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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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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는 남송(南宋) 임희일(林希逸)의 저작으로 조선조에 다수의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널리 애독되던 책이며, 언제부터 유행하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2. 저자

(1) 성명:임희일(林希逸(1193~1271))
(2) 자(字)·호(號):자(字)는 숙옹(肅翁), 연옹(淵翁)이고, 호(號)는 죽계(竹溪), 권재(鬳齋), 헌기(獻機) 또는 헌재(獻齋)이다.
(3) 출생지역:남송(南宋) 복주(福州) 복청현(福淸縣) 어계(漁溪(현 복건성(福建省) 복청시(福清市)))
(4) 주요 활동과 생애
남송 광종(光宗) 소희(紹熙) 4년(1193)에 태어나 도종(度宗) 함순(咸淳) 7년(1271)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희일은 어렸을 때 부친을 잃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의탁하여, 외할머니 왕씨와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종(理宗) 단평(端平) 원년(1234)에 해시(解試) 제일(第一)로 합격하고, 다음해 단평(端平) 2년(1235) 43세의 나이로 성시(省試) 제일(第一), 전시(殿試) 중 갑과(甲科) 제사인(第四人)으로 합격했다.
단평 2년(1235) 진사(進士)에 합격한 후, 처음에는 평해군(平海軍) 절도추관(節度推官)이 되었는데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다. 순우(淳祐) 원년(元年) 천주(泉州)에 큰 기근이 들었는데, 임희일은 당시 천주군연(泉州郡掾)으로 부임해 있었으므로 아침에는 죽을 나눠주고 오후에는 쌀을 풀어서 구휼했다. 순우 6년(1246)에 비성정자(秘省正字)로 옮겼고, 7년(1247) 비서원편수관(秘書院編修官)을 제수받았으며, 8년(1248)에 직비각(直祕閣) 지흥화군(知興化軍)이 되었다.
보우(寶祐) 3년(1255)에 요주(饒州)의 태수(太守)가 되었다가 경정(景定) 4년(1263)에 사농소경(司農少卿) 등이 되었다. 이후에 7년간 한거(閑居)하다가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1269) 9월부터 6년(1270) 봄까지 계속해서 서울에 들어와 사한(詞翰)을 관장하라는 명이 내려왔는데, 자주 사양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져 결국 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후의 일은 상세하지 않다. 다만 임희일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벼슬을 끝마쳤다고만 전해지는데, 중서사인의 벼슬을 언제 맡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임희일은 애헌학파(艾軒學派)의 삼전제자(三傳弟子)인데, 그의 학적인 계보는 멀리 정이(程頤)의 문인(門人)인 윤화정(尹和靖)(1071~1142, 윤돈(尹焞). 자(字)는 언명(彦明))으로부터 연결된다. 그런데 이정(二程)의 학설에 충실하였던 윤화정과 달리 애헌학파의 사상적 색채는 뒤로 갈수록 변화하기 시작한다. 윤화정의 문인인 애헌(艾軒) 임광조(林光朝(1114~1178, 자(字)는 겸지(謙之), 호(號)는 애헌(艾軒)))에게는 이정의 ‘리(理)의 철학’적 요소가 매우 희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荒目見悟, 〈林希逸の立場〉, 《九州大學中國哲學論集》 7號, 九州大學中國哲學會 1981.10, 48쪽)하고 있다. 또한 임광조는 주자와도 친분이 있었으며(《애헌집(艾軒集)》 제요(提要)와 서(序)에 주희(朱熹)가 애헌을 존경했다거나 형으로 섬겼다는 설명이 나온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타난 애헌에 관한 인용과 평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매우 호의적으로 애헌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임광조는 이천(伊川)의 문학경시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며, 이후로 문장을 중시하는 풍조는 애헌학파 전통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애헌 임광조의 학통은 임역지(林亦之(1136~1185, 자(字)는 학가(學可), 호(號)는 망산(網山) 또는 월어(月漁)))→진조(陳藻(자(字)는 원결(元潔), 자호(自號)는 낙헌(樂軒)))→임희일로 이어지는데, 임광조에 이르러서는 아직 도불(道佛)에 대한 이단관(異端觀)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뒤로 갈수록 그 사상적인 색채가 달라졌다. 특히 진조의 경우 “낙헌선생은……우리 유가의 도道를 지키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 매우 엄했다.[樂軒……其衛吾道 闢異端甚嚴](유극장(劉克莊), 《후촌선생대전집(後村先生大全集)》 권90, 〈흥화군산성삼선생사당기(興化軍山城三先生祠堂記)〉)”라는 평가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낙헌〉선생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불서佛書는 우리 유가서(儒家書)를 입증・설명하기에 가장 좋다.’[先生嘗曰 佛書最好證吾書](《장자구의(莊子口義)》 권3)”라는 언급도 존재한다. 따라서 진조는 명목상으로는 불교 등 이단에 대한 변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남송 말기의 임희일에 와서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한 도불사상의 수용 또는 포섭’이라는 결과로 나아가게 된다. 비록 임희일의 세계관에 유가〉노장〉불가라는 위계가 설정되어 있으며, 유가경전의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적 효용성으로 도불의 수용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사유의 바탕에는 도불사상의 대의가 유가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는 맥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주요저작
그의 저작은 매우 많지만, 현존하는 저서는 《고공기해(考工記解)》 2권, 《노자권재구의(老子鬳齋口義)》 2권, 《장자권재구의(莊子鬳齋口義)》 10권,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 2권(이상의 세 책은 《(노장열(老莊列))삼자구의(三子口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권재속집(鬳齋續集)》(《죽계권재십일고속집(竹溪鬳齋十一稿續集)》) 30권, 《죽계십일고시선(竹溪十一稿詩選)》 1권, 《심유적고서(心游摘稿序)》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공기해》는 그의 재전(再傳) 스승인 임역지(林亦之)를 비롯하여 송대(宋代) 학자들이 주해한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주석이다.(《주례》 〈고공기〉에 대한 주석으로는 당대(唐代) 두목(杜牧) 주(注)가 있고, 송대(宋代)에는 진상도(陳祥道), 임역지(林亦之), 왕염(王炎) 등의 주가 있으나 지금 전해지지 않고, 유독 임희일의 주만 간신히 남아 있다.(《考工記解》 《欽定四庫全書》 經部 提要)
이외에도 《춘추삼전(春秋三傳(정부론(正附論)))》 13권, 《역강(易講)》 4권, 《양조보훈(兩朝寶訓)》 21권, 《권재전집(鬳齋前集)》 6권, 《산명별집(山名別集)》과 《수목청화시(水木淸華詩)》 1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3. 서지사항

임희일의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는 본문 앞에 경정삼년임술(景定三年壬戌) 왕경(王庚(자(字)는 경장(景長),천주(泉州) 사람))의 〈후서(后序)〉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송 경정(景定) 3년(1262)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张京华, 〈宋本《列子鬳斋口义》考〉, 《图书馆》 2017年 第4期) 현재 중국에 전해지는 판본은 12종(원각본(元刻本) 3종, 명각본(明刻本) 8종,청각본(清刻本) 1종)이며, 일본에 전해지는 것은 7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재목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판각하여 전해지는 것은 2종류인데, 그중 하나는 경자자복각본(庚子字覆刻本)이다. 즉 세종 7년(1425) 경자자본(庚子字本) 《장자권재구의》와 《노자권재구의》가 있고 또한 《열자권재구의》의 경우 경자자복각본(庚子字覆刻本)이 존재하며,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1467)조의 기사에서 문신들에게 여러 책을 나눠주어 읽게 했는데 그중 《노자》・《장자》・《열자》가 포함되어 있고, 이는 《삼자권재구의》일 것으로 추정하였다.(최재목, 〈朝鮮時代における林希逸《三子鬳齋口義》の受容〉, 《양명학》 제10호, 한국양명학회, 2003) 따라서 늦어도 15세기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임희일의 《열자권재구의》를 직접 판각하여 읽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구의(口義)’라는 말은 《신당서(新唐書)》 〈선거지(選擧志)〉에 보이는데, 묵의(墨義)라는 지필고사 방식과 상대되는 시험의 방식으로, 일종의 구술고사의 형식으로 경전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송대에 이르러 호원(胡瑗)의 《주역구의(周易口義)》·《홍범구의(洪範口義)》라는 두 권의 책이 있었고, 호원의 뒤를 이어 ‘구의(口義)’라는 말로 주소(注疏)의 명칭을 삼은 것이 임희일의 《삼자구의(三子口義)》이다. 임희일의 《삼자구의》에서 ‘구의’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임경덕(林經德)의 〈장자권재구의서(莊子鬳齋口義序)〉(=〈남화진경후서(南華眞經後序)〉)와 임계유(任繼愈)의 《도장제요(道藏提要)》에 잘 나타난다. 임경덕의 〈서(序)〉에서는 “이 책을 ‘구의’라고 이름 지은 것은 그 문장이 이속(里俗)의 통속적인 말을 섞어서 직접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도장제요》에서는 “《도덕진경구의(道德眞經口義)》는……그 글이 문장을 따라 직접적으로 풀이하였는데, 바로 구어(口語)로 의미를 강설하였기 때문에 ‘구의’라고 명명하였다”라고 하였다.(陳怡燕, 〈林希逸《莊子口義》思想硏究〉, 臺北: 國立師範大學國文硏究所 碩士論文, 2009)

4. 내용

우리나라에서 판각된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는 上·下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上卷에는 〈천서(天瑞)〉·〈황제(皇帝)〉·〈주목왕(周穆王)〉·〈중니(仲尼)〉 등 4편이‚ (下卷)에는 〈탕문(湯問)〉·〈역명(力命)〉·〈양주(楊朱)〉·설부〈說符〉 등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술 방식은 먼저 《열자》의 본문을 큰 글씨로 기록한 다음 그 아래에 임희일의 주석을 쌍행소주(雙行小註)의 형태로 수록하였다.(강문식, 규장각 해제)

5. 가치와 영향

임희일(林希逸)의 《삼자구의(三子口義)》는 13c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최재목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7년(1425)에 이미 경자자본(庚子字本) 《삼자권재구의》가 판각된 이래로, 조선시대 내내 상당히 여러 차례 발간되어 사대부들에게 널리 애독되었다. 또한 일본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복영광사(福永光司)는 “에도(江戶)시대의 노장학은 무로마치(室町) 시기의 선승(禪僧)이 계승한 당시의 노장학이며, 아울러 송대 임희일의 《노자구의(老子口義)》와 《장자구의(莊子口義)》 등을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도교여일본문화(道敎與日本文化)》 )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임희일의 주석이 13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널리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임희일의《삼자구의》는 기본적으로 송대 이학(理學)적 관점에서 도가 텍스트를 재해석한 것인데, 해석의 과정에 선불교의 내용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유불도 삼가의 사상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송대 도가 주석의 주요 특징은 유불도 삼가사상의 융합을 기반으로 도가의 텍스트(《노자》・《장자》・《열자》)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많았으므로, 임희일의 관점은 시대적인 요구에도 부합했다. 더욱이 임희일의 《열자구의》에서는 《열자》를 읽을 때 별도로 안목을 갖추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데, 그 중요 내용 중에는 《열자》의 문장[筆端]이 (변화)고무(鼓舞)하는 곳을 잘 파악해야 한다던가, 문장·어구·단락과 편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며, 《열자》의 비유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는 도(道)와 문(文)을 함께 중시했다는 애헌학파(艾軒學派)의 문장관(文章觀)을 이어받은 임희일의 관점이 그의 《열자》 해석에서 잘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목에서부터 장자의 문장을 통속적이고 쉬운 글을 뜻하는 구의(口義)라는 쉬운 글의 형태로 풀이하겠다고 표방하고 있다. 이는 원전의 난해한 내용을 일상용어인 구어체(spoken language)로 풀이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임희일의 《삼자구의》가 인기가 끌게 된 이유에 대해 단지 ‘구의’라는 주소(注疏) 형식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임희일은 각 구절들의 의미와 문맥을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임희일의 주석은 전통시대에 상당히 많이 읽히게 되었다.”(장원태, 규장각 해제)라는 식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 대표적인 주석서로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게 된 원인에 대해 단순히 쉽고 평이한 문장 때문이라는 인식은 너무나 평면적인 분석으로 보인다.
실제로 임희일의 《삼자구의》에 대해서는 평이하고 간명하다는 평가와 천박하다는 평가로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전자에는 진고응(陳鼓應(《노자금주금역급기평개老子今註今譯及其評介》)), 아카츠카 키요시(赤塚忠(《諸子思想硏究:平明の解釋》)), 모리 미키사부로(森三樹三郞(《老子・莊子:平易に說》))등의 평이 있고, 후자에는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평가(향보(享保) 12년(1727)의 〈답문서(答問書)〉 하(下)),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의 평가(〈자지만필(紫芝漫筆)〉 권8)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어체식의 풀이는 당송대(唐宋代) 선불교(禪佛敎)의 어록체로부터 비롯되어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이르기까지 당시 신유학자들에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쉬운 구어체로 풀이했다는 점이 인기를 끌었던 원인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송유(宋儒)들의 수많은 도가서(道家書) 주해 가운데 특별히 임희일의 주석이 공통적으로 성행했던 것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하다.
한편으로 《한적국자해전서(漢籍國字解全書)》 제28권에서는 임희일에 대한 《총목제요(總目提要)》의 비판에 대해 만청(滿淸)학자들이 송유(宋儒)를 배척하던 누습(陋習)에 의한 것이지만, 임희일의 설이 송유의 눈으로 장자를 곡해하고 있는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임희일의 주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고전서총목제요》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학파는 오히려 고증학이나 한학(漢學적) 관점에서 임희일의 송학(宋學)적 장자(莊子) 해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임희일의 《삼자구의》의 특징은 단순히 쉽고 평이한 ‘구의’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송학을 기반으로 송유의 시각으로 도가사상을 재해석했다는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임희일의 《삼자구의》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게 된 원인은 위에서 언급했던 《삼자구의》 자체의 세 가지 측면의 특징, 즉 송학을 기반으로 한 유불도 삼교사상의 소통과 융합, 문장학을 중시한 도가텍스트 원전의 분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유행했던 구어체(어록체, 백화체)로 분명한 의미 설명 등을 모두 지적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것(〈중니〉편에서 ‘뜻을 얻은 사람은 말이 없고, 모든 것을 아는 사람도 역시 말이 없다’이라는 말)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을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설인데, 다만 말이 고무된 것일 뿐이다.[此即從心不踰矩之說 但說得鼓舞爾]”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
• “장자와 열자의 책을 읽을 때는 별도로 한 쌍의 안목을 갖추어야만 된다.[讀莊列之書 別具一只眼可也]” 《열자권재구의》
• “장자와 열자는 원류가 본래 하나의 근원이니, 미묘한 말과 뜻이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莊列源流本一宗 微言妙趣不妨同]” 《죽계십일고시선(竹溪十一稿詩選)》 〈열자구의(列子口義)〉 시(詩)
(2) 색인어:임희일(林希逸), 권재(鬳齋), 열자권재구의(列子鬳齋口義), 삼자구의(三子口義), 애헌학파(艾軒學派)
(3) 참고문헌
• 《列子鬳齋口義》(林希逸, 景印文淵閣 四庫全書(續修四庫全書 子部 道家類), 臺北商務印書館)
• 《列子鬳齋口義》, 明萬曆甲戌蒲阪張四維敬義堂刊鬳齋口義本(中國子學名著集成編印基金會印行)
• 〈宋本《列子鬳齋口義》考〉(張京華, 《圖書館》 2017年 第4期)
• 〈林希逸列子觀考論〉(詹石窗, 《甘肅社會科學》 2018年 4期)
• 〈林希逸對《列子》思想宗旨的判析〉(胡瀚霆, 《宗教學研究》, 2018年 1期)
• 〈林希逸《三子鬳齋口義》の韓國版本調査〉(崔在穆, 《郭店楚簡の思想史的硏究》(〈古典學の再構築〉東京大學郭店楚簡硏究會編) 第五卷, 2001)

【김형석】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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