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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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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이하 《전서》)는 《양명전서(陽明全書)》, 《왕양명전집(王陽明全集)》이라고도 하는데, 명대 사상가 왕수인(王守仁)의 어록 등 저술을 모은 것이다. 《전서》에는 〈전습록(傳習錄)〉, 〈대학문(大學問)〉, 〈수도설(修道說)〉, 〈대학고본서(大學古本序)〉, 〈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 〈계산서원존경각기(稽山書院尊經閣記)〉, 〈오경억설(五經臆說)〉, 〈남감향약(南贛鄕約)〉 등 유명한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왕수인의 핵심 사상인 ‘심즉리설(心卽理說)’,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만물일체지인설(萬物一體之仁說)’, ‘사상마련설(事上磨練說)’, ‘치양지설(致良知說), ‘삼교합일설(三敎合一說)’, ‘육경개사설(六經皆史說)’, ‘발본색원설(拔本塞源說)’, ‘사민론(四民論)’, ‘사구교(四句敎)’ 등이 드러나 있다.
왕수인은 명대 주류 사상인 주자학의 ‘이본체론(理本體論)’과 ‘심리위이(心理爲二)’, ‘선지후행(先知後行)’ 등을 비판・부정하고, 최고의 본체는 ‘마음(心)’이라고 한 심본체론(心本體論)과 심물일체론(心物一體論)의 입장에서 이론을 구축하였다. 왕수인은 도교, 불교와 유교 등을 섭렵하여, 주자학의 틀을 깨트리고 맹자, 육상산 등의 사상 노선을 계승하여 양명학파를 형성, 새로운 학문세계를 열었다. 《전서》에 나타난 양명사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사회와 학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저자

(1) 성명: 왕수인(王守仁)(1472-1528), 초명은 운(雲)이다.
(2) 자(字)·별호(別號):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3) 출생지역: 절강성(浙江省) 여요(余姚)(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여요시(余姚市))
(4) 주요 활동과 생애
왕수인은 중국 명나라의 군사가, 정치가, 서예가, 사상가, 교육가이며 양명심학의 창시자이다. 왕수인의 선대는 진(晉)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람(覽)으로, 본시 낭야(琅琊) 사람이었으나 증손 왕희지(王羲之) 때에 산음(山陰)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23세조 적공랑(迪功郞) 수(壽)가 달계(達溪)에서 여요(余姚)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화(華)이고, 자는 덕휘(德輝)이며 별호는 실암(實庵)이다. 남경이부상서(南京吏部尙書)로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졌다.
1472년 9월 정해(丁亥)에 태어났다. 다섯 살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11세부터 시를 지었고 12세가 되던 해에 서당에 나아갔는데 “공부하는 것은 성현을 배우는 일입니다.”라 하고 성현이 되는 데 뜻을 두었다. 왕수인은 15~16세 때 북경의 거용삼관(居庸三關)을 돌아보았다. 18세 때, 남창(南昌)에서 소흥(紹興)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신(廣信)에 들러 오여필(吳與弼)의 제자 누량(婁諒)을 만나 성학을 탐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1499년 28세 때 진사에 합격하였다. 회시(會試)에서 사이갑진사(賜二甲進士)로 제7인에 들어 관정공부(觀政工部)의 일에 대해 소(疏)를 써서 개진하였고 위녕백(魏寧伯) 왕월(王越)의 분묘 축조 공사를 감독하고 〈변무팔사(邊務八事)〉를 올렸다.
1500년 29세로 형부(刑部) 운남청리사주사(雲南淸吏司主事)에 임명되었다. 1502년 5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회계산(會稽山)의 양명동(陽明洞)에 거처하며 도인술(導引術) 수련을 하였다. 그 후에 그는 “이것은 정신을 가지고 노는 것일 뿐, 도가 아니다.”라고 하여 물리쳤다. 세상을 멀리 떠날 것을 생각하였으나, 오직 조모와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포기했다. 1505년 왕수인의 문인이 나오기 시작하고, 담약수(湛若水)와 만나서 벗으로서 교류했다. 15세부터 34세까지 “오닉(五溺)” 즉 임협(任俠), 기사(騎射), 사장(辭章), 신선(神仙), 불교(佛敎)에 탐닉했다.
1506년 권세를 누리고 있던 환관 유근(劉瑾)에 대한 탄핵운동에 참여했다가 정장(廷杖) 40대의 형을 당하고서 귀주(貴州) 수문현(修文縣) 용장역(龍場驛)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1508년 왕수인은 어느 날 꿈속에서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자족하다. 지난날 이치를 여러 사물에서 구한 것은 착오였다.[聖人之道吾性自足 向之求理於事物者誤也]”고 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본지를 크게 깨달았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이치를 찾아야 한다는 심즉리(心卽理)의 자각이다. 이에 암기하던 오경(五經)의 말과 맞추어 보니 맞지 않음이 없어 이로 인해 〈오경억설(五經臆說)〉을 지었다. 1509년 왕수인은 귀양서원(貴陽書院)에서 강학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제창했다. 1516년 찰원좌첨도어사(察院左僉都御史)가 되었고 1517년 강서(江西)의 지방관이 되어 십가패법(十家牌法) 등을 실행했다. 그리고 이 동안에 중국 각지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반란과 영왕(寧王)의 반란도 평정했다. 1521년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에 임명되었고,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졌다. 이때 제자들에게 ‘치양지(致良知)’를 천명했다. 1522년부터 5년 동안 고향에 머물면서 계산서원(稽山書院)에서 강학했다. 1527년 전덕홍(錢德洪)과 왕용계(王龍溪)의 문답에 대해 소흥(紹興)의 천천교(天泉橋)에서 ‘사유설(四有說)’과 ‘사무설(四無說)’을 제시했다. 1527년 도찰좌도어사(都察左都御史),양광총독(兩廣總督) 겸 순무(巡撫)로 광서성(廣西省)의 사은(思恩) 전주(田州)의 반란을 평정하고 토벌에서 돌아오던 길에 폐병이 재발하여, 1528년 강서(江西)의 남안(南安)에서 졸했다.
(5) 주요 저작
왕수인의 저작은 설, 기, 서, 수필, 시, 곡, 문집 등이 있다. 설은 〈오경억설(五經臆說)〉, 〈계산서원존경각기(稽山書院尊經閣記)〉, 〈친민당기(親民堂記)〉, 〈중수산음현학기(重修山陰縣學記)〉, 〈완역와기(玩易窩記)〉, 〈하루헌기(何陋軒記)〉, 〈상사기(象祠記)〉, 〈빈양당기(賓陽堂記)〉 등이 있고, 시문은, 〈교조시용장제생(敎條示龍場諸生)〉, 〈예려문(瘞旅文)〉, 〈입춘(立春)〉 등이 있다. 철학사상이 담긴 작품에는 〈전습록〉, 〈대학문(大學問)〉, 〈답고동교서(答顧東橋書)〉 등이 있고, 문집은 《왕문성공전서》가 있다.

3. 서지사항

원래 《왕문성공전서》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단행본으로 되어 있다. 먼저 서애(徐愛) 등이 《전습록》을 편집하고, 전덕홍(錢德洪) 등이 《양명문고(陽明文稿)》, 《양명선생문록(陽明先生文錄)》, 《문록속편(文錄續篇)》, 《연보(年譜)》 등을 수집하여 편집했다. 1572년 사정걸(謝廷傑)이 처음으로 한 권으로 묶어서 간행하였으며, 《주자전서(朱子全書)》의 체제를 모방하여 《왕문성공전서》라고 했다. 이 38권으로 된 융경본(隆慶本)은 20여 종이며, 단행본은 수십 종이다. 통행본은 1572년 융경본(隆慶本), 건륭(乾隆) ‘사고전서(四庫全書)’본, 1919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사부총간(四部叢刊)’본, 1934년 상무인서관의 ‘국학기본총서(國學基本叢書)’본, 1936년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사부비요(四部備要)’본, 1992년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의 신교점본(新校點本), 1997년 북경연산출판사(北京燕山出版社)의 교점본(校點本), 2010년 절강고적출판사(浙江古籍出版社)의 ‘절강본(浙江本)’ 등이 있다.
《사부총간》에는 융경본(隆慶本)을 수록하였고,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는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로 되어 있다. 청각본(淸刻本), 상해중화도서관 석인본(上海中華圖書館石印本)(1913)과 《사부비요(四部備要)》 조판 인쇄본에는 《양명전집(陽明全集)》으로 되어 있다. 지금 학계에서 통행본이라고 한 것은 바로 1992년에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출판한 《왕양명전집》이다. 1997년 연산본(燕山本)에는 일본에서 발견된 왕수인 일문(逸文)을 증보하였고, 절강본(浙江本)도 일본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내용(〈유언록(遺言錄)〉 등)을 증보하였으며, 이 중에는 대량의 시문이 포함되어 있다. 융경본 《전서》도 전덕홍이 편정한 왕수인의 〈문록〉(《왕문성공전서》 고소본(姑蘇本)이라도 함)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전서》의 구성은 첫째, 〈어록〉(〈전습록〉)으로 왕수인이 살아 있을 때 제자 서애가 편집한 것이며, 다음은 〈문록(文錄)〉 5권(권4~권8), 〈별록(別錄)〉 10권(권9~권18), 〈외집(外集)〉 7권(권19~권25), 〈속편(續編)〉 6권(권26~권31), 모두 28권으로 양명이 죽은 후에 제자 전덕홍이 편집한 것이다. 마지막 7권(권32~권38)은 〈부록(附錄)〉인데, 〈연보(年譜)〉 5권, 〈세덕기(世德紀)〉 2권으로 전덕홍과 왕기가 붙인 것이다. 〈전습록〉은 책의 핵심 부분이며, 왕수인의 대표작이다.

4. 내용

《전서》는 왕수인의 어록과 사상을 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습록〉는 왕수인의 교육과 관련된 어록과 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명학의 핵심을 모은 것이다.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 〈전습록(傳習錄)〉, 〈대학문(大學問)〉, 〈남감향약(南贛鄕約)〉, 〈오경억설(五經臆說)〉, 〈계산서원존경각기(稽山書院尊經閣記)〉, 〈훈몽대의시교독유백송등(訓蒙大意示敎讀劉伯頌等)〉 등은 양명학의 주요 사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이다.
주자학이 박람다식(博覽多識)의 번쇄함에 기울고 있을 때 왕수인은 육상산의 등의 사상을 융합하여 새로운 철학을 창시했다. 주자의 이본체론(理本體論)을 부정하고 최고의 본체는 마음(心)이라고 주장했으며, 심본체론(心本體論)과 심물일체론(心物一體論)의 차원에서 철학을 개진하였다. 왕수인은 제자들과 ‘마음이 곧 리(理)이다’, ‘격물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의 구별이 없다’, ‘하나로써 전체를 꿰뚫는다.’라는 내용을 토론하였다. 아울러 “마음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어 모든 사태가 나오니, 마음을 떠나 리(理)가 없고, 마음 밖에 일[事]이 없다[虛靈不昧 衆理具而萬事出 心外無理 心外無事]”는 주장을 했다.
왕수인이 제자 고동교(顧東橋)와 지행합일에 대해 토론한 글(〈답고동교서(答顧東橋書)〉)의 끝에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이 개진되었는데, “지를 참되고 충실하게 하는 곳은 바로 행이다”라고 주장하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발본색원’이라는 용어를 ‘올바른 정치와 교육을 해치는 사욕과 욕망과 같은 폐해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왕수인은 〈전습록〉에서 제자들에게 “병에 따라 처방을 내린다.”라는 방법으로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도록 하고 양지를 체인하고 사상마련에 힘쓰도록 하며 핵심사상인 양지와 치양지론이 잘 제시되었다. “백성과 친하다”는 ‘친민(親民)’도 명덕(明德)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명덕은 우리 마음의 덕이며, 인(仁)이라 보았다. 인은 천지만물을 하나로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사물이라도 그 자리를 잃게 되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인을 다하지 못한 것일 따름이라고 하여 ‘만물일체의 인[萬物一體之仁]’을 천명한다. 왕수인 사상을 잘 정리한 사구교(四句敎), 즉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다.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념의 움직임이다.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떨치는 것이 격물이다.[无善无恶心之体 有善有恶意之动 知善知恶是良知 为善去恶是格物]”를 토론한 천천교문답(天泉橋問答)도 들어있다.
〈대학문〉은 1527년 왕수인이 반란을 토벌하러 가기 전에 제자에게 《대학》에 대한 견해를 구술한 것이다. 여기에서 ‘격물’의 의미로 ‘리(理)’를 추구한다는 주자학적인 해석을,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실천적 의미로 바꾸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 ‘치양지(致良知)’ 등 주요 사상을 제시하였다.
〈교약(敎約)〉은 학교에서 행할 수업 규칙, 지도 요령 등, 일과 규정을 합친 것으로 구체적인 교육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며, 〈훈몽대의시교독유백송등(訓蒙大意示敎讀劉伯頌等)〉은 ‘아동의 성정’에 따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가(詩歌)’, ‘습례(習禮)’, ‘독서’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인도한다는 교육 방침을 제시한 것이다.
독서에 대한 태도는 〈오경억설(五經臆說)〉에 가장 잘 드러난다. 이것은 오경(五經)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라, 왕수인 자신의 견해와 사상을 오경을 매개로 표출한 것으로, 왕수인이 직접 쓴 유일한 저작이다. 다만 다 태워버려서 13여 조목만 남아 있다.
〈계산서원존경각기〉는 왕수인의 심 주체론과 성현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서와의 관련성이 거론된 글이다. 왕수인은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교육도 중시했는데, 이것은 〈남감향약(南贛鄕約)〉에 잘 드러나 있다.
《전서》에는 왕수인의 시부(詩賦)도 많이 수록되었다. 소부(騷賦), 귀월시(歸越詩), 산동시(山東詩), 경사시(京師詩), 옥중시(獄中詩), 부적시(赴謫詩), 거이시(居夷詩), 노릉시(盧陵詩), 경사시(京師詩), 귀월시(歸越詩), 저주시(滁州詩), 남도시(南都詩), 감주시(贛州詩), 강서시(江西詩), 거월시(居越詩), 양광시(兩廣詩)로 나눌 수 있는데 총 600여수이다. ‘거이시(居夷詩)’는 101수가 있는데 왕수인이 귀주 용장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거이시는 대부분 고향을 그리워 하여 빨리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담은 것인데, 그의 철학사상의 변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5. 가치와 영향

왕수인은 주자의 ‘격물치지’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심학을 이루고 양명학파를 세웠으며 명나라 말기 사회와 학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수인 사후 양명학파는 우파(右派), 좌파(左派), 절충파(折衷派)로 다양하게 갈라진다. 그의 ‘심즉리’, ‘치양지론’은 인간성을 긍정하여 선불교와 상통하는 점도 있었다. 이는 삼교합일 사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탁오(李卓吾), 유종주(劉宗周), 황종희(黃宗羲) 및 동림학파(東林學派) 등은 모두 양명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이탁오는 ‘양지설’을 계승하여 ‘진심’과 ‘동심’을 강조하는 사상을 형성했다. 왕세정(王世貞)도 왕수인의 글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변법유신을 주장한 강유위(康有爲),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 등도 모두 양명학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했다.
양명사상은 조선, 일본, 동남아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중기에 조선에 수입된 양명학은 선불교와 흡사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하지만 정제두(鄭齊斗)가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하였다. 이광사(李匡師), 정후일(鄭厚一), 신작(申綽) 등이 주요 인물이다. 구한말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한 박은식(朴殷植)이 《왕양명선생실기(王陽明先生實記)》를, 정인보(鄭寅普)가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지었다.
일본 학계는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일본양명학을 형성했다. 나카에 토쥬(中江藤樹)는 양명학을 개성 있는 양명학의 체계로 수립하였고, 이후 쿠마자와 반잔(熊澤蕃山), 미와 싯사이(三輪執齋), 사토 잇사이(左藤一齋), 오시오 츄사이(大塩中齋) 등이 발전시켜갔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산속의 도적을 물리치기는 쉬우나, 마음속의 도적을 물리치기는 어렵다.[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여양사덕설상겸서(與楊仕德薛尙謙書)〉
• “마음 밖에 이치가 없으며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無心外之理 無心外之物]” 〈전습록(傳習錄)〉
•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뜻(意)의 움직임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이다.[無善無惡心之體 有善有惡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전습록(傳習錄)〉
• “천지가 비록 크지만 단지 일념으로 선을 향하고 마음에 양지를 갖추면, 비록 평범하고 속된 자라도 모두 성현이 될 수 있다.[天地雖大 但有一念向善 心存良知 雖凡夫俗子 皆可爲聖賢]” 〈전습록(傳習錄)〉
(2) 색인어:왕수인(王守仁), 양명학(陽明學), 융경본(隆慶本), 전습록(傳習錄), 심학(心學),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
(3) 참고문헌
• 王陽明全集(王陽明, 浙江古籍出版社)
• 王文成公全集(王守仁, 臺灣商務印書館)
• 心體與性體(牟宗三, 上海古籍出版社)
• 陽明學の位相(荒木見悟, 硏文出版社)
• 有無之境-王陽明哲學的精神(陳來, 人民出版社)
•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최재목, 이우진 옮김, 정병규에디션)
• 내 마음이 등불이다: 왕양명의 삶과 사상(최재목, 이학사)
• 일본양명학(요시다 코헤이 지음, 정지욱 옮김, 청계)

【최재목】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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