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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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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해(玉海)》는 200권으로,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이 과거시험용으로 편찬한 유편유서(類編類書)이다.

2. 편자

(1) 성명:왕응린(王應麟(1223~1296))
(2) 자(字)・별호(別號):왕응린의 자는 백후(伯厚), 호는 심녕거사(深寧居士) 또는 후재(厚齋)이다.
(3) 출생지역:경원부(慶元府) 은현(鄞縣(현 절강성(浙江省) 파시(波市) 은주구(鄞州區)))
(4) 주요활동과 생애
왕응린은 남송(南宋)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육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박학다재(博學多才)하였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주희(朱熹)를 받들었다. 경사백가(經史百家)와 천문지리(天文地理)를 섭렵하였으며, 장고제도(掌故制度)에 익숙하고 고증에 뛰어났다. 순우(淳祐) 원년(元年(1241))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보우(寶祐) 4년(1256)에 다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하였다. 태상시(太常寺)・주부(主簿)・예부상서겸급사중(禮部尙書兼給事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사람됨이 정직하고 직언을 잘 하여 누차 권신(權臣) 정대전(丁大全)・가사도(賈似道)의 미움을 사 파직당하기도 하였는데, 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20년간 저서에 전념하였다.
(5) 주요저작:왕응린의 저서로는 《삼자경(三字經)》・《곤학기문(困學紀聞)》・《소학감주(小學紺珠)》・《통감답문(通鑑答問)》・《심녕집(深寧集)》・《시고(詩考)》・《시지리고(詩地理考)》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책 뒤에 《사학지남(辭學指南)》 4권과 《옥해부각(玉海附刻)》 13종이 붙어 있으며, 왕응린이 지은 《시고》・《시지리고》・《한서예문지고(漢書藝文志考)》 및 《소학감주(小學紺珠)》 등의 저작이 수록되어 있다. 명나라 사람 유홍훈(劉鴻訓)은 이 책의 규모가 너무 방대하여 휴대와 검색에 불편함을 알고 원서(原書)의 기초 상에서(원서에서 적록하는 형식으로) 《옥해찬(玉海纂)》 22권을 편찬하였다.
《옥해》의 판본으로는 원(元) 지정(至正) 6년(1269) 경원로유학시간본(慶元路儒學始刊本)과 명(明) 정덕(正德) 2년(1507) 남경국자감보간인본(南京國子監補刊印本)이 있다. 통행본으로는 청(淸) 광서(光緖) 9년(1883) 절강서국중인본(浙江書局重印本)이 있는데, 청나라 장대창(張大昌)의 《교보쇄기(校補瑣記)》 2권이 붙어 있다. 《옥해찬》의 판본으로는 청 금려(金閭) 왕윤명간본(王允明刊本)과 광서 5년(1879) 서씨(徐氏) 팔삼재(八杉齋) 교간본(校刊本)이 있다.

4. 내용

이 책은 당시의 박학굉사과 응시를 위해 편찬되었는데, 천문(天文)・율력(律曆)・지리(地理)・제학(帝學)・성제(聖制)・예문(藝文)・조령(詔令)・예의(禮儀)・거복(車服)・기용(器用)・교사(郊祀)・음악(音樂)・학교(學校)・선거(選擧)・관제(官制)・병제(兵制)・조공(朝貢)・궁실(宮室)・식화(食貨)・병첩(兵捷)・상서(祥瑞) 등 21문(門)으로 분류하였다. 각 문 아래에는 또한 자목(子目)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를테면 천문문(天文門)은 천문도(天文圖)・천문서(天文書)・의상(儀象)・규경(圭景) 4목으로 나누었으며, 예문문(藝文門)은 43목으로 나누었다. 전서(全書)는 모두 240여 자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목 아래에는 예속관계에 의거하여 사물이나 도서 이름으로 약간의 소표제(小標題)를 열거하였으며, 몇 개의 목(目) 사이에 때때로 ‘참견(參見)’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사실(事實)은 연대순으로 기록하였는데, 최근의 것을 상세하게 옛것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자못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설(異說)이 있을 경우 고적(古籍)을 간략하게 인용하여 고증을 하였다.
그중에서 《옥해》 〈예문(藝文)〉만을 보더라도 송대(宋代) 국사(國史) 예문지(藝文志), 실록(實錄), 회요(會要)와 각종 관찬목록, 한漢・수隋・당唐 예문지와 당・송시대 저명한 사인(私人) 장서목록을 포괄하고 있으며, 또한 십칠사(十七史),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및 전사사(前四史) 중 제가(諸家)의 주해(注解), 《세설신어(世說新語)》 주(注), 《문선(文選)》 주(注), 당・송 양대(兩大) 중요 유서 중의 문화전적(文化典籍)과 관련이 있는 역사문헌 참고자료들을 포괄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 “왕응린은 각별히 박식하여 이 책을 지었는데, 즉 박학굉사과의 응용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열한 조목은 대략 거창한 전장(典章)이었으며, 그 채록한 역사 사실은 또한 모두 길상선사(吉祥善事)로, 다른 유서의 체제와는 매우 다르다. 그러나 경(經)・사(史)・자(子)・집(集)으로부터 백가 전기(傳記)까지 두루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다. 게다가 송대의 역사적 사실은 대개 실록・국사・일력에 근거하고 있으며, 더욱이 대부분이 뒤의 사지(史志)에는 상세하지 않은 것들이다. 이 책의 초지일관 정밀하고 심오하며 그 방대함은 당・송의 유서들이 따를 수 없다.[應麟尤爲博洽 其作此書 卽爲詞科應用而設 故臚列條目 率巨典鴻章 其採錄故實 亦皆吉祥善事 與他類書體例迥殊 然所引自經史子集 百家傳記 無不賅具 而宋一代之掌故 率本諸實錄國史日曆 尤多後來史志所未詳 其貫串奧博 唐宋諸大類書未有能過之者]”라고 하였다. 비록 평가가 과장되기는 하였지만, 그 자료 수집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인용한 서적들 중의 일부는 일찍이 산일(散逸)되었기 때문에, 이 책은 《송사(宋史)》 연구의 보충자료로 제공될 수 있다. 이 책은 편찬 자체가 잘되었기 때문에 비록 권질(卷帙)이 방대하지만 오히려 번잡하고 어지럽지 않다. 그래서 역대 문인・학자들이 이 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옥해》 〈예문〉에는 매우 풍부한 고대 목록 자료와 역사문헌 참고자료를 수록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용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예문〉의 편찬 방법이 기타 목록과는 얼마간 다른데, 일종의 주제목록(主題目錄)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신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찬 방법은 독자들에게 도서 내용의 분류는 물론 서명의 형식 분류상에서 모두 자신이 참고할 도서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옥해》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3년(1364)에 명주(明州) 사도(司徒) 방국진(方國珍)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는 주청사(奏請使) 편에 다른 책과 함께 구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이 우리나라에 비교적 일찍 전해졌으며 아울러 그 영향력도 적지 않았음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김진(金搢)(1585~?)이 《신편휘어(新編彙語)》라는 유서를 편찬할 때 《옥해》를 참조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순희(淳熙) 원년(고려 명종(明宗) 4년, 1174) 5월 29일에 명주(明州) 진사(進士) 심민(沈忞)이 《해동삼국사기(海東三國史記)》 50권을 바치므로 은폐(銀幣) 백 냥을 하사하고 비각(秘閣)에 간직하였다.[淳熙元年五月二十九日 明州進士沈忞上海東三國史記五十卷 賜銀幣百付秘閣]” 《옥해(玉海)》 〈예문(藝文) 이역도서異域圖書〉
• “한(漢) 〈관개리명(冠蓋里銘)〉. 《수경주(水經注)》에 ‘의성현(宜城縣)에 태산(太山)이 있는데 그 산 아래에 사당이 있다. 한나라 말에 관료가 많았는데, 그중 자사(刺史)・이천석(二千石)・경장(卿長) 등 수십 명이 화개(華蓋) 씌운 붉은 수레를 타고 함께 사당 아래에 모였다. 형주자사(荊州刺史)가 순행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그 성대함에 감탄하여 그곳을 관개리(冠蓋里)라고 부르고(《국사지(國史志)》에 「양양(襄陽)에 관개리가 있다.」 하였다.) 명(銘)을 지어 돌에 새겼다. 그 글에서 「높고 높은 남악(南岳), 찬란히 빛나네. 진실로 영준함이 넘쳐, 군자가 나셨네. 오직 이 군자만이, 한나라의 영걸이시네. 그 덕은 용처럼 빛나고, 그 소리는 학처럼 울리네.」라고 하였다.’ 하였다.[漢冠蓋里銘 水經注 宜城縣有太山 山下有廟 漢末多士 其中刺史二千石卿長數十人 朱軒華蓋 同會于廟下 荊州刺史行部見之 雅嘆其盛 號曰冠蓋里(國史志 襄陽有冠蓋里) 刻石銘之 其辭曰 峨峨南岳 烈烈離明 實敷俊乂 君子以生 惟此君子 作漢之英 德爲龍光 聲化鶴鳴]” 《옥해》 〈예문(藝文) 명(銘)〉
• “당(唐) 대종(代宗) 대력(大曆) 12년(777) 5월 갑자일(甲子日)에 성도(成都) 사람 곽원(郭遠)이 상서로운 나무 하나를 얻었는데, ‘천하태평(天下太平)’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다. 그것을 헌상하니 재상과 신하들이 하례하여 아뢰기를 ‘지극한 덕의 교화가 먼저 초목을 아름답게 하여 태평 시기에 마침내 문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라옵건대 비각에 보관하고 사관(史館)에 명하시어 기록으로 전해지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大曆十二年五月甲子 成都人郭遠獲瑞木一莖 有文曰 天下太平四字 獻之 宰臣奏賀曰 至德之化 先賁草木 太平之時 遂形文字 望藏于秘閣 付史館]” 《옥해》 〈상서(祥瑞) 당서목(唐瑞目)〉
(2) 색인어:옥해(玉海), 왕응린(王應麟), 옥해찬(玉海纂), 경원로유학시간본(慶元路儒學始刊本), 남경국자감보간인본(南京國子監補刊印本), 예문(藝文), 주제목록(主題目錄)
(3) 참고문헌
• 한・중 유서문화 개관(최환, 영남대학교출판부)
• 中國類書槪說(劉葉秋 지음, 金長煥 옮김, 학고방)
• 中國古代的類書(胡道靜, 中華書局)
• 中國類書(趙含坤, 河北人民出版社)
• 〈王應麟的《玉海・藝文》〉(王重民, 《學術月刊》 1964年 01期)
• 〈簡論《玉海・藝文》中主题目錄的新方向〉(趙宣, 《圖書情報工作》 2007年 08期)
• 〈《玉海》版本流傳考述〉(楊萬兵, 《大學圖書館學刊》 2008年 02期)
• 〈《玉海》所引隋唐五代文獻硏究〉(蕭光偉, 上海師範大學 博士學位論文 2011年 4月)
• 〈宋代目錄學硏究的新突破―評《玉海藝文校證》〉(郝潤華, 《古籍整理硏究學刊》 2015年 01期)
• 〈《玉海・藝文》—中國古代創立類書輯錄書目之先〉(龔新年, 《高校圖書館工作》 2015年 02期)
• 〈《玉海》成書考略〉(韓興波, 《荊楚學刊》 2015年 02期)
• 〈《玉海》與南宋詞科考試硏究〉(韓興波, 重慶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16年 6月)

【최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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