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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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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사(金史)는 원대 탈탈(脫脫) 등이 편찬한 금대의 역사서이며, 중국 역대 정사(正史) 중의 하나이다. 구성은 본기(本紀) 19권, 지(志) 39권, 표(表) 4권, 열전(列傳) 73권으로 되어 있고, 금국어해(金國語解), 부록(符籙) 1권이 뒤에 덧붙여졌다. 금 태조(金太祖) 수국원년(收國元年)(1115) 아골타가 칭제한 것에서부터 금 애종(金哀宗) 천흥(天興) 3년(1234) 몽고가 금을 멸하기까지의 총 120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원순제(元順帝) 지정(至正) 3년(1343) 3월 중서우승상 탈탈(1314~1355)이 도총재관(都總裁官) 겸 감수국사(監修國史)를, 철목아탑식(鐵木兒塔識), 장기암(張起岩), 구양현(歐陽玄), 여사성(呂思誠), 갈혜사(擖傒斯) 등이 총재관을 맡아서 찬수사업을 진행하였다.
(2) 자(字)·별호(別號):탈탈의 몽골 이름은 토크토아ᠲᠣᠭᠲᠠᠭᠠ또는 토크토테무르ᠲᠣᠭᠲᠠᠭᠠ이며, 자(字)는 대용(大用)이다.
(3) 출생지역:미상
(4) 주요활동과 생애
탈탈(1314~1356)은 탈극탁(托克托), 탈탈첩목아(脱脱帖木儿)라고도 하며, 멸리걸씨(蔑里乞氏)이다. 몽고족 蔑里乞[메리키트] 부족 출신으로 원말의 정치가, 군사가이다. 원통 2년(1334)에 동지선정원사(同知宣政院事)에 임명된 이래로 중서우승상, 중서좌승상 등을 역임하였다. 1343년에는 도총재관으로 《요사(遼史)》, 《송사(宋史)》, 《금사(金史)》의 편찬을 책임졌다. 1350년에는 우승상으로서 ‘지정교초(至正交鈔)’를 발행하고 가로(賈魯)를 파견하여 황화의 치수에 성공하여 백성들로부터 ‘현상(賢相)[현명한 재상]’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지정 11년(1351)에는 황화를 치수하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홍건적으로 되자 그들을 진압하였다. 지정 14년(1354) 말에 파직되어 이듬해 운남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다음해 중서평장정사이던 합마(哈麻)가 조서를 조작하여 자살시켰다고 한다. 지정 22년(1362)에 누명이 풀려 복관되었다.
(5) 주요 저작:《요사(遼史)》, 《송사(宋史)》, 《금사(金史)》

3. 서지사항

《금사》의 판본은 몇 가지가 있다. 원 지정 연간에 인쇄 출판된 것 외에, 명대(明代)에 남북양감본(南北兩監本)(南監本, 北監本)이 만들어졌고, 청대에는 사고본(四庫本)(《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과 무영전본(武英殿本)(《무영전진판(武英殿聚珍版)》에 수록)이 만들어졌다. 청대에 편찬된 것은 일반적으로 원본에 대한 변조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판본으로서는 부적당하다.
근대 이후 1935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간한 백납본(百衲本) 《금사》는 원 지정 연간의 135권과 동일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오랜 기간 최고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1975년에 중화서국에서 새롭게 교점한 《금사》가 출판되어 이후에는 중화서국본이 이용되고 있다. 중화서국본은 백납본 《금사》를 저본으로 하여, 남북감본과 무영전본 등, 각종 판본을 이용하여 교정을 추가한 것 외에 각종 자료에 의한 보정도 이루어졌다.

4. 내용

금사는 중국 역대 정사의 하나로서 원 세조(元世祖) 쿠빌라이 시기부터 편찬이 시작되었다. 즉, 남송 멸망 이전인 중통(中統) 2년(1261)부터 이미 요‧금사의 편찬사업을 기획하였으며, 지원(至元) 13년(1276) 남송의 도성인 임안(臨安)을 함락함과 동시에 황실도서의 완전한 보존을 명령하면서 사서편찬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통일 후의 정사 편찬사업은 정통론 시비로 지체되다가, 순제(順帝) 지정(至正) 3년(1343) 2월부터 요‧송‧금 삼국 정사의 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
그해 3월에는 정사를 편찬하기 위한 정식기구를 설립하였고, 중서우승상 탈탈이 도총재관 겸 감수국사를 맡았고, 사랄반(沙剌班), 왕리(王理), 백안(伯顏), 조시민(趙時敏), 비저(費著), 상기옹(商企翁) 등 6인이 편수작업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지정 4년(1344) 11월 《금사》 135권이 완성되었으니, 약 2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편찬이 이루어졌다.
금사의 편찬 체제의 특징은 본기가 〈세기(世紀)〉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즉, 〈태조본기(太祖本紀)〉 앞 편에 〈세기〉를 신설하여, 금 태조 아골타 이전 10대 선조들의 사적을 기술하여 여진 부족의 사회적 상황을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본기의 마지막에 〈세기보(世紀補)〉를 넣어 희종의 부친인 경선제(景宣帝), 세종의 부친인 예종, 장종의 부친인 현종(顯宗)을 기술하였다. 세 사람은 모두 대신이었는데, 그들의 아들들이 황제로 되면서 열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세기보〉라는 형식의 체제를 만든 것으로 이후 《원사》와 《명사》에서도 본받는 바가 되었다.
전기 중에는 여러 사람이 관련된 동일 사건에서 주요 인물의 전기에서 상세하게 사건의 본말을 기술하고 기타 전기에서는 간략하게 서술하여 중복 서술을 피하였다. 또한 〈교빙표(交聘表)〉를 두어서 금과 송, 서하, 고려와의 전쟁 및 사신의 왕래를 상세하게 기재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점 등이 비교적 높게 평가된다.
또한 《금사》는 ‘실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료의 신뢰성이 높다. 예컨대, 금과 요의 왕래와 전쟁 중에 금의 통치자가 했던 음모와 계략 등에 대해서도 비교적 사실적인 서술로 되어 있으며, 황제들의 잔혹함, 황음무도함, 통치자들 간의 갈등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비교적 충분하게 서술한 점 등이다. 이외 지(志)의 내용도 비교적 상세한데, 총 39권으로 전체의 약 1/3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그중에서도 《하거지(河渠志)》, 《병지(兵志)》, 《식화지(食貨志)》, 《선거지(選舉志)》, 《백관지(百官志)》의 내용이 가장 충실하다.
금사 편찬의 주요 자료는 상기한 실록 외에 원 세조 시기의 한림학사였던 왕악(王鶚)이 편찬한 《금사고(金史稿)》가 있다. 또한 금말의 두 학자의 저술을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유기(劉祁)의 《귀잠지(歸潛志)》와 원호문(元好問)의 《임진잡편(壬辰雜編)》이다. 금이 망한 후 원호문은 역사 편찬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군신들의 남긴 기록 등을 모아 100만여 자에 이르는 《임진잡편》를 편찬하였다. 유기의 《귀잠지》도 《금사》의 주요 사료의 하나이다. 원호문과 유기는 직접 금말의 병란의 일들을 체험하고는 책 속에 그들이 보고들은 바를 저술하였다. 때문에 금사 중에서 금말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은 매우 생동감 있고, 마치 눈앞에서 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5. 가치와 영향

《금사》에 대한 역대의 평가는 비교적 높은 편이며, 《송사》와 《요사》는 물론 《원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원래 자료의 저본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였으며, 금대에 사서 편찬이 중요하게 이루어졌던 것에 기인한다. 이렇듯 《금사》는 비교적 완정된 형태의 실록과 금대에 편찬된 사서, 원호문, 왕악 등의 보충 자료라는 풍부한 자료의 기초 위에 편찬되었다. 이 점이 단기간에 편찬된 《송사》와 《요사》와 달리 삼사(三史)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게된 점이다.
물론 《금사》의 내용 중에는 일부 부실한 대목도 있다. 예컨대, 금초 아골타에게 중요한 계책을 건의하고 조정의 제도 등을 발의했던 발해인 양박(楊朴)은 중요한 인물이지만 《금사》에는 그의 열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기록도 없다. 《금사》에는 또한 장방창(張邦昌)의 전기가 있는데, 비록 금의 책봉을 받기는 했지만, 반정에 의해 송나라에 의해 피살되었고, 《송사》에 이미 그의 열전이 있기 때문에 굳이 열전에 넣을 필요가 없으니 불필요하게 넣은 것이라 하겠다. 이외에 중요한 사건 등이 일부 기재되지 않았는데, 천회(天會) 10년(1132) 금이 세웠던 제(齊)가 변경으로 천도한 사건, 12년(1134) 금과 제가 함께 송을 공격한 사실 등은 모두 중요한 사건이지만 기재되지 않았다. 일부 기록들의 모순과 중복, 사실의 착오, 기술의 소략, 연도의 오류와 지명의 혼란, 한 인물에 대한 여러 명칭, 한문으로 음차한 몽골 명칭의 불일치 등도 많이 있다. 이에 대해 청대(淸代) 인물인 시국기(施國祁)가 《금사》에 대한 고증 작업을 하여 《금사상교(金史詳校)》 10권을 편찬하였으며, 《금사》를 읽을 때 참고서로 유용하다.

6. 참고사항

(1) 金史 명언
‧ “지금부터 마땅히 급박하게 행해야 할 것이 있으면, 먼저 행동한 후에 보고하라![自今有當亟行者,先行後聞]” 〈권15, 선종(宣宗)〉
‧ “조정에서 일을 행함에 있어 진실로 스스로 옳지 않다면 어떻게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朝廷行事苟不自正,何以正天下]” 〈권19, 세종(世宗)〉
‧ “사람의 총명함은 대부분 허영된 과시적 행위로 인해 잃어 버리게 된다.[人之聰明, 多失於浮衒]” 〈권73, 마혜적(馬惠迪)〉
(2) 색인어:원순제(元順帝), 탈탈(脫脫), 원호문(元好問), 삼사(三史), 금사고(金史稿), 귀잠지(歸潛志), 임진잡편(壬辰雜編)
(3) 참고자료
⋅金史 標點本(中華書局)
⋅金史詳校(施國祁, 新文豐出版社)
⋅金史纂修考(邱靖嘉, 中華書局)
⋅歸潛志(劉祁, 中華書局)
⋅〈王鶚《汝南遺事》成書年代辨〉(趙梅春, 鄭州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2013年05期)
⋅〈金修國史及金史源流〉(王明蓀, 書目季刊 卷22,第1期(1988))
⋅〈《壬辰雜編》與《金史》史源〉(陳學霖, 臺大歷史學報 第15期 國立臺灣大學歷史系,1990.12)
⋅〈《歸潛志》與《金史》史源〉(陳學霖, 大陸雜誌 卷25, 第8期(1962, 12))

【이석현】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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