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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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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경편(自警編)》은 송대(宋代)의 문사 조선료(趙善璙)가 전시대 선현제공(先賢諸公)들의 언행을 선집(選集)하여 편찬한 저술이다. 편찬시 본문은 교육(敎育)과 섭양(攝養), 학문(學問), 사명(使命) 등 여러 소제목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자경편》은 송대 문인들이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현(諸賢)의 언행을 모아 편집하여,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편찬한 저술이다.

2. 저자

(1) 성명:조선료(趙善璙(?~?))
(2) 자(字)・호(號):자는 덕순(德純)이다.
(3) 출생지역:출생지역은 알 수 없고, 신안(新安)이나 무령(武寧) 일대(현재의 안휘성(安徽省))에서 활동하였다.
(4) 주요활동과 생애
그가 최초로 벼슬을 한 시점은 가정(嘉定) 원년(1208)이고 《자경편》의 서문을 작성한 시점은 가정(嘉定) 17년(1224)이었다. 또한 《자경편》을 실제 간행하면서 작성한 발문을 기록한 때가 단평(端平) 원년(1234) 3월이었으므로, 당시까지는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안문헌지(新安文獻志)》에는 아버지 무절공(武節公)의 은덕으로 승신랑(承信郞)에 제수되었던 점, 가정(嘉定)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수직랑(修職郞)이 된 사실 정도가 소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과정 중에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무령현(武寧縣)의 현령(縣令)과 강주(江州)의 지사(知事)를 역임한 이력 또한 밝혀져 있다. 이로 미루어 《신안문헌지》가 작성된 15세기 중엽에도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조선료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일찍이 벼슬에 입문하였음을 가정하더라도 대략 12세기 후반에 출생하여 관력(官歷) 기록이 남아 있는 13세기 초반까지는 활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자경편》의 발문이나 그의 전기에서 공통적으로 조선료 자신이 병이 많았다는 점과 벼슬을 오래 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장수를 누리지는 못한 사실이 드러난다.
(5) 주요저작:《자경편》

3. 서지사항

《자경편》의 내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구절은 조선료가 서문에 밝혀두었다. 즉, 편자는 책의 서문에서 제공(諸公)들의 언행을 선집(選集)하였고, 이를 교육과 섭양 등 여러 소제목으로 나누어 본문에 배치하였음을 밝혀두었다.
실제 본문의 구성 및 내용은 8개의 대분류로 구분되어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존 판본들을 두루 살펴보면, 책의 편철 및 구성은 5권 5책본・9권 6책본・9권 10책본 등 아주 다양하지만 수록된 내용은 일관되어 있다. 본문에 수록된 8개의 대분류 아래에는 57개의 소주제로 세분되어 있다. 대분류에 따른 소주제별 수록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학문류(學問類)에는 학문(學問)・견식(見識)・기량(器量), 조수류(操修類)에는 정심(正心)・검신(檢身)・성실(誠實)・조수(操守)・정력(定力)・청렴(淸廉)・검약(儉約)・무기호(無嗜好)・근언행(謹言行)・도회(韜晦)・섭양(攝養)・호생(好生)이 수록되었다. 이어서 제가류(齊家類)에는 효우(孝友)・교자손(敎子孫)・진친족(賑親族)・거처(居處), 접물류(接物類)에는 교제(交際)・군자(君子)・소인(小人)・낙선(樂善)・교육(敎育)・후덕(厚德)・보덕(報德)・불보(不報)・혼장(婚葬), 출처류(出處類)는 출처(出處)・의명(義命)・염퇴(恬退)・환난(患難)・휴치(休致)로 나누었다. 그리고 사군류(事君類)는 분량이 많은 탓에 상하(上下)로 다시 나누어 상편(上篇)에는 충의(忠義)・공정(公正)・덕망(德望)・득체(得體)・강독(講讀)・간쟁(諫諍)의 6개 영역을 다루고, 하편(下篇)에는 우구(憂國)・천거(薦擧)・용인(用人)・선처사(善處事)・사명(使命)을 수록하였다. 또 정사류(政事類)에는 정사(政事)・진정신(鎭靜信)・ 통하정(通下情)・제인(濟人)・구황(救荒)・구폐(救弊)・변무(辨誣)・옥송(獄訟)・재부(財賦)・병(兵)・제승(制勝)을 배치하고, 마지막 습유(拾遺)에는 의논(議論)・보응(報應)을 두었다. 다만, 특기할 점은 일반적인 문장 선집이 그러하듯이 내용 중에 편자 조선료의 주장이나 글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을 편성할 당시부터 의도된 것으로, 모든 문장들은 인용하거나 발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생각이나 의견이 포함된 저서(著書)나 찬술서(撰述書)와는 엄연히 구분된다는 점을 밝혀 둔다.

4. 내용

《자경편(自警編)》에 수록된 본문의 내용은 모두 당시에 유통되었던 다른 저술에서 인용된 것이다. 수록 내용의 출처 조사를 통해 드러난 인용 문헌은 모두 30여 종이 넘게 나타났고, 이 가운데 2회 이상 인용된 문헌으로는 주희(朱熹(1130~1200))의 《삼조명신언행록(三朝名臣言行錄)》과 《오조명신언행록(五朝名臣言行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밖에 본문의 내용이 인용된 문헌으로는 《소씨견문록(邵氏聞見錄)》・《낙암어록(樂庵語錄)》・《상채어록(上蔡語錄)》・《이정전서(二程遺書)》・《언행귀감(言行龜鑒)》・《여씨동몽훈(呂氏童蒙訓)》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편자 조선료가 활동한 시대에 자신이 직접 읽었거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에서 우선 그 내용을 취하였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책이 편찬되었던 13세기 남송의 사회와 문화 질서 전반에서 드러나는 주희의 영향력이다. 이 시기 학문의 전반적인 조류는 문치주의와 유학 진흥의 일환으로 경학의 계승이라는 흐름으로 대변되고, 여기에 주자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5. 가치와 영향

《자경편》은 宋나라에서 편찬되고 간행된 이후 우리나라로 유입되었고, 왕실에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정관정요(貞觀政要)》 등의 서적과 더불어 경연에서 강론하는 등 그 활용 사례가 아주 빈번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기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간행된 뒤, 경주부(慶州府) 등지에서 목판으로 새기는 등 여러 차례 간행으로 이어졌다. 서책에 대한 수요는 왕실은 물론, 지역 유사(儒士)들의 요구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자경편》의 편찬 체제와 찬술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신수자경편(新修自警編)》・《속자경편(續自警編)》・《광보자경편(廣輔自警編)》・《후자경편(後自警編)》 등 우리나라의 학자들에 의하여 후속 저술이 찬술되거나 증보 작업이 이루어져, 《자경편》이 우리나라 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저술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독서하고 학문하는 근본 목적은 마음을 열고 눈을 밝혀서, 행동하는 것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讀書學問 本欲開心明目 利於行也]” 《자경편(自警編)》 권1 〈학문류(學問類)〉
• “내면에 밝은 자는 자신의 허물을 보고, 외면에 밝은 자는 남의 허물을 본다. 자신의 허물을 보는 자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자기보다 낫다고 여기고, 남의 허물을 보는 자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못하다고 여긴다.[用明於內者 見己之過 用明於外者 見人之過 見己之過者 視天下人皆勝己也 見人之過者 視天下人皆不若己也]” 《자경편》 권2 〈조수류(操修類)〉
• “사람의 한 마음은 맑고 허명(虛明)하여 마치 거울이 비어있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과 같아서 한 몸의 주재자가 되는 것이니 진실로 진체(眞體)의 본래 그러함이다.[人之一心 湛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 《자경편》 권1 〈학문류〉
(2) 색인어:자경편(自警編), 조선료(趙善璙), 신수자경편(新修自警編), 속자경편(續自警編), 광보자경편(廣輔自警編)
(3) 참고문헌
• 《中國圖書文獻史攷》(工藤一郞, 明治書院)
• 《宋代版本學硏究》(李明杰, 齊魯書社)
• 《中國儒學史》1~3(趙吉惠 著, 김동휘 譯, 신원문화사)
• 《中國古籍編撰史》(曹之著, 武漢大學出版社)
• 《韓國典籍印刷史》(千惠鳳, 汎友社)

【임기영】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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