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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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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현경》은 서한(西漢) 말기에서 동한(東漢) 초기에 활약했던 양웅(楊雄)이 경서(經書)로는 《주역(周易)》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고 여겨 《주역(周易)》을 모방해서 한나라 애제(哀帝) 때 지은 철학서이자 점서이다. 《태현경》에는 양웅이 《노자(老子)》의 도(道)에서 가져온 개념인 ‘현(玄)’을 통해 천지만물을 해석하는 총체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범주로 삼아서 우주의 생성 도식을 구축하고 사물의 발전 규율을 탐색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도가(道家)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양웅의 ‘현’의 함의(涵義)는 노장(老莊)의 ‘도(道)’ 또는 ‘무(無)’와 근접해 있고, 《주역》의 ‘역(易)’ 관념과도 상통한다. 양웅의 주된 공헌은 우주 본체론의 문제를 토론할 때, 우주 일체를 자연(自然)의 도(道)가 드러난 것으로 보고, 신의 의지로 체현된 것으로 보지 않은 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神學)의 목적론(目的論)과는 대립되었고, 천명(天命)의 주재성(主宰性)은 배척하였다. 이것은 위진(魏晉) 이후 현학사상(玄學思想)의 발전에 결정적 방향을 제시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저자

(1)성명:양웅(楊雄)(B.C. 53∼A.D. 18)
(2)자(字)·별호(別號):자는 자운(子雲)
(3)출생지역:촉군(蜀郡) 성도(成都)(현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비현(郫縣) 우애진(友愛鎭))
(4)주요활동과 생애
양웅은 서한 선제(宣帝) 감로(甘露) 원년에 나서 왕망(王莽) 천봉(天鳳) 5년에 죽었으니, 서한 말기부터 왕망이 건국한 신(新) 왕조 시기를 살았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부가(辭賦家)·언어학자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박학다식하였으나 말을 더듬어 유창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사부에 능하였다. 40여 세에 경사(京師)로 나아가 낭(郎)이 되었다. 양웅은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어도 영리(榮利)를 도모하지 않고 욕심이 없었다. 문장(文章)으로 황제인 성제(成帝)의 눈에 띄어 급사황문(給事黃門)이란 관서(官署)의 말단 관리로 들어갔으며, 이후 서한 왕조에서는 성제를 거쳐 애제(哀帝)·평왕(平王)을 차례로 섬겼다.
그는 공자에게 뿌리를 두며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유자(儒者)로 자처하였으나, 특히 순자가 제기한 ‘원도(原道)’와 ‘징성(徵聖)’, ‘종경(宗經)’의 관점을 새롭게 확대 발전시켰다. 《법언(法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문예이론의 범주에 포함된 내용들도 적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만년에는 오로지 철학과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다가 71세에 죽었는데, 《漢書한서》 권87 〈양웅열전(揚雄列傳)〉에 자세한 생평(生平)이 전한다.
(5)주요저작
양웅의 주요 저작에는 철학 저서인 《태현경》과 《법언》 외에도 언어학 저서로 《훈찬편(訓纂篇)》이 있고, 최초의 방언학 저서인 《방언(方言)》이 있다. 문집에는 명대(明代) 장부(張溥)의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에 《양시랑집(楊侍郞集)》이 전하고, 청대 엄가균(嚴可均)이 집록한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의 《전한문(全漢文)》의 권51~54에 양웅의 전체 저작과 일부 고서에 흩어진 단락과 잔본(殘本)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서》 〈예문지〉에는 양웅의 부(賦) 12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10편은 대부분 모방 작품이다.
양웅은 평소 사마상여가 지은 부(賦)는 체재가 넓으면서도 크며 문체의 수식이 풍부하면서도 전아(典雅)해서 마음속으로 훌륭하다고 흠모했다. 심지어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신령한 조화가 이른 것인가?”라고 할 정도로 늘 그의 작품을 모방하고 그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았다. 그래서 사마상여의 〈상림부(上林賦)〉와 〈자허부(子虛賦)〉를 모방한 〈감천부(甘泉賦)〉와 〈우렵부(羽獵賦)〉·〈장양부(長楊賦)〉·〈하동부(河東賦)〉 등을 지었는데, 이 작품들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한대(漢代)의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모방하여 지은 〈반이소(反離騷)〉를 통해 굴원이 멱라(汨羅)강에 투신자살한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반복해서 설명하면서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하였다. 아울러 동방삭(東方朔)의 〈답객난(答客難)〉을 모방해서 지은 〈해조(解嘲)〉와 〈해난(解難)〉을 지었다. 개천설(蓋天說)의 부당함을 논하고 혼천설(渾天說)을 주장한 〈난개천팔사(難蓋天八事)〉를 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다른 저작인 《창힐훈찬(蒼頡訓纂)》 같은 자서(字書)와 《속사기(續史記)》 같은 역사서는 실전(失傳)되었다. 남조의 동진(東晉) 영화(永和) 11년(355년)에 상거(常璩)가 편찬한 《화양국지(華陽國志)》 〈서지(序志)〉에 양웅의 《촉왕본기(蜀王本紀)》라는 사서(史書)가 있었음이 보이는데, 《관잠(官箴)》 같은 작품처럼 잔문이 일부 전하고 있다. 양웅은 대학자로서 역량을 발휘하여 《우잠(虞箴)》을 본떠 《주잠(州箴)》을 저술했고, 《한서》 〈예문지(藝文志)〉의 유가류(儒家類)에는 그의 저술로 《악(樂)》 4편이 보이며, 고전의 주석에도 조예가 깊어 《맹자(孟子)》의 주석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3. 서지사항

《태현경》은 양웅이 《주역》을 모방해서 지은 철학서이다. 이전의 역학(易學)과 철학 및 자연과학에 대해 전반적인 정리를 하였지만, 점복(占卜)의 내용도 제공되어 왕망(王莽)이나 당대 유종원(柳宗元)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 점을 치기도 하였다. 《태현》이란 서명(書名)에 대해 양웅 자신은 명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으나, 전체 내용을 볼 때 ‘태극(太極)’과 ‘(노자의) 도(道)’를 합쳐 만든 것이므로 ‘가장 근원적인 것을 탐구한 글’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태현》은 양웅 사후(死後)에 저작물과 저자를 존중해서 《태현경(太玄經)》이라 하였고, 《양자태현경(楊子太玄經)》으로도 일컫지만, 간단히 《현경(玄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 이 전집이 편찬되던 당시 청(淸)나라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이름인 현엽(玄燁)을 피휘(避諱)해서 《태원경(太元經)》이라 하였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19권이라고 했으나,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서는 12권이라고 했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10권이라 기재되어 있어 문헌에 따라 권수의 차이가 다소 있다. 현전하는 판본은 《문헌통고》처럼 모두 10권이다. 《태현경》이 출판된 후 일부 실전된 주석본들이 출현한 적이 있었다. 유소군(劉韶軍)의 《태현대대례기연구(太玄大戴禮記硏究)》에 의하면 현존하는 판본과 주석본은 대략 72종이다. 따라서 현전하는 《태현경》의 권수나 내용에 적잖은 출입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태현경》의 권수와 편은 다음과 같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마다 《태현》의 일방(一方)·이방(二方)·삼방(三方)의 27수(首)가 나열되어 있다. 이외에도 〈수(首)〉·〈충(衝)〉·〈착(錯)〉·〈측(測)〉·〈리(攡)〉·〈영(瑩)〉·〈수(數)〉·〈문(文)〉·〈예(掜)〉·〈도(圖)〉·〈고(告)〉 11편이 열거되어 있다. 이 11편은 ‘현’의 이치를 해설한 문장인데, 각기 ‘현’의 함의와 성질 및 작용, 또 ‘현’과 만사(萬事)·만물(萬物)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태현경》 전체의 체례(體例)를 설명하고 있어서 《태현경》을 읽을 때에는 먼저 읽으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10편을 후세의 일부 학자들은 〈리(攡)〉·〈영(瑩)〉이라 하지 않고 “현(玄)”자를 앞에 덧붙여 〈현리(玄攡)〉·〈현영(玄瑩)〉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태현경》은 방(方)·주(州)·부(部)·가(家)의 사중(四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기 3배수로 확대된다. 즉, 3방·9주·27부·81가·243표(表)·729찬(贊)이다.
《태현경》에 가장 먼저 주를 단 사람은 동한(東漢)의 송충(宋衷)이다. 그 후 삼국시대 오(吳)나라 사람인 육적(陸績)이 주석을 달았고, 진(晉)의 범망(范望) 또한 앞선 두 사람의 주석들을 정리하여 스스로 주석을 달고 찬문(贊文)을 지었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은 칠가(七家)(일곱 주석가)의 주석을 집대성한 후, 자신의 주석을 덧붙여 《태현집주(太玄集注)》 10권 가운데 여섯 권을 지었다. 이후 7권부터 10권은 양릉(襄陵)의 허한(許翰)이 주석을 달았다. 청대에는 고증학자 진본례(陳本禮)가 《태현천비(太玄闡秘)》를 저술했다. 《태현집주》에는 청대의 가경각본(嘉慶刻本)이 있고, 《태현천비》에는 청말의 각본이 있다. 《태현경》에 내재된 짙은 도가적 색채 때문에 《태현경》은 명나라 정통(正統) 연간에 완성된 《정통도장(正統道藏)》의 태청부(太淸部)에 편입되어 도교(道敎)의 경전으로도 읽혀졌다.

4. 내용

《태현경》은 내용이 심오하면서도 풍부하며 천지인(天地人)의 근본 대도(大道)를 주된 핵심으로 삼고 인사와 행위 준칙 등을 두루 서술하였는데, 추상적인 ‘현리(玄理)’와 구체적인 행사와 원칙을 적합하게 결합시켰다. 사상적인 연원은 《주역》의 ‘때에 순응하는 순시(順時)’와 《노자》의 ‘청정(淸靜)’, 공자의 ‘중용(中庸)’ 사상을 두루 취하였다. 또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율력(律曆)·과학(科學) 등의 사상을 융합하였는데, 모방도 하였지만 양웅 자신이 새롭게 창작한 독특한 견해도 적지 않다.
하지만 《태현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은 ‘현’이다. 양웅 스스로 《태현경》은 《주역》을 모방해서 지었다고 했지만, 《주역》에서 ‘현(玄)’의 의미는 곤괘(坤卦)의 상육효(上六爻)에 “현황(玄黃)”으로 언급했고,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서 “대저 현황(玄黃)이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하여 ‘현’의 뜻을 간단히 하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덕경》에서 말하는 ‘현’은 단순히 색깔이 검다는 뜻이 아니라, ‘그윽하고 심원(深遠)하다’는 말로 이해하였다. 《노자》 1장에는 이와 같은 도의 속성을 일러 “그윽하고 심원한데 또 그윽하고 심원하다.[玄之又玄]”고 했다. 양웅이 《태현경》에서 사용한 ‘현’의 의미는 바로 이 《노자》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양웅이 《태현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관념으로 삼은 ‘현’은 《노자》의 도와 《주역》의 태극(太極) 관념을 확대해서 가져온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태현경》이 세계의 근본적인 규율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양웅은 천지만물을 해석하는 총체적인 원칙이자 본체인 ‘현’을 제시하면서 〈현도(玄圖)〉에서 “무릇 현이라는 것이야말로 천도(天道)이고 지도(地道)이며 인도(人道)인데, 이 세 도(道)를 겸하여 하늘이 그것을 이름 지은 것이다.[夫玄也者 天道也 地道也 人道也 兼三道而天名之]”고 하였다. ‘현’은 형태가 없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사물 변화의 근원이다. 양웅은 《태현경》에서 ‘현’으로 중심사상을 삼아 당시 사상계의 주된 사상인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 등의 사상을 통합하려 했다. 그 가운데는 국가(國家)·종족(宗族)·길흉(吉凶)·화복(禍福)·동정(動靜)·상하(上下)·주야(晝夜)·한서(寒暑)·인혁(因革) 등의 대립을 서로 통합하여 통일적인 관계를 천명하려고 했다. 또 모든 사물에는 9개의 발전 단계가 있다고 간주하였는데, 그 첫 단계인 ‘구찬(九贊)’에서 사물이 유래하게 되는 맹아(萌芽)와 그것이 발전하여 왕성함을 맞아 쇠퇴하고 마지막에는 사라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늘에는 ‘구천(九天)’이 있고, 땅에는 ‘구지(九地)’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구등(九等)’이 있고, 가족에도 ‘구속(九屬)’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또 양웅은 《태현경》에서 당시 사회에 유행하던 음양오행사상과 천문역법지식을 이용한 점복(占卜)의 형식으로 세계에 대한 도식화를 꾀하였다. 《태현》의 구성요소인 1현(玄)·3방(方)·9주(州)·27부(部)·81가(家)·729찬(贊)은 《주역》의 태극(太極)·양의(兩儀)·4상(四象)·8괘(八卦)·64중괘(重卦)·384효(爻)에 각각 해당한다.
《주역》은 6효(六爻)인데, 《태현》에서는 9수(九首)를 두어서 하하(下下), 하중(下中), 하상(下上), 중하(中下), 중중(中中), 중상(中上), 상하(上下), 상중(上中), 상상(上上)의 천지인(天地人)의 개념을 3단계로 도입하고 주야(晝夜)를 구분해 한 단계를 더 늘려 놓았다. 또 《태현》의 찬사(贊辭)는 《주역》의 효사(爻辭)에 해당한다. 《주역》에서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을 비롯한 이른바 10익(十翼)을 두어 본문인 경(經)을 설명하고 있듯이, 《태현경》 또한 〈현충(玄沖)〉과 〈현착(玄錯)〉을 비롯한 11편을 덧붙여 본문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주역》은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결합운동을 상징적인 형상의 변화로 표시하였으나, 《태현경》에서는 다시 도가적인 도의 관념을 빌어서 ‘현’이라고 이름한 다음, 그것을 이기(二氣)의 통일체로 상정하였다. 이 현이 만물로 전개해가는 양상을 《주역》에서는 ⚊과 ⚋ 2종류로 표기하였지만, 《태현경》에서는 상징적인 부호(符號)인 ⚊과 ⚋, ⵈ 3종류의 조합과 난해한 찬(贊)으로 표현하려 하였는데, 《역(易)》과 《역전(易傳)》의 형식을 모방한 양웅의 창조물이다. 사상적으로는 《역전》과 음양오행설 및 《노자》의 천도관(天道觀)을 기본으로 해서 세계의 형성과 변화를 체계화하였다. 〈현리(玄攡)〉편에서 “현(玄)은 음양이기(陰陽二氣)가 혼돈된 분화되지 않은 것의 총체이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기(二氣)가 결합하고 운동하는 전규율(全規律) 그 자체로서 만물 속에 존재하여 상호 연계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그것은 지(智)·인(仁)·용(勇)·공(公)·통(通)·성(聖)·명(命) 등이라고 하는 한정된 작용을 ‘그윽하고 어두움 속’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통합시키는 것이다.
또 〈현영(玄瑩)〉편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의 도가사상에 있던 “자연적인 순리에 따른다.[因循]”는 생각을 발전시켜 객관적 정황을 중시하고 주관적 해석을 피하도록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태현경》은 당시의 정통사상이었던 신비주의적 세계관이나 예언(豫言)·참위설(讖緯說)에 반대한 동한(東漢)의 환담(桓譚)과 왕충(王充)·장형(張衡)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이것은 6조(六朝) 도가사상의 선구라고도 평가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서한 후기에 이르러 참위설(讖緯說)이 유행하자, 유학은 더욱 황당하고 미신적이며 허망한 경지에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유학자와 사상가들 중에는 이에 반항하는 조류가 일어나 유학이 미신화와 황당화·번잡화 되어가는 경향을 혐오하여 다시 도가학설(道家學說)을 기초로 삼아 우주와 자연·본체의 문제를 깊이 토론하였다. 이런 사조(思潮)의 대표적인 학자가 양웅이고, 이런 차원에서 저술한 저작이 바로 《태현경》이다. 그는 평생 유가와 도가를 통합하고, 유학의 정통사상을 회복시키는데 진력하여 당시 만연되었던 천인감응을 반대하고 참위미신을 배격하였으며, ‘현(玄)’을 본체로 삼는 우주의 도식(圖式)과 ‘선악이 혼재된’ 인성학설을 제기하였다.
유가의 경전을 점성술적이고 신비적·예언적으로 해석하는 참위(讖緯)가 극성을 이루고,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숭상하는 이른바 황로학(黃老學)이 횡행하던 시대여서 양웅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고사전(高士傳)》이란 역대 저명한 은일자(隱逸者)들의 전기물에 수록된 엄준(嚴遵)이란 인물의 행적에 의하면, 양웅은 성도(成都) 저잣거리에서 점치는 일로 생업을 이어가던 엄준을 따라다니며 배웠다고 한다. 점복(占卜)에 종사한 행적과 《노자》 연구에 천착했다는 행적으로 볼 때, 참위설을 신봉하던 황로학 사상가인 엄준을 스승으로 삼아 배운 양웅 또한 학문적 사상적 기반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흠(劉歆)처럼, 양웅도 한나라 왕조를 찬탈하고 신(新) 왕조를 건국한 왕망(王莽)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 대가로 양웅에게는 대중대부(大中大夫)라는 높은 관직이 주어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양웅은 능숙한 문학적 역량을 발휘해서 왕망을 찬양하는 〈극진미신(劇秦美新)〉이라는 유명한 글을 짓기도 했다. 서한 정권을 버리고 왕망을 택한 이런 행태는 대의명분에 투철하고자 하는 후대의 유자(儒者), 특히 주희(朱熹)를 대표로 하는 성리학자들에 의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양웅은 유자로서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기에 동한 초기 사상가들인 환담(桓譚)이나 왕충(王充) 같은 이는 물론이고, 유가적 대의명분을 주창한 당대의 한유(韓愈)나 유종원, 북송(北宋)의 사마광과 왕안석(王安石) 등에게도 높이 추앙받았다. 하지만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나 북송의 소식(蘇軾), 남송(南宋)의 주희 등으로부터는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한 때 공자나 맹자, 순자 등에 견주어 양자(楊子)로까지 추앙된 양웅은 주자성리학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계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절조(節操) 없는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후세의 《태현경》 연구가들은 ‘현’을 중심사상으로 삼아 유(儒)·도(道)·음양(陰陽)의 삼가사상을 통합하고자 했고, 양웅이 제창한 ‘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집착과 탐구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지배한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육조 시기 도가사상의 선구라고 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음양 두 기운을〉 불면 흩어져 그 형체가 흐르고, 빨아들이면 모여들어 형체를 이룬다. 이런 까닭에 천지가 합쳐진 것을 공간이라 하고, 천지가 개벽한 것을 시간이라고 한다.[嘘則流體 唫則凝形 是故闔天謂之宇 闢地謂之宙]” 〈현리(玄攡)〉
• “군자가 날마다 자신의 부족한 것을 강하게 하고 그 남는 것을 제거하면 현의 도에 가까울 것이다.[君子日强其所不足 而拂其所有餘 則玄之道 幾矣]” 〈현리(玄攡)〉
• “본질과 핵심은 자연스러움에 있지만, 화려한 수식은 작가가 윤색하는 데 달려 있다.[質幹在乎自然 華藻在乎人事]” 〈현영(玄瑩)〉
• “계승하면서 새롭게 혁신할 수 있으면 천도는 얻게 되고, 혁신하면서 계승할 수 있으면 천도는 순응하게 된다.[因而能革 天道乃得 革而能因 天道乃馴]” 〈현영(玄瑩)〉
(2)색인어:양웅(楊雄), 태현경(太玄經), 육적(陸績), 범망(范望), 사마광(司馬光)의 태현집주(太玄集注), 진본례(陳本禮), 태현천비(太玄闡秘), 정만경(鄭萬耕), 태현교석(太玄校釋), 유소군(劉韶軍), 태현교주(太玄校注)
(3)참고문헌
• 太玄集注(司馬光 集注, 劉韶軍 點校, 中華書局)
• 太玄經解(范望(晉), 中華書局)
• 太玄闡秘(陳本禮(清), 中華書局)
• 太玄校釋(鄭萬耕, 中華書局)
• 楊雄集校注(張震澤 校注, 上海古籍出版社)
• 楊雄集校注(林貞愛 校注, 四川大學出版社)
• 太玄校注(劉韶軍 著, 華中師範大學出版社)
• 태현경(김태식, 자유문고)
【이장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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