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동양고전해제집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 개요

북송 태종(太宗) 때 이방(李昉), 호몽(扈蒙), 서현(徐鉉), 송백(宋白) 등 17명이 칙명을 받아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982)부터 옹희(雍熙) 4년(987)에 걸쳐 편찬한 시문집 총집이다.

2. 편자

(1) 성명:이방(李昉)(925~996), 호몽(扈蒙)(915~986), 徐鉉(916~991), 宋白(936~1012) 등.
(2) 자(字)·별호(別號):이방의 자는 명원(明遠) 혹은 명숙(明叔)이고, 호몽의 자는 일용(日用)이고, 서현의 자는 정신(鼎臣)이고, 송백의 자는 태소(太素)이다.
(3) 출생지역:이방은 심주(深州) 요양(饒陽)(현 하북성(河北省) 요양현(饒陽縣)) 사람이며, 호몽은 유주(幽州) 안차(安次)(현 하북성(河北省) 안차현(安次縣)) 사람이다. 서현의 원적은 회계(會稽)(현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인데, 부친 서연휴(徐延休)가 강도소윤(江都少尹)을 지낸 이후 그 곳을 집으로 삼았으므로 광릉(廣陵)(현 강소성 양주(揚州)) 사람이라고도 한다. 송백은 대명(大名)(현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郸市)) 사람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이방은 오대(五代)부터 북송(北宋) 초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오대 후한(後漢) 때 진사가 되고 우습유(右拾遺),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후주(後周) 때 집현전 직학사(直學士),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거쳤다. 북송이 들어선 후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고, 태종 때 참지정사(参知政事),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여, 거란(契丹)과의 수호(修好)를 주장했다, 사공(司空)으로 치사했고, 죽은 후 사도(司徒)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백거이 시풍으로 저명하다.
호몽은 오대 후진(後晉) 천복(天福) 연간에 진사가 되고, 후주(後周)에서 우습유(右拾遺), 직사관(直史館),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아우 호재(扈載)는 한림학사였다. 송(宋)나라에 들어와 중서사인을 거쳐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태조 건덕(乾德) 6년(963)에 지제고가 되고 사관(史館)의 수찬(修撰)으로 충원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중서사인에 배수되고 다시 한림학사가 되었다. 옹희(雍熙) 3년(986)에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했다. 문집으로 《오산집(鰲山集)》이 있다.
서현은 십국(十國)의 양오(楊吳)에서 교서랑(校書郎)을 지내고, 남당(南唐)에서 벼슬을 살아 지제고, 중서사인, 한림학사, 이부상서를 지냈다. 송나라가 되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순화(淳化) 연간에 정난군(靜難軍)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좌천되었다. 아우 서개(徐鍇)와 함께 소학(小學)에 밝았다.
송백은 건륭(建隆) 2년(961)에 진사가 되고, 건덕(乾德) 초(963)에 발췌(拔萃) 시험에서 고등을 하여 저작좌랑(著作佐郎)을 제수받았다. 태종이 발탁하여 좌습유, 권지연주(權知兗州)를 삼았다. 관직은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죽은 후 문헌(文憲)의 시호를 받았다.
(5) 주요저작
이방은 송대 4대 유서 가운데 《문원영화》를 비롯해서 《태평어람(太平御覽)》, 《태평광기(太平廣記)》의 편찬에 참여했다. 문집이 있었으나, 일실되었다. 태종 때 호몽과 함께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엮었다.
호몽은 태조의 개보(開寶) 연간에 이목(李穆) 등과 함께 《오대사(五代史)》를 엮고, 《고금본초(古今本草)》를 상정했다. 태종 때 이방과 함께 《태조실록》을 엮었다.
서현은 옹희 연간(984~987) 조칙을 받아 구중정(句中正), 갈단(葛湍) 등과 함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교정해서, 세칭 대서본(大徐本)을 이루었다. 문집 30권과 《질의론(質疑論)》이 있다.
송백은 문집 1백 권이 있었다고 한다.

3. 서지사항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이방, 호몽, 서현, 송백 등 17명이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982)부터 편찬을 시작했고, 후에 태종은 다시 소이간(蘇易簡), 왕우(王祐), 범고(范杲), 송식(宋湜) 및 송백 등에게 찬수를 명해서 옹희(雍熙) 3년(986)에 초고가 완성되어 이듬해 완료되었다. 전체 1000권, 목록 50권에 달한다.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년)에 다시 번잡한 부분과 빠진 부분을 중수하고,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에 칙명으로 다시 석대문(石待問), 장병(張秉), 설영(薛映), 척륜(戚綸), 진팽년(陣彭年) 등이 교감했다. 남송 가태(嘉泰) 4년(1204)에 간행되었는데, 송본(宋本)으로써 현존하는 것은 140권이다. 명나라 융경(隆慶) 원년(1567)에 나머지 860권을 간행했다. 명나라 가정(嘉靖) 45년(1566) 호유신(胡維新) 등이 전초본(傳抄本)을 저본으로 중각했다. 한편, 본래 오자와 탈자가 많았으므로, 남송 팽숙하(彭叔夏)의 《문원영화변증(文苑英華辯証)》 10권과 청나라 노격(勞格)의 《문원영화변증습유(文苑英華弁証拾遺)》가 나왔다. 1966년에 중국의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송간 잔본 140권, 명간 860권을 영인하고 원서를 교정했으며, 《문원영화변증》과 《문원영화변증습유》를 수록하고 작자성명색인(作者姓名索引)을 붙여서 간행했다. 2003년 같은 출판사가 재출간했다.

4. 내용

《문원영화》는 《태평광기(太平廣記)》․《태평어람(太平御覧)》․《책부원귀(冊府元龜)》와 함께 宋四大書로 일컬어진다. 남조 양나라 때의 《문선》, 당나라 때의 《문관사림》을 이은 것으로, 양(梁)나라 말부터 당나라 말까지 2,200명의 시문 2만 편을 채록하였다. 전부 1,000권, 목록 50권에 달한다. 문체를 부(赋), 시시(詩), 가행(歌行), 잡문﹑雜文, 중서제고﹑中書制誥, 한림제고﹑翰林制誥 등 39류로 분류했다. 혹 시책(諡册)과 애책(哀册)을 합병하면 38류이다.
명나라 때 호응린(胡應麟)은 유서를 사부(四部) 바깥에 따로 배열하여 불경(佛經)․도경(道經)․위고서(僞古書)와 동류로 두었으나, 명나라 임세근(林世勤)은 사부에 모두 유서가 있다고 하였다. 즉 임세근은 《오경통의(五經通義)》․《구경보운(九經補韻)》 등을 경부(經部) 유서(類書), 《통전(通典)》․《회요(會要)》 등을 사부(史部) 유서(類書), 《초학기(初學記)》․《예문유취(藝文類聚)》 등을 자부(子部) 유서(類書), 《문원영화》․《당문수(唐文粹)》․《송문감(宋文鑑)》 등을 집부(集部) 유서(類書)라고 보았다. 이후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는 유서를 자부(子部)의 한 부류로 설정하였다. 임세근의 분류는 유서의 실상에 부합하지만 유서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문원영화》․《당문수》․《송문감》은 집부(集部) 총집류(總集類), 《오경통의》는 경부(經部) 저술(著述), 《구경보운》은 음의류(音義類)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원영화》는 문체별 분류 방식을 취하였으나, 문체의 하위에는 다시 천상(天象)․세시(歲時)․지류(地類)․수(水)․제덕(帝德) 등등의 의미별 분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문체는 부(賦), 시(詩), 가행(謌行), 잡문(雜文), 중서제고(中書制誥), 한림제고(翰林制誥), 책문(策問), 책(策), 판(判), 표(表), 전(牋), 장(狀), 격(檄), 노포(露布), 탄문(彈文), 이문(移文), 계(啓), 서(書), 소(疏), 서(序), 논(論), 의(議), 주(珠)․유대(喩對), 송(頌), 찬(讚), 명(銘), 잠(箴), 전(傳), 기(記), 시애(諡哀), 책문(冊文), 시의(諡議), 뇌(誄), 비(碑), 지(誌), 묘표(墓表), 행장(行狀), 제문(祭文) 등이다. 그 가운데 부(賦)와 시(詩)의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賦
天象, 歲時(刻漏附), 地類, 水, 帝德, 京都, 邑居, 宮室, 苑囿․朝會, 禋祀, 行幸, 諷諭, 儒學, 軍旅, 治道, 樂, 鐘鼓, 雜伎, 飮食, 符瑞, 人事, 志, 射․博奕, 工藝, 器用, 服章, 圖畵, 寶, 絲帛, 舟車, 薪火, 畋漁, 道釋, 紀行, 遊覽, 哀傷, 鳥獸, 蟲魚, 草木

• 詩
① 天部 1(日 月 仲秋月 翫月 對月), 天部 2(望月 雜題月 星), 天部 3(雨 喜憂 對雨 苦雨 雜題雨), 天部 4(詠雪 對雪), 天部 5(詠雪雜題 晴霽), 天部 6(風 雜題風 雲 雜題雲 霜 露 霧 煙霞 天河 虹蜺), 天部 7(元日 春 人日 上元 寒食 上巳 夏 端午 伏日), 天部 8(秋 七夕 九日 冬 除夜)
② 地部 1(山 終南山 太山 華岳), 地部 2(南岳 廬山 望夫山 歸山 山中 雜題), 地部 3(山雜題 洞 峽 石 孤石 太湖石 雜題), 地部 4(海 江 潮), 地部 5(河 湖 潭 水 泉), 地部 6(泉 瀑布 雜題 曲江 昆明池 溫湯), 地部 7(池 遊泛), 地部 8(池雜題 溪 遊泛 雜題)
③ 帝德
④ 應制 1(錫宴 酺宴), 應制 2(侍宴), 應制 3(巡幸1), 應制 4(巡幸2, 扈從附), 應制 5(歲時)[元日 人日 上元 晦日 春 寒食 仲春 中和節 上巳 夏 秋], 應制 6(七夕 九日 追賞 雨 晴 雪), 應制 7(宮 臺 宅), 應制 8(殿 樓 閣 亭 園 幸宅), 應制 9(昆明池 慶池 降慶池 公主林亭 送公主), 應制 10(送餞), 應制 11(寺院 雜題 宮觀 雜題)
⑤ 應令(應敎附)
⑥ 省試 1-10(州府試附)
⑦ 朝省 1(趨朝 寓直), 朝省 2(寓直)
⑧ 樂府 1-20
⑨ 音樂 1(樂 琴 箏 笙 琵琶 箜篌 簫 笛 雜樂), 音樂 2(歌舞附)[歌 舞 歌妓]
⑩ 人事 1(宴集), 人事 2(宴集), 人事 3(宴集), 人事 4(宿會), 人事 5(逢遇)
⑪ 釋門 1-6
⑫ 道門 1(遊仙 神仙 懷仙 夢仙 謫仙 仙谷遇毛女 桃源 秦越人洞中詠 下元齋詠 歌詞), 道門 2(宮觀), 道門 3(宮觀 送贈道人), 道門 4(送贈道人), 道門 5(送贈道人)
⑬ 隱逸 1(徵君 居士 處士), 隱逸 2(處士 山人), 隱逸 3(山人 隱士)
⑭ 寺院 1-7(塔附)
⑮ 酬和 1-7
⑯ 寄贈 1-19
⑰ 送行 1-18, 送行 19(送人省覲), 送行 20(賦物送人 歌附)
⑱ 留別 1-3
⑲ 行邁 1-7, 行邁 8(奉使), 行邁 9(奉使 館驛), 行邁 10(館驛附)
⑳ 軍旅 1(講閱 征伐 邊塞), 軍旅 2(邊將)
㉑ 悲悼 1(追述 僧附), 悲悼 2(哭人), 悲悼 3(哭人), 悲悼 4(哭人), 悲悼 5(哭人 哭僧道 哭妓 送葬), 悲悼 6(墳墓), 悲悼 7(第宅), 悲悼 8(懷古), 悲悼 9(遺跡), 悲悼 10(挽歌)
㉒ 居處 1(上陽宮 九成宮 華淸宮 宮 苑 殿 樓), 居處 2(樓), 居處 3(樓 臺), 居處 4(閣 堂), 居處 5(亭), 居處 6(亭), 居處 7(園齋), 居處 8(別業 村墅), 居處 9(村墅 山莊 田家), 居處 10(宿齋 祠廟)
㉓ 花木 1(牧丹 桃花 杏花 紫薇), 花木 2(梅花 芙蓉 蓮荷 石榴 海棠 玫瑰 玉蘂 薔薇 菊花 蜀葵), 花木 3(山花 刺桐 看花 惜花 殘花 雜花 柳), 花木 4(松 栢 桂 檜 杉 桐 槐), 花木 5(竹 笋), 花木 6(櫻桃 甘橘 桃李 梨 石榴 棗栗 柰 梅 茘 枝 雜果實 樹木 藤 果實附), 花木 7(藥 茶 蘭 萱 衆草 苔 蘆 葦 萍 枹杞 雜詠 木葉 草附)
㉔ 禽獸 1(鳳 鶴 鷹 烏 鵲 鴈 鸎鳳 鶴 鷹 烏 鵲 鴈 鸎), 禽獸 2(百舌 鸚鵡 鴛鴦 鸂鶒 孔雀 鷺鶿 鷄雉 鷓鴣 鳬 鷗 鵝鴨 鷰 雀 子規 雜題 蝶 蜂 螢 蟲附), 禽獸 3(蟲魚:蟬 促織 蜘蛛 馬 猿 獺 魚 龜)

5. 가치와 영향

《문원영화》는 유서로서, 시문이나 문화적 사항의 자료를 찾는 데 활용되어 왔다. 현대에는 일실된 책을 재구성하는 데 자본으로 삼기도 한다. 명․청 때 이루어진 《古詩紀》․《全唐詩》 등은 대개 이 총집에 의거하였다. 2020년 10월에 중국에서 《국가진귀고적명록(國家珍貴古籍名錄)》(第六批)에 등록되었다. 이 유서에는 한국 관련 자료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본서 권161 지부(地部) 3 고석오수(孤石五首)에는 정법사(定法師)의 오언율시 〈영고석(詠孤石)〉이 실려 있다. 《고려사(高麗史)》와 《송사(宋史)》에 의하면 고려 선종(宣宗) 2년(1085) 송나라에서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상기(金上琦)와 예부시랑(禮部侍郞) 최사문(崔思文), 공부상서(工部尙書) 임개(林槩)와 병부시랑 이자인(李資仁)을 각각 조위사(弔慰使)와 하등극사(賀登極使)로 임명하여 송에 파견해서 형법(刑法) 관련 문서와 함께 《태평어람》, 《개보통례(開寶通禮)》, 《문원영화》를 구매하려 했으나 송나라에서는 《문원영화》만 주었다고 한다.(《고려사(高麗史)》 권1 〈세가(世家)1〉 宣宗 2년 3월 무술(戊戌), 동(同) 8월 신미(辛末);《송사(宋史)》 권487 〈열전(列傳)246 외국(外國)3 고려(高麗)〉. 윤병태 《한국서지연표》(韓國圖書館協會, 1972) 참조)
조선 세종 11년인 1429년 5월에는 각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문원영화》 등을 바치도록 명했다. 성종 21년인 1490년에 2월에도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하교하여, 여조겸(呂祖謙)의 《역대사상절(歷代史詳節)》 등등을 민간에서 널리 찾아 올려 보내라고 했는데, 그 서목 가운데 《문원영화》가 들어 있다. 중종 31년인 1536년 11월에는 성절사(聖節使) 송겸(宋㻩)이 중국에서 필사본 《문원영화》를 구입해 올렸다. 중종은 교서관(校書館)으로 보내어 간행하게 하라고 명했으나, 오자(誤字)와 착간(錯簡) 투성이므로 인출하지는 못했다. 선조 때인 1592년의 주청사가 명나라에서 《문원영화》를 구득해왔는데, 그 판본은 융경 원년 간본이었던 듯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집(眉巖集)》 권9에 보면 《문원영화》 등 13종의 책을 구입해왔다고 되어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신라왕이 직금(織錦)하여 만든 시에 ‘이물체함장(理物體含章)’이라 했는데, ‘이(理)’를 《구당서》 본전에서는 ‘치(治)’로 적었다. 이것은 고종 영휘(永徽) 원년에 바친 시이므로, 마땅히 고종의 휘를 피하여야 하니, ‘이(理)’자가 옳다.[新羅王織錦作詩 理物體含章 理 唐書本傳 作治 此在高宗永徽元年獻詩 當避高宗諱則理字是]”(《문원영화변증(文苑英華辨證)》 권8 피위(避諱))
• “신라왕 덕진(본전에는 진덕으로 되어 있다.)이 직금하여 〈태평시〉를 만들었는데, 영휘(永徽) 5년(654) 덕진이 백제의 군사를 대파했다. 고찰하건대 본전에 무덕(武德) 4년(621) 신라왕 진평이 사자를 보내어 입조했고, 정관(貞觀) 5년 죽어서 아들이 없었으므로 딸 선덕을 왕으로 세웠으며, 21년(631) 지나 선덕이 죽자 누이동생 진덕이 섰고, 영휘 원년 백제를 공격하여 분쇄하고 직금이 송(頌)을 지어 헌정했으며 재위 5년에 죽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영휘 5년은 마땅히 ‘원년’이어야 한다.[新羅王德眞(本傳作眞德) 織錦作太平詩 永徽五年 德眞大破百濟之衆 按本傳 武德四年 新羅王眞平 遣使者 入朝 貞觀五年死無子 立女善德爲王 二十一年 善德死 妹眞德立 永徽元年 攻百濟破之 織錦爲頌以獻 五年死 據此 則永徽五年 當作元年] 《문원영화변증》 권4 연월(年月)2
(2) 색인어:유서(類書), 이방(李昉), 호몽(扈蒙), 서현(徐鉉), 송백(宋白), 송사대서(宋四大書)
(3) 참고문헌
• 《한국한문기초학사》(심경호, 태학사, 2012)
• 《大百科事典》(平凡社, 1984, 「文苑英華」(筧文生 집필))
• 《文苑英華研究》(凌朝棟著, 上海古籍出版社, 2005)
• 《文苑英華校記》 全10冊(傅増湘校, 北京圖書館出版, 2006)
• 《한국서지연표》(윤병태, 韓國圖書館協會, 1972)

【심경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