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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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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자주소(孟子注疏)》는 후한(後漢) 때 조기(趙岐)가 지은 고주(古注)인 《맹자장구(孟子章句)》에 송(宋)나라 때 손석(孫奭)이 소(疏)를 붙인 책이다. 모두 14권으로, 《맹자정의(孟子正義)》라고도 한다.

2. 저자

(1) 성명:조기(趙岐)(108~201), 손석(孫奭)(962~1033)
(2) 자(字)・호(號):조기는 초명(初名)이 조가(趙嘉), 자가 대경(臺卿)・빈경(邠卿)이다. 손석은 자가 종고(宗古), 시호가 선(宣)으로 손선공(孫宣公)이라 칭한다.
(2) 출생지역:조기는 경조(京兆) 장릉현(長陵縣)(현 중국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이고, 손석은 박주(博州) 박평(博平)(현 중국 산동성 임평현(茌平縣) 박평진(博平鎭))
(3) 주요활동과 생애
조기는 학문의 전통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경서에 능통하였고 재예(才藝)가 뛰어났으며, 성품은 개결(介潔)하고 강직하였다. 당대의 학자인 마융(馬融)의 조카와 혼인하였다. 30세에 중병을 얻어 7년을 병석에 누워 지냈다. 47세이던 154년에 사공연(司空掾)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양기(梁冀)의 참모로 능력을 인정받아, 피씨현(皮氏縣)의 수령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마침 중상시(中常侍) 좌관(左悺)의 형인 좌승(左勝)이 하동태수(河東太守)로 부임해 오자, 평소 환관(宦官)의 전횡을 미워하던 조기는 당일로 사직하고 낙양(洛陽)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중상시 당형(唐衡)의 형인 당현(唐玹)이 중상시의 권세를 등에 입고 호아도위(虎牙都尉)에 임명되자 조기가 당현을 폄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당현이 조기에게 원한을 품었다. 158년에 당현이 경조윤(京兆尹)에 임명되어 조기를 해치려고 하니. 조기는 북해(北海)로 달아나 손숭(孫嵩)이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살았다. 조기는 여기서 몇 년을 머무르며 《맹자장구》를 저술하였다. 나중에 당현이 죽자 병주자사(幷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1차 당고(黨錮)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2차 당고 때에는 10여 년 동안 금고(禁錮)를 당하였다. 190년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했을 때에는 의랑(議郞)과 태복(太僕)에 임명되었다. 192년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정권을 잡자 마일제(馬日磾)의 부관(副官)이 되어 전국을 순행하였는데, 당시 기주(冀州)를 두고 각축을 벌이던 원소(袁紹), 조조(曹操), 공손찬(公孫瓚) 등이 싸움을 멈추고 조기를 영접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태상(太常)에 이르고, 201년 형주(荊州)에서 세상을 떠났다.
손석은 어려서 동향(同鄕)의 학자 왕철(王徹)에게 오경(五經)을 배웠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성취가 매우 빨랐다. 27세 때이던 989년에 응시한 과거시험에서 구경(九經)으로 급제하여 거현 주부(莒縣主簿)에 제수되었다가 대리평사(大理評事)로 승진하였다.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으로 있을 때에는 송 태종(宋太宗)이 국자감에 직접 행차하여 그의 《서경(書經)》 강의를 듣고 크게 칭찬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진종(眞宗) 때에는 공부낭중(工部郎中), 용도각대제(龍圖閣待制), 밀주 자사(密州刺史)를 역임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에 임명되었다. 손석(孫奭)은 강석(講席)에서 역사상 혼란기에 국가를 망하게 만든 군신(君臣)을 논할 때마다 반복하여 인종(仁宗)에게 풍자(諷刺)의 규간(規諫)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올라 치사(致仕)하고, 1033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4) 주요저작:《후한서(後漢書)》에는 조기의 저술로 《맹자장구》와 《삼보결록(三輔決錄)》이 전한다는 기록이 있으나, 《삼보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손석은 경학가(經學家)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오경(五經)에서 치도(治道)에 긴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경전휘언(經典徽言)》 50권을 편찬하였고, 이외에 《숭사록(崇祀錄)》, 《악기도(樂記圖)》, 《오경절해(五經節解)》, 《오복제도(五服制度)》, 《맹자음의(孟子音義)》 등을 저술하였으며, 형병(邢昺), 두호(杜鎬), 서아(舒雅) 등과 함께 《주례(周禮)》, 《의례(儀禮)》,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효경(孝經)》, 《논어(論語)》, 《이아(爾雅)》의 의소(義疏)를 교정(校定)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 서지사항

《맹자주소》는 14편(篇)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맹자》는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이었다. 조기가 7편을 각각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 14편으로 재편(再編)하고, 장(章)과 구(句)를 나누어 《맹자장구》를 지었다. 《맹자주소》는 《맹자장구》의 편차를 따랐다. 남송(南宋) 이전의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은 경(經), 주(注), 소(疏)가 각기 따로 판각(板刻)되어 유통되었다. 경, 주, 소가 합쳐져 판각된 합각본(合刻本)이 나타난 것은 남송 초기에 이르러서이다.
황당(黃唐)이 소흥(紹興)의 양절동로다염사(兩浙東路茶鹽司)에서 간행한 《모시(毛詩)》, 《예기(禮記)》, 《주역(周易)》, 《상서(尙書)》, 《주례(周禮)》의 합각본과 소흥지부(紹興知府)에서 간행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합각본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소흥의 고호(古號)인 월주(越州)를 붙여 ‘월주본육경(越州本六經)’이라고 부르며, 모두 반엽(半葉)이 8항行이어서 ‘월간팔항본(越刊八行本)’이라고도 부른다. 앞의 6경을 이어서 《논어주소(論語注疏)》와 《맹자주소》의 팔항본(八行本)도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맹자주소》 최초의 판본(版本)이다. 팔항본이 나온 뒤에 남송 건양(建陽) 지방에서 반엽이 10항인 방각본(坊刻本)이 간행되었다. 모두 육덕명(陸德明)의 《음의(音義)》를 붙였으므로 ‘건각부석음본(建刻附釋音本)’이라고도 부른다.
원(元)나라를 거쳐 명(明)나라에 이르면서 십항본(十行本)은 중각(重刻)과 보수(補修)를 거치다가 각판(刻板)이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으로 옮겨졌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1522~1566)에 이원양(李元陽)은 이 판본을 바탕으로 《십삼경주소》를 새로 판각하였다. 이 판본은 반엽이 9항으로, 민본(閩本)・가정본(嘉靖本)・구항본(九行本) 등으로 불린다. 만력(萬曆) 연간(1573~1620)에 이 민본을 바탕으로 중각(重刻)한 것이 북감본(北監本)(만력본(萬曆本))이고,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 급고각(汲古閣)의 모진(毛晉)이 북감본(北監本)을 조본(祖本)으로 삼아 중각한 것이 모본(毛本)(숭정본(崇禎本))이다.
청(淸)나라 건륭(乾隆) 연간(1736~1795)에는 무영전(武英殿)에서 《십삼경주소부고증(十三經注疏附考證)》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북감본을 조본으로 삼은 것이다. 북감본, 모본, 무영전본(武英殿本)이 모두 민본에서 파생되어 나온 판본이다. 청나라 가경(嘉慶) 20년(1815)에서 21년 사이에 완원(阮元)이 당시에 전존(傳存)하던 남송의 십항본과 단소본(單疏本)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십삼경주소》를 중각하였다. 이것을 ‘완원교각본(阮元校刻本)’, 줄여서 ‘완각본(阮刻本’)이라고 부른다. 이 완각본은 교감(校勘)이 정밀하여 출간된 이후 기존의 모본을 대신하여 널리 유통되었다. 2000년에는 북경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가 완각본을 저본으로 표점본(標點本)을 출간하였으며, 2009년에는 중화서국(中華書局)이 완각본을 영인(影印)하여 5책으로 출간하였다.

4. 내용

전국(戰國) 시기 대표적인 유가(儒家) 사상가인 맹자의 언행(言行)이 기록되어 있다. 맹자가 당시의 사상가들과 벌인 논쟁, 제자들에게 전수한 가르침, 여러 제후들에게 유세(遊說)를 다니면서 남긴 언행 등을 정리하여 맹자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편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맹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정(仁政), 민본(民本), 성선(性善), 양기(養氣) 등과 관련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맹자》의 편명(篇名)은 《논어》처럼 해당 편이 시작하는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맹자주소》는 매 편의 첫머리인 편수(篇首)에 편명과 함께 그것을 설명하는 주(注)와 소(疏)가 달려 있고, 그 아래에 딸린 장(章)마다 경문(經文)과 해당 경문을 설명하는 주(注)가 구(句) 단위로 끊어져 수록되어 있으며, 한 장(章)의 경문과 주(注)가 완결되면 이어서 해당 경문과 주(注)를 설명하는 수(疏)가 나온다. 선진(先秦)의 사상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문헌이며, 이후 동양의 정치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 가치와 영향

송나라 이전의 《맹자》는 경서(經書)가 아니었으므로 연구하는 학자가 많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조기의 《맹자장구》 이후 주석서로는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의 《맹자주(孟子注)》, 유희(劉熙)의 《맹자주(孟子注)》, 양(梁)나라 때 기무수(綦毋邃)의 《맹자주(孟子注)》, 당(唐)나라 때 육선경(陸善經)의 《맹자주(孟子注)》, 장일(張鎰)의 《맹자음의(孟子音義)》, 정공저(丁公著)의 《맹자수음(孟子手音)》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다양한 주석서가 풍부하게 산출된 여타 오경(五經)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이다. 이러한 쉽지 않은 여건에서 나온 《맹자주소》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 받을 만하다. 또한 송나라 때에 이르러 경서의 지위에 올라 “십삼경(十三經)”의 구성을 완성했으며, “십삼경주소”의 형태로 간행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려 말에 성리학이 수입된 이후 조선은 500년 동안 주희(朱熹)의 《사서집주(四書集注)》가 표준 주석이 되어왔다. 이에 따라 많은 《맹자》 주석서가 《맹자집주》의 범위 안에서 주희의 본지(本旨)를 탐구하거나 부연(敷衍)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황(李滉), 박세당(朴世堂),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지는 《맹자》 주석서의 흐름은 경문 자구(字句)의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경전의 본의(本意)에 접근하고자 하는 훈고학적(訓詁學的) 연구 방법을 발전시켰다. 특히 정약용은 맹자 연구에 《맹자주소》를 활용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군주에 대해서는 백성들도 군주가 즐거워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백성이 근심하는 것을 근심하는 군주에 대해서는 백성도 군주가 근심하는 것을 근심한다.[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 《맹자주소(孟子注疏)》 〈양혜왕 하(梁惠王下) 제4장〉
∙“천하의 너른 거처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그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 부귀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이 그 절개를 바꾸지 못하며, 위무가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으니,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주소》 〈등문공 하(滕文公下)〉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긴다.[夫人必自侮然後 人侮之]” 《맹자주소》 〈이루 상(離婁上)〉
∙“생선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발바닥 요리도 내가 원하는 요리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생선 요리를 포기하고 곰발바닥 요리를 택할 것이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포기하고 의를 택할 것이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맹자주소》 〈고자 상(告子上)〉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며, 그 살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신체와 피부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곤궁하게 하며, 그 하는 일마다 뒤틀고 어지럽히니, 이것은 그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함으로써 그 부족한 능력을 키워주려는 것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맹자주소》 〈고자 하(告子下)〉
∙“옛 사람들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베풀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자신을 닦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곤궁할 때에는 홀로 자신을 善하게 닦고 영달했을 때에는 천하 사람들을 모두 선하게 했던 것이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맹자주소》 〈진심 상(盡心上)〉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것이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맹자주소》 〈진심 하(盡心下)〉
(2) 색인어:맹자주소(孟子注疏), 맹자(孟子), 맹가(孟軻), 조기(趙岐), 맹자장구(孟子章句), 손석(孫奭), 맹자정의(孟子正義),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3) 참고문헌
∙≪孟子≫(홍인표 역, 서울대학교출판부, 1992)
∙≪맹자 사람의 길≫(김용옥, 통나무, 2012)
∙≪역주 茶山 孟子要義≫(정약용, 현대실학사, 1994)
∙≪한글 맹자≫(이을호 역, 전남대학교출판부, 1958)
∙≪현토완역 孟子集註≫(성백효, 전통문화연구회, 1998)
∙≪孟子≫(金良年 詳解, 上海古籍出版社, 2010)
∙≪孟子今註今譯≫(史次耘, 臺灣商務印書館, 1978)
∙≪孟子譯注≫(楊伯峻 譯注, 中華書局, 1960)
∙≪孟子正義≫(焦循 撰, 中華書局, 1987)

【양기정】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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