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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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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당서》는 오대(五代)의 후진(後晉) 때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이다. 중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전의 왕조사를 정리해 왔는데, 그중 기전체로 쓰인 공신력 있는 서적을 보통 정사(正史)라고 불렀다. 《구당서》는 바로 이 정사의 하나로서 총 2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당서(唐書)’였다. 그런데 송대(宋代)에 다시 ‘당서’가 만들어진 뒤 편찬 시기에 따라 그 원명 앞에 ‘구(舊)’와 ‘신(新)’을 붙여 양자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한 왕조의 정사는 하나뿐이지만, 당나라의 경우 《구당서》와 《신당서》가 함께 정사로 인정된다. 이는 두 책 모두 당대의 역사 이해에 불가결(不可缺)하기 때문이며, 각 서적의 이러한 특징을 알고 서로 비교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2. 저자

(1) 성명:유후(劉昫)(887~946), 조영(趙瑩)(885~951) 등
《구당서》는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 “유후(劉昫)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편찬하였다.[劉昫等奉敕撰]”고 하였다. 이는 《구당서》가 이른바 ‘설관수사(設館)(官)修史’ 곧 전문적인 관청 혹은 관료를 두어 사서를 만든 제도의 산물이며 그 중심인물이 유후였음을 뜻한다. 그런데 유후는 단지 후진 출제(出帝) 개운(開運) 2년(945) 이 책의 완성 당시 재상이라 ‘감수국사(監修國史)’의 직함만 가졌을 뿐 실질적인 기여는 별로 없었다.
기실 《구당서》의 편찬은 일찍이 천복(天福) 6년(941)에 후진 고조(高祖)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가위(賈緯)(?~952)⋅장소원(張昭遠)(?~?) 등 많은 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이때 재상이던 조영(趙瑩)이었다. 후량(後梁) 때 진사과에 급제한 그는 이 일을 주관할 만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구당서》의 수찬(修撰) 방침과 방법을 결정하는 등 저술 작업을 실제로 기획하였던 것이다. 《오대회요(五代會要)》가 이 책의 편찬에 관한 설명 대부분을 그에게 할애한(권18, 〈전대사(前代史)〉)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구당서》의 저자들 가운데 유후, 조영 두 사람만 설명하겠다.
(2) 자(字):유후의 자는 요원(耀遠), 조영의 자는 현휘(玄輝)
(3) 출생지역:유후는 탁주(涿州) 귀의(歸義)(현 중국 하북성(河北省) 보정시(保定市) 용성현(容城縣)), 조영은 화음(華陰)(현 중국 섬서성(陝西省) 화음시(華陰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유후는 당⋅후량 시기에 지방의 미관(微官)으로서 뚜렷한 행적이 없다. 하지만 후당(後唐)이 서자 중앙으로 진출하여 재상이 되고 감수국사의 직책까지 맡았다. 후진에서도 여전히 득세하여 재상이 되었으며, 거란(契丹)이 중원을 점령했을 때도 그 직위를 유지할 만큼 시세에 잘 적응하였다. 유후는 왕조 교체와 무관하게 벼슬하고 영달하던 오대 시기 관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조영은 후량의 진사과에 급제하여 입사했으나, 후당 때까지 지방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석경당(石敬瑭)(892~942, 후진의 고조)과 친분을 맺어 그가 후진을 세운 뒤 재상으로까지 발탁되었다. 고조가 《구당서》의 편찬을 명하였을 때 조영이 감수국사로서 주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에 연유한다. 조영은 후진이 망한 뒤 출제와 함께 요(遼)나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후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을 잊지 않은 충신으로도 유명하다.
(5) 주요 저작:미상

3. 서지사항

‘설관수사’의 제도를 확립한 당(唐)나라는 자기 왕조의 역사도 체계적으로 정리해 갔고, 당대에 이미 기(紀)⋅지(志)⋅열전(列傳)을 갖춘 《당서》라는 이름의 사서가 만들어졌다. 당이 망한 뒤 후량⋅후당 역시 이러한 수사(修史) 작업을 잇고자 하였다. 오대라는 혼란기에, 그것도 5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구당서》가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다양한 선행 성과 덕분이었다.
그러나 참고할 만한 자료가 아무리 많았을지라도, 이처럼 빨리 당대의 긴 역사를 방대한 양으로 새롭게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구당서》는 기존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둔 부분이 적지 않고, 예전 문헌의 종류⋅다과(多寡)에 따라 그 내용의 정밀도가 다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서술의 일관성과 체계성이 부족하다. 양조성(楊朝晟)(?~801)처럼 동일인을 두 군데 입전(立傳)한 사례마저 발견될 정도이다. 이러한 문제는 빈번한 전란 속에서 불안정한 왕조가 계속된 오대 시기의 역사적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구당서》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무척 낮았다. 북송 진종(眞宗) 시기에 이 책을 판각(板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인종(仁宗)이 내용 부실 등의 이유로 재차 당대의 사서를 편찬하도록 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당서》가 바로 그 결과물인데, 이 책이 나온 뒤 《구당서》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송대나 명대(明代)에 ‘십칠사(十七史)’ 혹은 ‘이십일사(二十一史)’로 불리며 중시된 사서 중에 《구당서》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 서적이 또 다시 주목된 것은 청(淸) 건륭 연간(1736~1796)에 《구당서》를 새로 인쇄하여 널리 유포시킨 뒤의 일로서, 이러한 변화에는 당시 고증학(考證學)의 발달도 일조하였다.
《구당서》는 여느 정사에 비하여 덜 중시되었지만, 1927~1937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발행한 백납본(百衲本)24사(史)에 포함되었다. 1959~1977년에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표점(標點)⋅교감(校勘)한 25사(24사에 《청사고(淸史稿)》 포함)에도 당연히 들어가 있으며, 현재 대부분 이 책을 이용하고 있다. 중화서국본 《구당서》는 1975년에 나왔고, 현재 그 수정⋅보완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4. 내용

《구당서》는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본기를 보면, 총 10권에 불과한 《신당서》보다 그 내용이 훨씬 풍부하다. 하지만 전술하였듯이 참고한 문헌에 따라 시기별 차이가 존재한다. 고조(高祖)에서 대종(代宗)까지는 당대에 쓰인 《당서》에 직접 의거했고, 덕종(德宗)에서 무종(武宗)까지는 실록(實錄)을 참조해 정리하였다. 그리고 실록조차 없던 선종(宣宗) 이후는 단편적 기록을 새로 수습(收拾)해야만 하였으므로, 그 서술이 상대적으로 소략하고 체계적이지도 않다.
지는 〈예의(禮儀)〉(7권), 〈음악(音樂)〉(4권), 〈역(曆)〉(3권), 〈천문(天文)〉(2권), 〈오행(五行)〉(1권), 〈지리(地理)〉(4권), 〈직관(職官)〉(3권), 〈여복(輿服)〉(1권), 〈경적(經籍)〉(2권), 〈식화(食貨)〉(2권), 〈형법(刑法)〉(1권) 총 30권으로 구성되는데, 무려 50권이나 되는 《신당서》의 지에 비하여 여러 모로 빈약하다. 게다가 대부분 기존 문헌에 의지한 까닭에 초래된 한계도 뚜렷하다. 〈경적지〉가 그 좋은 예로서, 당 현종(唐玄宗) 개원 연간(713~741)의 도서 목록을 위주로 한 탓에 유종원(柳宗元)(773~819)의 책마저 없다. 안사(安史)의 난(亂)(755~763) 이후 나온 서적들은 《구당서》 경적지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열전의 경우도 비슷한 문제를 갖는다. 입전된 인물의 숫자가 《신당서》보다 적으며, 특히 당 후기 관련 기록이 당 전기만큼 충실하지 않다. 국가체제가 어지러워진 당 후기에는 공식적 기록이 부족하여 행장(行狀)⋅가전(家傳) 등 사적(私的) 자료에 주로 의존하였고, 이때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아 생긴 착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구당서》의 내용상 특징은 기본적으로 이 책이 단기간에 당대의 자료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편찬된 데 기인한다.

5. 가치와 영향

오대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급히 만든 《구당서》는 결코 훌륭한 사서라 말하기 어렵고, 《신당서》의 출현 뒤 거의 읽히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의 완성 이듬해 후진이 요(遼)의 침공으로 멸망하면서 개봉(開封)에 있던 많은 서책들이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렇게라도 《구당서》가 편찬되지 않았다면, 훗날 당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근거 문헌들 대다수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당서》가 당대의 문헌을 전재(轉載)하다시피 한 것도 일면 역사학적으로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독자적인 사서로서는 분명한 약점일 터이지만, 당시 사료의 보존이란 면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조칙이나 상주문이 당대의 글 그대로인 경우가 많으며, 제도나 법령 관련 서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구당서》를 통하여 당대의 실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쓸 때 또 근대의 당령(唐令) 복원 작업에서 《구당서》를 《신당서》보다 중시했던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구당서》의 장점은 《신당서》와 극명히 대비된다. 송나라의 안정기에 구양수(歐陽修)(1007~1072)처럼 빼어난 학자들이 주도해 만든 《신당서》는 분명히 잘 정리된 사서이지만, 편찬자의 독특한 사상과 문체가 개입됨으로써 당대의 자료와 사실에 상당한 변형을 야기한 부분도 적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이 두 정사는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정확한 역사의 이해를 위해 두 책의 비교⋅검토가 필수적이다.
한반도에서도 일찍부터 《구당서》를 즐겨 읽었던 듯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정종(靖宗) 8년(1042)년에 왕명을 받들어 《당서》를 “신간(新刊)”하였고 또 문종(文宗) 10년(1056)에 과거 응시자들을 위하여 “인(印)”한 책들 중에 《당서》란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신당서》가 나오기 이전의 이 《당서》는 모두 《구당서》인 것이다. 실제로 《고려사》의 “《당서》를 살펴보면[按唐書]”이란 기록은 모두 《구당서》와 관련된 내용이다(권7, 〈세가(世家)〉 문종 7년 7월; 권61, 〈예(禮)3 제릉(諸陵)〉). 그러나 조선시대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太宗) 12년(1412) 8월 기록의 《신당서》란 표현에서 보듯이, 그 이전에 새로운 당대의 정사가 국내에 들어와 있었다. 이후 《신당서》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더욱 중시되었으며, 《구당서》의 위상이 점차 낮아졌다. 조선시대의 문헌에 나오는《당서》가 통상 《신당서》를 가리킨다는 것이 그 확실한 증거이다.

6. 참고사항

(1) 《구당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기록: 《신당서》 해제의 이 부분과 비교해보기 바람
‧ [당대 문헌의 채록(採錄) 방법] “〈유상도(劉祥道)(596~666)가 상주하기를〉 첫째, 현재 선사(選司)의 사인(士人) 선발은 많이 또 함부로 뽑는 병폐가 있습니다. 매년 입류(入流)하는 자의 수가 1,400명을 넘으니 병폐가 많이 뽑는 데 있다는 것이고, 잡색(雜色)이 입류할 때 엄격히 가려 뽑지 않으니 이것이 병폐가 함부로 뽑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은 사인도 오히려 올바른 사람이 드문데, 대부분 서리(胥吏)의 부류를 많이 뽑아 〈입류시키니〉 어찌 이들 모두 덕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함께 정사(政事)를 행하는 이들 중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其一曰 今之選司取士 傷多且濫 每年入流數過千四百 傷多也 雜色入流 不加銓簡 是傷濫也 經明行修之士 猶或罕有正人 多取胥徒之流 豈能皆有德行 卽知共釐務者 善人少而惡人多……]”(권81, 〈유상도〉)
‧ [한유(韓愈)(768~824)에 대한 평가] “한유와 이고(李翶) 두 문공(文公)은 〈유교의 이상(理想)이〉 쇠퇴한 말세에 인의(仁義)를 회복하려 힘썼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범을 부지(扶持)하는 데 뜻을 두어 인문(人文)으로써 교화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그 도(道)가 실현되지 못하였다.[韓李二文公 於陵遲之末 遑遑仁義 有志於持世範 欲以人文化成 而道未果也]”(권160, 사신왈(史臣曰))
(2) 색인어: 구당서(舊唐書), 유후(劉昫), 조영(趙瑩), 가위(賈緯), 장소원(張昭遠), 설관수사(設館)(官)修史, 후진(後晉), 신당서(新唐書)
(3) 참고문헌
‧ 舊唐書 標點本(中華書局)
‧ 중국정사조선전2(국사편찬위원회, 신서원)
‧ 역주 중국정사외국전10(김유철 등, 동북아역사재단)
‧ 二十二史箚記(趙翼 撰, 박한제 역주, 소명출판)
‧ 二十四史全譯⋅舊唐書(許嘉璐 주편, 漢語大詞典出版社)
‧ 舊唐書與新唐書(黃永年, 人民出版社)

【하원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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