1878~1962)
(2) 자·별호: 조이손의 자(字)는 공양(公鑲), 호(號)는 차산(次珊). 일설에는 자가 차산이고 호는 무보(無補)라고도 한다. 가소민의 자는 풍손(風蓀), 호는 요원(蓼園)이다. 김량의 호는 식후(息侯) 혹은 소숙(小肅), 만년의 호는 과포노인(瓜圃老人)이다.
(3) 출생지역: 조이손은 봉천(奉天) 철령(鐵嶺)(현재 요녕성 철령시) 출신이다. 가소민은 산동 교주(膠州) 출신이다. 김량은 항현(杭縣)(현재 절강성 항주) 출신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조이손은 한군정람기(漢軍正藍旗) 출신이다. 동치(同治) 13년(1874) 진사 급제하여 한림원 편수에 제수되었다. 안휘(安徽)·섬서(陝西) 안찰사(按察使), 감숙(甘肅)·신강(新疆)·산서(山西) 포정사(布政使)를 역임했으며 나중에 호남순무(湖南巡撫), 민부상서(民部上書), 천경장군(天京將軍), 강서총독(江西總督), 사천총독(四川總督) 등의 직위를 역임했다. 선통(宣統) 3년(1911)에 동삼성총독을 맡았으며 무창기의(武昌起義) 이후 봉천(奉天)(현재 요녕)에서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해 신해혁명을 방해했다. 민국 성립 후 봉천도독(奉天都督)을 맡았으나 곧 사직했다. 민국(民國) 3년(1914) 청사관총재(淸史館總裁)를 맡아 《청사고》의 주편을 담당했다. 원세개(袁世凱)의 칭제(稱帝)를 지지했으며 민국 14년(1925) 단기서(段祺瑞) 집정 시기에 선후회의(先後會議) 의장, 임시참의원의장을 맡았다. 민국 16년(1927)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가소민은 광서(光緖) 12년(1886)에 진사가 되어 한림원 편수(編修)· 시독(侍讀)· 시강(侍講)을 역임했으며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총감독과 청사관 관장 대리와 총찬(總纂)을 역임했다. 1927년 초대 청사관장이었던 조이손이 병사하자 2대 관장이 되었다. 가소민은 학문에 정통하여 단독으로 《신원사(新元史)》를 편찬하기도 했다.
김량은 만주정백기(滿洲正白旗) 출신이며 구왈기야[瓜爾佳]씨이다. 광서 30년(1904) 진사가 되어 경사대학당제조(京師大學堂提調), 내성경청지사(內城警廳知事), 민정부참의(民政部參議), 봉천기무처총판(奉天旗務處總辦), 봉천신민부지부(奉天新民府知府), 봉천청장국부국장(奉天淸丈局副局長), 봉천정무청청장(奉天政務廳廳長) 등을 역임했다. 민국 성립 후 청사관 교대(校對)를 맡았다. 봉천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추천으로 북양정부 농상부 차장을 맡기도 했다. 김량은 역사뿐 아니라 서화 등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국가문물에 관한 고문직을 맡았다. 1962년 12월 27일 북경에서 사망했다.
(5) 주요저작
조이손의 주요 저작은 《청사고》 이외에 《형안신편(刑案新編)》, 《조유수공략(趙留守攻略)》 등이 있다.
가소민의 주요 저작은 《신원사(新元史)》, 《춘추곡량전주(春秋穀梁傳注)》(15권), 《신원사고증(新元史考證)》, 《역사보(譯史補)》 등이 있다. 미간행된 원고는 《이아주(爾雅注)》, 《문헌통고교주(文獻通考校注)》, 《문선보저(文選補著)》, 《요원문집(蓼園文集)》등이 있다.
김량의 주요 저작은 《사조일문(四朝佚聞)》, 《청제후외전외기(淸帝后外傳外紀)》, 《흑룡강통지(黑龍江通志)》, 《봉천통지(奉天通志)》, 《과포총간서록(瓜圃叢刊敍錄)》, 《증집신해순난기(增輯辛亥殉難記)》, 《근세인물지(近世人物志)》, 《만주비당(滿洲秘檔)》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특징

왕조가 바뀌면 앞선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이 중국 사학의 전통이었으므로 원세개의 북양정부도 1914년에 청사관을 설치하고 조이손을 관장으로 삼아 청사 편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28년 여름에 《청사고》 536권을 완성했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으로 중국 전통의 정사(正史)가 아닌 ‘고(稿)’ 즉 원고 상태로 남게 되었다. 대만 국민정부에서 《청사고》를 바탕으로 《청사(淸史)》를 출판했지만 공인되지 않았다. 한편 대륙에서 《청사고》를 교감하여 활자본으로 간행했고, 대만에서도 《청사고》를 바탕으로 《청사고교주(淸史稿校注)》를 국사관(國史館)에서 간행하는 등 《청사고》는 마치 청대사의 정사로 간주되고 있다. 이에 중국 역대 왕조의 25사(史)에 《청사고》를 합해 “26사”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었다.
《청사고》의 판본은 관외본(關外本)과 관내본(關內本) 두 종류가 있다. 1928년에 초판을 1,100부 간행했는데 그 중 400부를 김량(金梁)이 동북 지역으로 가져가 마음대로 개수하여 ‘관외(關外)’에서 발행한 판본이다. 이것을 소위 관외 1차본이라 한다. 김량은 자의적으로 장훈(張勳)과 강유위전(康有爲傳)을 첨가하고 예문지(藝文志) 서(序)는 삭제했으며 교각기(校刻記)를 덧붙이는 등 여러 부분을 개수하였다. 관내 1차본이 김량에 의해 고쳐진 것을 청사관에서 발견하고 북경에 보존된 것을 엮어서 출판했는데 이를 관내본이라 한다. 그 후 일본이 만주 지역을 지배하면서 관외본을 다시 수정, 간행하였는데 이를 관외 2차본이라 한다.
현재 《청사고》는 대만 국사관에서 수정한 교점본 《청사고교주(淸史稿校注)》(1986~1991, 15책과 부록)와 중국 중화서국에서 관내본을 교점본으로 출판한 《청사고》가 있다.

4. 내용

《청사고》는 내용상으로 상당히 충실한 편이며 체제면에서도 앞 시대와 다르게 독창성을 보였다. 예컨대 〈교통지(交通志)〉, 〈방교지(邦交志)〉, 〈주인전(疇人傳)〉, 〈번부전(藩部傳)〉, 〈번속전(藩屬傳)〉 등은 새롭게 만든 것이며, 〈제신봉작표(諸臣封爵表)〉, 〈대학사표(大學士表)〉, 〈군기대신표(軍機大臣表)〉, 〈번부표(藩部表)〉 등도 새로 둔 것이다. 그러나 청의 입장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청을 옹호하는 표현이 보이고 혁명파와 태평천국을 폄하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편찬될 당시 중국은 군벌의 혼전, 국공 대립 등 정치적 변화를 예상할 수 없어 결국 총체적인 검토를 끝마칠 수 없었다.
《청사고》는 체제도 통일되지 않았고 내용도 번잡한 곳과 소략한 부분이 균일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또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되어 있는 등 문제가 많아 남경국민정부는 이 책의 간행과 유포를 금지시켰다.

5. 가치와 영향

《청사고》는 누르하치의 건국부터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붕괴될 때까지의 풍부한 사료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청대 각 조대(朝代)의 국사 752권, 실록 4,374권, 성훈(聖訓) 1,624권, 전지(典志)와 인물 전기 등 자료로 볼 때 중국 어느 시대보다도 가장 좋은 조건 속에서 편찬되었다. 이러한 사료들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므로 《청사고》에 인용된 자료는 사료적 가치 면에서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로서 “청사”가 정식 간행된 적이 없고 《청사고》 자체가 청조의 많은 사료들을 근거로 하였으므로 그 역사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개혁개방 이후 2000년 말 인민대학(人民大學) 청사연구소(淸史硏究所)의 대일(戴逸), 인민대학 교수 이문해(李文海), 북경대학 교수 왕효추(王曉秋) 등이 정부 주도로 청사를 편찬할 것을 제안했고 2002년 25명의 청대사·근대사 연구자로 구성된 국가청사편찬위원회(國家淸史編纂委員會)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른바 “청사공정(淸史工程)”이라고 불리는 청사 편수 작업은 2013년 간행을 목표로 진행되었지만 체계의 통일부터 내용상의 문제에까지 많은 문제들이 있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태조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는 성(姓)이 아이신 기오로[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 aisin gioro]이고 휘(諱)는 누르하치[努爾哈齊]이다. 그 선조는 아마도 금(金)의 후예 부락일 것이다. 시조는 부쿠리 용숀[포고리옹순(布庫里雍順), bukuri yongšon]으로 모친인 퍼쿨런[불고륜(佛庫倫), fekulen]이 붉은 열매를 전해 받고 감응해 회임했다. 조금 자라서 삼성(三姓)(ilan hala)의 난을 평정해 무리가 그를 버일러로 받들어 장백산 동쪽 오모호이[아막혜(俄漠惠), omohoi] 들판 오도리[아타리(俄朶里), odori]城에 거하고 그 부족을 만주(滿洲)라 불렀다. 만주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원(元)은 그 지역에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했고 명(明)은 처음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했다.[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姓愛新覺羅氏諱努爾哈齊其先蓋金遺部始祖布庫里雍順母曰佛庫倫相傳感朱果而孕稍長定三姓之亂眾奉為貝勒居長白山東俄漠惠之野俄朵里城號其部族曰滿洲滿洲自此始元於其地置軍民萬戶府明初置建州衛](《청사고》 권1 〈본기(本紀)〉 1 〈태조본기(太祖本紀)〉)

·세조체천륭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世祖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는 휘(諱)가 풀린[fulin, 福臨]이고, 태종(太宗)의 아홉 째 아들이다. 모친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가 임신했을 때 붉은빛이 몸을 비추어, 빙빙 맴도는 것이 용의 형상 같았다. 탄생하기 전날 저녁, 꿈에 신인(神人)이 아들을 안고 황후에게 안겨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천하를 통일할 주인입니다.” 황후가 깨어나 태종에게 말하니, 태종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기이하고 상서롭구나.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대업을 이루겠구나.” 다음날 황상(皇上)이 태어나니 붉은빛이 궁중을 비추고 향기가 여러 날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황상은 나면서 남다른 기품이 있어서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솟아올랐고 용의 형체와 봉황의 자태가 있었으며 신령스러운 지혜를 하늘에서 주었다. 숭덕(崇德) 8년(1643년) 8월 경오일(庚午日), 태종이 붕어하였는데,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호쇼이[화석(和碩), hošo i] 예친왕(禮親王) 다이샨이 제왕(諸王), 버일러, 버이서, 문무 군신들을 모아서 논의를 정하니, 황상을 받들어 대위(大位)를 잇게 하였고, 천지에 맹세하여 알리고, 호쇼이 정친왕(鄭親王) 지르갈랑, 호쇼이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 보정(輔政)하게 했다. [世祖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諱福臨太宗第九子母孝莊文皇后方娠紅光繞身盤旋如龍形誕之前夕夢神人抱子納后懷曰此統一天下之主也寤以語太宗太宗喜甚曰奇祥也生子必建大業翼日上生紅光燭宮中香氣經日不散上生有異稟頂髮聳起龍章鳳姿神智天授八年秋八月庚午太宗崩儲嗣未定和碩禮親王代善會諸王貝勒貝子文武羣臣定議奉上嗣大位誓告天地以和碩鄭親王濟爾哈朗和碩睿親王多爾袞輔政] (《청사고》 권4 〈本紀본기〉 4 〈세조본기(世祖本紀)〉 1)

· 청의 황제들이 장백에서 일어나 몽고를 손에 넣어 번(藩)으로 봉하였다. 당시 중원에서 군사를 도모하려 하였으나, 조선이 명에 복속하고 있어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이에 있으면서 황제의 군대에 번번이 항거하였다. 숭덕 2년(1637) 다시 그 도읍으로 들어가니, 국왕이 스스로를 결박하고 볼모를 바쳐 영원히 신복이 되었다. 이로부터 동쪽을 바라보아도 근심이 없어져서 중원에만 전력하였다. 순치(順治)가 명을 이어받아 위세를 사방에 떨쳤다. 순치 3년(1646)에 류구(琉球)가 소문을 듣고 먼저 봉해지기를 청하였다. 9년에 섬라(暹羅), 17년에 안남(安南)이 계속하여 귀부하였고 옹정(雍正) 4년에 소록(蘇祿), 7년에 남장(南掌)이 연이어 입공(入貢)했다. 대저 이때 청의 무의(武義)가 대단해짐에 따라 육지와 해상이 두려워하고 먼 곳의 나라들이 공손히 무릎을 꿇은 것은 청을 연모하여 귀화한 것이지 힘으로 정벌한 것이 아니다. [有清龍興長白撫有蒙古列為籓封當時用兵中原而朝鮮服屬有明近在肘腋屢抗王師崇德二年再入其都國王面縛納質永為臣僕自此東顧無憂專力中夏順治紹明威震殊方三年琉球聞聲首先請封九年暹羅十七年安南相繼歸附雍正四年蘇祿七年南掌先後入貢蓋其時武義璜璜陸懾水慄 殊國絕域交臂詘膝慕義歸化非以力征也] (《청사고》 권526 〈열전(列傳)〉 313 〈속국(屬國)〉1)

(2) 색인어
청사고(淸史稿), 조이손(趙爾巽), 가소민(柯劭忞), 김량(金梁), 방교지(邦交志), 속국전(屬國傳)

(3) 참고문헌
· 중국사학사(신승하, 고려대학교 출판부)
· ‘외국’과 ‘속국’의 사이(김선민, 《사림》 41, 2012)
· 《淸史稿》 〈屬國傳〉 조선 관계 기사 분석(정혜중, 《중국사연구》 제51집, 2007)
· 《청사고》 편찬사업과 대외인식(홍성화, 《역사와 세계》 54, 2018)
· 《清史稿》的纂修及其缺陷(戴逸,《清史研究》, 2002年2月 第1期)
· 清朝修史与《清史稿》编纂研究(秦国经·高换婷, 《清史研究》, 2002年8月 第3期)
· 清史稿纂修始末研究(邹爱莲·韩永福·卢经, 《清史研究》 2007年2月 第1期)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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