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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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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지재집(遜志齋集)》은 명(明)나라 방효유(方孝孺)의 시문집(詩文集)이다.

2. 저자

(1) 성명:방효유(方孝孺)(1357~1402)
(2) 자(字)·별호(別號):방효유의 자는 희직(希直) 또는 희고(希古)이고 호는 손지(遜志)이다. 고향의 지명을 따서 구성선생(緱城先生)이라고도 불리고, 촉헌왕(蜀獻王) 주춘(朱椿)이 그의 서재 이름을 ‘정학(正學)’으로 지어주어 정학선생(正學先生)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 출생지역:태주(台州) 영해(寧海)(현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시(寧波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원(元)나라 혜종(惠宗) 지정(至正) 17년(1357)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소한유(小韓愈)’(어린 한유)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명(明)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29년(1376)에 당대의 대학자 송렴(宋濂)(1310~1381)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홍무 15년(1382)과 25년(1392) 두 차례 추천으로 태조를 알현(謁見)하였고 한중교수(漢中敎授)에 임명되어 태자(건문제(建文帝))를 보위(保衛)하면서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건문제 즉위 후에는 그를 도와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건문제 역시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다. 건문제는 삭번(削藩) 정책을 펼치는 등 왕권 강화를 도모하면서 번왕(藩王)들과 갈등이 깊어졌는데, 건문제의 숙부들 중 최연장자였던 연왕(燕王) 주체(朱棣)(1360-1424, 후의 영락제(永樂帝))가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처단하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이른바 ‘정난지변(靖難之變)’을 일으켰다. 1402년, 4년 간의 전쟁 끝에 주체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건문제의 신하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건문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에 대해서만은 비교적 정중하게 ‘선생’이라 부르면서 자신의 즉위 조서(詔書)의 초안을 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방효유는 끝까지 주체에게 저항하면서 종이에 “연적찬위(燕賊纂位)(연나라의 역적이 황위(皇位)를 찬탈하였다)”라고만 썼다. 이에 격분한 주체는 방효유의 구족(九族)을 멸한 뒤 그의 친구와 제자들까지도 잡아들여 죽이고 마지막으로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십족(十族)을 멸한다’는 말의 효시가 되었다.
(5) 주요저작: 방효유의 저술은 본서 이외에도 《송사요언(宋史要言)》, 《기명록(基命錄)》, 《문통(文統)》, 《주역지사(周易枝辞)》, 《주례고차(周禮考次)》, 《무왕계서주(武王戒書注)》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영락제 때에는 그의 저작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모두 일실(逸失)되었다. 다만 그의 제자인 왕임(王稔)이 숨겨두었던 원고가 명나라 선종(宣宗) 연간(1425~1435)에 전파되었던 바, 명나라 천순(天順) 7년(1463)에 조홍(趙洪)이 이를 토대로 문집을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3. 서지사항


현전하는 《손지재집》은 당초에 40권으로 편집되어 간행되었는데,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연간(1465~1487)에 황공소(黃孔昭)와 사탁(謝鐸) 등이 편집하고 영해(寧海) 지현(知縣)인 곽신(郭伸) 등이 간행하여 통상 ‘읍본(邑本)’으로 불린다. 읍본은 방효유의 시문 1,200여 편을 본집 30권, 습유 10권으로 편집하여 간행되었고, 중화민국 17년(1928)에 중간된 바 있다. 잡저(雜著) 10권, 서(敍) 5권, 기(記) 3권, 서(書) 3권, 비지(碑誌) 2권, 장전(狀傳) 1권, 시(詩) 3권, 습유(拾遺) 10권으로 구성되었다.
읍본 간행 40여 년 후에 태주 자사(台州刺史)였던 고린(顧璘)(1476~1545)은 읍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약간의 시문을 새로 증보하여 간행하였는데, 이를 통상 ‘군본(郡本)’이라 부른다. 이 군본은 이후에 여러 차례 중간되면서 《손지재집》의 통행본으로써 널리 유통되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판본 역시 이 군본이다. 군본은 잡저(雜著) 8권, 서(書) 3권, 서(序) 3권, 기(記) 3권, 제발(題跋) 1권, 찬(贊) 1권, 제문(祭文)·뇌(誄)·애사(哀辭) 1권, 행장(行狀)·전(傳) 1권, 비(碑)·표(表)·지(志) 1권, 고체시(古體詩) 1권, 근체시(近體詩)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함풍(咸豊)~동치(同治) 연간(1851~1874)에 노조안(盧朝安) 등이 간행한 7권본도 존재하며, 방효유의 문장을 가려 뽑은 몇 가지 선집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 김석주(金錫胄)(1634~1684)가 방효유의 산문 114편을 뽑아 엮은 《방정학문초(方正學文抄)》 3권이 한구자(韓構字)로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

4. 내용

본서는 방효유의 사상과 문학, 학문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인 동시에, 그가 살았던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명도(明道)’로 자임(自任)하여 그의 저술 중에는 이와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 특히 잡저의 〈유의잡명(幼儀雜箴)〉, 〈심려론(深慮論)〉 연작 10편 등이 저명하다. 한편 확고한 명분론(名分論)에 기반한 정통론(正統論) 역시 그의 문집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데, 3부작으로 이루어진 〈석통(釋統)〉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외에도 다양한 사론(史論) 작품들을 통해 그의 명분론과 정통론의 실제를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대(蚊對)〉, 〈월무(越巫)〉와 같은 우언(寓言) 작품들 역시 그의 문학적 역량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장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5. 가치와 영향

죽음을 불사하고 명(明)나라 건문제(建文帝)에 대해 절의(節義)를 지켰던 방효유는 이후 절의의 표상으로 동아시아 한문문화권에서 추숭(追崇)되었다. 또한 그는 금화학파(金華學派)의 핵심 인물로서 정주리학(程朱理學)을 부흥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상가이기도 하다.
조선에서도 역시 방효유의 순정한 학문과 절의를 높게 평가하여 국가적으로 방효유의 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즉 선조(宣祖) 18년(1585)에 선조는 방효유를 비롯하여 문천상(文天祥),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절의를 표창하기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효유의 학문과 절의는 문인들에게도 추숭의 대상이어서 사육신(死六臣)과 같이 죽음으로 절의를 지켰던 인물들을 방효유에 비견하면서 호평하는 사례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방효유의 문학은 내용과 주제의식 상의 의리(義理) 내지는 순정(醇正)함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반면, 수사(修辭)의 측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지적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효유는 명나라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문학가로서 다양한 문학 선집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만큼이나 우리나라에서 사랑받았던 명나라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화(禍)는 항상 소홀한 가운데서 일어나며, 난(亂)은 항상 의심할 만하지 않은 일에서 일어난다.[禍常發於所忽之中 而亂常起於不足疑之事]” 〈심려론(深慮論)〉
• “장차 흥하려는 군주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장차 망하려는 군주는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將興之主 惟恐人之無言 將亡之主 惟恐人之有言]” 〈누경(婁敬)〉
• “세상에 재주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늘 병통이다. 배우는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니지만 도를 알려 하지 않는 것이 항상 근심이다. 재주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가 도에 밝게 한다면 세상은 다스릴 것도 없으리라.[天下非無才也 而恒病乎不學 學者非少也 而恒患乎不知道 使有才者皆明乎道 天下有不足治]” 〈오정루기(娛靜樓記)〉
(2) 색인어:손지재집(遜志齋集), 방효유(方孝孺), 방정학(方正學), 방희직(方希直), 건문제(建文帝), 영락제(永樂帝)
(3) 참고문헌
• 方孝孺集(浙江古籍出版社, 2013)
• 文彪千秋 骨鯁千秋 : 方孝孺的散文理論與實踐(張夢新, 《浙江學刊》, 1992)
• 方孝孺 硏究 (김양섭, 경희대 박사학위논문, 1992)
• 朝鮮 後期 漢文學과 方孝孺(김광년, 《語文論集》 32, 2018)
• 明の重臣 方孝孺の忠と死 : 八七三人の死を前にして (石毛愼一, 湘南社, 2011)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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