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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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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서는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했던 양왕조(502~557)의 역사를 기술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사서로 중국의 정사(正史)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당나라 때의 관료이자 문인인 요사렴(姚思廉)이 지었으며 전 56권으로 636년(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10년)에 완성되었다. 본서는 저자의 부친인 요찰(姚察)의 원고에 의거한 바가 많다. 본기와 열전의 말미에 첨부된 사론(史論)들 가운데는 저자인 요사렴 외에 요찰과 당대(唐代)의 명신인 위징(魏徵)의 문장도 포함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요사렴(姚思廉)(557~637)
(2) 자자(字)·별호(別號):자는 간지(簡之)
(3) 출생지역: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現 중국 섬서(陝西) 장안현(長安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요사렴은 원래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했던 남조 진(陳) 출신으로 진이 멸망하기 전에는 양주주부(揚州主簿)를 지냈다. 그의 부친 요찰(姚察)은 진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올랐는데, 진이 수(隋)에 의해 망하자 수 조정으로 들어가 중용되어 태자내사인(太子內舍人), 비서승(祕書丞) 등의 관직을 지냈다. 요사렴은 부친으로부터 한사(漢史)를 가학으로 전수받았는데, 이것이 후일 그가 《양서(梁書)》와 《진서(陳書)》의 편찬을 담당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 그는 수왕조에서는 한왕부참군(韓王府參軍), 대왕시독(代王侍讀) 등 왕부(王府)의 관을 지냈고 양제(煬帝)의 명을 받아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조준(崔祖濬)과 함께 《구우도지(區宇圖志)》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후 수에서 당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을 때, 그는 당시 진왕(秦王)으로 있던 태종의 눈에 들어 진왕부문학(秦王府文學)으로 등용되었고, 태종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으며 태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저작랑(著作郞),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산기상시(散騎常侍)까지 올랐다. 정관(貞觀) 11년(637)에 죽었다. 그는 황제의 면전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인한 성품으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태종은 그가 죽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루 동안 조회를 정지했고 그를 태상경(太常卿)에 추증함과 동시에 자신의 능인 소릉(昭陵)에 배장(陪葬)을 명했다. 배장은 황제가 자신의 능묘 근처에 별도로 장지를 내주어 그곳에 무덤을 쓰게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요사렴에 대한 태종의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5) 주요저작:요사렴의 열전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저서로 본서 외에도 《구우도지(區宇圖志)》, 《진서(陳書)》 등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서와 《진서》이다.

3. 서지사항

및 특징
본서는 남북조시대 강남 남조의 왕조들 가운데 하나인 양(502~557) 일대를 다룬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요사렴의 《양서》 이전에도 양의 사적을 기록한 사서들은 존재했다. 양 무제 때 심약(沈約)과 주흥사(周興嗣), 포행경(鮑行卿), 사호(謝昊) 등이 함께 100편 분량의 국사(國史)를 지었는데 원제(元帝) 때 서위(西魏)에 의해 당시 수도인 강릉이 함락됨에 따라 전란의 와중에 이 책은 소실되었다. 이밖에도 하지원(何之元), 유번(劉璠)이 《양전(梁典)》 30편을 지었는데 완성된 기전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조 진(陳)에 와서 요찰이 양과 진의 역사서 편찬에 뜻을 두고 그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은 수에 의해 망했고 요찰이 수 조정으로 들어가면서 이를 마칠 수 없게 되었다. 요찰은 죽음에 임하여 그 아들인 요사렴에게 미완의 작업을 완성시켜줄 것을 당부했다. 이에 요사렴은 표문을 올려 당시 황제인 양제(煬帝)에게 양사(梁史)와 진사(陳史)의 편찬을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양제도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수왕조의 치세에서는 끝내 그 책이 완성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본격적으로 그가 작업에 착수한 것은 당 태종 때였다. 당 태종은 정관(貞觀) 3년(629) 그에게 조서를 내려 당시 명신인 위징과 함께 《양서》와 《진서》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7년 만인 정관 10년(636) 비로소 본서와 《진서》가 함께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전 56권으로 이 가운데 본기가 6권, 열전이 50권으로 지와 표는 없다. 이는 이보다 앞서 성립된 남조의 다른 정사들인 《송서》, 《남제서》와의 차이이기도 하다. 《구당서(舊唐書)》 〈요사렴전(姚思廉傳)〉과 동서(同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본서가 50권으로 되어 있으나 당나라의 사가(史家) 유지기(劉知機)의 《사통(史通)》, 《신당서(新唐書)》 〈예문지〉에서는 56권이라 하였다. 따라서 《구당서》에서도 원래는 ‘오십육(五十六)’으로 되어 있었으나 판본의 유전 과정에서 ‘육(六)’이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 본서 외에도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북주서(北周書)》, 《수서(隋書)》가 나란히 636년에 완성되었고, 이들을 통틀어 오대사(五代史)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대사 모두 지가 빠져 있었기 때문에 641년(정관 15년) 태종은 다시 이에 대한 지의 편찬을 명했고, 조대를 넘어 고종(高宗) 현경(顯慶) 원년(656년)에 완성, 이를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 하였다. 이 지는 예의(禮儀), 음악(音樂), 율력(律曆), 천문(天文), 오행(五行), 식화(食貨), 형법(刑法), 백관(百官), 지리(地理)의 9부분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권질이 왕조별로 나뉘어 각각의 사서에 배정된 것이 아니라 일괄 《수서》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수서》의 지에는 수대의 전장제도 외에 양, 진, 북제, 북주의 사적을 포함하게 되었다. 따라서 《양서》에 빠져 있는 지는 《수서》의 지를 통해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대(唐代)에 남조의 정사들을 요약한 《남사(南史)》가 편찬되어 유행하게 되면서 본서는 점차 읽히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북송(北宋)에 이르러서는 원문에 많은 탈오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북송 인종(仁宗) 가우(嘉祐)연간(1056~1063) 황제의 명령에 의해 교감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증공(曾鞏)의 주도로 교정작업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그는 영종(英宗) 치평(治平)연간(1064~1067) 본서의 교정본을 올렸다.
현재 전하는 판본은 삼조체수본(三朝遞修本)(일명 삼조본(三朝本)), 명, 청시대 상숙(常熟)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십칠사(十七史),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일명 남감(南監)), 북경국자감(北京國子監)(일명 북감(北監))의 이십일사(二十一史), 무영전(武英殿)의 이십사사(二十四史) 수록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조본은 송, 원, 명 세 왕조에 걸쳐서 수정된 판본을 이용하여 중수(重修), 보각(補刻)된 판본을 말한다. 이후 민국시기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결락을 다른 판본들과 대조하여 보충하고 영인(影印)한 일명 백납본(百衲本) 이십사사(二十四史)가 간행되었고, 본서 역시 이 백납본 이십사사에 수록되었다. 백납본에서는 삼조본을 채택하였다. 1973년에는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이상의 판본들을 비교, 대조하여 원문을 교감하고, 표점한 점교본(點校本)이 간행되었고 오늘날에는 이 간행본이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4. 내용


본서의 기 6권 가운데 3권이 양의 건국자인 무제에 대한 기록인데 이 같은 분량의 배치는 그의 재위기간(502~549)이 양의 치세(502~557) 대부분을 점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본서의 기에는 양의 무제, 간문제(簡文帝), 원제(元帝), 경제(敬帝)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고, 양 무제의 손자이자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아들인 소찰(蕭詧)이 세운 후량(後粱)(555~587)의 사적은 본서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대신 후량에 대한 기록은 《주서(周書)》 〈소찰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후량이 북주(北周)(557~581)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본서 열전의 가장 마지막인 56권에는 양왕조의 멸망을 초래한 동위(東魏) 출신의 무장 후경(侯景)의 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같은 설정은 마치 《송서》에서 〈이흉전(二凶傳)〉을 열전의 마지막에 배치한 것과 같다. 한편 본서 〈제이전(諸夷傳)〉에는 양왕조와 교섭했던 동남아지역 국가들에 대한 정보가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이 부분은 《송서》 〈이만전(夷蠻傳)〉보다도 내용이 충실하다. 이를 통해 당시 동남아시아지역과 중국과의 교류의 실상 및 해당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황제의 본기 말미에는 ‘사신왈(史臣曰)’로 시작하는 사론이 첨부되어 있는데, 이는 당의 위징이 지은 것이다. 열전의 경우 각권의 말미에 ‘사신왈’ 또는 ‘진이부상서요찰왈(陳吏部尙書姚察曰)’로 시작하는 사론이 1편씩 첨부되어 있다. 이 가운데 후자의 문구로 시작하는 사론이 총 26편에 달한다. 이는 요사렴이 부친의 문장을 채록한 것으로, 이를 통해 열전에 수록된 인물들의 선정과 그에 대한 기술의 상당부분이 이미 요찰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본서 이전에 성립된 남조 정사(正史)들의 경우, 본문은 물론이고 사론의 문장도 당시에 유행했던 4·6대구(對句)의 변려문(騈儷文)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본서는 사실의 묘사에 있어서 운율이나 대구를 고려하지 않고 내용을 충실히 표현하는 한대(漢代) 고문(古文)의 문체를 주로 취했다. 특히 요찰의 사론은 모두 고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이는 같은 책에서 위징의 사론이 변려문으로 작성된 것과 대비된다. 이러한 이유로 본서의 문장은 당대(唐代) 고문운동의 효시로 평가되기도 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그러나 그 논의에 공평하고 합당한 점이 많고 배치와 순서도 한진(漢晉)이래로 전해 온 사법(史法)을 갖추고 있다.[然持論多平允 排整次第 猶具漢晉以來相傳之史法]”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 “육조시대에는 다투어 변려문을 숭상하여 일을 서술하는 글에도 네 글자를 한 구절로 하는 경우가 많았고 산문 형식의 문체를 쓰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양서(梁書)는 고문을 구사한 것이 많다.[蓋六朝爭尙騈儷 卽庶事之文 亦多四字爲句 罕有用散文單行者 梁書則多以古文行之]” 조익(趙翼), 《이십이사차기(廿二史箚記)》
(2) 색인어:양서(梁書), 요찰(姚察), 요사렴(姚思廉), 위징(魏徵), 양사(梁史), 당(唐), 태종(太宗), 고문(古文), 수서(隋書)
(3) 참고문헌
‧ 梁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梁書全譯(二十五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양진성】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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