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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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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논어정의(論語正義)》는 청대(淸代)의 고증학자(考證學者)인 유보남(劉寶楠)이 《논어(論語)》의 경문과, 하안(何晏(193?~249))의 《집해(集解)》를 함께 해설하는 소(疏)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논어》 주석서이다. ‘소’의 형식으로 작성된 주석은 기존 주석의 성과를 폭넓게 흡수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유보남이 지은 《논어정의》는 한대(漢代)의 구설(舊說)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의 새로운 해석과 관점, 그리고 고증자료를 대량으로 수록하고 있어 그 어떤 주석서보다 훈고⋅고증이 가장 자세하다. 따라서 유보남의 《논어정의》는 청대 《논어》 연구의 집대성이며, 경학(經學) 저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권17까지는 유보남이 직접 찬술하였고, 뒤의 7권은 유보남이 작성한 장편(長編)을 기초로 아들 유공면(劉恭冕)이 찬술하였다.

2. 저자

(1) 성명:유보남(劉寶楠(1791~1855)), 유공면(劉恭冕(1824~1883)).
(2) 자(字)·호(號):유보남의 자는 초정(楚楨)이고, 호는 염루(念樓)이다. 유공면의 자는 숙면(叔俛)이다.
(3) 출생지역:강소성(江蘇省) 보응현(寶應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유보남은 1791년 강소성 보응현에서 아버지 유이순(劉履恂(1738~1795))과 어머니 교씨(喬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자는 적구(迪九)이고, 건륭(乾隆) 51년(1786)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국자감 전부(國子監典簿)를 지냈으며, 저서에는 《추사찰기(秋槎札記)》가 있다.
유보남은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교씨의 가르침 속에 성장하였다. 애초에 유보남은 종부(從父) 유태공(劉台拱)의 한학(漢學)이 깊고 정밀하였으므로 유태공에게 전수받기를 청하여 학행으로 향리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제생(諸生)이 되었을 때 의징(儀徵)의 유문기(劉文淇)와 명성을 나란히 하여 사람들이 “양주이류(揚州二劉)”라고 칭송하였다. 도광(道光) 20년(1840) 진사(進士)가 되어 직례성(直隷省)(하북성(河北星)의 옛이름) 문안현(文安縣)의 지현(知縣)을 제수 받았다.
유보남은 16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항상 의관이 소박하여 마치 제생 때와 같았다. 송사를 처리함에 신중하였고, 문안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쌓인 현안 1,400여 건을 자세하게 살펴 결론을 내렸으며, 새벽닭이 처음 울 때면 당청에 앉아 원고와 피고가 모두 법정에 나오고 증거가 구비되면, 때에 맞춰 상세히 국문을 하였다. 큰 사건이건 작은 사건이건 할 것 없이 균등하게 자기의 뜻대로 안건을 판결 지었고, 패도(悖道)한 자는 법의 판례에 비추어 죄를 다스렸다.
유보남은 경전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씨(毛氏)의 《시경(詩經)》과 정씨(鄭氏)의 《예(禮)》를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뒤에 유문기 및 강도(江都)의 매식지(梅植之(1794~1843)), 경현(涇縣)의 포신언(包愼言(?~?)), 단도(丹徒)의 유흥은(柳興恩(1795~1880)), 구용(句容)의 진립(陳立(1809~1869))과 함께 각각 하나의 경전을 전공할 것을 약속했다. 유보남은 과장에서 문제를 내어 고시를 보일 때 《논어》를 얻었는데, 황간(皇侃)과 형병(邢昺)의 《논어(論語)》 소(疏)가 거칠고 견문이 좁고 적음을 병통으로 여겨 이에 한유(漢儒)의 구설(舊說)을 모으고, 게다가 송나라 시대 사람들의 의론 및 근세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보태어 초순(焦循(1763~1820))이 《맹자정의(孟子正義)》를 저술한 체재를 따라 먼저 장편(長編)을 만들고, 그런 다음 바로 모으고 절충하여 《논어정의》 24권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관직의 일이 많아서 일을 마치지 못하고 아들 유공면(劉恭冕(1824~1883))에게 명하여 이어서 완성하게 하였다. 함풍 5년(1855)에 죽으니, 향년 65세이다.
유공면은 광서(光緖) 5년(1879)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가학(家學)을 지켜 경훈(經訓)에 통달했고, 경학을 공부하며 거처하는 당(堂)의 이름을 광경당(廣經堂)이라 했다. 안휘성(安徽星)의 학정(學政) 주란(朱蘭(1800~1873))의 막하(幕下)에 들어가 이이덕(李貽德(1783~1832))의 《춘추좌씨전가복주집술(春秋左氏傳賈服注輯述)》을 교정하여 백 수십 가지의 일을 옮겨서 보충하였다. 후에 호북(湖北)의 경심서원(經心書院)에서 주강(主講)이 되었는데, 돈독한 품행과 신중한 행실로 질박한 학문을 숭상하였다.
역대 제가의 이설(異說)을 참고하고 비교하여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논어정의》를 완성하고, 《면양주지(沔陽州志)》와 《황주부지(黃州府志)》, 《한양부지(漢陽府志)》, 《황강현지(黃岡縣志)》를 편찬했다. 향년 60세이다.
(5) 주요저작:유보남은 《보응도경(寶應圖經)》 6권, 《승조순양록(勝朝殉揚錄)》 3권, 《문안제공록(文安隄工錄)》 6권이 있고, 이 외에 《석곡(釋穀)》 4권이 있는데, 대부분 정요전(程瑤田(1725~1814))의 《구곡고(九穀考)》의 설을 보정한 것이고, 《한석례(漢石例)》 6권은 비지(碑志)의 체제와 격식에 대한 고증이 자세하고 넓다.
유공면은 《논어정의보(論語正義補)》, 《하휴논어주훈술(何休論語注訓述)》, 《광경실문초((廣經室文鈔)》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유보남은 《논어정의》를 도광(道光) 8년(1828년)에 처음 쓰기 시작하였는데, 함풍(咸豊) 5년(1855)에 거의 완성되려 할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유공면이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동치 4년(1865)에 전서가 완성되었다. 《논어정의》의 완성은 전후 38년이 소요되었으며, 동치 5년에 최초 판각본이 간행되었다. 이후 이 초간본에 의거해 번각 혹은 활자화된 《황청경해속편(皇淸經解續編)》본, 《사부비요(四部備要)》본, 《만유문고(萬有文庫)》본, 《제자집성(諸子集成)》본, 《국학기본총서(國學基本叢書)》본, 고유수(高流水)의 교감과 표점 작업을 거친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십삼경청인주소(十三經淸人注疏)》본이 있다.

4. 내용

유보남의 《논어》 연구는 가학(家學)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의 《논어정의》는 그가 38세에 뜻을 두고 착수하여 평생을 바친 저작으로, 청대 《논어》 연구의 결정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유보남의 《논어정의》는 흔히 한유(漢儒)의 구주(舊注)를 망라한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 위(魏)⋅양(梁) 제가(諸家)의 관점을 광범하게 수집하고 있는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주희(朱熹)의 《논어집주(論語集註)》와 더불어 《논어》 주소(注疏)의 사거서(四巨書)로 손꼽힌다.
사실 청대의 고증학 중심의 《논어》 연구는 청나라 중기를 거치면서 유태공(劉台拱)의 《논어병지(論語騈枝)》, 초순의 《논어하씨집해보소(論語何氏集解補疏)》, 송상봉(宋翔鳳)의 《논어정주(論語程注)》에 오게 되면 한위(漢魏) 경사(經師)의 《논어》 연구와 구주(舊注)의 분석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연구 성과와 초순의 《논어통석(論語通釋)》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제창은 경서에 대한 신주소(新注疏)가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는데, 그 위에서 성립된 것이 바로 유보남의 《논어정의》였다.
유보남은 《논어》를 연구함에 정현(鄭玄)의 주석을 높이 받아들였으며, 하안의 《논어집해》에 대해 “위인(魏人)의 《집해》는 정현의 주에 비해 산일(刪佚)한 것이 많아, 위공(僞孔)ㆍ왕숙(王肅)의 설이 도리어 그것을 바탕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이다.[魏人集解於鄭注多所刪佚 而僞孔王肅之說 反藉以存 此其失也]”고 하였고, 《논어의소》와 《논어주소(論語注疏)》에 대해서는 “양(粱)의 황간(皇侃)은 《논어집해》에 의지해서 소(疏)를 달았는데, 거기에 실려 있는 위(魏)와 진(晉)의 제유들의 강의(講義)는 청담과 현묘를 섭렵함이 많아 궁실과 의복 등 여러 예에 대하여 빼놓고 말하지 않았다.[粱皇侃依集解爲疏 所載魏晉諸儒講義 多涉淸玄 於宮室衣服諸禮厥而不言]”라고 하였으며, “송(宋)의 형병(邢昺)은 또 황씨(皇氏)를 근거로 별도의 소를 달았는데, 글자에 의지해 뜻을 부풀려 놓았으니 더더욱 족히 취할 만한 것이 없다.[宋邢昺又本皇氏 別爲之疏 依文衍義 益無足取]”라고 하였다. 더욱이 송유(宋儒)의 《논어》학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유보남은 자신의 이해를 시대적인 토양과 결합시킴으로써 한송겸채(漢宋兼采)의 《논어》학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논어정의》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논어정의》는 기본적으로 《논어》를 20편으로 분류하되, 〈팔일(八佾)〉, 〈향당(鄕黨)〉이 예악제도를 많이 말하였으므로 자세하게 주석하여, 〈팔일〉을 2권(권3,4)으로 나누고 〈향당〉을 25절 3권(권11,12,13)으로 나누었으며, 권24에는 하안의 〈논어서(論語序)〉를 수록하였고, 부록으로 〈정현논어서일문(鄭玄論語序逸文)〉을 붙이고 유공면의 〈후서(後序)〉를 더하여 모두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에서 권17까지는 권의 제목 아래 “보응유보남학(寶應劉寶楠學)”이라고 되어있고, 권18에서부터 권24까지는 “공면술(恭冕述)”이라고 되어 있어 앞의 17권은 유보남이 저술한 것이고, 그 이하는 아들 유공면이 완성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논어정의》는 범례 상에 있어서 경문(經文)과 주석의 글은 모두 송나라 형병(邢昺)의 「소(疏)」본을 따랐고, 한과 당의 석경(石經), 《논어의소》 및 《경전석문(經傳釋文)》의 각본의 이문(異文)을 「소」 가운데 열거하였다. 또 경문은 《십삼경주소》의 형소본(邢疏本)을 저본으로 하고, 주문(注文)은 하안의 《논어집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유보남이 경문의 문자 교감(校勘)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은 당송이래의 판본이다. 한·당·송의 석경은 물론이고, 황간의 「소」, 육덕명의 《경전석문》에 실려 있는 명본(名本)을 형소본 문자와 비교하여 자신의 새로운 「소」 안에 반영하고 있지만, 명·청 시기에 새로 출현한 문자의 차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논하지 않는다. 이 또한 《논어정의》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유보남은 황간의 소에 실려 있는 하안의 주석이 비록 상세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전적의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보고 대신 형병의 소에 실려 있는 하안의 주석을 사용한다.

5. 가치와 영향

청나라 때의 관료이자 학자인 장백행(張伯行(1652~1725))의 《청사열전(淸史列傳)》에서는 《논어정의》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논어》 〈학이〉의 제12장인 ‘유자언체지용(有子言體之用)’ 장을 《중용》의 설이라고 밝힌 것과, ‘50세에 천명을 알았다.’는 것을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음을 알았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 자유와 자하가 효를 물은 것에 대한 해석에서 ‘선비의 효’라고 말한 것,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겠다.’고 한 것을 지금의 고려(한국)를 가리킨다고 해석한 것 등인데, 이 모두는 2천여 년 동안이나 드러나지 않았던 옛 성현의 뜻을 비로소 밝힌 것이이며, 특히 〈팔일〉, 〈향당〉 두 편에서 밝힌 예제(禮制)는 상세하고도 정확하다고 평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논어정의》의 가치를 정리해보면, 문자훈고(文字訓詁)나 선진사사(先秦史事), 고대의 전적을 박람(博覽)하면서도 요령이 있다. 광범하게 인용하고 좋은 것을 골라서 따랐으며, 책 속에서 충분히 앞사람이 《논어》를 연구한 성과를 흡수하였다. 청인(淸人)이 집록한 정현의 남아있는 주석을 모두 소 안에 수록하고 《집해》를 사용하여 한(漢)·위(魏)의 옛 모습을 간직했다. 경의 해석은 주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또 경에 의거해 소를 보충하였고, 소에 잘못이 있으면 경의 뜻에 근거해 변론하였다. 또한 《논어정의》에서는 청대의 고증학을 드러내고 문자훈고와 사실의 고정(考訂)에 주의하였으며, 전장(典章), 명물(名物), 인명, 지명, 역사적 사건에 대해 모두 하나하나 주석하고 고증하여 자세하게 갖추었으면서도 대의가 남김없이 모두 개괄되었다. 또한 내용이 박흡(博洽)하고 고석(考釋)이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며 정밀하다.
또한 《논어정의》는 가장 최후에 나온 저술답게 이전의 여러 주석서의 장점을 고루 흡수하였다. 한·위의 고주(古注)를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이런 고주에 대해 상세하게 소해(疏解)하였고, 그 결과 주석내용을 풍부하게 했으며, 고거(考據)와 의리(義理)를 아울러 중시하였고 간혹 송유(宋儒)의 학설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문학파(金文學派)에 대한 이해도 있으며 건륭(乾隆)·가경(嘉慶) 고증학 황금시대의 다음 시대 저술로서 제가(諸家)의 설을 집대성한 것이 이 책의 제일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예기(禮記)》 〈증자제언(曾子制言)〉 중에 ‘내가 그 사람을 인(仁)하지 않다고 여기면 비록 홀로 있더라도 나는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주공이 말했다. ‘나만 못한 사람과 나는 함께 처하지 않으니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와 대등한 사람과 나는 함께 처하지 않으니, 나에게 무익한 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함께 처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다.’ 증자와 주공의 말을 살펴보면 자기만 못한 사람이란 곧 불인(不仁)한 사람이다. 공자는 이러한 사람을 심히 배척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자기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 것이다.”[曾子制言中 吾不仁其人 雖獨也 吾弗親也 故周公曰 不如我者 吾不與處 損我者也 與我等者 吾不與處 無益我者也 吾所與處者 必賢于我 由曾子及周公言觀之 則不如己者卽不仁之人 夫子不欲深斥 故只言不如己而已] 〈학이(學而)〉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의 말에 의거하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겠다.’라고 한 것은 동이(東夷)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로 발해(勃海)였던 것이다.”[據志言 則浮海指東夷 卽勃海也]
• “공자가 구이(九夷)에서 살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누추한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그곳에 살고 있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정의(正義)》에서 말한다. ‘공자가 구이에서 살려고 한 것과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한 것은 모두 조선(朝鮮)을 이른다. 공자가 중국에서 등용되지 않아 결국 국외에서 도를 실행하고자 한 것이니, 그 나라에는 인자(仁者)와 현자(賢者)의 교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은 앞의 부해(浮海)의 소(疏)에 보인다.’”[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正義曰 子欲居九夷 與乘桴浮海 皆謂朝鮮 夫子不見用於中夏 乃欲行道於外域 則以其國有仁賢之化故也 說見前浮海疏] 〈자한(子罕)〉
(2) 색인어:논어(論語), 논어정의(論語正義), 논어집주(論語集註), 논어주소(論語註疏), 논어집해(論語集解),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경전석문(經典釋文), 칠경맹자고문(七經孟子考文), 대학(大學), 중용(中庸),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현(鄭玄), 공안국(孔安國), 황간(皇侃), 유보남(劉寶楠), 유공면(劉恭冕), 육덕명(陸德明), 오규 소라이[狄生徂徠], 야마노이 곤론[山井崑崙], 아시카[足利], 훈고학(訓詁學), 고증학(考證學)
(3) 참고문헌
• 論語正義(劉寶楠, 中華書局, 1990)
• 論語正義(劉寶楠, 臺北 :臺灣中華書局, 民國57[1968])
• 論語正義(劉寶楠, 上海 :上海古籍出版社,1995)
• 論語注疏(注 魏ㆍ何晏, 疏 宋 邢昺, 臺灣古籍出版有限公社,2001)
• 論語義疏(梁 皇侃 撰, 中華書局, 2013)
• 論《論語》中〈顏淵〉二種詮釋-以劉寶楠《論語正義》與朱熹《論語集注》為核心(劉鐔靖, 輔大中研所學刊, 2017)
• 《論語正義》之撰作緣起與成書過程再探-以劉氏父子《論語》諸稿本為考察中心(陸駿元, 臺大中文學報, 2021)
• 《논어정의》는 어떻게 집필하였는가-증학적 연구방법으로서의 장편長編(김효신, 인문논총, 2018)
• 失熹의 『論語集注』와 劉寶楠의 『論語正義』에 나타난 '仁'의 해석학적 비교(윤혜정, 誠信女子大學校 大學院 석사학위 청구논문, 2010)

【함현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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