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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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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서는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했던 진 왕조(557~589)의 역사를 기술한 기전체(紀傳體) 사서로 중국의 정사(正史)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당대의 관료이자 문인인 요사렴(姚思廉)이 지었으며 전 36권으로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10년(636)에 완성되었다. 남조 진(陳) 일대를 기술한 사서로 본기와 열전의 말미에 첨부된 사론들 가운데는 저자인 요사렴 외에 요사렴의 부친인 요찰(姚察)과 당대(唐代)의 명신인 위징(魏徵)의 문장도 포함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요사렴(姚思廉)(557~637)
(2) 자자(字)·별호(別號):자는 간지(簡之)
(3) 출생지역: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현 중국 섬서(陝西) 장안현(長安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요사렴은 원래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했던 남조 진(陳) 출신으로 진이 멸망하기 전에는 양주주부(揚州主簿)를 지냈다. 그의 부친 요찰(姚察)은 진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올랐는데, 진이 수(隋)에 의해 망하자 수 조정으로 들어가 중용되어 태자내사인(太子內舍人), 비서승(祕書丞) 등의 관직을 지냈다. 요사렴은 부친으로부터 한사(漢史)를 가학으로 전수받았는데, 이것이 후일 그가 《양서(梁書)》와 《진서(陳書)》의 편찬을 담당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 그는 수왕조에서는 한왕부참군(韓王府參軍), 대왕시독(代王侍讀) 등 왕부(王府)의 관을 지냈고 양제(煬帝)의 명을 받아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조준(崔祖濬)과 함께 《구우도지(區宇圖志)》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후 수에서 당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을 때, 그는 당시 진왕(秦王)으로 있던 태종의 눈에 들어 진왕부문학(秦王府文學)으로 등용되었고, 태종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으며 태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저작랑(著作郞),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산기상시(散騎常侍)까지 올랐다. 정관(貞觀) 11년(637)에 죽었다. 그는 황제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인한 성품으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태종은 그가 죽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루 동안 조회를 정지했고 그를 태상경(太常卿)에 추증함과 동시에 자신의 능인 소릉(昭陵)에 배장(陪葬)을 명했다. 배장은 황제가 자신의 능묘 근처에 별도로 장지를 내주어 그곳에 무덤을 쓰게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요사렴에 대한 태종의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5) 주요저작:요사렴의 열전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저서로 본서 외에도 《구우도지(區宇圖志)》, 《진서(陳書)》 등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서와 《진서》이다.

3. 서지사항 및 특징

본서는 남북조시대 강남 남조의 왕조들 가운데 하나인 진(558~589) 일대를 다룬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요사렴의 《진서》 이전에도 진의 사적을 기록한 사서들은 존재했다. 진이 망하기 전에 고야왕(顧野王)과 부재(傅縡)가 진(陳)의 무제기(武帝紀)와 문제기(文帝紀)를 지었고, 진 선제(陳宣帝) 때에는 육경(陸瓊)이 여러 편의 국사(國史) 지었다고 한다. 이를 다시 요찰이 이어받아 산삭과 개정을 가하고 대강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다가 진이 수에 의해 망함에 따라 작업은 중단되었고 요찰은 이를 가지고 수 조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이를 완성하지 못했고, 죽음에 임하여 아들인 요사렴에게 미완의 작업을 완성시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요사렴은 표문을 올려 당시 황제인 양제(煬帝)에게 양사(梁史)와 진사(陳史)의 편찬을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양제도 이를 허락하였다. 하지만 수왕조의 치세에서는 끝내 그 책이 완성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본격적으로 그가 작업에 착수한 것은 당대(唐代)에 와서였다. 요사렴은 당 고조(高祖) 무덕(武德) 5년(622년) 조서를 받아 《진서(陳書)》의 편찬에 착수했는데 당시에는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 후 태종은 정관 3년(629) 그에게 조서를 내려 위징(魏徵)과 함께 《진서(陳書)》와 《양서(梁書)》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7년 만인 정관 10년(636) 비로소 본서와 《양서》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전 36권으로 이 가운데 본기가 6권, 열전이 30권으로 지와 표는 없다. 본서 외에도 《북제서(北齊書)》, 《북주서(北周書)》, 《수서(隋書)》가 나란히 636년에 완성되었고 이를 통틀어 오대사(五代史)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들 오대사 모두 지가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관 15년(641) 태종은 다시 이에 대한 지의 편찬을 명했고, 조대를 넘어 고종(高宗) 현경(顯慶) 원년(656)에 완성되니 이를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 하였다. 이 지는 예의(禮儀), 음악(音樂), 율력(律曆), 천문(天文), 오행(五行), 식화(食貨), 형법(刑法), 백관(百官), 지리(地理)의 9부분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권질이 왕조별로 나뉘어 각각의 사서에 배정된 것이 아니라 일괄 《수서》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수서》의 지에는 수대의 전장제도 외에 양, 진, 북제, 북주의 사적을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진서》에 빠져 있는 지는 《수서》의 지를 통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대(唐代)에 남조의 정사들을 요약한 《남사(南史)》가 편찬되어 유행하게 되면서 본서는 점차 읽히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북송(北宋)에 이르러서는 원문에 많은 탈오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북송 인종(仁宗) 가우(嘉祐)연간(1056~1063) 황제의 명령에 의해 교감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증공(曾鞏)의 주도로 교정작업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그는 영종(英宗) 치평(治平)연간(1064~1067) 본서의 교정본을 올렸다. 이때 추가된 것이 목록(目錄)인데 이는 교정 이전의 구본(舊本)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증공이 독자의 편의를 위해 별도로 만든 것이다.
현재 전하는 판본은 삼조체수본(三朝遞修本)(일명 삼조본(三朝本)), 명, 청시대 상숙(常熟)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십칠사(十七史),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일명 남감(南監)), 북경국자감(北京國子監)(일명 북감(北監))의 이십일사(二十一史), 무영전(武英殿)의 이십사사(二十四史) 수록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조본은 송, 원, 명 세 왕조에 걸쳐서 수정된 판본을 이용하여 중수(重修), 보각(補刻)된 판본을 말한다. 이후 민국시기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결락을 다른 판본들과 대조하여 보충하고 영인(影印)한 일명 백납본(百衲本) 이십사사(二十四史)가 간행되었고, 본서 역시 이 백납본 이십사사에 수록되었다. 백납본에서는 삼조본을 채택하였다. 1972년에는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이상의 판본들을 비교, 대조하여 원문을 교감하고, 표점한 점교본(點校本)이 간행되었고 오늘날에는 이 간행본이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4. 내용

본서의 기와 열전의 각권 말미에는 사론이 첨부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무제기(武帝紀)와 문제기(文帝紀)의 사론만 요찰(姚察)의 문장이다. 나머지 본기와 황후전(皇后傳)의 사론은 위징의 문장이다. 이를 통해 《양서》의 상당부분이 요찰의 원고에 의거한 것과 달리 본서에서 요찰의 원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요찰이 죽기 직전, 《양서》는 그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달했음에 비해 《진서》는 막 시작 단계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본서의 본기 2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요사렴에 의해 기술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요사렴은 부친인 요찰의 열전을 본서 제27권에 수록했는데 그 분량이 진조(陳朝)의 창업에 기여했던 공신들의 열전을 압도한다. 이는 자식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고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으로 지적된다. 비록 요찰이 남조 진의 이부상서를 지냈지만 수로 들어가 그 관료로서 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의 열전은 《수서》에 수록되는 것이 옳다. 요찰 외에 강총(江總), 원헌(袁憲) 등도 수에서 생을 마쳤으나 그들의 열전은 모두 《진서》에 수록되어 있다. 이 같은 본서의 인물배치는 시대구분과 그 적용에 있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한편 남조의 다른 정사들이 열전 내에 외국전(外國傳)을 설정하여 중국 왕조와 교섭했던 주변지역의 국가와 민족집단에 대한 정보를 수록한 것과 달리 본서에는 이러한 부문이 없다.

5. 가치와 영향

본서는 편목과 체제의 구성 등에 있어서 앞서 나온 남조의 다른 정사들과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게다가 당대(唐代)에 남조의 정사들을 요약한 《남사(南史)》가 편찬되어 유행함에 따라 본서는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가 남조 진(陳) 일대를 다룬 정사로서는 유일하다는 점, 남조의 사정사(四正史)들 가운데 성립 당시 원본의 면모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사》의 보충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가장 적다는 점 등에서 그 사료적 가치는 결코 낮지 않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제 그 열전을 읽어보면 체제가 정연하니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양서(梁書)처럼 들쭉날쭉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今讀其列傳 體例秩然 出於一手 不似梁書之參差 亦以此也]”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 “남사(南史)가 다른 책들에 대해서는 더하거나 덜어낸 것들이 많으나 오직 진서(陳書)만은 〈그러한 산삭이〉 매우 적다.[南史於他書多所增刪 獨至陳書則甚少]” 조익(趙翼), 《이십이사차기(廿二史箚記)》
(2) 색인어:진서(陳書), 요찰(姚察), 요사렴(姚思廉), 위징(魏徵), 진사(陳史), 당(唐), 태종(太宗), 수서(隋書)
(3) 참고문헌
‧ 陳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陳書全譯(二十五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양진성】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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