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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수(魏收)는 북조시대(北朝時代) 북위(北魏), 동위(東魏), 북제(北齊)의 관리이자 역사가이다. 본서는 모두 124권인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554년(천보 5년) 완성되었다. 이 책은 16국시대와 북위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사서이다.

2. 저자

(1) 성명:위수(魏收)(506-572)
(2) 자(字):백기(伯起)
(3) 출생지역:거록군(鉅鹿郡) 하곡양현(下曲陽縣)(현재의 河北省 晉州 서쪽)
(4) 주요활동과 생애
531년(북위(北魏) 중흥원년(中興元年)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기거주(起居注)의 일을 맡아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동위시대(東魏時代)부터 계속 국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북제(北齊)가 북위(北魏)의 선양(禪讓)을 받은 후에 위수는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고 여전히 저작랑(著作郞)을 겸했다.
551년(천보(天保) 2년) 위사(魏史) 편찬의 명령을 받았다. 553년(천보(天保) 4년) 위윤(魏尹)에 임명되었으나 군(郡) 행정에 간여하지 않고 위사 편찬에 전념하였다. 554년(천보 5년) 삼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바치고 십일월에 10지를 바쳤다. 북위(北魏)말부터 동위(東魏), 북제(北齊)를 거쳐 위수(魏收)는 20여년 동안 󰡔위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방연우(房延祐), 신원식(辛元植), 조유(刁柔), 배앙지(裴昂之), 고효간(高孝衎), 기모회문(綦母懷文), 목중양(睦仲讓) 등이 《위서(魏書)》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위수(魏收)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여 방연우(房延祐)와 신원식(辛元植) 등이 사재(史才)가 없다고 하여 편찬(編纂) 과정에서 배제하였다.
(5) 주요저작:역사서로 《위서(魏書)》가 있다. 시부(詩賦)에 능했으며 《미녀편(美女篇)》, 《영세락(永世樂)》 등을 남겼다. 원래 문집 70권이 있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명대 장부(張溥)가 위수(魏收)의 글을 모아 《위특진집(魏特進集)》의 집본(輯本)을 편찬하였다.

3. 서지사항

모두 본기(本紀) 12권(卷), 열전(列傳) 92권, 지(志) 20권 등 모두 124권이다. 원본은 131권이지만 북송시대(北宋時代)에 예목(例目) 1권과 기(紀)․전(傳)․지(志) 중 29권이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의 판본은 3권 《태종기(太宗紀)》, 《천상지(天象志)》의 3․4 2권은 송대(宋代) 사람들이 수(隋) 위담(魏澹)의 《위서(魏書)》, 당(唐) 장태소(張太素)의 《위서》에서 보충하였다. 나머지는 《북사(北史)》와 고준(高峻)의 《소사(小史)》(고씨소사(高氏小史)라고도 함),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에서 보충하였다. 29권에도 누락이 있다.
국내에는 완역본은 없고 우리나라를 제외한 중국 주변국의 열전을 역주(譯註)한 《위서 외국전 역주》(동북아역사재단 엮음, 동북아역사재단, 2010)가 있다.

4. 내용

위수는 553년(천보 4년) 사직(史職)에 임명되어 다음 해에 《위서(魏書)》 전체를 바쳤다. 편찬 기간이 1년여를 넘지 않았다. 이는 북위시대 국사와 기거주(起居注) 편찬 작업 때문이며 북위 도무제(道武帝) 시기부터 시종 중단되지 않았다. 건국부터 효명제(孝明帝) 말년부분까지 위수는 모두 구사(舊史)를 이어받았다. 북위말과 동위 약 20년의 사적은 자료를 다시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최홍(崔鴻)의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손성(孫盛)의 《진양추(晉陽秋)》, 단도란(檀道鸞)의 《속진양추(續晉陽秋)》 등을 이용하였다. 위수는 심약(沈約)의 《송서(宋書)󰡕와 소자현(蕭子顯)의 《남제서(南齊書)》도 얻어 보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송제(宋齊) 시대는 가깝고 사실을 고증하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위수가 남조(南朝) 문인(文人)을 멸시했기 때문에 도이(島夷) 《유유전(劉裕傳)》과 《소도성전(蕭道成傳)》은 완전히 남조(南朝) 심약(沈約)과 소자현(蕭子顯)의 기록을 참조한 흔적은 없다.
《북사(北史)》가 편찬된 후 《위서(魏書)》의 많은 내용이 사라졌는데, 권3 태종기(太宗紀), 권13 황후전(皇后傳), 권14 신무평문제제자손(神武平文諸帝子孫), 권15 소성자손(昭成子孫), 권17 명원육왕(明元六王), 권18 태무오왕(太武五王), 권19상․중․하 경목십이왕(景穆十二王), 권20 문성오왕(文成五王), 권22 효문오왕(孝文五王), 권25 장손숭(長孫嵩), 장손도생(長孫道生), 권33 송은(宋隱), 왕헌(王憲), 굴준(屈遵), 장포(張蒲), 곡혼(谷渾), 공손표(公孫表), 장제(張濟), 이선(李先), 가이(賈彝), 설제(薛提), 권34 왕낙아(王洛兒), 차로두(車路頭), 노노원(盧魯元), 진건(陳建), 만안국(萬安國), 혜발(嵆拔), 권81 기준(綦儁), 산위(山偉), 유인지(劉仁之), 우문충지(宇文忠之), 卷82 이염지(李琰之), 조형(祖瑩), 상경(常景), 권83상․하 외척전(外戚傳), 권84 양월(梁越), 노추(盧醜), 장위(張偉), 양조(梁祚), 평항(平恒), 진기(陳奇), 상상(常爽), 유헌지(劉獻之), 장오귀(張吾貴), 유란(劉蘭), 손혜울(孫惠蔚), 서준명(徐遵明), 동징(董徵), 조충(刁沖), 노경유(盧景裕), 이동궤(李同軌), 이업흥(李業興), 권85 문원전(文苑傳), 권86 효감전(孝感傳), 권87 절의전(節義傳), 권89 혹리전(酷吏傳), 권91 예술전(藝術傳), 권92 열녀전(列女傳), 권101 저(氐), 토욕혼(吐谷渾), 탕창강(宕昌羌), 고창(高昌), 등지(鄧至), 혁양(赫羊), 만(蠻), 료(獠), 권102 서역전(西域傳), 권103 연연(蠕蠕), 흉노(匈奴) 우문막괴(宇文莫槐), 도하(徒何) 단취육권(段就六眷), 고차(高車)는 후에 《북사(北史)》를 근거로 하여 《위서(魏書)》를 복원하였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해당 권의 내용을 《위서(魏書)》가 아닌 《북사(北史)》를 인용한다.
북위(北魏)의 전신인 탁발부(拓跋部)는 동진(東晉)․십육국시대(十六國時代)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십육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즉 권95 흉노(匈奴) 유총(劉聰), 갈호(羯胡) 석륵(石勒), 철불(鐵弗) 유호(劉虎), 도하(徒何) 모용외(慕容廆), 임위저(臨渭氐) 부건(苻健), 강(羌) 요장(姚萇), 약양저(略陽氐) 여광(呂光)은 십육국시대의 여러 나라, 권96 참진(僭晉) 사마예(司馬叡), 종(賨) 이웅(李雄)은 동진(東晉)과 성한(成漢), 권97 도이(島夷) 환현(桓玄), 해이(海夷) 풍발(馮跋), 도이(島夷) 유유(劉裕)는 각각 초(楚), 북연(北燕), 유송(劉宋), 권98 도이(島夷) 소도성(蕭道成), 도이(島夷) 소연(蕭衍)은 남제(南齊)와 양(梁), 권99 사서(私署) 양주목(涼州牧) 장식(張寔), 선비(鮮卑) 걸복국인(乞伏國仁), 선비(鮮卑) 독발오고(禿發烏孤), 사서(私署) 양왕(涼王) 이고(李暠), 노수호(盧水胡)는 전량(前涼), 서진(西秦), 남량(南涼), 서량(西涼), 북량(北涼)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위진(魏晉) 이후 불교(佛敎)가 점차 흥성하여 중국 사회, 사상,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도교(道敎)도 정치와 사회에 상당한 작용을 하였는데, 모두 사서에 반영되었다. 《위서(魏書)》에는 처음으로 《석로지(釋老志)》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석로지(釋老志)》는 역대 정사 가운데 종교를 다룬 최초의 지(志)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북위시대 선비(鮮卑) 부족이 번성하였는데, 태화(太和) 이후 선비성(鮮卑姓)을 한성(漢姓)으로 바꾸었다. 위수는 한인(漢人) 씨족(氏族) 보첩(譜牒)의 뜻을 본받아 북방민족 부락 족성(族姓)의 풍습을 종합하여 《관씨지(官氏志)》를 만들고 백관(百官) 이외에 씨족을 서술하였다. 이는 당시 시대 특징에 맞는 방식이며 후세 사람이 북위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편리하다.

5. 가치와 영향

《위서(魏書)》는 북위(北魏)의 역사와 제도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사료이다. 《위서(魏書)》의 내용과 체례(體例)는 《북제서》, 《주서》, 《북사》, 《자치통감》 등 역사서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위서》의 내용과 체례는 후세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위수는 북제 시대에 󰡔위서󰡕를 편찬했는데, 북제는 동위를 계승하였으므로 그는 동위를 정통으로 삼았고 고환(高歡)을 미화하였다. 예컨대 《지형지(地形志)》는 문서(文書)의 산일(散佚)을 이유로 북위의 영토가 가장 넓었던 선무제(宣武帝) 연창(延昌) 년간의 판도가 아니라 동위 무정(武定) 연간을 표준으로 하여 기록하여 북위 역사 연구에 불편하다. 위수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능멸하고 모욕하여 역사 서술의 불공평함을 호소한 사람이 백여 인에 달하며 《위서(魏書)》는 예사(穢史)라 하였다. 예컨대 위수는 돈을 받고 이주영(尒朱榮)의 열전을 미화하였다. 당대(唐代)의 유지기(劉知幾)와 청대(淸代)의 조익(趙翼)도 《위서(魏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위서(魏書)》를 긍정적으로 기술하였다. 《위서(魏書)》에 대한 찬반양론은 20세기 이후에도 지속되어 《위서(魏書)》를 예사로 평가하는 견해와 반대하는 견해가 나뉜다. 후자의 견해에 찬성하는 학자는 《위서(魏書)》에도 《이주영전(尒朱榮傳》에 그의 전횡과 잔학한 행위, 북위에 끼친 화(禍)와 해를 충분히 기록하였음을 지적한다. 예사라는 말은 문벌사족(門閥士族)이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 불만족스러웠음을 반영하며 완전히 사실에 부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위서(魏書)》가 당시의 선비어(鮮卑語) 관직과 칭호 등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알선동석각문(戞仙洞石刻文)》과 《문성제남순비(文成帝南巡碑)》의 발견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문평(米文平)이 1980년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호륜패이맹(呼倫貝爾盟) 악륜춘자치기(鄂倫春自治旗)에서 발견한 북위 태무제(太武帝)시대의 《알선동석각문》은 󰡔위서󰡕를 재평가할 자료였다. 이 석각문(石刻文)은 《위서》 《예지(禮志)》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황제(皇帝)와 황후(皇后) 대신 유목민 고유의 군주호인 가한(可寒)․가돈(可敦)의 칭호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위수가 선비적(鮮卑的) 습속(習俗)을 야비(野卑)하다고 삭제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90년대 발견된 《문성제남순비》에 보이는 다양한 호족계(선비계) 관명은 《위서(魏書)》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위수가 이민족지배(異民族支配)를 연상시키는 기록을 누락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각종 석각(石刻)과 문서자료에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초기까지 ‘대대(大代)’라는 국호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확인하고 《위서(魏書)》에는 국호 ‘대(代)’의 용례가 없음을 밝혀 위수가 고의로 배제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처럼 최근 발견된 금석문을 분석하면 위수가 의도적으로 탁발선비(拓跋鮮卑) 중심으로 한 이민족의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2) 색인어:위수(魏收), 위서(魏書), 북사(北史)
(3) 참고문헌
• 魏書標點本(中華書局)
• 北史標點本(中華書局)
• 資治通鑑標點本(中華書局)
• 趙翼, 󰡔卄二史箚記󰡕(王樹民 校證, 󰡔卄二史箚記校證󰡕, 中華書局, 1984)
• 岡岐文夫, 「魏收穢史」, 󰡔文化󰡕 1-5, 1934
• 余嘉錫, 󰡔四庫提要辨證󰡕, 昆明: 雲南人民出版社, 2004[初版 1985]
• 尾崎康, 「魏書成立期の政局」, 󰡔史學󰡕 34-3․4, 1962; 瞿林東, 「說《魏書》非“穢史”」, 󰡔江漢論壇󰡕 1985-5, 1985
• 周一良, 「魏收之史學」, 󰡔周一良集󰡕 第一卷(魏晉南北朝史論), 瀋陽: 遼陽敎育出版社, 1998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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