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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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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거정(薛居正)은 후당(後唐)에서 진사에 합격한 후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송(宋)에서 관직을 역임하고, 평소 몸가짐이 바르고 너그러운 성격의 정치가이자 사학가이다. 본서는 모두 150권인 기전체사서로 단대사 형식을 취한 정사(正史) 가운데 하나이다. 974년에 완성된 이 책은 오대(五代)의 실록(實錄)과 범질(范質)의 《오대통록(五代通錄)》을 참고하여 비교적 빠른 시간에 완성하였다. 금(金)나라 장종(章宗) 태화(泰和) 7년(1207)에 새로 반포된 학령(學令)에서 배제된 후 점점 잊히다가 청(淸) 건륭(乾隆) 연간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때 산일되었던 자료를 집록하여 원본의 7, 80%로 복원하였다.

2. 저자

(1) 성명:설거정(薛居正)(912~981)
(2) 자(字)‧별호(別號):자는 자평(子平), 시호(諡號)는 문혜(文惠)이다.
(3) 출생 지역:허난성(河南省) 카이펑시(開封市)
(4) 주요 활동과 생애
설거정은 후당(後唐) 말제(末帝) 청태(淸泰) 2년(935)에 진사에 합격한 후 후진(後晉)에서 염철순관(鹽鐵巡官), 탁지추관(度支推官), 우습유(右拾遺), 개봉부판관(開封府判官) 등을 역임하였으며, 후주(後周)에서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도관랑중(都官郞中),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형부시랑(刑部侍郎) 등을 역임하였으며, 송(宋)에서 호부시랑(戶部侍郞), 병부시랑(兵部侍郎), 참지정사(參知政事), 감수국사(監修國史),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좌복야(左僕射),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981)에 복용하던 단사(丹沙)에 중독되어 사망하였으며, 태위(太尉),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진종(眞宗) 함평(咸平) 2년(999) 소훈각(昭勳閣)에 모신 24명 공신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5) 주요 저작:설거정의 저작에는 사후에 그의 아들이 원고를 정리하여 30권으로 만든 《문혜집(文惠集)》과 《구오대사(舊五代史)》가 있다.

3. 서지사항

《구오대사(舊五代史)》는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 61권, 지12권, 열전77권 모두 1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책 이름은 《양당진한주서(梁唐晉漢周書)》 또는 《오대사(五代史)》이며, 설거정이 감수했으므로 설사(薛史)라고도 부른다. 구양수(歐陽修)의 《오대사기(五代史記)》가 출간된 이후 시기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후세 사가들이 《구오대사(舊五代史)》라고 부른다.
송 태조(宋太祖) 개보(開寶) 6년(973) 설거정(薛巨正)이 감수(監修)가 되고, 노다손(盧多遜), 호몽(扈蒙), 장담(張澹), 이방(李昉), 유겸(劉兼), 이목(李穆), 이구령(李九齡) 등 7인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구오대사》가 편찬된 이유는 당말(唐末) 이래 전란이 지속되어 강상윤리(綱常倫理)가 파괴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치란성쇠의 경험을 찾고자 함이었다.
《구오대사》는 금 장종(金章宗) 태화(泰和) 7년(1207) 새로 정한 학령(學令)에서 구양수의 《오대사기》만을 사용하여 가르치도록 한 이후 산실되어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청(淸) 건륭제(乾隆帝)가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영용(永瑢), 소진함(邵晉涵) 등은 《영락대전(永樂大全)》에서 집록하고, 《책부원구(冊府元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 등에서 수록된 오대사(五代史) 관련 내용을 보충하여 원본의 7, 80% 정도 복원하였다. 또한 송대의 소설, 수필, 문집, 오대의 비갈(碑碣) 등의 전적에서 관련 사료를 집록하여 고이(考異)를 만들어 부기하였다. 현재 《구오대사》의 저본은 건륭 40년(1775) 헌정한 것으로 이것은 고본(庫本)이라 불리며, 원본의 집록 출처와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한 내용은 관련 정문(正文) 아래에 부기하였다. 하지만 복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서 빠진 부분도 있다.
《구오대사》의 판본에는 건륭제에게 헌정한 사고전서본(四庫全書庫本), 무영전(武英殿)에서 출간한 전본(殿本) 등이 있다. 전본은 역사적 사실을 보충한 주문(注文)을 정문(正文) 아래에 부기하고, 「고증(考證)」을 만들어 권말에 부기하였다. 문자와 내용에 다소 변화가 있으며, 집문(輯文)의 출처도 삭제하였다. 현존하는 《구오대사》의 판본인 간본과 석인본은 대부분 전본에 근거하여 출판하였다.
이외 건륭 연간 공홍곡(孔葒谷)의 교초본(校抄本)(간칭 孔本), 팽원서(彭元瑞)의 교초본(간칭 팽본(彭本)), 포경루(抱經樓) 노씨(盧氏)의 초본(抄本)(간칭 노본(盧本))은 모두 집문의 출처를 보존하였다. 이 가운데 공본은 비교적 일찍부터 집록한 내용을 초록한 것으로 청나라 황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곳이 많고, 이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삭제된 수십 조의 주문도 남아 있다. 1921년 남창(南昌) 사람 웅씨(熊氏)가 영인본을 출판했는데, 이를 영고본(影庫本)이라 한다. 1925년 가업당(嘉業堂)에서 간행한 유본(劉本)은 노본을 저본으로 하고, 전본을 근거로 틀린 글자를 바로잡고 빠진 글자를 보충하였다. 상무인서관에서 간행한 백납본(百衲本)은 유본을 근거로 하여 영인한 것이다. 현재 많이 이용되고 있는 중화서국(中華書局)의 표점교감본(標點校勘本)은 웅씨(熊氏)의 영고본(影庫本)을 저본으로 하여 전본, 유본 및 기타 초본을 참고하여 교감하였다.
《구오대사》는 《한서(漢書)》 이후 정사 편찬의 기본 방식이었던 단대사(斷代史) 형식을 취하였다. 〈양서(梁書)〉(24권), 〈당서(唐書)〉(50권), 〈진서(晉書)〉(24권), 〈한서(漢書)〉(11권), 〈주서(周書)〉(22권)로 구분하였으며, 각 단대사는 본기(本紀),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다. 다음으로 십국(十國)과 관련된 내용이 〈세습열전(世襲列傳)〉(2권), 〈참위열전(僭僞列傳)〉(3권)으로 구분되었다. 그 다음에는 주변 나라와 관련된 〈외국열전(外國列傳)〉(2권)이 있다. 정사에서 외국전이 편찬된 것은 《구오대사》가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전장제도와 관련된 지(志)(12권)가 있다.

4. 내용

《구오대사》는 기존의 정사 편찬 방식을 연용하여 907년 朱全忠이 당을 멸하고 후량을 건국한 이후 960년 후주가 멸망할 때까지 54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본기와 열전은 단대로 구분하였다. 본기에는 후량의 태조(太祖)‧말제(末帝), 후당의 장종(莊宗)‧명종(明宗)‧민제(閔帝)‧말제(末帝), 후진의 고조(高祖)‧소제(少帝), 후진의 고조‧은제(隱帝), 후주의 태조‧세종(世宗)‧공제(恭帝) 등 모두 13명의 황제를 다루고 있다. 열전은 후비전(后妃傳), 종실전, 열전으로 구분하였다. 후량의 후비 3명, 종실 13명, 열전 79명, 후당의 후비 11명, 종실 20명, 열전 145명, 후진의 후비 4명, 종실 12명, 열전 123명, 후한의 후비 1명, 종실 4명, 열전 32명, 후주의 후비 6명, 종실 6명, 열전 79명, 세습열전 22명, 참위열전 20명 등을 다루고 있다.
열전 다음에는 십국과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십국과 관련해서는 나라를 세우지 않고 대대로 지위를 계승한 이들은 〈세습열전〉에 수록하였으며,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한 이들은 〈참위열전〉에 수록하였다. 다음에는 주변 나라인 거란(契丹), 토번(吐蕃), 회골(回鶻), 고려(高麗), 발해말갈(渤海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 신라(新羅), 당항(党項), 곤명부락(昆明部落), 우전(于闐), 점성(占城), 장가만(䍧牱蠻) 등을 수록한 〈외국열전(外國列傳)〉(2권)이 있다. 그 다음에는 지(志)를 붙였는데, 〈천문지(天文志)〉, 〈역지(曆志)〉, 〈오행지(五行志)〉, 〈예지(禮志)〉, 〈악지(樂志)〉, 〈식화지(食貨志)〉, 〈형법지(刑法志)〉, 〈선거지(選擧志)〉, 〈직관지(職官志)〉, 〈군현지(郡縣志)〉로 분류하였다. 또한 역대 황제나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사신왈(史臣曰)’이라는 형식으로 논찬을 부기하였다.
《구오대사》는 각조대의 실록 자료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본기와 열전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구비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다수의 단점도 보인다. 각 단대사에 수록된 인물은 주요 활동 시대에 편입하지 않고 졸한 시기의 왕조에 편입되었으므로 주로 후량(後梁)에서 활약했던 장전의(張全義), 주우겸(朱友謙)이 당서(唐書)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후량의 현신이지만 마치 후당의 주요 신하인 것으로 착각할 여지가 있다. 또한 동일한 인물에 대한 서술이나 평가가 각조대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 양군(梁軍)은 〈양서〉에서 왕사(王師)로 서술되어 있지만 〈당서〉에는 양인(梁人)‧변구(汴寇)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천명(天命)과 같은 개념에 대한 서술도 다른 경우가 있다. 〈진서‧안중영(安重榮傳)〉의 논찬에서 제왕의 존엄은 반드시 천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내용을 수록하고, 〈한서‧사홍조(史弘肇)〉에서 사홍조가 한의 멸망이 어찌 천명에 달려 있겠는가라는 내용을 수록하였다. 천명에 대한 둘의 이해는 상호 모순적이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구오대사》는 《오대십국실록주기(五代十國實錄注記)》와 범질(范質)의 《오대통록(五代通錄)》 등 오대 시기 관수실록과 국사의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제왕의 즉위에서 민간의 기이한 이야기까지 오대 시기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대흔(錢大昕), 왕명성(王鳴盛) 등은 《구오대사》는 단대사로 풍부한 사료를 잘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5. 가치와 영향

《구오대사》는 오대의 정사로 각조대의 실록 자료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본기와 열전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구비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오대와 관련된 원시 사료를 잘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송대 사람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할 때나 송원 시기 사학자인 호삼성(胡三省)이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鑑音注)》를 저술할 때에도 구양수의 《신오대사》를 채택하지 않고 《구오대사》를 이용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7년 임신(1512) 10월 21일(신유) 기사에 언급된 ‘풍도(馮道)’는 《구오대사》에 〈풍도열전〉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일성록(日省錄)》 정조 5년 신축 윤5월 29일(신미)일 기사에 ‘白馬의 禍’라는 내용은 《구오대사》 〈양서〉 권18 〈이진(李振)열전〉에 나오는 내용이며, 《자치통감》에도 수록된 내용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그러나 그것을 얻는데 몹시 고생했는데, 그것을 잃는데 어찌 그리도 빠른가.[然得之孔勞 失之何速]” 〈권34 당서(唐書)〉
‧ “때맞추어 오는 추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게다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不唯時寒 且不可失信於小民]” 〈권43 당서〉
‧ “풍도의 덕행은 옛사람의 풍격이 풍성하며, 그의 기개와 도량은 대신(大臣)의 덕성을 깊이 얻었다. 그러나 네 왕조(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섬기고, 여섯 명의 황제의 재상을 역임했으니 어찌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道之履行 鬱有古人之風 道之宇量 深得大臣之體 然而事四朝 相六帝 可得爲忠乎] 〈권126, 주서(周書)〉
(2) 색인어:설거정(薛居正), 구오대사(舊五代史),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 문혜집(文惠集), 오대통록(五代通錄), 자치통감(資治通鑑), 풍도(馮道)
(3) 참고문헌
‧ 舊五代史(中華書局)
‧ 舊五代史‧新五代史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 舊五代史新輯會證(陳尙君 復旦大學)
‧ 新舊五代史編纂異同之批敎(姜海軍 史學史硏究)
‧ 舊五代史諸志標準本的論證(陳智超, 鄭慶寰 江西社會科學)
‧ 舊五代史硏究(孫先文 安徽大學博士論文)

【김종섭】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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